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미영 씨의 책을 읽고 마이리뷰로 쓰려던 것을 미루다 못해 간단한 밑줄로 대체합니다. 시대별 특징은 지은이의 것을 빌려왔고, 작품들은 제가 보고싶은 것들로 꼽았습니다.

- 1960년대
[특징] 기성 연극계에 대한 비판, 사회운동의 일환으로 마당극에 대한 문제제기.
[작품] 서울대 문리대 연극반 <혈맥> <유민가>

- 1970년대
[특징] 서울대 부산대를 중심으로 탈춤부흥운동 시작. 마당극의 전형(현실주의, 민족주의, 전통연희 부활의 혼재)이 실험되고 생성되었던 시기.
[작품] <진오귀굿>(73, 김지하) <소리굿 아구>(74, 채희완) <예수의 생애>(77, 임진택) <미얄>(79, 임진택) <동일방직 문제 해결하라>(78) <함평 고구마>(78) <덕산골 이야기>(78) <공장의 불빛>(78, 김민기 채희완) <김상진 장례식>(78)

- 1980년대
[특징] 마당극의 양적인 성장, 기성 연극계와의 재결합 시도, 지역 마당극 패의 형성(광주-놀이패 신명, 제주-수놀음, 부산-자갈치, 대구-함께 사는 세상, 청주-열림터)
[작품] <장산곶매>(황석영 채희완) <토선생전> <공해풀이 마당굿 - 나의 살던 고향은>

- 1987년 이후
[특징] 노동연극, 노래판굿의 부각
[작품] <쇳물처럼> <어떤 생일날>

- 1990년대
[작품] <우리 동네 갑오년>(94, 우금치) <칼노래 칼춤>(94, 한두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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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복궁에서 너무 늦게 나오는 바람에 채 반도 둘러보지 못했습니다. 1층 로비에 자리잡은 카페며 기념품을 파는 상점, 중간중간에 마련된 휴식공간도 굉장히 예쁘게 마련되어 있는데 미처 담아오지 못했구요, 박물관 마당에 자리한 약재점, 포목점과 같은 옛 점포의 모습도 훑듯이 보고 나와야했습니다.

- 다음에 꼭 시간을 내어 다시 들러야겠습니다. 박물관 구성에 대해서도 파악하고, 전시물들도 꼼꼼히 둘러보구요.



- 도저히 지나칠 수 없어 몇 장만 담았습니다. 민속박물관의 좋은 점은, 지난 생활 양식에 대해서 단순히 보여주는 것 이상으로 과정까지 꼼꼼하게 소개하고 있다는 점인데요, 빛깔도 빛깔이지만, 재료가 되었던 식물들과 제작 과정을 소개하고 있어 참 좋았습니다. 저 빛을 내려고 낸 것도 아닐진데, 다섯 가지 모두 참으로 곱습니다.



- 조각보를 비롯한 몇 가지 물품들을 통해 전통 문양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복잡하지만, 아름답다는 생각 밖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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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복궁에 다녀왔습니다. 얼마 전 서울의 5대 궁궐을 돌아보겠노라고 다짐하고는, 첫 발걸음이었습니다. 사진기를 빌리는 것 부터 시작해서, 우중충한 날씨에 스물일곱 백수와 함께 고궁을 거닐 친구를 찾는 것도 예사 어려움이 아니었으니, 제법 괜찮은 발걸음이었습니다.

- 한 가지 아쉬운 점은, 너무 늦게 출발하고 너무 일찍 떠나는 바람에, 안내 표지판도 느긋하게 훑어보지 못하고 한번 둘러보는 수준에 그쳤다는 점과, 볼거리 많은 민속박물관 마감 시간에 걸렸다는 것인데요, 4월이 되면 좀 더 여유가 날 터이니 한번 더 발걸음 해야겠습니다.



- 근정전입니다. 신하들이 무릎 꿇고 앉아있을 장면을 상상해봤는데, 찬 기운이 도는 바닥이며 높은 임금의 단상 때문에, 어전회의가 꽤나 불편했을 것 같더군요.



- 근정전을 나서니, 어디서부터 어떻게 둘러봐야 할지가 걱정이었습니다. 매표소에서 안내 팸플릿이라도 한 장 들고올걸 하는 아쉬움이 들었지만, 다시 돌아가기에는 너무 먼 거리라, 일단 근정전을 시작으로 끝까지 올라가 북문을 본 후, 양쪽을 훑으며 내려오기로 했습니다.



- 근정전의 후문이기도 한 사정문. 일전에 어떤 TV 프로그램에서 어전회의에 참석하기 전, 생각을 가다듬는다는 의미에서 '사정문'이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했던 기억이 얼핏 났습니다.



