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와 충돌하지 않고 착륙하는 방법 - 신기후체제의 정치
브뤼노 라투르 지음, 박범순 옮김 / 이음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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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브뤼노 라투르 (1947~2022)

2022109일 라투르가 췌장암으로 영면하였다. 딱히 그를 따르지는 않았지만 올해가 가기 전 뭘 하면 좋을까 고민하다가 나름대로 추모의 마음을 담아 이 책의 리뷰를 쓰기로 했다. 지난번 녹색 계급의 출현리뷰 쓸 때만 해도 이 세상 사람였는데, 리뷰 올리고 열흘쯤 뒤에 돌아가실 줄 알았다면, 좀더 다정한 리뷰를 썼어야 했다. 사실 그 리뷰 쓰고 나서 뭔가 켕기는 게 남았는데, 그 점에 대해서도 좀더 풀어보고 싶었다. 각을 세우기보다는 귀를 기울이는 방식으로 말이다.

 

1. 1990년대: 새로운 역사의 시작

1990년대초 역사의 종말로 불리던 현실 사회주의의 몰락과 함께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었다. 라투르는 이 새로이 시작된 역사를 함께 구성하는 세 가지 현상을 지목한다. 그것은 1) 탈규제, 2) 불평등의 폭증, 3) 신기후체제 또는 (그에 대한 반동으로서) 기후변화 부정론이다(17, 29, 40, 42). 글로벌화의 부정적 결과쯤으로 이해할 수 있을 법한 이 현상들은 다른 모습으로 계속 반복되어 왔는데, 2010년대 중반 이후의 세 사건들 - 브렉시트, 트럼프 당선, 이주의 급증 - 도 이 세 현상의 복합적 현상태로 이해할 수 있다. 사실 이것들은 하나의 위험이다(29). 이 사건들은 근대화의 연장선상에서 글로벌화가 약속했던 보편성의 시효가 만료되었음을 보여준다. 이런 사례들은 2022년말의 뉴스에서도 계속 꼽을 수 있다. 코로나19바이러스 확산으로 인한 애플과 테슬라의 중국 공장 가동 중단, 영국의 난민 르완다 이송계획, 그리고 프랑스 노인의 쿠르드족 총격 살인사건 등도 신기후 체제역사의 한 장면들임이 분명하다. 이 장면들은 모두 지금 머무는 이곳에서 두 발 뻗고 편히 지낼 수 없음을 보여주는 사례들이다. 의존할 것이 마땅치 않다. 근대화를 통해 남의 땅을 빼앗던 이들이 딛고 서있는 땅도 이제 빼앗길 위기에 처한다(26). 라투르는 이를 발밑에서 땅이 꺼지는 느낌으로 표현한다(27-28). 이제 우리 모두 딛고 의지할 땅이 필요하다. 그런데 새 땅은 이제 없다.

 

2. Global, Local, 그리고 Terrestrial

라투르의 근대가 원래 의미대로의 역사적 시대 범주가 아니라 사회/자연의 이원론적 세계관을 뜻하듯, 글로벌과 로컬도 규모(scale)의 의미라기보다는 사람들이 그쪽을 향해가고자 하는 지향, 그들의 나침반 바늘이 가리키는 유인자(attractor), 직선적 벡터의 양 끝(그림 1, 49, 52~57)이다. 우리는 결코 근대인이었던 적이 없다(p. 302)에서 네트워크에 비하면 별 볼 일 없는 것들로 취급되었던 로컬과 글로벌이 이 책에서는 그림 1부터 6까지 모두에 출현하는 유인자들이다. 로컬과 글로벌은 근대인의 단선적인 시간의 화살이라는 가상적 선분의 두 점, 곧 유토피아이다. 근대인들(또는 그들의 시간의 화살)은 로컬을 등 뒤로 한 채, 근대화의 전선을 밀어붙이면서 글로벌 쪽을 향해 질주해왔다. 그런데 애초 글로벌화의 장밋빛 약속(글로벌화 플러스)은 지켜질 수 없었고, 대신 서두에서 살펴본 글로벌화의 부정적 경향들(글로벌화 마이너스)이 명약관화해지면서 이에 대한 반동으로서 로컬-마이너스로의 질주 역시 확산된다(54). 트럼프주의는 이 정반대로의 두 질주들을 통합하려 하면서 비현실로 이륙하려고 한다(60~61). 라투르는 트럼프주의가 지향하는 네 번째 유인자를 외계로 Out-of-This World”라고 칭하면서, 자신이 제안하는 세 번째 유인자를 그것의 대극에 자리매김한다. 라투르가 제안하는 the Terrestrial은 인간의 행동이 펼쳐지는 환경 또는 배경이 아니라, 그 자체로 하나의 새로운 정치적 행위자다(66).

