겸손한_목격자@제2의_천년.여성인간ⓒ_앙코마우스TM를_만나다 - 페미니즘과 기술과학 아우또노미아총서 14
다나 J. 해러웨이 지음, 민경숙 옮김 / 갈무리 / 2007년 12월
평점 :
절판


해러웨이의 스트래선에 대한 의존은 여전하다. 그런데 이번에는 <부분적 연결들>이 아니라, 90년대 초반의 저작들이 인용된다. 


figuration과 figure(50~)를 둘 다 "비유"로 번역했는데, 아무리 생각해봐도 전자는 "형상화"로 후자는 "형상" 또는 "인물"로 옮겼어야 옳을 것 같다. 물론 이 한국말들이 다 커버하지 못하는 뜻이 분명히 있지만 그래도 "비유"보다는 낫다. "비유"로 옮겨서는 안 되는 것들이 훨씬 더 많다. 


푸코의 "생명정치"를 해러웨이가 자기 식으로 이해하고 있는 부분은 오랜 궁금증을 조금 풀어주었다. Sarah Franklin의 "생명 그 자체(life itself)"라는 개념이 푸코의 "생명정치"와 해러웨이의 "technobiopolitics"를 매개하는 것 같은데, 프랭클린은 누구인가? 처음 봤다. 


참고문헌에는 르 귄의 "Carrier bag theory of fiction"이 있는데, 색인에는 르 귄 이름이 없어서 어디에서 어떤 맥락으로 인용되는지 한참 찾았다. 6장의 450쪽 각주 30번(영어판 미주 14번)에 나온다. 나중에라도 다시 보게 되면 잘 봐야지...


라투르 이야기도 많이 나오고, 맑스에 대한 참조들도 눈에 띄는데, 이것 역시 나중에 제대로 살펴봐야 할 것 같다. 


이제 짬은 그만 내고, 도망친 할 일로 다시 돌아가자. 에효~

아리스토텔레스의 "figures of discourse(담론의 비유?)"는 수사학상의 공간적 배열에 관한 것이다. figure는 기하학적인 동시에 수사학적이다. topics와 tropes는 둘 다 공간적 개념이다. "figure"는 프랑스어로 얼굴을 뜻하는데, 영어에서는 이야기의 윤곽이라는 개념의 뜻을 보유하고 있다. "To figure"는 세다, 계산하다를 의미하며, 또한 이야기 속에 끼다, 역할을 맡다 등을 의미한다. figure는 또한 그림그리기이다. figure는 graphic representation과 시각 형태 일반과 관련이 있으며, 이 사실은 시각적으로 포화된 기술과학 문화에서 적지 않은 중요성을 띠고 있다. figure는 반드시 재현적(representational)이거나 미메시스일 필요는 없지만 비유적(tropic)이어야 한다. 다시 말하면, figure는 문자적(literal)이거나 자기동일적(self-identical)여서는 안된다. - P55

Figures는 동일시와 확실성에 문제를 일으킬(trouble) 수 있는 자리바꿈(displacement)을 적어도 포함하고 있어야 한다.

Figurations는 그 안에 살 수 있는 수행적 이미지들이다. 말로 된 것이든 시각적인 것이든, figurations는 경합적인 세계들이 압축되어 있는 지도일 수 있다. 수학을 포함한 모든 언어는 figurative하다(비유적이다). 곧 비유들(tropes)로 이뤄진다. 곧 우리를 literal-mindedness에서 벗어나게 만드는 bump들로 구성된다. 나는 figuration이 모든 물질-기호론적 과정들의 비유적(tropic) 성질을 명백하고 불가피하게 만든다는 것을, 특히 기술과학에서 더욱 그러하다는 것을 강조한다. - P55

Figures는 언제나 해석적 실천을 조직하는 일종의 시간적 양상(temporal modality)을 동반한다. 나는 푸코(1978)의 생명권력 개념이 신체에 대한 관리행정(administration, 경영), 치료, 감시를 통해 그 살아있는 유기체의 힘을 담론적으로 구성하고, 증가시키고, 관리하는 것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한다. 푸코는 자위행위를 하는 어린이를 묘사함으로써 그의 이론적 개념에 형상(shape)을 부여한다. 이 아이는 맬더스적인 커플, 히스테리컬한 여자, 그리고 동성애자 변태의 형상들을 재생산한다. 이 생명정치적인 형상(인물)들의 시간성은 발전적(developmental)이다. 이들은 모두 건강, 퇴화, 그리고 생산 및 생식의 유기적 효율성 및 병리학의 드라마 등과 연관되어 있다. 발전적 시간은 기독교 리얼리즘 및 기술과학적 휴머니즘의 속성인 구원의 역사의 시간성의 합법적 계승자인 것이다. - P56

이와 유사하게 나의 사이보그 형상들(figures)은 내가 기술생명권력(technobiopower)이라고 부르는 돌연변이의 시간-공간 체제 내에 거주한다. - P57

수렵인 남자(Man the Hunter)가 전후의 보편적 인간 가족 속에서 기술, 언어, 혈연관계의 결속을 구체화하였다. 동일한 적응행동 속에서 기술과 기호학의 어버이인 - 자연과학과 인문과학의 어버이인 - 수렵인 남자는, 아름답고 기능적인 최초의 물건들을 만들었고 최초의 중요한 말들을 말하였다. 이 설명 속에서 수렵은 경쟁과 공격에 관한 것이 아니라, 위대한 손-눈 협조 체제를 가진 활보하는 두 발의 原人들(protohumans)에게 가능했던 새로운 생존 전략에 관한 것이었다. 그 과정 속에서 거대한 두뇌와 힘든 출생을 획득하게 된 이 존재들은, 짝들과 아이들과 함께 그리고 서로 간에 전리품을 공유하는 맥락 속에서, 협동, 언어, 기술, 여행욕구 등을 개발하였다. 물론 1950년대와 1960년대의 수렵가설에서는 수컷들이 인간 진화의 능동적인 추진력으로 간주되었으나, 그런 논리는 1970년대에는 지나치게 강요되지 않았다. - P449

1970년대에는 채집인 여자(Woman the Gatherer)가 전면에 부각되었고, 여성 오르가즘이나 아이에게 유용한 아빠를 여성이 선택하는 것 같은 몇몇 쓸모있는 가족 개혁들이 진행되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여전히 아기 멜빵(baby slings), 뿌리와 견과류를 담는 가방(carrying bags), 성인들의 일상적인 가십, 아이들에게 말하기 등이 날렵하게 잘 빠진 발사체(elegant projectiles), 모험으로 가득찬 여행, 정치적 웅변, 위험에 맞서는 남성적 단결들로 이뤄지는 시초에 관한 드라마(originary drama)와 경쟁하기란 거의 불가능했다. [각주 30에서 다른 페미니스트 저작들과 함께 Le Guin(1988)이 나옴.] - P450

회절 Diffraction - P63

... 나는 이 책을 <회절>Diffraction, 즉 린 랜돌프가 그린 분열된 인물(a split figure)의 그림으로 끝맺는다. 그 분열된 인물은 얇은 막을 통해 하나의 세계로 들어가고 있는데, 그 세계에서는 간섭패턴들 때문에 의미가 만들어지고 체험되는 방법에 차이가 생길 수 있다. - P61

