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트랙 프로젝트 (TWO TRACKS PROJECT) 투트랙 프로젝트 (TWO TRACKS PROJECT) 1
정승환 외 노래 / 뮤직앤뉴 / 2022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조동익이 작곡과 편곡을, 조동희가 작사를 한 노래들을 색깔이 전혀 다른 두 가수들이 함께 부른다. 협업과 대칭이 돋보인다고 할까? 노래가 다 좋은데 잔나비 최정훈과 한영애가 1, 2절을 나눠 부르는 사랑을 사랑하게 될 때까지가 가장 인상적였다. 아. 그리고 스텔라장의 새로운 모습이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엄마의 노래 (Mother Song)
박새별 외 노래 / Kakao Entertainment / 2021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말로, 강허달림, 장필순 이름 보고 구입했고, 이들의 노래는 역시 좋다. 여자 가수가 아니라 엄마 가수의 노래들. 엄마로 사는 게 고단한 사람들에게는 좋은 선물이 될 것 같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지구와 충돌하지 않고 착륙하는 방법 - 신기후체제의 정치
브뤼노 라투르 지음, 박범순 옮김 / 이음 / 2021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0. 브뤼노 라투르 (1947~2022)

2022109일 라투르가 췌장암으로 영면하였다. 딱히 그를 따르지는 않았지만 올해가 가기 전 뭘 하면 좋을까 고민하다가 나름대로 추모의 마음을 담아 이 책의 리뷰를 쓰기로 했다. 지난번 녹색 계급의 출현리뷰 쓸 때만 해도 이 세상 사람였는데, 리뷰 올리고 열흘쯤 뒤에 돌아가실 줄 알았다면, 좀더 다정한 리뷰를 썼어야 했다. 사실 그 리뷰 쓰고 나서 뭔가 켕기는 게 남았는데, 그 점에 대해서도 좀더 풀어보고 싶었다. 각을 세우기보다는 귀를 기울이는 방식으로 말이다.

 

1. 1990년대: 새로운 역사의 시작

1990년대초 역사의 종말로 불리던 현실 사회주의의 몰락과 함께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었다. 라투르는 이 새로이 시작된 역사를 함께 구성하는 세 가지 현상을 지목한다. 그것은 1) 탈규제, 2) 불평등의 폭증, 3) 신기후체제 또는 (그에 대한 반동으로서) 기후변화 부정론이다(17, 29, 40, 42). 글로벌화의 부정적 결과쯤으로 이해할 수 있을 법한 이 현상들은 다른 모습으로 계속 반복되어 왔는데, 2010년대 중반 이후의 세 사건들 - 브렉시트, 트럼프 당선, 이주의 급증 - 도 이 세 현상의 복합적 현상태로 이해할 수 있다. 사실 이것들은 하나의 위험이다(29). 이 사건들은 근대화의 연장선상에서 글로벌화가 약속했던 보편성의 시효가 만료되었음을 보여준다. 이런 사례들은 2022년말의 뉴스에서도 계속 꼽을 수 있다. 코로나19바이러스 확산으로 인한 애플과 테슬라의 중국 공장 가동 중단, 영국의 난민 르완다 이송계획, 그리고 프랑스 노인의 쿠르드족 총격 살인사건 등도 신기후 체제역사의 한 장면들임이 분명하다. 이 장면들은 모두 지금 머무는 이곳에서 두 발 뻗고 편히 지낼 수 없음을 보여주는 사례들이다. 의존할 것이 마땅치 않다. 근대화를 통해 남의 땅을 빼앗던 이들이 딛고 서있는 땅도 이제 빼앗길 위기에 처한다(26). 라투르는 이를 발밑에서 땅이 꺼지는 느낌으로 표현한다(27-28). 이제 우리 모두 딛고 의지할 땅이 필요하다. 그런데 새 땅은 이제 없다.

 

2. Global, Local, 그리고 Terrestrial

라투르의 근대가 원래 의미대로의 역사적 시대 범주가 아니라 사회/자연의 이원론적 세계관을 뜻하듯, 글로벌과 로컬도 규모(scale)의 의미라기보다는 사람들이 그쪽을 향해가고자 하는 지향, 그들의 나침반 바늘이 가리키는 유인자(attractor), 직선적 벡터의 양 끝(그림 1, 49, 52~57)이다. 우리는 결코 근대인이었던 적이 없다(p. 302)에서 네트워크에 비하면 별 볼 일 없는 것들로 취급되었던 로컬과 글로벌이 이 책에서는 그림 1부터 6까지 모두에 출현하는 유인자들이다. 로컬과 글로벌은 근대인의 단선적인 시간의 화살이라는 가상적 선분의 두 점, 곧 유토피아이다. 근대인들(또는 그들의 시간의 화살)은 로컬을 등 뒤로 한 채, 근대화의 전선을 밀어붙이면서 글로벌 쪽을 향해 질주해왔다. 그런데 애초 글로벌화의 장밋빛 약속(글로벌화 플러스)은 지켜질 수 없었고, 대신 서두에서 살펴본 글로벌화의 부정적 경향들(글로벌화 마이너스)이 명약관화해지면서 이에 대한 반동으로서 로컬-마이너스로의 질주 역시 확산된다(54). 트럼프주의는 이 정반대로의 두 질주들을 통합하려 하면서 비현실로 이륙하려고 한다(60~61). 라투르는 트럼프주의가 지향하는 네 번째 유인자를 외계로 Out-of-This World”라고 칭하면서, 자신이 제안하는 세 번째 유인자를 그것의 대극에 자리매김한다. 라투르가 제안하는 the Terrestrial은 인간의 행동이 펼쳐지는 환경 또는 배경이 아니라, 그 자체로 하나의 새로운 정치적 행위자다(66).