 

역자는 the Terrestrial대지”, “대지인”(83)으로, terrestrials대지의 것들”(120, 128)로 번역한다. “글로벌”, “로컬은 음차해도 독자들의 이해에 무리가 없다고 판단한 반면, “테레스트리얼은 그렇지 않다고 생각했나 보다. 그 판단을 존중하지만, 덕분에 한국 독자들은 “-al”로 끝나는 라임의 맛을 볼 수는 없다. 그런데 the Terrestrial에는 인간, 비인간, 지구의 생명막(가이아), 곧 러브록적 행위자 모두가 들어가서 수중 존재는 배제하는 것 같은 그냥 "대지"라고 하기도 좀 그렇고, 사람만을 가라키는 "대지인"도 좀 그렇고... 어쨌든 좋은 번역어는 아닌 것 같다.

 

3. 정치생태학의 실패

앙드레 고르와 알랭 리피에츠. 내가 존경해마지 않는 프랑스의 정치생태학자들이다. 정치경제(political economy)에서 정치생태(political ecology)로의 전환은 현실 사회주의 몰락 이후 계몽된 맑스주의자들 중 일부가 걸었던 도정이다. 라투르는 이들이 환경 이슈들을 공공 생활의 핵심 의제로 만드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근대인들의 시간의 화살이라는 덫 자체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자침을 끌어당길 수 있는 새로운 유인자를 만들어 방향을 재설정하지 못했기 때문에 실패했다고 평가한다(73~77). 라투르가 the Terrestrial이라는 새로운 극을 제안하는 이유는 정치생태학이 나침반 바늘을 끌어당길 수 있는 새로운 유인자와 이로 인해 가능해질 새로운 좌표를 마련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단지 그 극을 지목했을 뿐, 이를 정치적 행위자로 엄밀하게 정의하지 못했으므로, 그 극으로의 실제적 이동에 실패했다(72, 85). 다른 세 극들이 토포스 및 땅과 토지가 없는 장소로서 유토피아에 불과하다면, the Terrestrial은 국경과 정체성을 초월하면서도 지구와 토지에 결부된 새로운 세계-만들기(worlding)이다(82). 따라서 이는 스케일의 전복과 시공간 경계의 파괴를 수반하며, 글로벌도 로컬도 아닌 대기적(atmospheric) 스케일에서 펼쳐진다(132).

 

4. 칼 폴라니 비판

라투르는 정치생태학이 결합시키고자 하였던 두 흐름 사회주의와 생태학 이 사회문제와 생태문제의 양자택일이라는 궁지에 빠졌기 때문에 실패했고, 이 결과 나침반의 바늘이 움직이지 못했다고 평가한다(86). 사회주의는 생태문제를 자신의 문제로 인식하지 못했고, 정치생태학은 사회주의의 배턴을 이어받지 못했다. 왜냐하면 이들은 자연의 역할을 서로 다르게 생각했기 때문이다(96). 지난 70년의 거대한 가속(the Great Acceleration) 시기 동안 자본주의는 변하였지만, 사회주의는 변하지 않았고, 생태주의는 주변적 위치에 머물렀다. 따라서 사회의 자기보호 운동은 폴라니의 기대만큼 활성화되지 않았고, 거대한 부동성(the great immobility)만을 보였을 뿐이다(85).

 

생태사회주의자들이 일종의 이론적 보완책으로 생각하였던 폴라니가 비판된다. 그는 시장자유주의를 과거의 일로 치부하였고, 시장화에 저항하는 사회의 능력을 과대평가했고, 계급 갈등이 아닌 강력한 저항의 힘을 예상하지 못하였다(85, 91). 폴라니에 대한 이러한 비판은 정치생태학을 매개로 하여 맑스주의 일반으로 확장된다. 이들은 자신의 주장만큼 충분히 유물론적이지도 않고, 리얼리스트도 아니다(91, 95).

 

5. 생산시스템의 사회적 계급 vs. 생성시스템의 지구사회적(geo-social) 계급

맑스와 폴라니, 그리고 그 후예들이 관심을 가졌던 것이 생산시스템, 사회계급, 사회문제였다면, 라투르는 생성시스템, 지구사회계급, 지구사회적 문제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양자의 차이는 18더욱 커지는 생산 시스템생성 시스템사이의 모순에서 주로 논의되는데, 녹색 계급의 출현에 실린 김환석의 라투르의 정치생태학과 슐츠의 새로운 계급이론의 표에 간략히 잘 정리되어 있기 때문에 여기에서 요약하지 않겠다. 이 책 16~17절에서는 양자가 기반하고 있는 자연관의 차이가 소개되는데, 약술하면 다음과 같다. 생산 시스템에 관심을 기울이는 전자가 자연을 갈릴레오적 객체들로 채워진 우주로서의 자연으로 보았다면, 생성 시스템에 관심을 기울이는 후자는 이를 러브록적 행위자들(Lovelocian agents)”로 이뤄진 과정으로서의 자연으로 파악한다(110, 115). 전자가 지구를 많은 행성 중의 하나로 멀리서 바라보는 관점이라면, 후자에게 지구는 거주지/서식지로서 그 안에서 다른 생명들이 함께 공동생산하는 것으로서 온전히 유일한(wholly singular) 것이다. 행위성(agencies)은 인간뿐만 아니라 비인간 존재들, 곧 전자의 관점이 객체들(objects), 심지어 자원들로 파악한 것들에게도 주어진다. 우리가 일부를 구성하는 이 지구가 바로 라투르의 제3, 정치적 행위자로서의 the Terrestrial인 것이다. 지구는 바로 나의/우리의 유일한 거주지이므로, 갈릴레오적 객체들에 대해 취할 수 있는 중립적 입장이나 거리두기는 불가능하다.