- 여긴 소회의실 정도 되려나요. 근정전 보다는 신하들의 고초가 조금 덜 했을 것 같습니다.



- 모르는 한자입니다. 임금의 숙소 입구였던 것 같아요.





- 사방으로 나 있는 문이 인상적입니다. 열려있으면서도 닫혀있는 공간, 일상적인 주거공간 과는 아주 다른 느낌입니다.



- 대부분의 건물 하단에 이와 같은 시설이 있는데, 나중에 친구에게 물어보니 아궁이라고 합니다. 아궁이 아닌 것 같은데.



- 작고 아담한 출입문이 줄곧 인상적이었습니다.



- 이것이야 말로, 아궁이로 들어가는 문이 아닐까요. 문을 개방해두었더라면 좋았을텐데.



- 부러 저렇게 지은 것인지, 양쪽 복도의 높이 차이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무척 아름다웠습니다.



- 기단으로 부터 널찍히 떨어뜨려 집을 짓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 줄곧 보아왔던 문과는 다소 달리보이는 문이었습니다.



- 문 옆에 방을 냈다는 것도 그렇지만, 어김 없이 마루와 오름돌이 있다는 것이 참으로 아기자기합니다.





- 흔치 않은 정사각형의 건물입니다. 옆으로 돌아가면, 위에서 보이는 것 처럼, 마루를 내어 넉넉한 느낌을 줍니다. 아름답군요.



- 문이 여럿 나있는 담벽입니다. 담벽에 만들어 둔 공간을 무엇에 쓰였을지 궁금합니다. 안내원이라도 있었으면 할 정도로 궁금함 투성이었어요.



- 조신하게 걸어야 될 것 같은, 아름다운 복도입니다.



- 아기자기함을 극적으로 보여주는 곳입니다. 두 걸음 간격으로 작은 문이 나있죠.



- 북문까지 갔다가 왼쪽으로 돌아내려오는 길이었습니다. 멀리 경복궁의 서문이 보이는군요. 제법 좋아보이는 사진기를 들고 다니던 중년의 아저씨들을 계속 마주쳤습니다. 함께 사진을 찍고, 뉘엿뉘엿 지는 해를 뒤로 하며 근처 대포집에서 소주 한 잔 하실 아저씨들의 모습이 참 훈훈하고 부럽습니다.





- 공간을 만들어 둔 담벽이 있는가 하면, 한 쪽을 완전히 틔워둔 담벽도 있었습니다. 계단은 왜 옆으로 나있는걸까요.



- 궁궐의 왼편을 돌아 다시 근정전에 도착했습니다. 어느덧 해가 지고, 맑지 못한 하늘이나마 담아갑니다.



- 이제 반대편으로 돌아서면 경회루를 볼 수 있습니다. 연희와 뱃놀이를 즐겼던 곳이라고 하는데요, 참 운치가 넘치는 곳입니다.



- 아쉽게도 경회루로 향하는 문은 닫혀있었습니다. 경회루를 지나 다시 북문으로 올라가는 길입니다. 다른 곳에 비해 상대적으로 좀 닫혀있는 듯한 느낌을 주는 곳이었는데요, 문득 <마지막 황제>에서 푸이 황제가 자금성 정문을 향해 달려가던 그 곳이 떠올랐습니다.



- 담벽에도 공간을 내다보니, 불가피하게 이런 문도 나오는군요.



- 연못도 아닌 것 같고, 안압지 처럼 호사스러운 연희를 즐기기에는 너무 구석진 곳이었습니다.



- 함화당 집경당은 한참 복원 공사중이었습니다. 흥선대원군이 머물렀다던 이곳은 내후년이나 볼 수 있겠군요. 언제 소실된 것일까요?



- 복원 공사 울타리에 걸려있는 발굴현장 사진입니다.



- 고종 황제와 명성황후가 흥선대원군을 비해 북문 가까이 건물을 내면서 사이에 만든 연못입니다. 이름을 외워둘걸 그랬습니다. 팔각정과 다리가 아름답지요. 봄에는 더욱 장관일겝니다. 이곳에 배를 띄워두고 방문한 이들도 탈 수 있게 한다면 참 좋을텐데요. 왜 보기만 해야하죠.



- 고종 황제와 명성황후의 궐도 공사중이었습니다. 소실되고 남은 담벽과 울타리에 걸린 담벽 그림, 웃어버렸습니다.