 

역자는 the Terrestrial대지”, “대지인”(83)으로, terrestrials대지의 것들”(120, 128)로 번역한다. “글로벌”, “로컬은 음차해도 독자들의 이해에 무리가 없다고 판단한 반면, “테레스트리얼은 그렇지 않다고 생각했나 보다. 그 판단을 존중하지만, 덕분에 한국 독자들은 “-al”로 끝나는 라임의 맛을 볼 수는 없다. 그런데 the Terrestrial에는 인간, 비인간, 지구의 생명막(가이아), 곧 러브록적 행위자 모두가 들어가서 수중 존재는 배제하는 것 같은 그냥 "대지"라고 하기도 좀 그렇고, 사람만을 가라키는 "대지인"도 좀 그렇고... 어쨌든 좋은 번역어는 아닌 것 같다.

 

3. 정치생태학의 실패

앙드레 고르와 알랭 리피에츠. 내가 존경해마지 않는 프랑스의 정치생태학자들이다. 정치경제(political economy)에서 정치생태(political ecology)로의 전환은 현실 사회주의 몰락 이후 계몽된 맑스주의자들 중 일부가 걸었던 도정이다. 라투르는 이들이 환경 이슈들을 공공 생활의 핵심 의제로 만드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근대인들의 시간의 화살이라는 덫 자체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자침을 끌어당길 수 있는 새로운 유인자를 만들어 방향을 재설정하지 못했기 때문에 실패했다고 평가한다(73~77). 라투르가 the Terrestrial이라는 새로운 극을 제안하는 이유는 정치생태학이 나침반 바늘을 끌어당길 수 있는 새로운 유인자와 이로 인해 가능해질 새로운 좌표를 마련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단지 그 극을 지목했을 뿐, 이를 정치적 행위자로 엄밀하게 정의하지 못했으므로, 그 극으로의 실제적 이동에 실패했다(72, 85). 다른 세 극들이 토포스 및 땅과 토지가 없는 장소로서 유토피아에 불과하다면, the Terrestrial은 국경과 정체성을 초월하면서도 지구와 토지에 결부된 새로운 세계-만들기(worlding)이다(82). 따라서 이는 스케일의 전복과 시공간 경계의 파괴를 수반하며, 글로벌도 로컬도 아닌 대기적(atmospheric) 스케일에서 펼쳐진다(132).

 

4. 칼 폴라니 비판

라투르는 정치생태학이 결합시키고자 하였던 두 흐름 사회주의와 생태학 이 사회문제와 생태문제의 양자택일이라는 궁지에 빠졌기 때문에 실패했고, 이 결과 나침반의 바늘이 움직이지 못했다고 평가한다(86). 사회주의는 생태문제를 자신의 문제로 인식하지 못했고, 정치생태학은 사회주의의 배턴을 이어받지 못했다. 왜냐하면 이들은 자연의 역할을 서로 다르게 생각했기 때문이다(96). 지난 70년의 거대한 가속(the Great Acceleration) 시기 동안 자본주의는 변하였지만, 사회주의는 변하지 않았고, 생태주의는 주변적 위치에 머물렀다. 따라서 사회의 자기보호 운동은 폴라니의 기대만큼 활성화되지 않았고, 거대한 부동성(the great immobility)만을 보였을 뿐이다(85).

 

생태사회주의자들이 일종의 이론적 보완책으로 생각하였던 폴라니가 비판된다. 그는 시장자유주의를 과거의 일로 치부하였고, 시장화에 저항하는 사회의 능력을 과대평가했고, 계급 갈등이 아닌 강력한 저항의 힘을 예상하지 못하였다(85, 91). 폴라니에 대한 이러한 비판은 정치생태학을 매개로 하여 맑스주의 일반으로 확장된다. 이들은 자신의 주장만큼 충분히 유물론적이지도 않고, 리얼리스트도 아니다(91, 95).