 

[이 책의 역자 박범순은 geo-social지리-사회적이라고 번역하였는데, 김환석은 이를 지구사회적이라고 번역한다. 김환석의 번역이 옳다. 김환석 선생의 글은 이번에 다시 보았는데, 그 글이 후기로 실려 있는 녹색 계급의 출현뿐만 아니라, 이 책 지구와 충돌하지 않고 착륙하는 방법에 대해서도 친절한 안내를 제공하기 때문에 이 책의 이해가 녹록치 않은 독자들에게도 권하고 싶다.]

 

6.

나는 2022년에 슐츠와 공저한 (아마도 그의 생전에 출판된 마지막 책인) 녹색 계급의 출현2017년에 나온 이 책보다 먼저 보았다. 그리고 우리는 결코 근대인이었던 적이 없다』(1991)를 무척 힘들게 읽었지만 다 이해하지 못했고, 그 전에 나온 그의 STS 저작들에는 사실 별 관심이 없으며, 신기후체제에 대한 그의 다른 책들도 읽어보지 못했다. 그런데 어떤 저자의 새로운 저작들을 읽으면 읽을수록 이전에 내가 잘못 이해했던 것들을 교정하게 되고 또 새로운 의문들이 생기는 경우, 나는 그에 대한 지적 흥미가 더 자라남을 느낀다. 지금 내가 그렇다.

 

이 책을 읽은 후에야 녹색 계급의 출현에서 녹색계급이 맑스주의처럼 자기 역사의 방향을 규정해야 한다는 말의 의미를 비로소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그 역사적 방향이란 것이 다름아닌 the Terrestrial였고, 이것은 글로벌과 로컬의 상상적 벡터 바깥에 놓인 지향점이었던 것이다. 그 책의 리뷰(https://blog.aladin.co.kr/eroica/13966311#Comment_13966311) 마지막 부분에서 나는 세 가지 질문거리를 썼는데, 그 중에서도 다음의 두 번째 질문에 대한 생각을 고쳐먹게 되었다.

 

이 수행적인 글쓰기 어디에 라투르가 고수하던 행위자를 따라가라는 지극히 기술적인 글쓰기의 원칙이 적용되고 있는가? 전혀 아니다.”

 

녹색 계급의 출현을 다시 보면 또 어떨지 모르겠는데, 지구와 충돌하지 않고 착륙하는 방법19(133)에서 라투르는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한 답으로 지구에 있는 것들에 대한 대안적 기술을 답으로 제시한다. 그러면서 그것의 사례로 프랑스 대혁명 직전에 국왕이 제출토록 한 진정서의 예를 들고 있다. 거기에는 여러 신분들의 불만과 고충들이 자세하게 기술되어 있다고 한다. 그리고 프랑스 대혁명이 다종다기한 불만들을 왕정이냐 공화정이냐의 양자택일의 문제로 총체화하기 전에 있었던 자신의 거주지에 대한 구체적 기술이 이 진정서들에 담겨 있었다고 한다. 그러면서 활성체들(animate beings)의 거주지의 세부적 사안들에 대해 구체적으로 기술해야 한다고 제안한다. 곧 그는 프랑스 대혁명 직전의 진정서들처럼 다시 구체적으로 현황을 점검하자고 제안한다.

 

대지 유인자(Terrestrial attractor)의 출현과 서술이 과연 정치적 행동에 의미와 방향을 부여할 수 있을지가 ... 의문이다. 세계 질서가 있으려면 현황을 점검해서 어느 정도 공유할 만한 세계가 먼저 있어야 한다”(138).

 

여기에서 라투르는 분명히 정치적 행동에 의미와 방향을 부여하려면, 그 이전에 우리가 어느 정도 공유할 만한 세계에 대한 기술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분명 라투르는 수행(performance) 이전의 기술(description)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따라서 여기 어디에 행위자를 따라가는충실한 기술이 있느냐고 물어봤던 나의 질문은 이 지구와 충돌하지 않고 착륙하는 방법을 읽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라투르는 분명히 “‘대지의 것들을 따라가는 것의 중요성을 말하고 있다(124). 그렇다고 이 질문이 마냥 라투르를 왜곡한 것이라고 무지한 내가 잘못했습니다하기도 힘든 것이 라투르는 기술(description)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그것의 역사적 선례를 들 뿐, 지구라는 공동 거주지에 거주하는 모든 행위자들과 활성체들(? 움직이는 존재들?) 또는 정치적 행위자로서의 the Terrestrial에 대해 세세히 기술하지 못하였다. 또 이제는 아예 할 기회가 없게 되었다. 지구와 충돌하지 않고 착륙하는 방법은 구체적인 기술을 제안하면서 끝났고, 녹색 계급의 출현정치적 행동에 의미와 방향을 부여하고자 하는 의도에서 쓰여졌지만, 정작 두 저작을 매개하는 데에 필수불가결한 요소, 곧 그가 강조했던 지구와 행위자들에 대한 구체적 기술은 누락된 것이다.