내가 발명한 의미론의 범주인 회절은 서양 철학 및 과학에서 너무나 일반적인 광학적 은유 및 도구를 이용한다. 반영성이 비판적 실천으로 추천되었으나, 나는 반영성이 반사처럼 동일한 것을 다른 곳으로 환치할 뿐이라고 의심하였다. 그리고 복제와 원본에 관한 근심과 믿을 만한 것과 정말로 실재하는 것에 관한 탐색 문제를 만든다고 생각하였다. 반영성은 기술과학의 지식 속에 있는 강한 객관성(strong objectivity)과 상황적 지식에 관해 사고할 때, 리얼리즘과 상대주의 사이에서의 잘못된 선택을 피하기에는 나쁜 전의(bad trope, 부적절한 비유)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물질적-기호적 장치들 사이에 차이를 낳는 것, 기술과학의 광선을 회절시켜 우리의 생명과 몸의 기록 필름 위에 보다 유망한 간섭패턴을 얻는 것이다. 회절은 세계 속에 차이를 낳으려는 노력을 표현하기에 적절한 광학적 은유이다. - P63

린 랜돌프의 ... 그림은 다른 곳으로 치환된 동일한 것의 반사가 아닌 간섭패턴을 그리고 있다. 랜돌프는 페미니즘 해석에서나 기술과학 해석에서나 내가 속한 문화의 편협한 천년 말(the end of the millennium)을 전의로 표현할 수 있도록 강력한 비유(figure, 형상!)를 제공해주었다. 다시 말하자면 랜돌프의 여성은 천년 말이 빗나갈 수 있도록 만드는 방법을 고려하기 위한 장치이다. 목적론에 탐닉했던 사람들이 막판에 그 이상 더 무엇을 요구할 수 있겟는가? - P64

회절 패턴은 상호작용, 간섭, 강화, 차이의 역사를 기록한다. 회절은 원본들에 관한 것이 아니라 이질적 역사에 관한 것이다. 반사들과 달리, 회절들은 동일한 것을 다소 왜곡된 형태로 다른 곳으로 추방하지 않으며, 따라서 형이상학의 산업들을 발생시키지도 않는다. 오히려 회절은 이 고통스러운 기독교 천년 말에 또 다른 종류의 비판적인 의식을 표현하는 은유일 수 있다. 동일함이라는 성스러운 이미지를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차이를 만드는 데 몰두하는 은유일 수 있다. 회절은, 보다 정설적인 표명 뿐 아니라 신성하고 세속적인 기술과학적 설화들 속에서, 기독교 서사와 플라톤주의의 광학이 비스듬히 일그러진 것이다. 회절은 여러 중요한 의미들을 만드는 서술적·그래픽·심리학적·정신적·정치적 기술이다. - P503

<기만당한 여자들: 경계선 밖의 여성들에 대한 표현> 연작을 위해 그린 이 그림에 관해 랜돌프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모든 여성의 삶 속에서 강력한 남성 비유에 관한 차단된 기억은, 변화가 일어나는 장소를 나타낸다. 연륜 및 정신적 변형에 따라 발생하는 추이들, 한 몸에 통합되어 있는 여러 자기들selves이, 두 개의 머리, 여분의 손가락, 중간 지대에 있는 형이상학적 공간 등등으로 표현된 이 중앙에 있는 인물로 구체화되어 있다. 회절은 미지의 세계라는 심연 앞에 놓여 있으며, 미래의 가장자리에 있는 한 장소에서 발생한다. 은하수에 있는 그 물질의 구조적 패턴은 목련 꽃에서도 반복될 수 있으나, 이런 생산은 아마도 텍사스 출신의 화가들에게는 특이한 시각으로 보일지도 모른다. 나는 문제가 되는 몸들을 창조하려고 노력하는 중이다. - P503

동시대의 여성들은 여성들의 현실을 SF세계 속에 놓음으로써, 다시 말하자면 간접 패턴으로 구성된 장소에 놓음으로써, 동일함이라는 성스러운 이미지와 다른 어떤 것으로 등장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다시 말해 부적절하고, 기만적이며, 적합하지 않은, 마술적인 어떤 것, 즉 차이를 만들 수 있는 어떤 것으로 등장할 수 있을지 모른다. 나는 우리가 이것(즉, 차이를 만들 수 있는 어떤 것 - 역주), 즉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이것에 대해 능동적일 필요가 있다고 믿는다. ... 현실적이며(자연적이지 않으며), 삶의 불결함으로 인해 더럽혀진 이것에 대해 능동적일 필요가 있다고 믿는다(1993: 9). - P503

만약 당신이 쫓고 있는 것이 또 다른 종류의 세계와 세속적인 것이라면, 당신의 눈에는 질병과 치료가 실제로 동일한 것처럼 보일 것이다. 반영성보다는 여러 개의 차이 패턴을 생산하는 회절이 여기에서 요구되는 작업을 표현하는 데 더 유용ㅎ나 은유일지 모른다. - P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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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장 2022-10-17 18:1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나중에 한가해지시면 글 많이 올려주세욤

에로이카 2022-10-18 06:23   좋아요 0 | URL
네, 뚱이님. 감사합니다~
 
녹색 계급의 출현 - 스스로를 의식하고 자랑스러워하는
브뤼노 라투르.니콜라이 슐츠 지음, 이규현 옮김, 김지윤 외 해설 / 이음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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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투르라는 물의 온도가 조금은 올라간 것 같다. 현재의 기후위기 안에서 형성 중인 녹색계급에 대한 수행적 글쓰기. 녹색계급은 어떻게 해야 긍지를 가진 변혁주체가 될 수 있을까에 대한 브레인스토밍. 라투르 글 치고는 읽기 쉬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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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 계급의 출현 - 스스로를 의식하고 자랑스러워하는
브뤼노 라투르.니콜라이 슐츠 지음, 이규현 옮김, 김지윤 외 해설 / 이음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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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라투르 책 중에서 가장 수월하게 읽은 책이다. 그 이유는 이 책이 라투르의 단독 저작이 아니라 니콜라이 슐츠와의 공저이기 때문일 수도, 비교적 친숙한 주제인 계급을 다루기 때문일 수도, 또는 번역이 무난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라투르는 별로 다시 들어가고 싶지 않은 물이었는데, 신기후체제 하의 새로운 계급 형성의 문제를 다룬다는 말에 도저히 외면하기 힘들었다.

 

1. 계급투쟁: 기술적이면서도 수행적인 개념

엄밀한 분석과 주장이라기보다는 단상들의 메모이다. 저자들은 계급투쟁 개념의 기술적(descriptive)이면서 수행적인(performative) 성격에 주목한다(16). 맑스와 엥겔스의 공산당선언은 이 성격을 잘 보여준다. 1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는 부르주아의 탄생, 성장, 국가권력의 장악, 자본주의의 세계화, 상업공황, 프롤레타리아의 탄생과 성장에 이르는 과거와 현재의 훌륭한 역사적 기술이다. 2프롤레타리아와 공산주의자는 처음에는 기술로 시작되지만 역사적 경향을 식별해내서 프롤레타리아의 투쟁을 공산주의자들의 목적이라는 관점에서 재배열하면서 현재부터 미래에 이르는 투쟁의 청사진을 제시한다. 2장과 마지막 4장은 일종의 투쟁의 시나리오, 그것에 맞춰 투쟁을 지도하고 수행(perform)해야 하는 대본이다. 공산당 선언의 이러한 수행적 성격에 주목했던 하트와 네그리는 맑스가 그랬듯 자신들의 제국도 도래할 계급에 대해서 쓰는 것이라고 이야기한 바 있다.


