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사 교과서를 꽤나 증오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책상과 의자가 빽빽하게 들어찬 고등학교 교실에 앉아있을 때가 그러했고, 계급투쟁이라는 하나의 잣대로 세상을 새로이 바라보던 시절이 그러했습니다. 조금 더 시간이 지나고 나니, 이제 교과서도 하나의 책일 뿐이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것도 다른 책과 하나 다를 바 없이, 필자 집단과 필자 집단의 관점이 녹아있는 책이라는 것이죠. 교과서에 대한 판단이 변한 것이 아니라, 교과서를 바라보는 감정의 응어리가 풀리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리고, 재미있어졌습니다.

- 다소 딱딱한 필체이지만, 교과서도 나름의 장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읽기는 어렵지만, 찾기 쉽게 쓰여졌다고 할까요. 정치, 경제, 사회, 문화로 나뉘어 쓰여져있는 고등학교 국사 교과서는, 이야기를 포기하는 대신 전체를 조망하는 편리함을 택한 것이죠. 하지만, 전자와 후자는 택일의 문제가 아니라는데에 아쉬움이 있습니다. 오히려 전후관계라고 생각해요. 분석과 종합이라는 방식은, 어디까지나 분석되고 종합될 대상이 필요한데 그것이 이야기이니까요. 초등학교, 중학교 교과과정에서 충분히 이야기를 전달한 다음이라면 전혀 문제될 것이 없겠지만, 이미 여러차례 국사 교과서를 공부한 스물여섯 한국청년이 이야기에 목말라 대하소설이며 역사영화 데이터베이스를 뒤적이는 꼴이란.

- 영화의 배경이 되는 20세기 초반은, 한국 근현대사의 시작이기도 합니다. 메이지 유신을 통해서 자발적으로 - 엄밀하게 따져 자발적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 서양의 문물을 받아들인 일본과 달리, 조선과 청은 그렇지 못했다는 점에서 서로 비슷합니다. 그 결과는, 무력을 앞세운 침략이었고 지배와 통치였습니다. 그리고, 강요된 변화가 가져온 것은 - 변화의 방향이 옳고 그름을 떠나 - 가치관과 사회의 급격한 변화였죠. 이 점에서 조선과 청이 나아갈 길은 크게 다르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1919년 3/1 만세운동이 일어나던 해에 역시 중국에서 5/4 운동이 일어나고, 이 흐름이 1931년 만주사변으로 인해 한중 독립군의 연합작전으로 모아졌다고 본다면 너무 지나친 일반화일런지요. 하지만, 아무리 주인공이 조선이고 대한제국이며 한국인 국사 교과서라고 해도, 중국은 조연으로서의 자리매김도 확실하게 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종종 국제정세, 대외정세로 다루어지고 있긴 하지만, 마치 일인다역을 하는 이름 없는 조연배우 마냥 느껴진다면 좀 지나친 표현일까요.

- <마지막 황제>는 중국의 마지막 왕조 '청' 의 황제 '푸이' (이름과 지명은 원어 발음 그대로 쓰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의 일생을 다루고 있습니다. 국사 교과서에는 '만주국의 허수아비 국왕' 이라고 짧게 다루어졌던 그였죠. 그의 일생을 연기하는 배우가 유아시절, 청소년 시절, 장년기까지 모두 세명이라는 점이 상징적입니다. 유아시절의 그는 찬란한 중국왕조의 황제(1908년 즉위)였고, 청소년 시절(1911년 신해혁명)의 그는 자금성만의 황제였으며, 장년기(1924년 일본공사관 피신)의 그는 그저 명망있는 중국인일 뿐이었습니다. 새로운 시대는 지나간 시대의 최정점에 서있던 이를 가장 먼저 스치고 지나갔으며, 그만큼 가장 멀리 멀어져갔던 것이죠. 황제 푸이가 1911년 신해혁명과 함께 해체된다면, 인간 푸이의 해체가 1924년 군벌들 사이의 펑톈즈리 전쟁과 함께 자금성을 나오면서 부터 시작됩니다. 그는 혼란스러운 국내 상황에서 일본공사관을 선택한 것이죠. 이러한 그의 선택은, 1931년 만주사변 이 후, 만주국 황제로까지 이어지면서 그를 전쟁범죄자로 만들게 됩니다. 그는 1945년 일본 패전 이후 소련군에게 체포되어 1959년 특사로 풀려나올 때 까지, 오랜 감옥생활을 하였습니다. 그는 문화대혁명이 일어나던 1967년 사망합니다. 전쟁범죄자인 자신을 심문하던 공산당의 간부가 죄인으로 몰려 뭇매를 맞던 시대였습니다.