 

내가 다른 두 질문들에 담았던 생산 시스템의 사회계급과 생성 시스템의 지구사회계급 간의 관계나 자본주의의 문제에 대한 의문은 그 때보다는 다소 물렁물렁해져 뾰족한 끝이 닳았다. 이 문제들에 관해서는 언제고 여유를 갖고 라투르의 다른 글들과 그의 동료들의 저작들을 살펴보고 싶어졌다. 물이 좀 따뜻해진 걸까? 내 눈이 좀 밝아진 걸까?

 

라투르는 이 책을 자신의 가설이 틀렸음을 증명하고 더 나은 것을 찾을 수 있도록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 썼다는 말로 시작해서, 지금까지 내가 얘기했으니 이제부터 당신이 얘기할 차례라는 말로 끝맺는다(19, 149). 라투르도 대화를 하고자 했던 것일까? 단지 여전히 근대인의 귀를 가졌던 내가 못 알아들었기 때문에 배배꼬인 프랑스 지식인의 혼잣말로 간주한 것일까? 근데 이제 좀 듣고 싶어진 것 같은데...

 

Adieu, Bruno! Adieu, 2022!!

 

<2022. 12. 31. 추기>

남은 자투리들 몇 개: 

1) 미주 44, 54, 55에서 현재의 생태사회주의적 저작들을 비판하는 것 같은데, 좀 자세히 써주지... 무슨 혼잣말 같아서 더 궁금증을 유발한다. 

2) 라투르는 폴라니를 비판하지만 결국 생산 시스템이 생성 시스템 안에 파묻혀 있는(embedded) 것이라는 폴라니의 문제틀로 귀환하는 것 아닌가?

3) 미주 70, 74에서 언급되는 필립 데스콜라의 Beyond Nature and Culture나 라투르의 Politics of Nature, Facing Gaia, 그리고 스탕게르스의 책들도 좀 번역되어 나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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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원 2022-12-30 19:1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감사해요. 글을 읽다보니 온정이 느껴집니다. 라투르의 열정에 에로이카님의 정성까지...

에로이카 2022-12-31 12:09   좋아요 1 | URL
초원님, 온정이요? 잘 모르겠지만, 감사합니다. 한 해 잘 정리하시고,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

초원 2022-12-31 21:23   좋아요 1 | URL
라투르를 더 잘 이해할 수 있도록 안내해 주셔서 감사드렸어요. 동의하지 않는 주장에 대해서도 여러 경로로 논증하려는 모습이 타인을 인정하는 온정으로 느껴졌구요.
그런데 두 번째 자투리는 상호포섭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이해되기도 하던데요.

몇 시간이 지나면 또 다른 新年이 되는군요. 복 많이 받으시고, 소원 성취하시길 바래요.

에로이카 2023-01-01 18:50   좋아요 0 | URL
아.. 네.. ^^ 초원님, 따뜻한 댓글 감사드립니다. 라투르 너무 읽기 힘들어서 저는 이해하려는 노력이 많이 필요합니다. 리뷰에 그 흔적이 남았나 보네요... 상호포섭은 누군가의 개념인가요? 아니면 그냥 일상적인 용법에서의 의미인 건가요?

초원 2023-01-03 08:08   좋아요 1 | URL
홀리즘이었던 것 같은데요, 세르의 상호포섭 개념으로 자연과 사회를 파악하는 관점에 영향을 받은 학자들 중에 라투르도 있었던 것으로 ... 봉지 넣기 비유가 설득력이 있었어요. 그 막연한 기억에 더해서 에로이카님의 출중한 해설을 읽다보니 안다는 착각이 생겼네요.

에로이카 2023-01-03 10: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세르요.. 공부하고 싶은데 뭐부터 봐야할지 모르겠는 학자였어요. 세르의 상호포섭, 봉지넣기.. 기억해두겠습니다.. 고맙습니다~

2023-01-05 16: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Staying with the Trouble: Making Kin in the Chthulucene (Paperback)
Donna Haraway / Duke Univ Pr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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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6장인데, 국역서는 영어책의 5, 6, 7장을 누락하고 있다. 

6장에서는 애나 칭의 『세계 끝의 버섯』과 르 귄의 『세상을 가리키는 말은 숲』, "아카시아 씨앗의 저자"가 인용된다.

아래의 밑줄긋기는 이 중 르 귄의 『세상을 가리키는 말은 숲』과 관련된 내용이다. 