그렇다면 이 녹색 계급의 출현공산당 선언에 필적할 만큼 훌륭한 분석적이면서도 수행적인 글일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아니다. 그러나 흥미로운 논의들이 있고, 다음 이야기가 더 궁금하기도 하다. 사실 공산당 선언도 교리문답 같은 엥겔스의 공산주의의 원리라는 견실한 초고가 있었기 때문에 명확히 쓰여질 수 있었다. 짧은 단편 영화라기보다는 영화 예고편 광고 같다. 내용을 살펴보자.

 

2. 전통적인 계급투쟁과의 연속성과 불연속성

저자들은 녹색계급이 존재하기 원한다면 적어도 맑스주의만큼은 자기 역사의 방향을 규정해야 한다고 말하면서, 녹색계급도 노동자계급에 대한 맑스주의적 시나리오처럼 자기 존재의 물질적 조건의 생산과 재생산에 대해 규정해야 한다고 말한다(22-23). 그러나 바로 여기에 두 개의 단서를 덧붙인다. 하나는 물질에 대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생산에 대한 것이다. 첫째, 이제 물질은 맑스가 분석했던 인간의 재생산과 관련된 의식주에 국한되지 않고, 인간에게 직접적으로 유용하지 않은 비인간 존재들의 재생산으로까지 확장되어야 한다. 곧 분석대상으로서 하부구조의 경계가 확장되어야 한다. 둘째, 오늘날 생산체계가 파괴체계와 같은 말이 되어버린 현실에서 지구의 자연을 생산을 위해 추출해야 하는 자원이 아니라, 거주가능 조건으로 사유해야 한다(26). 곧 생산에 대한 배타적 관심에서 벗어나야 한다. 이러한 시각은 노동, 토지, 화폐는 원래 상품이 아니었다는 칼 폴라니의 논의에 접목된다. 사실 맑스의 정치경제학 비판의 생태적 한계를 지적하면서 폴라니의 논의를 끌어들이는 것은 많은 생태사회주의자들 제임스 오코너, 미카엘 뢰비 등 이 오래 전부터 하던 이야기라 새로울 것은 없다.

 

그나마 새로운 것이 있다면, 생산이 거주가능조건의 파괴와 동일시되는 임박한 파국의 확실성에도 불구하고 기후변화를 멈출 수 있는 동원은 지지부진하다는 사실에 대한 솔직한 인정과 이를 극복할 필요성의 제기이다. 맑스주의에 대해 적대적이면서 사회운동에 대해서도 별 관심이 없었던 라투르가 이런 말을 하다니, 그 차가웠던 물이 조금은 미지근하게 느껴진다. 생산 체계(system of production)는 생성 체계(system of engendering)에 둘러싸여 있다는 인식론적 지도를 그리면서, 다른 계급들이 생산관계의 영역을 확장하고자 한다면, 녹색계급은 이를 제한하고자 하며, 이제 계급 갈등이 생산체계 내부(1)뿐만 아니라 생산체계와 생성체계의 인터페이스(2)에서도 벌어지고 있다고 한다(34-35). 이 제2열의 투쟁에서 녹색계급은 지구 차원의 거주가능성 문제를 중심으로 옛 계급들과 충돌하면서 자신의 긍지를 끌어낸다(38-39). 이 서술은 분명 기술적이기보다는 수행적이다. 곧 그러기를 바라고, 저자들이 그렇게 되는 데에 일조하겠다는 바램과 다짐이 투영된 말이다.

 

이 형성 중인 녹색계급은 행위 지평을 생산의 외부로, 또 한 나라의 외부로 넓혀나가야 한다. 이 녹색계급이 대립하는 근대화와 세계화를 추구하는 계급들은 과거로 회귀하려 하는 것이므로 반동적이고, 거주가능조건을 유지하고자 하는 녹색계급은 진보적이며 해방적이다(43). 여기에서 저자들은 해방의 의미를 변화시킨다. 이들의 해방은 무언가로부터 자유로워진다는 해방이 아니라, 비로소 무언가에 의존할 수 있게 된다는 의미의 해방이다. 자유라는 이상은 발전(development)의 끝에 놓인 채 전진할수록 더 물러나는 잡히지 않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감싸고 있는 것(envelopment), 곧 거주가능조건에 편안히 몸을 맡긴다는 것을 뜻하게 된다. 전자가 생산 안에서의 사고라면, 후자는 생성 안에서의 사고라고도 할 수 있겠다. 생성 안에서 우리는 의존하면 의존할수록 더 좋다. 인클로저 운동이 인간이 자연을 소유하고자 울타리를 친 것이었다면, 이제 이 해방하는 속박은 자연이 인간을 소유하고 있음을 깨닫는 것이다(50-52). 이제 진보는 시간의 화살을 따라 하나의 방향으로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생산체계 둘레를 감싸고 있는 생성체계로 사방팔방으로 분산하는 것이 된다(60).

 

그렇다면 누가 녹색계급을 구성하는가? 7장에서 잠재적 구성원들이 제시된다. 프롤레타리아, 페미니즘, 탈식민주의, 토착 민족, 미래 세대, 지식인, 종교가 녹색계급을 구성 중이지만, 정작 그 계급은 자신이 잠재적으로 다수파임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곧 자신과 자신의 미래를 확신하는 긍지가 없다(73). 상황이 급박함에도 불구하고 행동하지 못하고 있다. 라투르와 슐츠는 이 상황을 돌파하고 싶어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주축 계급으로서의 긍지를 얻을 수 있을까? 저자들은 그람시의 진지전개념을 빌어온다. 이러한 차용은 두 가지 맥락에서 이뤄지는데, 하나는 미래의 기동전을 준비하기 위한 사전작업으로서의 의미이고, 다른 하나는 자신들의 객관적이익 심지어 그것이 생태적 이익이라고 해도 -에 매달리지 않고, 매번 문화 전체를 휘저어 섞어야 다른 계급들을 설득시켜서 동맹을 맺을 수 있는 헤게모니 계급으로서 등장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이 점에서는 사회주의보다는 자유주의를 모방해야 한다고 저자들은 주장한다(81-82).

 

녹색계급이 쟁취하고자 하는 권력은 어떤 권력이며 무엇을 할 것인가? 이것이 9장의 제목으로 들어가 있는 질문인데, 여기에 대한 충실한 답을 제시하고 있지는 못하다. 녹색 계급의 주제는 일국의 영토에 제한된 것이 아니고 지구(global? earth?)정치에 속하기 때문에 권력 획득이 쉽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가장치를 차지해야 하며(97), 풀뿌리부터 건설되는 정당이 필요하다(103). 그래야 투표할 수 있다. 근대화와 글로벌화의 국가가 아니라 생태화를 추구하는 국가를 만들어야 한다.