 

5. 생산시스템의 사회적 계급 vs. 생성시스템의 지구사회적(geo-social) 계급

맑스와 폴라니, 그리고 그 후예들이 관심을 가졌던 것이 생산시스템, 사회계급, 사회문제였다면, 라투르는 생성시스템, 지구사회계급, 지구사회적 문제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양자의 차이는 18더욱 커지는 생산 시스템생성 시스템사이의 모순에서 주로 논의되는데, 녹색 계급의 출현에 실린 김환석의 라투르의 정치생태학과 슐츠의 새로운 계급이론의 표에 간략히 잘 정리되어 있기 때문에 여기에서 요약하지 않겠다. 이 책 16~17절에서는 양자가 기반하고 있는 자연관의 차이가 소개되는데, 약술하면 다음과 같다. 생산 시스템에 관심을 기울이는 전자가 자연을 갈릴레오적 객체들로 채워진 우주로서의 자연으로 보았다면, 생성 시스템에 관심을 기울이는 후자는 이를 러브록적 행위자들(Lovelocian agents)”로 이뤄진 과정으로서의 자연으로 파악한다(110, 115). 전자가 지구를 많은 행성 중의 하나로 멀리서 바라보는 관점이라면, 후자에게 지구는 거주지/서식지로서 그 안에서 다른 생명들이 함께 공동생산하는 것으로서 온전히 유일한(wholly singular) 것이다. 행위성(agencies)은 인간뿐만 아니라 비인간 존재들, 곧 전자의 관점이 객체들(objects), 심지어 자원들로 파악한 것들에게도 주어진다. 우리가 일부를 구성하는 이 지구가 바로 라투르의 제3, 정치적 행위자로서의 the Terrestrial인 것이다. 지구는 바로 나의/우리의 유일한 거주지이므로, 갈릴레오적 객체들에 대해 취할 수 있는 중립적 입장이나 거리두기는 불가능하다.

 

[이 책의 역자 박범순은 geo-social지리-사회적이라고 번역하였는데, 김환석은 이를 지구사회적이라고 번역한다. 김환석의 번역이 옳다. 김환석 선생의 글은 이번에 다시 보았는데, 그 글이 후기로 실려 있는 녹색 계급의 출현뿐만 아니라, 이 책 지구와 충돌하지 않고 착륙하는 방법에 대해서도 친절한 안내를 제공하기 때문에 이 책의 이해가 녹록치 않은 독자들에게도 권하고 싶다.]

 

6.

나는 2022년에 슐츠와 공저한 (아마도 그의 생전에 출판된 마지막 책인) 녹색 계급의 출현2017년에 나온 이 책보다 먼저 보았다. 그리고 우리는 결코 근대인이었던 적이 없다』(1991)를 무척 힘들게 읽었지만 다 이해하지 못했고, 그 전에 나온 그의 STS 저작들에는 사실 별 관심이 없으며, 신기후체제에 대한 그의 다른 책들도 읽어보지 못했다. 그런데 어떤 저자의 새로운 저작들을 읽으면 읽을수록 이전에 내가 잘못 이해했던 것들을 교정하게 되고 또 새로운 의문들이 생기는 경우, 나는 그에 대한 지적 흥미가 더 자라남을 느낀다. 지금 내가 그렇다.

 

이 책을 읽은 후에야 녹색 계급의 출현에서 녹색계급이 맑스주의처럼 자기 역사의 방향을 규정해야 한다는 말의 의미를 비로소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그 역사적 방향이란 것이 다름아닌 the Terrestrial였고, 이것은 글로벌과 로컬의 상상적 벡터 바깥에 놓인 지향점이었던 것이다. 그 책의 리뷰(https://blog.aladin.co.kr/eroica/13966311#Comment_13966311) 마지막 부분에서 나는 세 가지 질문거리를 썼는데, 그 중에서도 다음의 두 번째 질문에 대한 생각을 고쳐먹게 되었다.

 

이 수행적인 글쓰기 어디에 라투르가 고수하던 행위자를 따라가라는 지극히 기술적인 글쓰기의 원칙이 적용되고 있는가? 전혀 아니다.”

 

녹색 계급의 출현을 다시 보면 또 어떨지 모르겠는데, 지구와 충돌하지 않고 착륙하는 방법19(133)에서 라투르는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한 답으로 지구에 있는 것들에 대한 대안적 기술을 답으로 제시한다. 그러면서 그것의 사례로 프랑스 대혁명 직전에 국왕이 제출토록 한 진정서의 예를 들고 있다. 거기에는 여러 신분들의 불만과 고충들이 자세하게 기술되어 있다고 한다. 그리고 프랑스 대혁명이 다종다기한 불만들을 왕정이냐 공화정이냐의 양자택일의 문제로 총체화하기 전에 있었던 자신의 거주지에 대한 구체적 기술이 이 진정서들에 담겨 있었다고 한다. 그러면서 활성체들(animate beings)의 거주지의 세부적 사안들에 대해 구체적으로 기술해야 한다고 제안한다. 곧 그는 프랑스 대혁명 직전의 진정서들처럼 다시 구체적으로 현황을 점검하자고 제안한다.

 

대지 유인자(Terrestrial attractor)의 출현과 서술이 과연 정치적 행동에 의미와 방향을 부여할 수 있을지가 ... 의문이다. 세계 질서가 있으려면 현황을 점검해서 어느 정도 공유할 만한 세계가 먼저 있어야 한다”(138).