Matter as timber brings me to Le Guin’s The Word for World Is Forest, published in 1976 as part of her Hainish fabulations for dispersed native and colonial beings locked in struggle over imperialist exploitation and the chances for multispecies flourishing. That story took place on another planet and is very like the tale of colonial oppression in the name of pacification and resource extraction that takes place on Pandora in James Cameron’s 2009 blockbuster film Avatar. - P120

나무 같은 물체는 1976년에 출판된 르 귄의 『세상을 가리키는 말은 숲』을 떠오르게 한다. 이 책은 제국주의적 착취에 대항하는 투쟁과 다종의 공동번영을 위한 기회라는 두 선택지를 갖고 있는 흩어져 사는 원주민과 식민자들에 대한 헤인 연대기의 일부다. 다른 행성에서 전개되는 이 스토리는 평화 정착(pacification)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식민주의적 억압과 판도라에서 발어지는 자원 추출 이야기인 제임스 캐머런의 블록버스터 영화 <아바타>(2009)와 매우 유사하다. - P120

Except one particular detail is very different; Le Guin’s Forest does not feature a repentant and redeemed "white" colonial hero. Her story has the shape of a carrier bag that is disdained by heroes. - P120

그러나 두 이야기 사이에는 매우 다른 하나의 디테일이 존재한다. 르 귄의 『세상을 가리키는 말은 숲』에는 잘못을 뉘우치고 다시 태어나는 "백인" 식민정착자 영웅은 등장하지 않는다. 그녀의 스토리는 영웅이 조롱하는 캐리어백(carrier bag) 모양을 하고 있다. - P120

Also, even as they condemn their chief oppressor to live, rather than killing him after their victory, for Le Guin’s"natives"the consequences of the freedom struggle bring the lasting knowledge of how to murder each other, not just the invader, as well as how to recollect and perhaps relearn to flourish in the face of this history. There is no status quo ante, no salvation tale, like that on Pandora. - P120

또한 그들을 가장 괴롭혔던 억압자를 승리 이후에도 처형하지 않고 살려 두긴 하지만, 르 귄의 "원주민들"은 그들의 투쟁의 결과로, 침략자뿐만 아니라 그들 서로를 살해하는 방법을 그 후로 계속 갖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 역사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번영할 수 있는가에 대한 지식을 기억하게 되었고, 아마도 다시 배우게 되었을 것이다. 여기에는 판도라에서 일어난 것과 같은 다시 돌아갈 수 있는 원래 상태나 구원의 이야기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 P120

Instructed by the struggle on Forest‘s planet of Athshea, I will stay on Terra and imagine that Le Guin’s Hainish species have not all been of the hominid lineage or web, no matter how dispersed. Matter, mater, mutter make me—make us, that collective gathered in the narrative bag of the Chthulucene—stay with the naturalcultural multispecies trouble on earth, strengthened by the freedom struggle for a postcolonial world on Le Guin’s planet of Athshea.

『세상을 가리키는 말은 숲』의 애쓰시아(Athshea) 행성에서의 투쟁의 교훈을 되새기면서, 나는 지구(Terra)에 계속 머물 것이며, 르 귄의 헤인 종(Hainish species)이 모두 단일한 영장류의 계통 또는 그물에 속하는 것은 아니라고 상상한다. 물질(Matter), 엄니(mater), 중얼거림/얼름(mutter)은 나를, 그리고 툴루세의 서사 가방에 함께 담겨 있는 우리 모두를 지구상의 자연문화적이며 다종적인 트러블과 함께 머물게 만든다. 이 자연문화적·다종적 트러블은 르 귄의 애쓰시아 행성의 식민지 해방 투쟁에 의해 강화된다. - P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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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끝에서 춤추다 - 언어, 여자, 장소에 대한 사색
어슐러 K. 르 귄 지음, 이수현 옮김 / 황금가지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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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짧은 글들의 모음이지만 그 안에 녹아 있는 르 귄의 사유는 깊고 넓고 따뜻하다. 여름에 읽은 책인데, 한 해가 저물어갈 때쯤에야 리뷰를 쓴다. 지난 주말에 바로 쓰고 싶었는데 김장 담그느라 못 썼고, 주중에도 일(과 월드컵) 때문에 잠시도 짬을 내기 힘들었다. 리뷰를 하기 전에 다시 빠르게 넘기며 초점을 잡는데 또 새로운 것들이 보인다. 특히 1986년에 발표한 세 글 - <브린 모어 대학 졸업식 축사>, <여자/야생>, <캐리어백 픽션 이론> -이 돋보인다. 원래 두 주제에 초점을 맞춘 하나의 리뷰를 쓰고 싶었는데, 마음을 바꿔 주제별로 두 개의 리뷰를 작성해야 할 것 같다. 두 번째 것은 쓸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이 첫 번째 리뷰는 르 귄의 캐리어백 픽션 이론에 관한 것이다. 이 책에는 소설판 장바구니론”(292~301)이라고 번역되어 있다.

 

1.