 

그런데 이들이 말하는 녹색계급의 정당은 아마도 그람시가 이야기하는 현대의 군주로서 지도를 수행하는 당은 아닌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명확하지는 않지만, 칼 슈미트의 논의를 연상시키면서 동지와 적을 새롭게 구분하며, 기존의 계급제휴를 붕괴시키고, 녹색계급의 계급의식을 고취하는 데에도 뭔가 역할을 하기는 바라는 것 같다(111-112). 또 언젠가 올지 모르는 뜻밖의 기회를 포착하기 위한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는 말도 맞는 말이다(113). 그런데 그 당의 이미지, 또는 짙은 안개 속에서마침내 모습을 드러낼 녹색계급의 모습이 알록달록한 옷을 입은 삐에로(112, 97)라면? 맥이 빠지면서 헛웃음이 나온다. 물론 반전이 있을 수도 있지. 그 삐에로가 허당이 아니라, 호아킨 피닉스가 연기한 조커로 변신하여 모든 기후악당들을 심판하는 시나리오가 가능도 할 수 있겠다만... 글쎄... 이 맥빠짐은 무엇일까? 내가 그저 우리가 잠재적 다수임을 확신하지 못한 채 한탄과 불평만을 일삼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104).

 

3. 부록

이상이 100쪽 남짓의 분량으로 쓰여진 76개의 메모를 정리하고, 아주 약간의 느낌을 덧붙인 것이다. 출판사가 이 분량만으로는 책을 내서 가격을 매기기가 힘들다고 생각했는지, 역자 후기를 포함하여 다섯 편의 짧은 글들이 더 실렸다. 이 중에서는 미셸 세르의 자연계약론을 소개한 역자 후기와 슐츠의 계급이론을 소개한 김환석의 글이 볼 만하다.

 

4. 단상과 의문

라투르 책 치고 쉬워서 좋았지만, 그리 대단한 내용이 있는 것 같지는 않다. 약간의 단상과 의문을 글로 적어 남긴다. 라투르와 슐츠가 이 글을 쓴 이유는 녹색계급에게 우리가 함께 싸우면 기후변화를 막아낼 수 있다는 긍지, 곧 집합적 효능감을 불어넣기 위해서일 것이다. 이 글이 그 목적을 얼마나 잘 수행했는지와는 별도로 나는 이 의도가 좋다. 그토록 맑스주의를 싫어했던 라투르가 계급투쟁을 선동하다니. 장하십니다! 좋습니다! 나도 힘을 합해 싸울게요!



 

그런데 이것이 단지 바이럴 효과를 노리는 일종의 카피캣 마케팅이 아니려면, 몇 가지 지점이 좀더 명확해져야 할 것 같다. 먼저 저자들은 계급투쟁을 생산체계 내부의 기존 계급투쟁과 생산체계와 생성체계간의 투쟁으로 분류하는데, 두 투쟁은 어떻게 연결되는가? 여기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다. 또 사회적 계급과 지구사회적 계급에 대한 슐츠의 구분(140) 역시 양자를 추상적으로 범주화할 뿐이다. 물론 슐츠의 글을 직접 다 읽은 것이 아니기 때문에 실제로 그가 양자의 관계를 설정하고 있는데 여기에 소개되지 않은 것일 수도 있다


둘째, (난 이것이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되는데) 라투르의 기존 저작들과 이 프로젝트의 정합성과 갈등의 지점이 명확해져야 할 것 같다. 라투르는 네트워크는 으로 이뤄진 것인데, 맑스주의자들은 추상을 통해 이 선들의 네트워크를 으로 인식하여 세계를 절대적 총체성의 관점에서 이해하였고, 이 면을 한 번에 뒤집으려던 맑스주의의 프로젝트는 총체적으로 실패했다고 조롱한 바 있다(우리는 결코 근대인인 적이 없다, 294-311). 그런데 그것이 생성체계가 밖을 감싸고 있는 생산체계의 이미지든, 슐츠가 표로 정리한 두 계급의 구별이든 추상의 산물 아닌가? 또 이 수행적인 글쓰기 어디에 라투르가 고수하던 행위자를 따라가라는 지극히 기술적인 글쓰기의 원칙이 적용되고 있는가? 전혀 아니다. 내가 라투르를 잘 모르기 때문에 오해를 하고, 그 오해의 뇌피셜이 자가발전한 꼬투리 잡기일까


마지막으로, 저자들은 녹색계급은 해방을 지향하는 좌파이지만, 그저 반자본주의투쟁의 연장선 위에 있다고 단언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데(21),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라투르가 자본주의에 대해 말하는 것도 듣는 것도 싫어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길게 왈가왈부하고 싶지는 않다. 그런데 개인의 호오를 떠나서 자본주의에 대한 녹색계급의 입장은 무엇인가? 녹색계급의 계급의식을 고취하여 계급투쟁을 수행할 정당은 자본주의에 대해서 뭐라고 말할 것인가? 나는 라투르가 자본주의에 대해 말해봤자 남는 것이 없기 때문에 언급 자체를 회피한다는 인상을 받는다. 자본주의에 대해서 말하지 않는 좌파가 가능한가? 내가 구닥다리라서 이런 말을 하는가? 자신이 녹색계급의 일원이 되기를 희망한다면 충분히 할 수 있는 질문이며, 이런 팜플렛을 쓴 저자들이 회피해서는 안 되는 질문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이 녹색 계급의 출현공산당 선언에 비교될 만한 대단한 글은 아니다. //코 아니다! 이것이 무언가 도래할 것에 대한 글이라면, 그 도래할 것은 새로운 계급투쟁을 수행하는 녹색 계급(ecological class) 자체라기보다는, 이 계급에 대한 새로운 연구일 것이다. 사이토 고헤이의 지속 불가능 자본주의가 과하다 싶은 맑스에 대한 맹목적 충성 때문에 지루했다면, 반대로 이 글은 맑스의 계급 이론에 대한 선택적 단순화 때문에, 그리고 라투르가 이전에 맑스주의에 대해 써댄 말들 때문에 그리 후한 평가를 내리기는 힘들다. 짧고 쉽다는 것은 장점이지만, 답을 주기보다는 더 많은 물음표들을 제기하게 만든 책이다. 물론 그것도 괜찮은 일이다. 내가 너무 박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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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 계급의 출현 - 스스로를 의식하고 자랑스러워하는
브뤼노 라투르.니콜라이 슐츠 지음, 이규현 옮김, 김지윤 외 해설 / 이음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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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 자연에 관해 말한다는 것은 평화협정에 서명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모든 대륙과 온갖 층위에서 일상생활의 모든 영역에 많은 갈등이 실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다. 자연은 통합을 고취하기는커녕 분열을 조장한다.