 

여기에서 라투르는 분명히 정치적 행동에 의미와 방향을 부여하려면, 그 이전에 우리가 어느 정도 공유할 만한 세계에 대한 기술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분명 라투르는 수행(performance) 이전의 기술(description)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따라서 여기 어디에 행위자를 따라가는충실한 기술이 있느냐고 물어봤던 나의 질문은 이 지구와 충돌하지 않고 착륙하는 방법을 읽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라투르는 분명히 “‘대지의 것들을 따라가는 것의 중요성을 말하고 있다(124). 그렇다고 이 질문이 마냥 라투르를 왜곡한 것이라고 무지한 내가 잘못했습니다하기도 힘든 것이 라투르는 기술(description)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그것의 역사적 선례를 들 뿐, 지구라는 공동 거주지에 거주하는 모든 행위자들과 활성체들(? 움직이는 존재들?) 또는 정치적 행위자로서의 the Terrestrial에 대해 세세히 기술하지 못하였다. 또 이제는 아예 할 기회가 없게 되었다. 지구와 충돌하지 않고 착륙하는 방법은 구체적인 기술을 제안하면서 끝났고, 녹색 계급의 출현정치적 행동에 의미와 방향을 부여하고자 하는 의도에서 쓰여졌지만, 정작 두 저작을 매개하는 데에 필수불가결한 요소, 곧 그가 강조했던 지구와 행위자들에 대한 구체적 기술은 누락된 것이다.

 

내가 다른 두 질문들에 담았던 생산 시스템의 사회계급과 생성 시스템의 지구사회계급 간의 관계나 자본주의의 문제에 대한 의문은 그 때보다는 다소 물렁물렁해져 뾰족한 끝이 닳았다. 이 문제들에 관해서는 언제고 여유를 갖고 라투르의 다른 글들과 그의 동료들의 저작들을 살펴보고 싶어졌다. 물이 좀 따뜻해진 걸까? 내 눈이 좀 밝아진 걸까?

 

라투르는 이 책을 자신의 가설이 틀렸음을 증명하고 더 나은 것을 찾을 수 있도록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 썼다는 말로 시작해서, 지금까지 내가 얘기했으니 이제부터 당신이 얘기할 차례라는 말로 끝맺는다(19, 149). 라투르도 대화를 하고자 했던 것일까? 단지 여전히 근대인의 귀를 가졌던 내가 못 알아들었기 때문에 배배꼬인 프랑스 지식인의 혼잣말로 간주한 것일까? 근데 이제 좀 듣고 싶어진 것 같은데...

 

Adieu, Bruno! Adieu, 2022!!

 

<2022. 12. 31. 추기>

남은 자투리들 몇 개: 

1) 미주 44, 54, 55에서 현재의 생태사회주의적 저작들을 비판하는 것 같은데, 좀 자세히 써주지... 무슨 혼잣말 같아서 더 궁금증을 유발한다. 

2) 라투르는 폴라니를 비판하지만 결국 생산 시스템이 생성 시스템 안에 파묻혀 있는(embedded) 것이라는 폴라니의 문제틀로 귀환하는 것 아닌가?

3) 미주 70, 74에서 언급되는 필립 데스콜라의 Beyond Nature and Culture나 라투르의 Politics of Nature, Facing Gaia, 그리고 스탕게르스의 책들도 좀 번역되어 나왔으면 좋겠다.


댓글(7)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초원 2022-12-30 19:1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감사해요. 글을 읽다보니 온정이 느껴집니다. 라투르의 열정에 에로이카님의 정성까지...

에로이카 2022-12-31 12:09   좋아요 1 | URL
초원님, 온정이요? 잘 모르겠지만, 감사합니다. 한 해 잘 정리하시고,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

초원 2022-12-31 21:23   좋아요 1 | URL
라투르를 더 잘 이해할 수 있도록 안내해 주셔서 감사드렸어요. 동의하지 않는 주장에 대해서도 여러 경로로 논증하려는 모습이 타인을 인정하는 온정으로 느껴졌구요.
그런데 두 번째 자투리는 상호포섭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이해되기도 하던데요.

몇 시간이 지나면 또 다른 新年이 되는군요. 복 많이 받으시고, 소원 성취하시길 바래요.

에로이카 2023-01-01 18:50   좋아요 0 | URL
아.. 네.. ^^ 초원님, 따뜻한 댓글 감사드립니다. 라투르 너무 읽기 힘들어서 저는 이해하려는 노력이 많이 필요합니다. 리뷰에 그 흔적이 남았나 보네요... 상호포섭은 누군가의 개념인가요? 아니면 그냥 일상적인 용법에서의 의미인 건가요?

초원 2023-01-03 08:08   좋아요 1 | URL
홀리즘이었던 것 같은데요, 세르의 상호포섭 개념으로 자연과 사회를 파악하는 관점에 영향을 받은 학자들 중에 라투르도 있었던 것으로 ... 봉지 넣기 비유가 설득력이 있었어요. 그 막연한 기억에 더해서 에로이카님의 출중한 해설을 읽다보니 안다는 착각이 생겼네요.