이 책의 발행일이 2021910일로 되어 있는데, 내가 해러웨이의 트러블과 함께하기를 읽고 리뷰(https://blog.aladin.co.kr/eroica/12900997)를 쓴 것이 그보다 열흘 남짓 빠른 829일였다. 처음 읽은 해러웨이의 책이었고, 그 책에서 르 귄의 이름을 처음 알았다. 언제나 그렇지만 내가 몰랐다고 별볼일없는 사람이 아니다. BTS 팬들은 그녀에 대해 이미 알고 있었고, 우리 말로도 그녀의 여러 작품이 번역된 유명한 SF 작가였는데, 그때 난 존재 자체를 모르고 있었다. 해러웨이는 트러블과 함께하기2(73~81)에서 르 귄의 이 글을 라투르, 마굴리스, 스탕제르 등의 논의와, 그리고 신의 트릭(God’s trick)”에 대한 자신의 이야기와 함께 엮어낸다. 그때는 아직 이 책이 번역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리고 음경 이야기(prick tale)”라는 유머를 질식시키는 극악무도한 번역 때문에 이 글의 원문을 찾아볼 수밖에 없었다. 그로부터 1년 반 동안 (스탕제르는 엄두를 못 냈지만,) 라투르, 마굴리스, 르 귄의 글들을 짬짬이 읽어 왔다. 해러웨이가 르 귄으로 들어가는 문을 열어준 것이다. 처음에는 해러웨이를 이해하기 위해 르 귄을 읽었는데, 읽으면 읽을수록 르 귄은 (이런 비교가 참 속물스럽지만) 어쩌면 해러웨이보다 더 훌륭한 사람 같다는 느낌이 든다.

  

르 귄의 캐리어백 픽션 이론에 관한 독보적인 이 짧은 글(한글로는 10페이지, 영어로는 6페이지)을 내가 몇 번이나 읽었을까? 열 번은 조금 안 될 것 같다. 그런데 이번에는 이전에 넘어갔던 한 구절이 나의 눈길을 끌었다.

 

버지니아 울프는 3기니라는 제목으로 완성될 책을 계획하고 있었을 때 공책에 용어사전(Glossary)”이라는 제목을 썼다. 당시 울프는 색다른 이야기를 하기 위해, 자신의 새로운 계획에 따라 영어를 재창조할 생각을 했다. 이 용어 사전 항목 중에 영웅주의는 보툴리즘(botulism)”으로 정의된다. 그리고 울프의 사전에서 영웅은 보틀(bottle)”이다. (bottle)이 영웅이라니, 혹독한 재평가다. 나는 이제 그 병을 영웅으로 제시하려 한다"(294).


이것은 무슨 말일까? 그 분야에 무지하지만, 버지니아 울프라는 이름은 들어봤다. 읽은 것은 없다. 그런데 그녀가 영웅담(heroism)을 보툴리즘으로, 영웅을 병으로 재정의하려고 하였다니. 출처가 어디인지, 맥락이 무엇인지 도무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르 귄의 이 책은 출처에 대해서 보통 미주를 달아 놓았는데, 유독 이 구절에 대해서는 아무런 실마리가 없었다. 버지니아 울프와 보툴리즘을 구글링한 끝에 Virginia Woolf’s Reading Notebooks(1983)의 존재를 알게 되었고, 내가 종종 이용하지만 장서가 그리 대단치 않다고 여겨온 도서관에서 이 책을 발견했고, 이 책의 53쪽에서 르 귄이 언급한 부분을 찾아냈다(https://blog.aladin.co.kr/eroica/14114280). 그런데 내용이 별 것 없다.

 

Soldier = Gutsgruzzler. Heroism = Botulism. a Hero = Bottle” (Virginia Woolf's Reading Notebooks, p. 253)

 

울프가 자신만의 노트에 남긴 이 짧막한 생각의 파편을 보았을 때, 르 귄은 궁금했을 것이다. 이것이 무슨 뜻일까? 그리고는 상상력을 발휘해서 짧지만 빛나는 위대함으로 가득찬 이 글을 써낸 것이다.

 



2.

르 귄은 프랑스 대혁명 이전의 사회계약론자들 홉스, 로크, 루소 등 처럼 채집사회에서 수렵사회로 넘어가는 일종의 자연상태에 대한 이야기로 글을 시작한다. 농업이나 문명이 시작되기 전의 시대, 일주일에 15시간 정도 일하면 충분히 생활을 꾸릴 수 있던 시절이다. 여자들은 아기를 보며 야생귀리를 까던 시절, 아기도 없고 노래나 별 다른 기술도 없던 남자들은 심심해서 나가서 매머드 사냥을 한다. 남자들은 상아와 고기만 갖고 돌아온 것이 아니라, 수렵 과정에서 있었던 일들에 대한 흥미진진한 이야기들까지 갖고 돌아온다. “액션으로 가득찬 영웅담. 이제 아이를 보며 야생귀리 까는 이야기는 목숨을 걸고 매머드를 찔러 죽이고 마침내 전리품을 짊어지고 귀환하는 액션 히어로 이야기와 비교가 될 수 없다.

 

르 귄은 이들의 영웅담에 들어 있는 때리고 찌르고 두들길 길고 단단한 도구”, “그 멋진 크고 길고 단단한 물건잎사귀, 박껍데기, 조개껍데기, 그물, 가방, 멜빵, 자루, , , 상자, 용기, 담는 것, 그릇같은 물건을 담을 용기”, 무엇인가를 담는 물건을 의미하는 병을 반정립시킨다(294-295). 막대기, , 창 이야기는 많이 들어봤지만, 그릇이나 병 이야기는 별로 들어본 적이 없다는 의미에서 새로운 이야기, 곧 뉴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언가를 담는 도구는 단검이나 도끼보다 훨씬 이전부터 존재했다. 이것이 인류학자 엘리자베스 피셔가 인간진화의 캐리어백 이론이라고 부른 것이고, 울프가 남긴 실마리를 르 귄이 재탄생 시킨 것이다.