4. ... 기후와 에너지 그리고 생물다양성에 대한 관심은 도처에서 이야기되고 있다. 하지만 지난 세기에 자유주의와 사회주의가 이끈 변화가 그랬던 것과 달리, 이런 이슈들을 둘러싼 갈등들은 아무튼 지금까지는 대중의 결집, 대중봉기라는 형태를 띠지 않았다. 이 점에서 생태주의는 어디에나 있으면서도 어디에도 없다. ... - P12

4. ... 생태운동이 더 견실해지고 더 자율적이게 되려면, 그리하여 과거에 못지 않은 역사적 도약으로 나타나려면 이 모두가 생태 운동을 모든 갈등을 이해할 수 있는 통일된 행동으로 모아냄으로써 자신의 기획을 인정하고 파악하고 이해하고 효과적으로 재현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우선 생태주의가 분열을 내포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다음으로 생태주의가 낳은 새로운 유형의 갈등들의 지도를 설득력 있게 그려내야 한다. 끝으로 단체행동을 위한 공동의 지평을 규정해야 한다. - P13

6.
"계급" ... 개념의 이점은 정치 역학을 사회의 갈등과 경험의 형성 그리고 집단의 지평이라는 관점에서 제시하도록 함으로써 사회적·물질적인 세계의 구조를 명확하게 해주는 것이었다. 역사의 흐름 속에서 계급투쟁의 개념의 역할은 분명코 기술적이면서 수행적이었다. 이 개념이 사회 현실을 묘사하는데 사람들이 자신의 위치를 정할 수 있게 자처하더라도 계급투쟁의 개념은 결코 사회를 변화시키려는 시도와 분리될 수 없었다. 그러므로 "계급"에 관해 말하는 것은 언제나 전투대형을 갖추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녹색계급"에 관해 말하기는 불가피하게 행동을 새롭게 기술하는 것이면서 동시에 우리가 "녹색"이라 부르는, 형성 중인 이 계급을 위한 분류(classement) 작업은 필연적으로 수행적이다. 이 용어가 많은 혼동을 초래한다 해도 다시 사용하는 것은 이 때문에 유용하다. - P15

7.
"계급투쟁"의 개념을 다시 사용하는 것이 그토록 어려운 이유는 그것이 생태학적 문제로 말미암아 분류투쟁으로 변했기 때문이다. ... 생태학적 문제와 관련해서는 아군과 적군이 분명하게 구별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화가 난다. 따라서 녹색계급을 출현시키려면 이와 같은 분류를 둘러싼 투쟁을 받아들이고 전통적인 계급갈등을 때로는 횡단하거나, 반대로 그것과 합류하는 구별의 기준을 찾아낼 필요가 있다. - P16

8.
생태학이 더 자율적이려면 계급이라는 용어에 새로운 의미가 부여되어야 한다. 그런데 현재 녹색계급은 지난 두 세기의 투쟁들과 관계를 설정하지 못할까봐 두려워한다. ... 그렇지만 모든 녹색 계급이 관계의 경제화에 저항하는 사회적 투쟁들을 역사적으로 이어받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녹색계급은 생산의 개념에 이의를 제기한다. 그렇기 때문에 사회를 희생시켜 경제를 자율화하는 것에 대한 전반적인 거부를 증폭시킨다고 할 수 있다. 확실히 이 점에서 녹색 계급은 한 치의 어긋남도 없는 좌파이다. - P20

9.
그렇지만 생산의 개념과 이상에 여전히 깊이 연계된 "계급투쟁"의 전통에 보조를 맞추어야 할 때에는 이야기가 달라진다. 새로운 상황을 기존의 틀안에 밀어넣는 것은 언제나 유혹적이지만 녹색계급이 그저 "반자본주의" 투쟁의 연장선 위에 있다고 서둘러 단언하지 말기로 하자. 생태주의가 이러한 조건반사적인 단언으로 자신의 가치들을 제한하지 않은 것은 옳았다. 그러므로 이 논쟁을 종결짓고 왜 이 점에서는 필연적으로 연속성이 없는가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 P20

10. ...
마르크스는 여전히 이 분야에 뛰어들기 위한 길잡이이다. 역사적으로 매우 뚜렷하게 구획된 어떤 시기 동안 "계급이론"은 사람들에게 무엇이 그들의 삶을 지탱하는지, 그들이 사회적 풍경에서 어디에 위치하며, 누구와 싸움을 벌이는지에 대해 분명한 방향을 제시하는 나침반 역할을 했다. ... 자유주의처럼 마르크스주의도 역사에 의미를 부여했다. 녹색계급 또한 존재하고자 한다면 적어도 마르크스주의만큼은 해야 하고 특히 역사, 자기 역사의 방향을 규정해야 한다. - P21

11.
계급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적 정의는 물질적 조건 - 사회적 조건은 물질적 조건의 표현일 뿐이다 - 을 이해하는 데 기여했다. 마르크스의 나침반이 유용했다면 이는 사회가 지속되는 데 필요한 과정을 비교적 분명하게 묘사하는 데 중점을 두었기 때문이다. 마르크스주의는 먼저 사회를 재생산하는 메커니즘을 묘사하며, 이어서 이 재생산 과정에서 행위자들이 대립적으로 위치하는 방식을 평가한다. 계급에 입각한 분석이 유물론적이라는 것은 바로 이런 의미에서다. 그러므로 녹색계급이 이 전통을 이어받고자 한다면 녹색계급은 마르크스주의의 전통이 주는 교훈을 받아들여서 자기 존재의 물질적 조건과 관련하여 자기규정을 시도해야 한다. 새로운 계급투쟁은 옛 계급투쟁만큼 유물론적인 접근을 토대로 전개되어야 한다. 연속성은 바로 이 본질적인 점에서 존재한다. - P22

12.
그러나 정말이지 그것은 이제 동일한 물질성이 아니다! 여기에서 사회주의의 전통과 오늘날 떠오르게 하는 것이 문제인 관심의 대상 사이에 상대적 불연속성이 생겨난다. ... 마르크스에게는 인간의 생존과 생식이 모든 사회와 사회사의 기본 원동력이었다. 그래서 인간 사회와 사회사에 대한 모든 분석의 첫 단계는 필연적으로 인간을 태어나게 하는 과정과, 인간 사회 및 집단에 존속을 허용하는 물질적 조건 - 인간이 먹는 것, 마시는 물, 입는 옷, 거주하는 집 등 -을 설명하는 것이었다. 맑스가 사회사의 토대로 간주한 것은 바로 이 물질적 재생산 조건의 생산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문제가 되는 것은 바로 사람들의 재생산이었다. 그렇기는 하지만 오늘날 우리는 전혀 다른 역사의 지형 안에 놓여 있다. 이제 우리는 동일한 역사를 좇지 않는다. 생산은 이제 우리의 유일한 지평을 규정하지 않는다. 그리고 특히 우리가 대면하고 있는 것은 이제 동일한 물질이 아니다. - P23

13. ...
사회주의의 나침반은 거의 배타적으로 생산과 재생산에 입각해서만 사유하기 때문에, 오늘날 계급의 풍경이 형태를 달리하는 방식을 설명할 수 없다. 기계 문명이 생겨날 때 그랬듯이, 오늘날 신기후체제는 우리에게 사회가 재생되거나 존속하는 과정을 다시 그리도록 강제한다. 또다시 "견고성과 영속성을 지녔던 모든 것이 연기처럼 사라진다." 19세기에 그랬듯이 현재 우리는 사회의 하부구조가 엄청나게 변화하는 것을 목격하고 있다. ... 녹색 계급에 입각한 분석은 여전히 유물론적이지만, 인간만의 생산과 재생산 이외의 다른 현상 쪽으로 눈을 돌려야 한다. - P25