에로이카 2023-01-03 10: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세르요.. 공부하고 싶은데 뭐부터 봐야할지 모르겠는 학자였어요. 세르의 상호포섭, 봉지넣기.. 기억해두겠습니다.. 고맙습니다~

2023-01-05 16: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Staying with the Trouble: Making Kin in the Chthulucene (Paperback)
Donna Haraway / Duke Univ Pr / 2016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책의 6장인데, 국역서는 영어책의 5, 6, 7장을 누락하고 있다. 

6장에서는 애나 칭의 『세계 끝의 버섯』과 르 귄의 『세상을 가리키는 말은 숲』, "아카시아 씨앗의 저자"가 인용된다.

아래의 밑줄긋기는 이 중 르 귄의 『세상을 가리키는 말은 숲』과 관련된 내용이다. 


Matter as timber brings me to Le Guin’s The Word for World Is Forest, published in 1976 as part of her Hainish fabulations for dispersed native and colonial beings locked in struggle over imperialist exploitation and the chances for multispecies flourishing. That story took place on another planet and is very like the tale of colonial oppression in the name of pacification and resource extraction that takes place on Pandora in James Cameron’s 2009 blockbuster film Avatar. - P120

나무 같은 물체는 1976년에 출판된 르 귄의 『세상을 가리키는 말은 숲』을 떠오르게 한다. 이 책은 제국주의적 착취에 대항하는 투쟁과 다종의 공동번영을 위한 기회라는 두 선택지를 갖고 있는 흩어져 사는 원주민과 식민자들에 대한 헤인 연대기의 일부다. 다른 행성에서 전개되는 이 스토리는 평화 정착(pacification)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식민주의적 억압과 판도라에서 발어지는 자원 추출 이야기인 제임스 캐머런의 블록버스터 영화 <아바타>(2009)와 매우 유사하다. - P120

Except one particular detail is very different; Le Guin’s Forest does not feature a repentant and redeemed "white" colonial hero. Her story has the shape of a carrier bag that is disdained by heroes. - P120

그러나 두 이야기 사이에는 매우 다른 하나의 디테일이 존재한다. 르 귄의 『세상을 가리키는 말은 숲』에는 잘못을 뉘우치고 다시 태어나는 "백인" 식민정착자 영웅은 등장하지 않는다. 그녀의 스토리는 영웅이 조롱하는 캐리어백(carrier bag) 모양을 하고 있다. - P120

Also, even as they condemn their chief oppressor to live, rather than killing him after their victory, for Le Guin’s"natives"the consequences of the freedom struggle bring the lasting knowledge of how to murder each other, not just the invader, as well as how to recollect and perhaps relearn to flourish in the face of this history. There is no status quo ante, no salvation tale, like that on Pandora. - P120

또한 그들을 가장 괴롭혔던 억압자를 승리 이후에도 처형하지 않고 살려 두긴 하지만, 르 귄의 "원주민들"은 그들의 투쟁의 결과로, 침략자뿐만 아니라 그들 서로를 살해하는 방법을 그 후로 계속 갖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 역사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번영할 수 있는가에 대한 지식을 기억하게 되었고, 아마도 다시 배우게 되었을 것이다. 여기에는 판도라에서 일어난 것과 같은 다시 돌아갈 수 있는 원래 상태나 구원의 이야기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 P120

Instructed by the struggle on Forest‘s planet of Athshea, I will stay on Terra and imagine that Le Guin’s Hainish species have not all been of the hominid lineage or web, no matter how dispersed. Matter, mater, mutter make me—make us, that collective gathered in the narrative bag of the Chthulucene—stay with the naturalcultural multispecies trouble on earth, strengthened by the freedom struggle for a postcolonial world on Le Guin’s planet of Athshea.

『세상을 가리키는 말은 숲』의 애쓰시아(Athshea) 행성에서의 투쟁의 교훈을 되새기면서, 나는 지구(Terra)에 계속 머물 것이며, 르 귄의 헤인 종(Hainish species)이 모두 단일한 영장류의 계통 또는 그물에 속하는 것은 아니라고 상상한다. 물질(Matter), 엄니(mater), 중얼거림/얼름(mutter)은 나를, 그리고 툴루세의 서사 가방에 함께 담겨 있는 우리 모두를 지구상의 자연문화적이며 다종적인 트러블과 함께 머물게 만든다. 이 자연문화적·다종적 트러블은 르 귄의 애쓰시아 행성의 식민지 해방 투쟁에 의해 강화된다. - P12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세상 끝에서 춤추다 - 언어, 여자, 장소에 대한 사색
어슐러 K. 르 귄 지음, 이수현 옮김 / 황금가지 / 2021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0.

