욕망과 갈등의 시대일수록 진정성이 담긴 담론이 필요하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다. 욕망과 갈등이 많을수록 진정한 담론은 꼬리를 감추고, 설마 설마 하는 이야기들이 썰렁하게 국토를 감돈다. 다른 이유가 있을 리 없다. ‘먹물’은 ‘먹물’대로, 근육의 힘겨움에 시달리는 육체 노동자는 육체 노동자대로 담론의 진정성이 받아들여지지 않는 현실에 애써 고개를 돌리는 것이다.
여기서 기담(奇談)이 발생한다. ‘기담’이라는 용어 자체는 일본 문단에서 주로 사용되어 왔지만 우리나라에도 기담이 없는 것은 아니다. 야담(野談)과 비슷한 의미를 지니던 기담이 그럴싸하게 문자화된 기록은 조선 성종 때의 ‘기담수록(奇談隨錄)’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이 책에 실린 ‘진포수전(陳砲手傳)’ ‘한량전(閑良傳)’ 등은 당시 시대와 타협하지 못하던 자들이 기담 형식을 빌려 쏟아낸 이야기로 가득하다. 기담의 유래는 인간의 역사와 궤를 같이 하지만 우리의 경우는 삼국시대 이전부터 형상화된 시가 등을 필두로 전해 내려온다고 보는 편이 옳다. 예컨대 ‘구지가(龜旨歌)’ ‘공무도하가(公無渡河歌)’ 역시 그 출발은 기담이다.
요즘 출판계에서는 기담이 새삼 화제다. ‘도쿄 기담집’ ‘경성 기담’ ‘사고루 기담’ 등 제목에 ‘기담’을 포함한 책이 일제히 독자의 환호를 받고 있다.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도쿄 기담집’은 발간된 지 한 달 만에 10쇄를 찍을 만큼 소설 분야의 베스트셀러 목록에 올랐고, 국문학자인 전봉관 KAIST 인문과학부 교수가 쓴 ‘경성 기담’ 역시 인문 분야에서 꾸준히 판매 지수를 높여가고 있다. 아사다 지로의 ‘사고루 기담’은 무라카미 하루키보다는 못하지만 국내 작가의 웬만한 소설보다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기담은 괴담(怪談)과 구별된다. 괴담은 얼토당토않은 이야기의 영역에 머무르지만 기담은 있을 법하지만 흔치 않은 이야기의 영역에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하루키는 이런 점에 착안해 현대인의 잠재의식 속에 있는 허무맹랑하지 않으면서도 쉽게 접할 수 없는 이야기를 소설화함으로써 ‘하루키 매니아’들을 만족시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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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 수록된 이야기 중 하나인 ‘황폐한 집’을 보자. 피아노 조율사인 ‘그’가 서점에서 찰스 디킨스의 소설 ‘황폐한 집’을 보고 있는데 옆에서 같은 책을 보고 있던 여자가 말을 걸어온다. 똑같은 소설을 보고 있을 수는 있지만 상대방이 말을 걸어온다는 것 자체가 범상치 않다. 사실 ‘그’는 (여자에게 큰 관심을 둘 리 없는) 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자를 지켜보게 되고 우연히 그녀의 오른쪽 귓불에서 점을 발견하곤 깜짝 놀란다. ‘그’의 누나도 오른쪽 귓불에 점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눈 끝에 ‘그’는 여자로부터 이틀 후 유방암 검진을 받을 것이란 얘기를 듣는다. 묘한 느낌에 사로잡힌 ‘그’는 누나에게 전화를 건다. 아니나 다를까. 누나는 “모레 유방암 수술을 받게 됐다”는 이야기를 전한다. 독자로 하여금 현실과 환상을 혼동하게 만드는 이러한 구성은 이 책의 제목에 ‘기담’이 들어가는 이유를 곱씹게 한다.
아사다 지로의 ‘사고루 기담’에서 ‘사고루’는 ‘모래로 쌓아 올린 높은 누각’이라는 뜻이다. 이 같은 ‘누각 기담’을 위해 아사다 지로는 아름다운 정원을 완성하려 주인을 죽이는 사람 이야기, 일본 도(刀)를 만들기 위해 달군 쇠를 맞매질할 상대로 신을 불러오는 장인(匠人) 이야기 등 다섯 편의 소설을 한 권의 책에 담았다.
무라카미 하루키나 아사다 지로의 소설에 비하면 ‘경성 기담’은 기담을 다루되 고급 인문교양서를 지향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괄목할 만한 성과를 이룬 책이기도 하다. 저자는 3·1운동 민족 대표의 한 사람인 박희도가 여제자의 정조를 유린했다는 ‘기담’에 주목한다.
당시 중앙보육학교 교장이던 박희도는 제자이자 친구의 아내를 성폭행한 인물. 그러나 이런 그의 행적은 그 동안 역사적으로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저자는 당시 신문과 잡지 등을 샅샅이 뒤져 사건 이면의 진실을 파헤치고 40여쪽에 걸쳐 당대를 대표하는 지식인 중 한 명인 그의 추악한 행적을 기담 형식으로 고발하고 있다.
왜일까. 저자는 지금 이 시대에도 성(性) 추문에 휩싸여 낙마하는 사회 저명 인사들이 심심찮게 등장하는 현실에 주목한다. ‘경성’ 시대의 기담이 오늘날 ‘대한민국’의 기담으로 활보하고 있는 현실, 아마도 저자가 이 책을 써야 한 이유 중의 하나일 터다. 이 책에는 ‘근대 조선을 뒤흔든 살인 사건과 스캔들’이란 부제가 붙어 있는데 이 부제만으로도 우리는 근간에 발생한 또 하나의 기담 ‘서래마을 영아냉동사건’을 쉽게 떠올릴 수 있다. 시대를 넘나드는 사회현상을 읽어내는 저자의 인문학적 깊이가 경외감을 자아낸다.
재미있는 것은 ‘도쿄 기담집’과 ‘사고루 기담’은 이름만 언급해도 ‘아, 그 사람’ 하는 일본 작가의 소설이고, ‘경성 기담’은 기담을 통해 우리 역사의 이면을 들여다보는 역사 사회학 서적에 가깝다는 점이다. 바꿔 얘기하면 우리 사회에는 아직도 기담으로나마 밝혀야 할 역사의 흠이 많다는 말이 성립된다.
이에 반해 일본 작가들은 항간에 회자되는 기담을 소설화하는 데 보다 의욕을 보이고 있다. 우리 인문학자는 기담을 통해서나마 진실을 알고자 하는 독자의 욕망을 읽었고, 일본 소설가들은 ‘기담의 소설화’에 대한 독자의 욕망을 읽었다고나 할까.
어쨌든 참 재미있다. 소설가든, 인문학자든 그런 욕망을 알아챘다는 것도 하나의 기담이고 그런 기담의 징후를 엮어 책을 만들어내는 출판계 역시 훗날 그 기담의 일부를 차지할 것이니 말이다.
덧붙여 최근의 기담 열풍에 관심이 가는 사람이라면 요즘 젊은이들이 깔깔 호호대는 데 혈안이 돼 있는 댄스그룹 ‘동방신기’의 팬픽(FanFic·fan과 fiction의 합성어로 자신이 좋아하는 연예인을 주인공으로 쓴 소설을 일컫는 말) ‘전식경연애기담’을 인터넷에서 찾아 일독해볼 것을 권한다.
임동헌 소설가
http://weekly.chosun.com/wdata/html/news/200609/20060919000014.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