14. 제2차 세계대전 직후에 이 생산체계가 몹시 거세게 가속화되어 지구와 기후의 체계를 불안정하게 했다. ... 생산체계는 파괴 체계와 동의어가 되었다. 인간이 아닌 것의 재생산에도 집중될 맑스주의적 분석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오늘날 유물론적이라는 것은 인간에게 유리한 물질적 조건의 재생산 이외에도 지구라는 행성의 거주가능 조건을 고려하는 것이다. 후자의 조건은 전통적인 정당의 정치경제학이 자원의 이름으로 단순화하려고 애쓴 것뿐만 아니라 지구의 새로운 물질적 현실을 고려하도록 강제한다. ... 지구의 거주가능조건을 유지하는 방향으로 돌아설 수 있는, 달리 말해서 생산에 대한 이 배타적 관심에 등을 돌려 거주가능 조건의 탐색이라는 더 큰 틀로 나아갈 수 있는 경제학은 존재하는가? 이것이 새로운 녹색계급의 관건 전체이다. 이 점에서, 다들 이해하다시피, 전통적인 "계급투쟁"과의 불연속성이 크게 돋보인다. - P26

15. ...
생산만을 지향하는 이러한 관심에서 벗어나 경제화에 대한 (칼 폴라니의 표현을 빌리건대) 사회의 저항을 확대하는 것이 중요하다. 20세기의 몇몇 투쟁은 명백히 맑스주의의 전통에 의해 고취되었지만, 다른 많은 투쟁은 단순히 생산의 확대에 대한 거부를 명분으로, 그리고 생산이 나머지 사회생활의 틀 밖으로 벗어난다는 그 끔찍한 주장을 거슬러 수행되었다. ... Lucas Chancel이 말했듯이, "노예제의 폐지, 사회보장, 보통선거권, 무상교육은 엄밀하게 말하자면 물질 생산의 조직화 문제에 관해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들은 인간 사회가 경제화에 의해서만 규정될 수 없다는 대단히 중요한 표현이다. 따라서 맑스주의적 발상의 유물론이 갖는 몇몇 한계를 비판하는 것은 또한 경제화에 대한 다양한 투쟁의 전통을 갱신할 수 있게도 해준다. 그러므로 사실 결정적이지만, 이 미묘한 차이를 제외하면, 녹색 계급은 해방을 주장하는 좌파의 역사를 이어받아 확대한다고 주장할 수 있다. - P27

16.
현 상황을 요약하자면, 이제는 모두가 파국을 막기 윟나 결정적인 행동이 필요하다는 것을 이해했지만, 행동을 가능하게 해줄 중계점, 동기, 지침이 없는 상황이라고 말할 수 있다. ...
예전에는 이상이 정열을 끓어오르게 했고 상황의 이해가 동원을 충분히 가능하게 했다. 오늘날에는 파국의 확실성이 오히려 행동을 마비시키는 것 같다. 어쨌든 세계의 재현, 에너지의 용출, 가치의 수호 사이에 본능적인 동조는 없다. 반대로 모든 본능이 생산을 이해하는 옛 방식의 완전히 동일한 "되풀이" 쪽으로 향해 있다. 이러한 마비 상태를 진단하고 불안, 집단행동, 이상과 역사의 방향 사이에 새로운 동조 관계를 찾아내는 것이 녹색 계급의 의무이다. - P30

17.
물론 자유주의의 다양한 형태와 대다수 사회주의의 전통 사이에 수많은 알력이 있어 왔다. 하지만 생산량을 높이는 데에는 양쪽이 완전한 일치를 이루었다. ...
갑자기 생산의 증대, 발전의 개념 자체, 진보의 개념이 고쳐야 할 착오로 나타난다. 생산이 지구에 거주할 수 있는 조건의 파괴와 연결되면서 동원의 역량은 위기에 처한다. ...
오늘날 관심의 방향이 바뀌었지만 행동으로 이어질 수 있도록 해줄 새로운 장치는 아직 고안되지 않았다. 누구나 불안, 죄의식, 무력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 장치를 제공하는 것이 녹색계급의 역할이다. - P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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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인원, 사이보그, 그리고 여자 - 자연의 재발명 동문선 문예신서 199
다나 J. 해러웨이 지음, 민경숙 옮김 / 동문선 / 2002년 6월
평점 :
절판


0.

이 책의 9<상황적 지식들: 페미니즘에서의 과학의 문제와 부분적 시각의 이점>은 적어도 내 주변에서는 해러웨이의 글 중에서 가장 많이 이야기되던 글이다. 샌드라 하딩의 페미니즘과 과학(1986)에 대한 논평문으로 1987년에 처음 발표되었다고 하는데, 그 책을 읽지는 못 했지만, 하딩은 참 행복했을 것 같다. 자신의 책에 대해서 이렇게 멋진 논평문을 써주다니. 사실 이제 이 <상황적 지식들>은 하딩의 그 책보다 더 유명한 논문으로 남게 되었다. 이 논문의 존재는 3년 전쯤 알았고, 한국어 번역이 있다는 것은 1년 전쯤 알았는데, 다른 책들 때문에 독서 우선순위에서 밀렸었다. 원래 스트래선의 부분적 연결들을 읽기 시작했는데, 역자 서문에서 <상황적 지식들>이 중요하게 언급되어서 비로소 잡고 읽기 시작했다. 예상대로 번역은 후졌다. 잘 절판됐다. 에효~

 

대략의 내용은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해러웨이는 누가 정리해주는 것보다는 힘들어도 직접 읽는 것이 훨씬 좋다. 몇 가지 이유가 있다. 다른 사람이 정리한 글은 맥락과 뉘앙스를 놓치거나 제거한 경우가 많다. 해러웨이의 글을 읽고 한 번에 이해할 수는 없다. 처음에는 이렇게 깊은 줄도 넓은 줄도 모르고 몸을 담갔는데, 깊고 넓다. 라투르도 깊고 넓은데 그 물은 차갑고 냉소적이라 별로 다시 들어가고 싶지 않은데, 해러웨이라는 물은 따뜻하다. 그런데 그것이 마냥 편안한 느낌은 아니다. 낯선 개념들이 나를 새로운 지적 지평으로 이끈다. 물론 처음 들어가는 물이라 트러블이 따르는데, 그녀가 이전에 쓴 글들이나 인용된 글들까지 파도를 타다 보면 이전에 내게 트러블로 다가왔던 것들의 실마리가 보이는데, 이 과정에 나름 희열이 있다. 이전에 힘들었지만 트러블과 함께하기<사이보그 선언>을 읽었기 때문에 이 글을 더 잘 이해할 수 있고, 이 글을 읽고서야 그 때 읽었을 때 명확하지 않았던 의미들이 좀더 명확해진다. 푸코는 전혀 다르다. 말과 사물을 읽는다고 성의 역사를 더 잘 이해할 수는 없다. 오독과 뇌피셜일까? 그럴 수도 아닐 수도 있지. 불행하게도 주변에는 해러웨이에 대해 함께 이야기할 사람이 없으니, 나의 뇌피셜은 당분간 계속될 것이다. 힘들지만 스스로 직접 읽고 정리하기는 해러웨이를 그저 페미니스트 중 한 명, 포스트휴먼 논자 중 한 명으로 치부하는 이들은 할 수 없을 저자와 독자 사이의 특이한(singular) 부분적 연결을 가능하게 해줄 수도 있을 것이다. 혼자 읽는 독서에서 중요한 것은 모르는 것을 퉁치고 넘어가면서 어떤 입장을 정하는 것이 아니라, 모름을 질문으로 언어화해서 기록해두는 것이다. 이 방법은 해러웨이 독서에 특히 유용한 것 같다. 다음에 다른 글을 읽을 때 확실히 도움이 된다.