짧은 글들의 모음이지만 그 안에 녹아 있는 르 귄의 사유는 깊고 넓고 따뜻하다. 여름에 읽은 책인데, 한 해가 저물어갈 때쯤에야 리뷰를 쓴다. 지난 주말에 바로 쓰고 싶었는데 김장 담그느라 못 썼고, 주중에도 일(과 월드컵) 때문에 잠시도 짬을 내기 힘들었다. 리뷰를 하기 전에 다시 빠르게 넘기며 초점을 잡는데 또 새로운 것들이 보인다. 특히 1986년에 발표한 세 글 - <브린 모어 대학 졸업식 축사>, <여자/야생>, <캐리어백 픽션 이론> -이 돋보인다. 원래 두 주제에 초점을 맞춘 하나의 리뷰를 쓰고 싶었는데, 마음을 바꿔 주제별로 두 개의 리뷰를 작성해야 할 것 같다. 두 번째 것은 쓸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이 첫 번째 리뷰는 르 귄의 캐리어백 픽션 이론에 관한 것이다. 이 책에는 소설판 장바구니론”(292~301)이라고 번역되어 있다.

 

1.

이 책의 발행일이 2021910일로 되어 있는데, 내가 해러웨이의 트러블과 함께하기를 읽고 리뷰(https://blog.aladin.co.kr/eroica/12900997)를 쓴 것이 그보다 열흘 남짓 빠른 829일였다. 처음 읽은 해러웨이의 책이었고, 그 책에서 르 귄의 이름을 처음 알았다. 언제나 그렇지만 내가 몰랐다고 별볼일없는 사람이 아니다. BTS 팬들은 그녀에 대해 이미 알고 있었고, 우리 말로도 그녀의 여러 작품이 번역된 유명한 SF 작가였는데, 그때 난 존재 자체를 모르고 있었다. 해러웨이는 트러블과 함께하기2(73~81)에서 르 귄의 이 글을 라투르, 마굴리스, 스탕제르 등의 논의와, 그리고 신의 트릭(God’s trick)”에 대한 자신의 이야기와 함께 엮어낸다. 그때는 아직 이 책이 번역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리고 음경 이야기(prick tale)”라는 유머를 질식시키는 극악무도한 번역 때문에 이 글의 원문을 찾아볼 수밖에 없었다. 그로부터 1년 반 동안 (스탕제르는 엄두를 못 냈지만,) 라투르, 마굴리스, 르 귄의 글들을 짬짬이 읽어 왔다. 해러웨이가 르 귄으로 들어가는 문을 열어준 것이다. 처음에는 해러웨이를 이해하기 위해 르 귄을 읽었는데, 읽으면 읽을수록 르 귄은 (이런 비교가 참 속물스럽지만) 어쩌면 해러웨이보다 더 훌륭한 사람 같다는 느낌이 든다.

  

르 귄의 캐리어백 픽션 이론에 관한 독보적인 이 짧은 글(한글로는 10페이지, 영어로는 6페이지)을 내가 몇 번이나 읽었을까? 열 번은 조금 안 될 것 같다. 그런데 이번에는 이전에 넘어갔던 한 구절이 나의 눈길을 끌었다.

 

버지니아 울프는 3기니라는 제목으로 완성될 책을 계획하고 있었을 때 공책에 용어사전(Glossary)”이라는 제목을 썼다. 당시 울프는 색다른 이야기를 하기 위해, 자신의 새로운 계획에 따라 영어를 재창조할 생각을 했다. 이 용어 사전 항목 중에 영웅주의는 보툴리즘(botulism)”으로 정의된다. 그리고 울프의 사전에서 영웅은 보틀(bottle)”이다. (bottle)이 영웅이라니, 혹독한 재평가다. 나는 이제 그 병을 영웅으로 제시하려 한다"(294).


이것은 무슨 말일까? 그 분야에 무지하지만, 버지니아 울프라는 이름은 들어봤다. 읽은 것은 없다. 그런데 그녀가 영웅담(heroism)을 보툴리즘으로, 영웅을 병으로 재정의하려고 하였다니. 출처가 어디인지, 맥락이 무엇인지 도무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르 귄의 이 책은 출처에 대해서 보통 미주를 달아 놓았는데, 유독 이 구절에 대해서는 아무런 실마리가 없었다. 버지니아 울프와 보툴리즘을 구글링한 끝에 Virginia Woolf’s Reading Notebooks(1983)의 존재를 알게 되었고, 내가 종종 이용하지만 장서가 그리 대단치 않다고 여겨온 도서관에서 이 책을 발견했고, 이 책의 53쪽에서 르 귄이 언급한 부분을 찾아냈다(https://blog.aladin.co.kr/eroica/14114280). 그런데 내용이 별 것 없다.

 

Soldier = Gutsgruzzler. Heroism = Botulism. a Hero = Bottle” (Virginia Woolf's Reading Notebooks, p. 253)

 

울프가 자신만의 노트에 남긴 이 짧막한 생각의 파편을 보았을 때, 르 귄은 궁금했을 것이다. 이것이 무슨 뜻일까? 그리고는 상상력을 발휘해서 짧지만 빛나는 위대함으로 가득찬 이 글을 써낸 것이다.