- 영화를 제작한 이탈리아 감독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는, 훗날 발간된 푸이의 자서전 <나의 전반생>을 원작으로 했다고 합니다. 그는

- 7살의 나이에 황제에 오른 푸이는 수많은 환관과 시종 시녀 요리사들에게, 그리고 무엇보다 넓고 높은 자금성의 벽에 둘러쌓여 있었습니다. 이내 나갈 수 없도록 된 자금성의 벽은, 그에게 담장 이상의 것이었겠죠. 그는 푸이이기 이전에, 황제 푸이였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의 인생을 비극적으로 마감시킨 일본공사관으로의 선택 역시, '황제 푸이'의 결정이었습니다.

- 동정적인 시선: 어린 나이에 황제가 되었다, 자금성에서 벗어나고 싶었지만 그럴 자유를 허락받지 못했다, 1924년 펑톈즈리 전쟁 이후 국민당의 종묘 도굴, 내내 멍한 표정, 일본 내무대신들의 농간, 등 

- 비판적인 시선: 권력에 집착하는 그의 선택, 신발끈 조차 매지 않음

"내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할 수 있는거지?" 라며 환관들에게 목욕물을 뿌려대던 유아시절 이후, 그에게서 웃음은 사라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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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어 초판이 88년에 나왔고, 실제 인터뷰는 60년대에 이루어 진 것으로 보입니다. 토인비가 말하는 '요즘의 세태' 가 주로 60년대 미국의 히피족들을 꼬집고 있는 것 같군요. 60년대는 2차 세계대전이 끝난 이래 가장 오래고 화려한 호황을 맞았던 세계 자본주의가 일단락되었던 시기이지요. 61년에 시작된 베트남 전쟁과 더불어, 세계 곳곳에서 반전운동을 비롯해 68년 '혁명' 이라고 일컬어질 만큼 다양한 분야에서 변화를 추구하는 운동이 일어났던 때이기도 합니다. <토인비와의 대화> 는 인생의 목적, 삶과 죽음, 여성 해방, 지적 생물로서의 인간, 건강과 복지를 위하여, 사회적 동물로서의 인간, 사랑과 성, 현대의 과제, 젊은 세대에 대한 기대, 등 다양한 주제에 관한 장편의 인터뷰를 담고 있습니다. 발췌독 하였습니다.

- (2장. 삶과 죽음) 결론부터 말하자면, 과학과 종교의 갈등, 종교와 종교의 갈등, 이데올로기 갈등은 도덕 내지 윤리라는 공통의 가치에 의해 화해할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주장입니다.

- 과학 이전에 종교가 있었다고 봐야 할까요? 과학이 종교로 부터 그리고 철학으로 부터 분리되어 나온 것이라고 봐야할까요? 자연 속에서 살아남기 위한 인류의 노력이 종교의 시작 - 그것이 다산의 기원이든, 풍년의 기원이든 - 이었던 것 처럼, 철학이나 과학도 그렇게 시작되었다고 봐야할 것 같습니다. 철학자 과학자는 기원전 OOOO년 OOOO문명에서 탄생했을지 모르겠지만, 철학이든 과학이든 자연 속에서 살아남기 위한 인류의 노력 안에 모두 뭉뜽그려져 있을테니까요. 우리가 최초의 철학자니 과학자라고 지칭하는 이들 역시, 종교 지도자와 마찬가지로 인류의 생존 이래 계속 존재해왔던 고민이 어느 순간 집약되고 전문화되었음을 알려주는 척도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들을 그렇게 부르는 것도, 결국은 오늘날의 우리이니 말이죠.