- 공사 중인 궐 오른편에 서있습니다. 청나라를 비롯해 외국의 사신을 접대하거나, 고종 황제의 개인 책방으로 사용했다고 합니다. 경복궁 내에서 유일하게 청나라 풍을 하고 있는데, 양쪽으로 모두 복도가 나있습니다. 궐 뒷편에는 경복궁의 북문이 지나칠만치 바짝 붙어있습니다.

- 여기까지 둘러보고 반대편 끝에 세워진 민속박물관으로 향했습니다. 꼼꼼하지는 못했지만, 한 바퀴 제대로 둘러본 셈입니다. 어서 두 개의 궐이 마저 복원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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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꺽정] 명종 대, 사림 중 서인 집권 기. 내수사에 의한 왕실 외척의 치부가 극심했다. 그의 세력은 관군과 동등한 규모에 훨씬 조직적이었고, 빼앗은 물건은 종로 시전에 내다팔아 자금으로 활용했다. 지나친 조정의 압력을 받은 관원들이 여럿의 가짜 임꺽정을 만들어 낼 정도였다.

[장길산] 숙종 대, 서인과 남인 간의 환국이 일어나며 붕당 정치가 무너져가던 시기.

[홍경래] 순조 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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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네이버 백과사전)

임꺽정 [?~1562] 조선시대의 의적이다. 양주(楊州)의 백정(白丁)이었으나 정치의 혼란과 관리의 부패로 민심이 흉흉해지자 황해도와 경기도 일대에서 창고를 털어 곡식을 빈민에게 나누어 주고 관아를 습격, 관원을 살해했다. 한때는 개성(開城)에 쳐들어가 포도관(捕盜官) 이억근(李億根)을 살해하기도 했다.
백성들의 호응으로 관군(官軍)의 토벌을 피했으나 1560년 형 가도치(加都致)와 참모(參謀) 서림(徐林)이 체포되어 그 세력이 위축되다가 1562년 토포사(討捕使) 남치근(南致勤)의 대대적인 토벌로 구월산(九月山)에서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명종실록(明宗實錄)》에는 그의 이름이 임거질정(林巨叱正)으로 적혀 있다. 

장길산 본래 광대 출신이나 용맹하여 황해도 일대에서 도당을 모아 도둑의 괴수가 되었다. 조정에서는 그를 체포하려 하였으나 장길산 일행은 이를 염탐하고 모두 달아났다. 1692년(숙종 18) 평안남도 양덕(陽德) 일대로 이동하여 세력을 키운 그는 뒤를 쫓는 관군을 피해 무리를 이끌고 다시 함경도 서수리(西水羅) 등지로 달아나 그곳에서 활약하였다. 북쪽에서 인삼을 가져다가 군자금으로 사용하는 등 상업활동을 한 것이 특이하다.
1696년(숙종 22) 서울의 서얼 출신 이영창(李榮昌)·금강산의 승려 운부(雲浮)와 손을 잡고 승려세력과 함께 봉기하여 거사를 도모하려 하였다. 장길산 사건은 17세기 이후 어려워진 사회조건 속에서 하류계층에 속했던 서얼·승려·농민 등이 힘을 합하여 새로운 왕조를 세우고자 한 모반사건의 하나였다.
조정에서는 그를 잡으려고 각 관찰사와 병사에게 엄명을 내리고 많은 상금을 걸었지만 그는 끝내 잡히지 않았다. 홍길동(洪吉童)·임꺽정(林巨正)과 더불어 조선의 3대 도둑으로 알려져 있다.
 