 



2.

르 귄은 프랑스 대혁명 이전의 사회계약론자들 홉스, 로크, 루소 등 처럼 채집사회에서 수렵사회로 넘어가는 일종의 자연상태에 대한 이야기로 글을 시작한다. 농업이나 문명이 시작되기 전의 시대, 일주일에 15시간 정도 일하면 충분히 생활을 꾸릴 수 있던 시절이다. 여자들은 아기를 보며 야생귀리를 까던 시절, 아기도 없고 노래나 별 다른 기술도 없던 남자들은 심심해서 나가서 매머드 사냥을 한다. 남자들은 상아와 고기만 갖고 돌아온 것이 아니라, 수렵 과정에서 있었던 일들에 대한 흥미진진한 이야기들까지 갖고 돌아온다. “액션으로 가득찬 영웅담. 이제 아이를 보며 야생귀리 까는 이야기는 목숨을 걸고 매머드를 찔러 죽이고 마침내 전리품을 짊어지고 귀환하는 액션 히어로 이야기와 비교가 될 수 없다.

 

르 귄은 이들의 영웅담에 들어 있는 때리고 찌르고 두들길 길고 단단한 도구”, “그 멋진 크고 길고 단단한 물건잎사귀, 박껍데기, 조개껍데기, 그물, 가방, 멜빵, 자루, , , 상자, 용기, 담는 것, 그릇같은 물건을 담을 용기”, 무엇인가를 담는 물건을 의미하는 병을 반정립시킨다(294-295). 막대기, , 창 이야기는 많이 들어봤지만, 그릇이나 병 이야기는 별로 들어본 적이 없다는 의미에서 새로운 이야기, 곧 뉴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언가를 담는 도구는 단검이나 도끼보다 훨씬 이전부터 존재했다. 이것이 인류학자 엘리자베스 피셔가 인간진화의 캐리어백 이론이라고 부른 것이고, 울프가 남긴 실마리를 르 귄이 재탄생 시킨 것이다.

 

르 귄은 제국주의적인 본성과 통제불가능한 충동을 다스리기 위해 법을 만드는 영웅들의 액션 스토리의 특징을 세 요소로 정리한다(298-299). 1) 한 시점에서 출발해서 그 후의 다른 시점의 목표에 도달하는 시간의 화살의 서사, 2) 갈등 중심의 전개, 3) 남자 영웅(he)이 나오지 않는 이야기는 좋은 이야기가 될 수 없다고 보는 관점이다.

 

르 귄은 이 셋 모두에 반대한다. 첫째, 처음, 중간, 끝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정리(48~49, 73)는 마치 시작 이전과 끝 이후에는 아무 이야기도 없는 것처럼 가정하지만, 실제로는 그 시작 이전에는 전편들(prequels)이, 끝 이후에는 속편들(sequels)이 존재한다. 이 시간의 화살에 우로보로스의 형상이 반정립된다. 둘째, 중요한 것은 관계이고, 갈등은 그것의 한 종류일 뿐이므로 모든 관계를 갈등으로 환원할 수 없다. 셋째, 소설에는 영웅이 아니라 사람들(people)이 있어야 한다.

 

르 귄은 소설을 시간의 화살이나 승리라는 결과를 갈등 끝에 쟁취하는 전투가 아니라, 자루나 가방으로 보는 것이 더 적합하다고 한다.

 

책은 말을 담는다. 말은 사물을 담는다. 의미를 품는다. 소설은 약보따리이며 그 속에 담긴 것들은 서로와, 그리고 우리와 특별하고 강력한 관계를 맺고 있다... 가방 속에 집어넣으면 영웅도 토끼처럼 보이고, 감자처럼 보일 것이다. 바로 그래서 나는 소설을 좋아한다. 소설 속에는 영웅이 아니라 사람들이 있다”(299).

 

뾰족한 것으로 찔러 죽이는 이야기가 아니라, 관계들에 대한 이야기 보따리로서의 소설이라는 르 귄의 관점은 SF의 재정의로 이어진다. 기술과 과학은 누군가를 지배하는 무기가 아니라, 문화의 장바구니로 다시 정의하게 되면, SF는 리얼리즘보다 덜 신화적인 장르로서 기묘한 리얼리즘이지만, 기묘한 현실이다”(301). 우리의 세상은 거대한 자루이고, 그 안에는 여러 존재들의 관계가 맺어졌다 풀려난다. 이 세상은 새로 태어날 것들의 자궁이며, 이전에 있던 것들의 무덤이며, 남자뿐만 아니라, 야생귀리를 잔뜩 따서 담고 그 씨앗을 뿌리는 이들, 그 와중에 포대기로 업은 아이들에게 불러주는 노래와 아이들의 농담이 다 들어 있다. 이 얼마나 기꺼이 잠겨 쉬고 싶은 편안하고 따뜻한 목욕물인가?


3.