- 역사의 길이로 과학, 철학, 종교의 우위를 구분하는 것은 어려워 보입니다. 그것은 처음 하나의 목적 안에서 뭉뚱그려진 상태로 존재했으나, 어떤 계기로 인해 하나씩 떨어져나가 각자의 영역을 구축했다고 봐야할 것 같습니다. 이들이 각각 독립하여 종교 철학 과학이라고 불리우기 위해서는 나름의 완결된 체계가 존재해야 할텐데요, 종교가 이들 사이에서 제일 먼저 독립했다는 것은 곧, 종교야말로 가장 추상적인 수준에서 체계화를 시도했다고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 일부가 '종교'라는 이름을 달고 독립을 시도한 만큼, 이제 남겨진 이들과의 구분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이름 붙여야 할 것 같습니다. '나머지 고민' 이라고 하죠. 선뜻 여기에 철학이니 과학이니 하는 이름을 붙일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 이름들은 후세의 역사가들이 임의로 붙인 것일 뿐인데, 이런 이름들은 오히려 종교, 철학, 과학에 대한 선입견을 갖게 한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이름을 붙일 만큼 확실한 것은 '종교' 일 뿐, 종교로의 체계화 속에 편입되지 않은 고민들은 뭉뜽그려 '나머지 고민' 이라고 부르는 것이 나을 듯 합니다. '나머지 고민' 에는 우리가 알고 있는 철학과 과학이 뭉뜽그려져 있을 것이구요. 이들은 종교와 더불어 끊임없이 인류 생존의 과제를 탐구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 하지만, 예전 같으면 서로에게 도움이 되었을 끊임없는 탐구와 문제제기가 이제 갈등을 불러일으킵니다. 수준은 비슷하면서도 가장 먼저 체계화되어 활약하고 있었던 종교이니 만큼, 가장 큰 지지세력을 형성했을 것이고 그것은 곧 정치권력이기도 했을테니까요. 이들의 문제제기는 종교의 지위를 위협하지 않는 선에서만 허락되었을 것입니다. 이 시기가 바로, 종교 교리에 부합하지 않는 생각인 '나머지 그룹' 이 종교에 의해서 억압받았던 중세에 해당한다고 보여집니다. 이 '나머지 그룹' 은 종교처럼 강력한 '스폰서' - 그것이 지지세력이든 정치권력이든 - 가 없어 고통받았을 것이고, 종교는 자신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올바른 문제제기도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종교와 '나머지 그룹' 모두에게 불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성직자 당국은 과학이 논파한 뒤에도 전통에 입각한 종교적 회답을 지켜 나가려고 하여 성직자 자신이 종교에 대한 평가를 떨어뜨렸습니다." 라는 토인비의 지적 역시 같은 맥락으로 보입니다.

- 종교가 독립한 이래, 결과적으로 인류의 생존을 위한 탐구 전체가 억눌렸다는 이런 밑그림은, 동서양에 보편적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중 서양의 가톨릭은 '면죄부 판매' 로 비화되는 극도의 폐쇄성과 부패 속에서 '종교개혁' 이라고 불리우는 일대 변화를 겪게되죠. 그리고, 이것을 통해 줄곧 억압받았던 '나머지 그룹' 에게도 기회가 돌아오게 됩니다. 물론, 이들 모두 본래 같은 근원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나머지 그룹' 의 발전은 곧 종교의 발전이기도 했을 것입니다. 개신교의 탄생이 그것이지요.

- 여튼, '나머지 그룹' 은 비약적인 발전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결과물이 제법 혁신적인 것이었기 때문에, 훗날 역사가들로 부터 '근대 철학' 이라는 이름을 선물받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근대 이후 오늘까지도 이 '나머지 그룹' 이 종교와 같은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하지는 못했다고 보여집니다. '나머지 그룹' 중의 일부가 '과학' 으로 독립하고, 과학의 발전이 인류가 가진 욕구의 상당부분을 해결하면서 크게 주목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종교를 대체하지는 못했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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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객관적이고 중립적인 서로 분리된 것은 상대적으로 짧은 역사를 가지고 있지만, 과학은 오늘날 종교 못지 않은 아니 어쩌면 더 월등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토인비는 이 점과 관련해 두 가지를 지적하고 있는데요, 첫번째는 종교와 철학으로 부터 독립한 과학이 스스로 이룩한 놀라운 업적입니다. 두번째는, 과학의 놀라운 발전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수렴하려 하지 않은 종교 지도자들의 태도인데요, 실재의 현상을 분석하는데 있어서 과학이 좀 더 명쾌한 언어로 추상적인 종교 교리를 뒷받침함에도 불구하고, 종교 지도자들 스스로 과학과의 논쟁을 통해 스스로의 역할을 망각할 뿐 아니라 지위마저 떨어뜨렸다는 것입니다. 중세 시대

- 과학은 종교를 대체하지 못할 것이다.