홍경래 [洪景來, 1771~1812]  출신 지역은 평안도 용강군 다미동(多美洞)이다. 아버지를 포함한 가계를 알 수 없으며, 아들만 네 형제인 집안의 셋째로 처 최소사(崔召史)와의 사이에 두 아들을 두었다. 신분은 대개 몰락양반이라고 설명하여 왔으나, 평민이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경제적으로는 전답이나 노비를 지니지 못한 빈궁한 처지에 있었다.
유교는 물론 풍수(風水)에 상당한 소양을 지니고 있었으며 서당에서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치기도 한 지식인이었다. 그러한 바탕 위에서 민중의 희원을 반영하여 초인이 나타나 세상을 구원할 것이라는 정진인설(鄭眞人說)을 봉기의 가장 중요한 이념으로 제시하였다. 또한, 뛰어난 무술 실력을 지니고 있어 직접 선두에서 전투를 지휘하기도 하였으며, 병법에도 밝아 다양한 전술로 관군과 대항하였다.
이 밖에 성장과정과 과거응시 등에 대해서 19세기 후반 작자미상의 한문단편 《홍경래》를 근거로 설명해 왔으나, 그 내용들은 사실로 받아들이기 힘들다. 1801년(순조 1)에 우군칙(禹君則)과 병란(兵亂)을 논의한 뒤로 10년 동안 각지를 다니며 향촌의 유력자, 무술을 갖춘 장사(壯士), 그리고 부호를 끌어들여 봉기를 준비하였다. 평서대원수(平西大元帥)의 직책을 띠고 1811년 12월 18일 가산 다복동의 봉기로부터 만 4개월 동안 계속된 반란을 총지휘하였다.
1812년 4월 19일 관군에 의해 정주성이 함락될 때 전사하였으며, 정부로부터 '군대를 일으켜 반역한 우두머리[擧兵逆魁]'로 처리되었다. 그러나 민중들 사이에서는 저항과 변혁의 상징으로 인식되어 죽지 않고 하늘을 날아서 성을 빠져나갔다는 소문이 퍼지기도 하였고, 많은 사람들이 그가 살아 있다고 주장하면서 민중봉기를 선동하였다.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기에는 그가 이끈 군사력과 봉기 이념에 명확한 한계가 있었지만, 당시의 지배체제가 아니라 기층사회에서 성장한 인물로서 대규모의 항쟁을 주도한 점에서 중세사회의 극복에 중요한 단계를 이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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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피드림~ 2007-03-25 12: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습니다. 퍼가도 될까여?^^*

sb 2007-03-25 23: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물론이긴 합니다만, (이미 밝혔듯이) 네이버 백과사전에서 가져와 정리만 한 것인데.
 

(출처: 한겨레)

한국예종 교수 된 ‘상계동 올림픽’ 김동원 감독 
 
1988년 2월, 김동원 감독은 27분짜리 다큐멘터리 <상계동 올림픽>을 완성했다. 올림픽 준비로 온나라가 들떴을 때 서울 상계동 달동네 주민들은 집을 빼앗겼다. 2년6개월 동안 상계동에서 명동 성당으로 다시 부천시 자투리 땅까지 철거민들이 내몰리는 과정을 좇으면서 다큐멘터리 속 나레이션의 주어는 “그들”이 아니라 “우리”가 됐다.

<상계동 올림픽>은 우리 영화계에서 다큐멘터리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준 기념비가 됐다. 마지막 장면, 성화봉송 때 보기 좋지 않다는 이유로 가건물을 세우는 것도 허가받지 못한 주민들은 허허벌판에서 <출전가>를 불렀다. 지금 그들은 어디에 있을까? 김동원(52) 감독은 최근 <상계동 올림픽 20년 후>를 찍기 시작했다.
 
다큐멘터리를 만들겠다는 목적도 없이 철거 현장에 넋이 나가 카메라를 돌리던 31살 초짜 감독 김동원은 그 뒤 20년 동안 독립다큐멘터리를 떠나지 않았다. 1991년 그가 변영주, 오기민 등과 만든 제작집단 ‘푸른영상’을 지키며 <또 하나의 세상-행당동 사람들 2> <명성, 6일간의 기록> <송환> 등을 내놓았다. 그렇게 극영화를 비롯해 ‘제도권’과 거리를 뒀던 그가 올해 한국예술종합대학 방송영상학과 교수가 되어 국내에 처음 생기는 다큐멘터리 전문사 과정을 맡게 됐다. 그는 작품 제작보다 교육 쪽에 무게중심을 두게 되는 걸까? 제도권에 대한 그의 생각은 어떤 것일까? 18일 푸른영상 사무실에서 김 감독을 만나 그의 새 작품 이야기, 그리고 교수가 된 사연과 심경을 들어봤다.

<상계동 올림픽> 그후

다큐멘터리가 나간 뒤 상계동 철거민에겐 공동체를 꾸릴 터전이 생긴 듯했다. 재개발 건축업체, 천주교, 서울시가 기금을 모아 부천에 땅을 사고 아파트를 올려 철거민들에게 거처를 마련해줄 계획이었다. 관리가 복잡해지자 일단 8평 남짓씩 주민들에게 나눠줬다. 그런데 땅값이 1년새 8배가 뛰면서 되레 액운이 몰려왔다. 주민들 사이, 대표자들 사이 신뢰가 틀어져버린 것이다. 3년 동안 가족처럼 연대했던 사람들이 서로 꼴보기 싫어하는 사이가 되어갔고, 결국 40가구 가운데 3가구만 남고 모두 땅을 팔아 흩어졌다. 절반은 억척스럽게 일해 살림이 나아졌다. 애초에 노동력이 없었던 사람들은 추락해 노숙자가 됐다. 몇몇은 투쟁의 기억을 긍지로 가지고 있고 몇몇은 철거민이었다는 사실 자체를 숨긴다.