이렇게 르 귄은 영웅이 길고 단단한 막대기를 휘두르는 영웅담(heroism)을 무언가를 담는 그릇의 보툴리즘(botulism)으로 대체한다. 대단하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울프의 노트에 나온 뜻모를 수수께끼를 이렇게 풀어내다니, 스핑크스의 퀴즈를 풀어낸 오이디푸스보다 위대한 인간, 더 닮고 싶은 인간 아닌가?

 

르 귄은 같은 해에 작성된 <브린 모어 대학 졸업식 축사>에서는 우리가 학교에서 배운 언어, 힘의 언어인 아버지말(father tongue)과 학교에 들어가기 전 배웠던 어머니말(mother tongue)을 대조시키면서, 후자는 그냥 의사소통이 아니라 관계와 관계 맺기의 언어”, “언제나 침묵 언저리에 있고, 자주 노래 가장자리에 있는 언어, ... 이야기들을 전하는 언어로 정의한다. 이 언어의 힘은 쪼개는 데 있지 않고 묶는 데 있으며, 거리를 벌리는 데 있지 않고 통합하는 데 있다고 말한다(263~264).

 

나는 이 문장들에서 어떤 경이를 느낀다. 그 경이를 아버지말에 오염된 나의 무딘 언어로 표현하기는 쉽지 않다. 그저 내 배꼽을 만져볼 뿐. 인간이라면, 곧 배꼽을 갖고 있다면, 어머니말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미 들어 왔던 말이고, 이미 할 줄 아는 말이기도 하다. 어머니말을 쓰는 비중을 늘리고, 그 말이 적합한 상황에서 그 말을 쓰고, 가끔은 아버지말을 어머니말로 번역도 하고, 번역 와중에 아버지말이 놓친 것들에 대해 어머니말로 실컷 이야기해야 하겠다.


4.

해러웨이는 트러블과 함께하기2(73~81)두번째 밀레니엄의 겸손한 목격자, 여성인간 앙코마우스를 만나다6(448~453)에서 이 캐리어백 픽션 이론을 발판삼아 아버지말과 어머니말을 넘나들며 새로운 스토리텔링의 방식을 보여준다. 철학적인 배경지식이 없다면, STS에 관심이 딱히 있는 것이 아니라면, 해러웨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데리다나 라투르가 아니라 르 귄에서 시작하는 것을 권하고 싶다. 해러웨이를 전공하거나 번역하는 이라면, 르 귄을 꼭 읽어야 할 것이다. 그래야 황당한 창조적 오역들을 피할 수 있겠다 싶다.

 

5. 딴 얘기 하나, 김장

일주일 전 김장을 했다. 전날 장보다 감기가 걸렸다. 오전부터 시작한 김장 노동은 자정이 가까워졌는데도 끝나지 않았다. 쪽파를 까면서 내 엄지와 검지는 팟물이 들어 흑록색으로 바뀌었다. 입은 계속 투덜댔지만 손은 쉬지 않았다. 씻고, 까고, 채썰고, 자르고, 나르고, 버무리고, 설거지하는 것이 무한반복되었다. 허리가 휘도록 일한다는 게 이런 거구나 했다. 일어나거나 앉을 때마다 아이구구구하는 소리가 계속 저절로 나왔다


 

마음 속으로 생각했다이런 게 야생귀리를 따고 까는 일이겠구나. ^^ 그러니 기분이 한결 좋아졌다마음 속으로 계속 생각했다김장이 엄청난 노동이지만이 노동은 착취당하는 노동이 아니다. 가격으로 수량화되는 '교환가치'를 위한 것이 아니라, 김치라는 사용가치의 생산을 위한곧 나의 재생산을 위한 노동은 필요노동과 잉여노동으로 구분되지 않는다온전히 나를 위한 노동이다새벽이 되어서야 끝난 김장 끝에 김치냉장고에서는 김치가 익고 있다.



허리는 이제 다 나았지만, 감기는 아직 안 나았고, 터진 엄지손톱 양쪽 끝 살들도 그대로다. 액션 영웅담인 월드컵을 보는 시간도 16강전 진출로 연장되었다. 배꼽 있는 인간에게 이 액션 히어로물은 오락물일 뿐이다. 반면 끊임없이 내가 씻고 채우고 비우고 날랐던 김장매트, “다라이”, 김냉 저장용기, 김치 냉장고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삶의 일부였다


이제는 김장하시기에는 기력이 없으신 어머니와 김장에 별 흥미를 못 느끼는 동생들에게 갖다 주니 좋아 한다. 나의 노동의 산물인 김치가 플라스틱 박스에 담겨 돈으로 바꿀 수 없는, 값을 매길 수 없는(priceless) 선물이 된다. 별로 재미없지만 배꼽달린 사람의 삶은 이런 것이다. 어머니말에 별 재주가 없는 나는 이렇게밖에 못 쓰지만, 르 귄은 다를 것이다. 그리고 또 다른 젊은 르 귄들이 유려한 어머니말로 유치한 파워레인저 이야기들을 가방 속 토끼로 만들어버릴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