- 도덕이나 윤리라는 교집합을 통해 종교나 이데올로기의 갈등은 극복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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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imbc)

20세기 현대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은 ‘러시아 혁명’이었다.
1917년 러시아 혁명이 성공하고 나서 최초로 사회주의 국가가 수립되자마자 그 영향은 범세계적인 것이었다.
먼저 러시아 혁명은 중국 혁명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쳤다. 뿐만 아니라 러시아의 볼쉐비즘에 대항하여 유럽에는 나치즘과 파시즘이라는 또 다른 형태의 전체주의가 발생하기도 하였다.

소비에트 러시아는 2차 대전 이후에도 냉전의 한 축이 되어 한국 전쟁과 쿠바 혁명, 베트남 전쟁에도 절대적인 영향력을 미쳤다. 또한 제 3세계의 반 식민운동을 지원하는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1991년 러시아에서 사회주의는 몰락하였으나 중국과 쿠바, 북한등 러시아 혁명과 스탈린주의의 유산을 물려받은 국가는 여전히 지구상에 남아 있다. 또한 현실 사회주의가 몰락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 사회에서 ‘이념 갈등’은 뜨거운 이슈에 속한다.

따라서 러시아 혁명은 한편으로는 20세기 현대사 이해의 열쇠를 제공하는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현대 한국 사회가 떠안고 있는 ‘이념 갈등’과 ‘분단’이라는 난제를 반추해 볼 기회를 제공하고 나아가 문제의 해법을 암시해줄 수 있을 것이다.

<1부>

전체 인구의 80% 이상이 농민으로 이루어진 농업국가, 러시아.

19세기 후반부터 급격히 늘어난 농촌인구로 인해 농민들이 소유할 수 있는 토지의 양은 턱없이 부족했다. 또 산업화가 가속화되면서 혹독한 노동조건을 견뎌야했던 노동자들의 원성은 날로 높아만 갔다.

1917년 폭설로 인해 막힌 철도는 도시의 식량사정을 더욱 악화 시키고 견디다 못한 여성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여성노동자들에 의해 시작된 시위는 시 전체로 확산되고 처음의 경제적 요구는 곧바로 ‘전 제정 타도’라는 구호로 바뀌었다. 사태수습을 위한 황제의 시위진압 명령은 무고한 시민들까지 죽음으로 몰고 갔고, 이는 병사들의 반란으로 이어지고 만다.

결국 이러한 상황은 제정 러시아가 무너지는 원인으로 작용하게 된다. 20세기 초반부터 1917년 2월 혁명에 이르기까지 당시 러시아의 시대상, 그리고 1차 대전을 겪으며 어버이로 추앙받던 황제가 무너지고 제정 러시아가 붕괴의 위기를 맞기까지... 그 과정과 원인을 다양한 실황자료와 재연 등을 통해 분석해 본다.

<2부>

1917년 2월 혁명의 성공 이후, 사람들은 새로운 체제를 갈망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욕구는 일종의 자치 기구이자 대의 기구인 소비에트의 결성으로 연결됐다. 소비에트에 파견되는 대표는 자신들이 일하는 작업장과 병영의 동료들이 직접 선출했기 때문에 구성원의 의견이 보다 효과적으로 반영될 수 있었다

하지만 문제는 여전히 계속되고 있었다. 2월 혁명이 성공했지만 러시아는 여전히 전쟁 중이었다. 혁명만 성공한다면 전쟁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던 병사들은 끝나지 않는 전쟁에 분노했고, 혁명 이후 국민들의 생활은 더욱 악화되었다.

이무렵 레닌이 이끄는 소수 정파인 볼셰비키는 농민과 병사, 그리고 노동자들의 욕구를 정확히 표현함으로써 인기를 얻는다. 그리고 그것을 바탕으로 러시아 내의 권력을 서서히 장악하기 시작했다. 마침내 1917년 10월 25일, 레닌은 세계 최초의 사회주의 혁명이 러시아에서 성공했음을 선언했다.

2월 혁명 이후 혼란에 빠진 러시아가 세계 최초의 사회주의 국가를 수립하기까지의 과정을 역사적 상황과 재연을 통해 살펴본다.