 

1. 나의 객관성과 너의 객관성이 다르다면?

글의 출발점과 도착점은 객관성이다. 과학과 페미니즘에 관한 기존 논쟁에 개입하면서, 해러웨이는 과학이라는 좋은 양을 편견(bias)이라는 나쁜 염소 떼로부터 분리시키는 것 이상을 원한다. 분리는 어쩌면 불가피하다. 논쟁은 그 분리를 명시한다. 인식 대상이 일관된 내적 법칙을 지닌다고 전제하는 낭만주의적·근대주의적 관점과 인식 주체와 대상의 관계는 항상 이미 권력관계였다는 주장을 펼침으로써 모든 객관성 주장은 허구라는 급진적 사회구성주의 간의 양극적 분리의 지형 안에서 논쟁이 펼쳐진다. 급진적 사회구성주의에 대해 비판적인 맑스주의도 좋은 양과 나쁜 염소로 분리된다. 인간(남성)의 자기 구성 과정에서 자연 지배에 대한 존재론적 이론을 전제하고, 이로 인해 임금을 받지 않는 여성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역사화하지 못하는 무능력을 보여주는 소위 인간주의적맑스주의로부터 관점, 체현, 헤게모니 비판, 매개에 대한 페미니스트 인식론의 정초를 도울 수 있는 유용한 도구들을 제공하는 맑스주의가 분리된다(334). [335쪽의 각주 9(영어판 미주 6)에 나온 참고문헌들의 논의를 해러웨이식으로 종합한 것인데, 맑스주의의 어떠한 자원들이 페미니스트 인식론에 이렇게 도움이 된다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본문에서 자세히 논해지지 않는다.]

 

해러웨이는 이러한 맑스주의적 자원들을 이용하여 급진적 구성주의를 비판하면서 객관성의 존재를 견지하는 하딩의 견해를 페미니스트 경험주의(feminist empiricism)라고 칭한다. 그녀는 하딩의 계승자 과학프로젝트의 핵심을 세 가지로 정리한다(335~336, 재번역).


1) 모든 지식 주장들과 인식주체에 대한 근본적인(radical) 역사적 우연성에 대한 설명, 2) 의미를 만들어내는 우리 자신의 '기호학적 기술' 인식하기 위한 비판적 실천, 그리고 3) 유한한 자유, 적당한 물질적 풍요, 고통 속에서도 겸손한 의미를 가질 있고, 제한된 것이라 해도 행복을 있는 지구 전체의 프로젝트에 친화적이면서 부분적으로라도 공유될 있는 '실재' 세계에 대한 충실한 설명을 위한 제대로 참여적 실천(commitment)."

이 세 가지 사항은 역설적이고 모순적이라 해도 필연적으로 동시에 추구되어야 한다. 페미니스트들은 그 어떤 초월을 약속하는 객관성도, 무제한적인 도구적 권력도, 세계를 재현할 수 있는 무오류의(innocent) 권력 이론도, 세계를 글로벌 시스템으로 바라보는 이론화도, 한 언어가 모든 번역과 전환을 위한 기준으로 강요되는 환원주의도 원하지 않는다. 그러나 페미니스트들에게는 지구 전체에 걸쳐 있는 연결들의 네트워크(에 대한 이론화)가 필요하다. 페미니스트들이 원치 않는다고 말한 것들은 바로 우리가 알고 있는 객관성의 속성이자 그것의 부정적 발현태이다. 해러웨이는 덧붙인다. 불멸성(immortality)과 전능성(omnipotence)은 페미니스트의 목표가 아니라고. 이것들은 신의 속성이고, 따라서 그러한 식으로 누구에게나 동일하게 보이는 객관성이란 신 흉내(God trick)”일 뿐이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사이보그 선언>의 마지막 문장-“나는 여신보다는 사이보그가 되겠다”-을 떠올리며 스스로 기특해 했다. <사이보그 선언>은 이 책에는 8장에 실려 있다.

 

2. 비전의 체현성과 이동가능성, 상황적 지식, 그리고 부분적 연결

기존의 객관성 개념은 “그 어디에도 없는 곳에서 모든 것을 볼 수 있는 신 흉내”(the god-trick of seeing everything from nowhere, 339)로서 인식대상에 대한 정복자의 시선으로 모든 것을 재현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자신의 시각이 체현된(embodied) 몸은 재현되지 않게 하는, 따라서 그것이 백인 남성의 시선이라는 점을 숨기는 권력이다. 모든 것을 보려고 하면서, 자신은 보이지 않게 만드는 권력이다. 곧 관음증의 권력이다. 이에 대항하는 페미니스트의 객관성은 체현된 객관성, 상황적 지식들(situated knowledges)”이다. 우리의 눈은 몸의 일부이며, 사람들의 몸이 자리매김된 상황은 다 다르다. 사람들마다 보는 것이 다를 수 있고, 자신이 본 것에 대해서 설명할 수 있다. 그것이 꼭 사람의 눈이 아니라 하더라도 시선이 시작되는 장소와 상황이 없을 수는 없다. 그래서 해러웨이는 이렇게 주장한다. “오직 부분적인 관점만이 객관적인 비전(vision, 시야, 시력, 전망)을 약속할 수 있다.” 자신의 부분성을 부정하는 객관성 주장, 곧 총체화하는 시선은 초월적인 신의 시각과 자신의 시각을 허위적으로 동일시하는 것에 불과할 뿐이다.

 

페미니스트라면 이를 흉내내려고 하면 안 된다. 그렇다고 상대주의의 유혹에 굴복해서도 안 된다. 여기에서 문제가 어려워진다. 해러웨이는 총체화와 상대주의 양자 모두에 대한 대안으로 연대(solidarity)”공유된 대화(shared conversations)”를 통한 연결들의 그물망의 가능성을 견지하는 부분적이면서, 위치를 특정할 수 있는, 비판적인 지식을 주장한다(343). 이것이 상황적 지식이며, 총체화하지 않지만 객관성을 포기하지 않는 해러웨이의 입장이다. 이를 위해서는 시선위치의 이동성과 열정적인 초연함(passionate detachment)”이 동시에 필요하다. 약자인 자신들의 죄없음을 강변하는 정체성/동일성의 정치는 그 자체로 그 시선의 옳음을 보장해주지 않는다(344). 따라서 과학적 인식 주체라면, 정체성/동일성의 위치에 고정되어서는 안 되고, 부분적 연결을 통해서 자신의 몸들이 알지 못하는 경험들과 대화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부분적 연결, 곧 가능한 객관성의 주체 위치이다(346). 페미니즘뿐만 아니라, 모든 사회운동 행위자들이 귀를 열고 들어야 하는 말이다.