 

르 귄은 제국주의적인 본성과 통제불가능한 충동을 다스리기 위해 법을 만드는 영웅들의 액션 스토리의 특징을 세 요소로 정리한다(298-299). 1) 한 시점에서 출발해서 그 후의 다른 시점의 목표에 도달하는 시간의 화살의 서사, 2) 갈등 중심의 전개, 3) 남자 영웅(he)이 나오지 않는 이야기는 좋은 이야기가 될 수 없다고 보는 관점이다.

 

르 귄은 이 셋 모두에 반대한다. 첫째, 처음, 중간, 끝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정리(48~49, 73)는 마치 시작 이전과 끝 이후에는 아무 이야기도 없는 것처럼 가정하지만, 실제로는 그 시작 이전에는 전편들(prequels)이, 끝 이후에는 속편들(sequels)이 존재한다. 이 시간의 화살에 우로보로스의 형상이 반정립된다. 둘째, 중요한 것은 관계이고, 갈등은 그것의 한 종류일 뿐이므로 모든 관계를 갈등으로 환원할 수 없다. 셋째, 소설에는 영웅이 아니라 사람들(people)이 있어야 한다.

 

르 귄은 소설을 시간의 화살이나 승리라는 결과를 갈등 끝에 쟁취하는 전투가 아니라, 자루나 가방으로 보는 것이 더 적합하다고 한다.

 

책은 말을 담는다. 말은 사물을 담는다. 의미를 품는다. 소설은 약보따리이며 그 속에 담긴 것들은 서로와, 그리고 우리와 특별하고 강력한 관계를 맺고 있다... 가방 속에 집어넣으면 영웅도 토끼처럼 보이고, 감자처럼 보일 것이다. 바로 그래서 나는 소설을 좋아한다. 소설 속에는 영웅이 아니라 사람들이 있다”(299).

 

뾰족한 것으로 찔러 죽이는 이야기가 아니라, 관계들에 대한 이야기 보따리로서의 소설이라는 르 귄의 관점은 SF의 재정의로 이어진다. 기술과 과학은 누군가를 지배하는 무기가 아니라, 문화의 장바구니로 다시 정의하게 되면, SF는 리얼리즘보다 덜 신화적인 장르로서 기묘한 리얼리즘이지만, 기묘한 현실이다”(301). 우리의 세상은 거대한 자루이고, 그 안에는 여러 존재들의 관계가 맺어졌다 풀려난다. 이 세상은 새로 태어날 것들의 자궁이며, 이전에 있던 것들의 무덤이며, 남자뿐만 아니라, 야생귀리를 잔뜩 따서 담고 그 씨앗을 뿌리는 이들, 그 와중에 포대기로 업은 아이들에게 불러주는 노래와 아이들의 농담이 다 들어 있다. 이 얼마나 기꺼이 잠겨 쉬고 싶은 편안하고 따뜻한 목욕물인가?


3.

이렇게 르 귄은 영웅이 길고 단단한 막대기를 휘두르는 영웅담(heroism)을 무언가를 담는 그릇의 보툴리즘(botulism)으로 대체한다. 대단하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울프의 노트에 나온 뜻모를 수수께끼를 이렇게 풀어내다니, 스핑크스의 퀴즈를 풀어낸 오이디푸스보다 위대한 인간, 더 닮고 싶은 인간 아닌가?

 

르 귄은 같은 해에 작성된 <브린 모어 대학 졸업식 축사>에서는 우리가 학교에서 배운 언어, 힘의 언어인 아버지말(father tongue)과 학교에 들어가기 전 배웠던 어머니말(mother tongue)을 대조시키면서, 후자는 그냥 의사소통이 아니라 관계와 관계 맺기의 언어”, “언제나 침묵 언저리에 있고, 자주 노래 가장자리에 있는 언어, ... 이야기들을 전하는 언어로 정의한다. 이 언어의 힘은 쪼개는 데 있지 않고 묶는 데 있으며, 거리를 벌리는 데 있지 않고 통합하는 데 있다고 말한다(263~264).

 

나는 이 문장들에서 어떤 경이를 느낀다. 그 경이를 아버지말에 오염된 나의 무딘 언어로 표현하기는 쉽지 않다. 그저 내 배꼽을 만져볼 뿐. 인간이라면, 곧 배꼽을 갖고 있다면, 어머니말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미 들어 왔던 말이고, 이미 할 줄 아는 말이기도 하다. 어머니말을 쓰는 비중을 늘리고, 그 말이 적합한 상황에서 그 말을 쓰고, 가끔은 아버지말을 어머니말로 번역도 하고, 번역 와중에 아버지말이 놓친 것들에 대해 어머니말로 실컷 이야기해야 하겠다.


4.