<3부>

사회주의 혁명이 성공한 후,
러시아는 영토의 3분의 1을 독일에게 넘겨야하는 브레스트 리토프스크 강화조약을 체결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러시아 군을 전선에 묶어두기 위한 영국과 프랑스의 끊임없는 간섭을 받는다. 결국 볼셰비키는 외국의 간섭국은 물론 러시아 내의 다른 세력들과 처절한 내전을 벌이고, 계속되는 내전은 러시아에 혼란을 가져온다.

내전으로 인한 엄청난 인플레이션 때문에 화폐의 가치가 떨어지면서 러시아 경제는 나락으로 추락하고 만다. 이를 타개하기 위한 볼셰비키의 선택은 공산주의와 자본주의가 뒤섞인 NEP(신 경제정책)라는 혼합 경제 정책에 이르게 되는데...

10월 혁명 이후 국내외의 적들과 내전을 벌였던 볼셰비키들의 생존 과정, 그리고 혼합 경제 정책을 통해 체제를 유지해 나갔던 1920년대의 러시아를 들여다본다.

<4부>

혁명과 내전을 거치면서 자연스럽게 러시아의 구체제가 무너졌다. 그리고 이를 대체할 새로운 삶의 방식, 그리고 사상과 문화의 실험이 시도되었다.
레닌의 죽음 이후, 새롭게 권력을 장악한 사람은 바로 스탈린이었다. 그는 안정적인 식량 확보와 생산성 증대를 위해 ‘농업 집단화’를 실시하면서 농촌을 완전히 통제했다.
또 농업국가 러시아를 산업국가로 탈바꿈하기위해 ‘스탈린 혁명’이라고 불리는 정책을 강행한다. 이러한 정책은 유럽 사회가 수세기에 걸쳐 이룬 것을 단숨에 달성하는 엄청난 성과를 보인다. 그러나 동시에 러시아 국민들은 대기근과 생활수준 하락이라는 끔찍한 희생을 치러야만 했다.

1917년 혁명을 뛰어 넘어 세계사에 유례없는 대격변을 초래했던 ‘스탈린의 혁명’은 농민과 노동자들의 삶에 어떤 변화를 가져왔을까? 그리고 그들은 스탈린과 그 시대를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 ‘스탈린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생생한 이야기와 그 현장을 통해 알아본다.

<5부>

1937년과 38년.
2년 동안 68만 명의 사람들을 처형하며 대테러를 감행한 스탈린.
그의 행동은 군대와 문화를 약화 시키며 러시아 사회에 큰 재앙을 가져왔다.
권력에 대한 모든 위협을 없애려고 했던 편집증적인 의심이 강했던 스탈린.
그의 성격은 대숙청의 원인으로 설명되기도 한다. 하지만 스탈린이 벌인 행동은 여전히 미스터리로 남아있다.

대테러의 그림자는 한국인도 피해갈 수 없었다. ‘스탈린 대숙청’은 당시 독립운동가로 활동하던 한국인 구철석의 목숨까지 앗아갔던 것이다.
아버지 구철석을 회고하는 구 스베뜰라나와 당시 처형된 한국인들의 모습.
그리고 그때를 기억하는 사람들과 전문가들의 이야기를 통해 ‘스탈린 대숙청’의 근본적 이유와 그것이 러시아 사회에 미친 영향에 대해 알아본다.
더불어 ‘스탈린주의로’ 마무리되는 러시아 혁명의 본질과 그것이 전 세계에 미친 영향에 대해서 다루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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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씨네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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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권)

- 양세봉 피살
- 민생단 투쟁: 중국공산당 내에서 밀정을 제거한다는 이유로 다수의 조선독립군을 살해된 사건
- 1935년 농촌계몽운동의 금지
- 집단농장(콜호스)의 건설
- 소수민족들에 대한 소련의 동화정책
- 소련의 조선독립군 무장해제
- 혈청단
- 미나미의 총독부임
-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토너 손기정 선수 금메달 / 동아일보 정간사건
- 1차 만주이민 10만여명
- 조선혁명당군이 양세봉의 죽음 이후 동북항일연군으로 흡수
- 코민테른 7차 대회에서 ‘반 파시즘 인민전선’ 을 주창하면서, 중조항일연군, 조선민족 자치구, 조선항일혁명당이 건설
- 학생첩
- 1937년 보천보 전투
- 카프(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 1925년 결성)
- 1936년 이재유계 경성트로이카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의 실패
- 1937년 중앙아시아 강제이주: 우즈베키스탄 8만명, 카자흐스탄 10만명, 지식인 2500명 총살
- 황국신민서사와 내선일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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