그는 다큐멘터리들에 공동체에 대한 애정과 희망을 담뿍 담아왔다. 아직도 믿고 있을까? “예전처럼 낙관하지 않는다. 저마다 욕망과 본성이 달라 공동체는 실패하기 쉽다는 걸 안다. 하지만 어떤 공동체는 세상의 빛이 된다. 나나 상계동 주민이나 꿈꾸는 공동체의 모습이 예전과 달라졌다. 그건 어떤 모습이며 우리에게 남은 최선은 뭘까?” 주민들은 여전히 송년회를 연다. 2세들 가운데 3분의 1은 매년 2~3차례 모인다. 그는 그 불씨의 구심력인 “긍지의 기억”을 조명하려 한다.

상계동의 기억

그는 <상계동 올림픽 20년후>에 자신의 이야기도 담을 예정이다. 상계동에서 그의 인생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김 감독은 중산층 출신으로 한량처럼 지내다가 군 제대 뒤 영화 연출부로 일했고, 비디오카메라로 결혼식 촬영을 해주며 용돈을 벌었다. 1985년 그는 상계동에서 계고장도 없이 집을 부수는데 증거자료를 찍어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간단한 일인 줄 알고 하루 촬영하러 갔는데 철거반이 들이닥쳤다. 철거민들은 사지를 들려 닭장차에 실려갔다. 그는 정신없이 찍었다. 어둠이 내린 뒤 주민들은 폐허 위에 큰 천막을 쳤다. 라면을 끓여먹고 술판을 벌였다. “내가 반쪽짜리 위선적인 세상에서 살았구나….” 도저히 천막을 들추고 혼자만 나갈 수 없었다. 하루를 보내기로 했고 다음날도 비슷했다. 그는 그때부터 1990년 1월까지 상계동 철거민들과 살았다. 그래서 상계동 철거민들은 그를 아직도 “김 감독님”이 아니라 “민기 아버지”라고 부른다.

가난의 힘

“어떤 주장을 하는데 힘을 실으려면 그렇게 살아야 한다. 가난한 사람을 바라보는 게 아니라 자신이 가난해야 떳떳하다. 세상을 낮은 데서 봐야 정확하다. 나에게 다큐멘터리는 주류 삶의 방식과 기치관에 딴죽을 걸고 저항하는 것이다.” 그렇게 믿고 필요한 것만 지니려 애쓰지만 그는 “악착같지 못하고 끊임없이 흔들린다”고 고백한다. 생활 자체가 협박이다. 늘 가난하게 살아왔는데, 세 아이들 앞에선 조금씩 점점 양보하게 됐다고 한다.

그가 떠맡아야 할 생활의 짐이 있고 교수직을 맡아 좀더 안정될지 모르지만, 마음은 복잡해졌다. 다큐멘터리가 영화와 저널리즘과 사이에서 제 영역을 굳건히 하려면 교육방법도 개발해야 하고 다큐멘터리를 모아 아카이브(* 정보창고)도 만들어야 한다. 자신이 주먹구구로 공부해서 더 필요를 느낀다. 할 일을 하는 것뿐이지만 그는 자신이 지켜야 할 자리를 벗어나는 건 아닌지 회의한다.

긍정을 위한 질문

전문적인 다큐멘터리 교육과정이 필요하다고 인정하면서도 그는 교수가 된 것에 대해 “위기감을 느낀다”고 말한다. “제도권 안으로 들어가는 것에 대한 거부감도 있었다. 옆길로 샌 듯한….” ‘지금 나는 어디에 있을까?’ 그는 스스로에게 묻고 있다. 그러나 “결국 내 자리로 돌아올 것”이라고 말한다. 사람들 때문이다. 천도교빈민회 회원들 가운데 힘들지만 의심 없이 사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을 보면 힘이 나고 날 보면 맥이 빠진다. 내가 정상 상태가 아니라는 걸 확인시켜 주는 사람들이다.” 생활공동체에선 쓴맛을 봤지만 그의 곁엔 제작공동체인 푸른영상이 남아 있다. 감독 7명은 한달 활동비 50만원으로 버티며 미군기지에 반대해 싸우는 대추리로 가고 해고된 학습지 교사들을 만난다.

그의 작품을 보려면 푸른영상(02-823-9124)의 회원이 되면 된다. 3월30일부터 4월3일까지 열리는 인디다큐페스티벌(sidof.org)에서 <명성, 6일간의 기록>과 <송환>을 볼 수 있다.

글 김소민 기자 prettyso@hani.co.kr 사진 이정아 기자 leej@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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