 

이러한 페미니스트 객관성은 (최소한) 둘 이상의 시선을 지닌 복수의 주체들이 대화를 통해서 만들어 나가는 과학을 주장한다(350). 처한 장소의 상이성은 언어의 상이성으로 나타나고, 이러한 부분성은 번역되어야 하고, 번역은 부분적이고 해석이 수반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 대화는 다원주의라는 손쉬운 해결책의 유혹에 저항하면서도 권력의 작동 가능성을 민감하게 인식해야 한다. 이 페미니스트 객관성은 최종심급에서의 단순화[결정]”라는 알튀세르의 해법에 저항하면서 대화를 계속해야 한다. 따라서 단 하나의 페미니즘 입장이란 것은 없다. 이 대화의 과정과 목적은 그 자체로 세계에 대한 더 나은 설명이고, 바로 이것이 과학이다(351~352). 따라서 경합(가능성)은 과학의 속성 그 자체이다(352).

 

3. 남근로고스중심주의와 백인 자본주의 가부장제

이러한 시각에서 보면, 아리스토텔레스 이래의 남근로고스중심주의(phallogocentrism)는 하나의 진정한 세계의 현존에 대한 노스탤지어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그렇게 재현된 세계란 그것이 특정 장소의 그 어떤 몸에 붙어 있는 눈으로 본 것임을 숨기고 있기 때문이다. 곧 부분성을 부정한다. 페미니즘이 부분성을 추구한다면, 그것은 부분성 그 자체가 아니라, 곧 박해받는 동일한 정체성 집단인 여성의 입장의 옳음 때문이 아니라, 부분성을 전제해야만 상황적 지식이 가능해지는 연결 관계들과 예기치 못한 기회들이 비로소 제공될 수 있기 때문이다(352-353).

 

남근로고스중심주의를 내장한 백인 자본주의 가부장제는 인식 대상인 세계를 행위자가 아니라 사물로 대상화한다(355). 여성, 자연, 식민지는 일을 시키고 제값을 지불하지 않아도 되는 노예, 쓸모있는 것들을 빨대꽂아 바닥까지 단물 쪽쪽 빨아먹고 버려도 되는 원료로 동질화될 뿐이다. 이 남근로고스중심주의에 대한 해러웨이의 해법은 정반대다. 곧 세계를 사물이 아니라 행위자들로 인식하는 것이다. 세계는 발견을 기다리는 동질적 대상인 사물들이 아니라, ‘대화를 거쳐야만 알 수 있는 능동적 행위자들이다(356). 해러웨이의 이러한 통찰은 브뤼노 라투르, 제이슨 무어, 마리아 미즈 등의 통찰과 공유된 대화를 통해 저마다 부분적 연결을 형성하면서, 매우 강력한 객관성 주장으로 발전하게 된다. “주체의 죽음으로 시작된 로고스적 이성 비판이 21세기에 접어들면서 인간주의에 대한 강력한 비판으로 결실을 맺게 되었는데, 해러웨이의 이 글이 바로 그 흐름의 선구자적 역할을 수행한 것이다.

 

4. 세계는 사물이 아니라 행위자다.

내가 보는 세계의 대상들을 행위자로 인식한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해러웨이는 세계를 위트 있는 행위자(witty agent)”로 본다. 그러면서 미국 남서부 인디언들의 코요테 또는 트릭스터(Trickster) 이야기를 한다(357; 역자는 357쪽에는 역주까지 달아서 트릭스터가 무엇인지 설명을 해놓으면서도 360쪽에서는 이를 사기꾼으로 번역한다. 어이없음). 만약 해러웨이를 처음 보는 독자라면 이것이 무슨 소리인가 당황하기 마련이다. 트러블과 함께하기를 읽은 나님은 그것이 크리터(critters)의 형뻘임을 알게 된다. 다름아니라 이것이 해러웨이가 수동적 범주들을 능동화(activation)”하는 방식이다. 세계에 대한 정복은 포기하되, 계속해서 객관성을 추구하는 페미니즘의 실천에 수반되는 것이다.

 

내 몸의 일부인 눈으로 보는 것과 그/녀의 몸에 달린 눈으로 보는 것은 다를 수 있다. 대화를 시작하기 전부터 존재하는 옳은 시각, 객관성은 없다. 18세기말 낭만주의 시대 이래로 시인들의 시와 생물학자들이 연구하는 유기체의 몸은 그것이 생산또는 발생된다는 점에서 유사한 것으로 여겨졌다고 한다. 해러웨이는 이 관점을 포스트모던한 방식으로 계승한다. 곧 세계를 물질적·기호학적 행위자(material-semiotic actor)’, 능동적으로 의미를 생산해내는 존재로 인식한다(359). 문학생산의 장소에서 시가 창작의도나 저자로부터 독립된 행위자인 것처럼 지식/인식의 대상으로서의 몸은 물질적이면서, 동시에 기호를 통해 의미가 발생하는 마디들(nodes)이다. 객관성은 특정 상황에서 풀려남(dis-engagement)으로써 얻게 되는 불편부당한 시각이 아니라, 우리가 유한자로서 존재하는 이 세계 안에서 위험을 무릅써야만 얻을 수 있는 상호적이면서 동시에 불평등한 구조화에 관한 것이다(360). 몸과 의미 모두 특정 상황에 강하게 결박되어 있다. 페미니스트 체현(embodiment), 곧 부분성, 객관성, 그리고 상황적 지식에 대한 페미니스트의 이 희망은 이 매듭이 묶인 마디에서 몸들과 의미들의 대화를 개시하는 것이다.

 

5. 나가며

인식대상인 세계를 물질적·기호학적 행위자(material-semiotic actor)’로 본다는 것이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또 상대주의, 다원주의, 불가지론의 손쉬운 해결책에 투항하지 않고 객관성을 견지하는 것도 쉽지 않다. 그러나 그것이 학문하는 사람뿐만 아니라, 어떤 분야든 비판적 실천에 참여하는 이의 자세일 것이다. 해러웨이가 좋은 이유는 비판을 하면서도 따뜻하고, 그러면서도 활기와 설득력이 있다는 점이다. 무척 똑똑한 할머니와 신나게 대화하는 느낌이 계속 든다. 도나, 부디 오래 사세요!

 

말로만 들었던 <상황적 지식들>을 보고, 내용까지 정리하니 마음이 놓인다. 다음 여정은 스트래선의 부분적 연결들이다. 해러웨이 선언문을 읽고 하고 싶었던 것으로 적어 놓았던 것의 대략 70% 정도를 한 것 같다. 화이트헤드는 엄두를 못 낼 것 같고, 스트래선은 이제 읽어야지. 하지만 발등에 불이 떨어져서 당분간 해러웨이 가지치기는 못할 듯. , 지금 읽고 있는 르 귄 책은 마저 봐야지.


[2022. 9. 14. 추기]

우연의 일치이지만, 어제 리뷰 쓰고 새벽에 일어나 다른 책 좀 보다가, 읽다 만 르 귄의 『세상 끝에서 춤추다』163쪽을 펼쳤는데, 바로 코요테와 트릭스터 이야기가 나온다. ^^ 이럴 때 난 기분이 좋다. 부분적 연결을 제대로 파악하고 있고, 잘 더듬어 따라가고 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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