해러웨이는 트러블과 함께하기2(73~81)두번째 밀레니엄의 겸손한 목격자, 여성인간 앙코마우스를 만나다6(448~453)에서 이 캐리어백 픽션 이론을 발판삼아 아버지말과 어머니말을 넘나들며 새로운 스토리텔링의 방식을 보여준다. 철학적인 배경지식이 없다면, STS에 관심이 딱히 있는 것이 아니라면, 해러웨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데리다나 라투르가 아니라 르 귄에서 시작하는 것을 권하고 싶다. 해러웨이를 전공하거나 번역하는 이라면, 르 귄을 꼭 읽어야 할 것이다. 그래야 황당한 창조적 오역들을 피할 수 있겠다 싶다.

 

5. 딴 얘기 하나, 김장

일주일 전 김장을 했다. 전날 장보다 감기가 걸렸다. 오전부터 시작한 김장 노동은 자정이 가까워졌는데도 끝나지 않았다. 쪽파를 까면서 내 엄지와 검지는 팟물이 들어 흑록색으로 바뀌었다. 입은 계속 투덜댔지만 손은 쉬지 않았다. 씻고, 까고, 채썰고, 자르고, 나르고, 버무리고, 설거지하는 것이 무한반복되었다. 허리가 휘도록 일한다는 게 이런 거구나 했다. 일어나거나 앉을 때마다 아이구구구하는 소리가 계속 저절로 나왔다


 

마음 속으로 생각했다이런 게 야생귀리를 따고 까는 일이겠구나. ^^ 그러니 기분이 한결 좋아졌다마음 속으로 계속 생각했다김장이 엄청난 노동이지만이 노동은 착취당하는 노동이 아니다. 가격으로 수량화되는 '교환가치'를 위한 것이 아니라, 김치라는 사용가치의 생산을 위한곧 나의 재생산을 위한 노동은 필요노동과 잉여노동으로 구분되지 않는다온전히 나를 위한 노동이다새벽이 되어서야 끝난 김장 끝에 김치냉장고에서는 김치가 익고 있다.



허리는 이제 다 나았지만, 감기는 아직 안 나았고, 터진 엄지손톱 양쪽 끝 살들도 그대로다. 액션 영웅담인 월드컵을 보는 시간도 16강전 진출로 연장되었다. 배꼽 있는 인간에게 이 액션 히어로물은 오락물일 뿐이다. 반면 끊임없이 내가 씻고 채우고 비우고 날랐던 김장매트, “다라이”, 김냉 저장용기, 김치 냉장고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삶의 일부였다


이제는 김장하시기에는 기력이 없으신 어머니와 김장에 별 흥미를 못 느끼는 동생들에게 갖다 주니 좋아 한다. 나의 노동의 산물인 김치가 플라스틱 박스에 담겨 돈으로 바꿀 수 없는, 값을 매길 수 없는(priceless) 선물이 된다. 별로 재미없지만 배꼽달린 사람의 삶은 이런 것이다. 어머니말에 별 재주가 없는 나는 이렇게밖에 못 쓰지만, 르 귄은 다를 것이다. 그리고 또 다른 젊은 르 귄들이 유려한 어머니말로 유치한 파워레인저 이야기들을 가방 속 토끼로 만들어버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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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rginia Woolf's Reading Notebooks (Hardcover)
Brenda R. Silver / Princeton Univ Pr / 198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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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지니아 울프의 브레인스토밍의 흔적이 담겨 있는 총 67권의 공책에 필기한 내용을 브렌다 실버가 정리해서 1983년에 펴낸 책이다. 


운 좋게 도서관 보존창고에 이 책이 있었고, 도서관 시스템이 전자정보화되기 전에 입수한 책인지 표지 뒷면에는 대출기록카드가 꽂혀 있는데, 이전에 빌려간 이가 아무도 없는지 깨끗하다. 2022년 11월의 나를 위해, 아마도 오직 나를 위해, 아무도 찾는 이 없었을 이 책을 오랫동안 고이 보관해준 도서관에게 고맙다. 내가 찾고 있는 구절에 대해서 아무런 페이지 정보가 없어서 어제 저녁부터 한참을 뒤적이며 찾다 드디어 발견! 


버지니아 울프 전공자가 아니라면 굳이 찾아볼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 이 책을 찾아본 이유가 있지. ㅎㅎㅎ



창작을 위한 사유에는 단어를 재정의하고자 하는 노력이 포함되어 있다.


군인을 Gutsgruzzler로 대체하는데, 이 단어는 뭐라고 옮겨야 하나? 

내장폭식자? 순대러버? 

영웅담(heroism)은 병 이야기(botulism)로, 영웅(hero)은 병(bottle)으로 재정의된다.

그러나 울프는 이에 대해 아무런 설명도 남겨놓지 않았다. 



르 귄도 이 페이지를 보았을 것이다. 그리고 보툴리즘이 무엇인지 이야기해준다. 

그게 뭔지는 다음 리뷰에 써주마. ㅋ

이 노트북에 있는 몇몇 스케치들은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든 완성된 저작에 나름대로 녹아 들어가게 된다. B.1절에는 새로운 단어들에 대한 탐색이 있는데, 여기에서 그녀는 "페미니스트"를 다른 말로 바꾸려고 한다. 이는 『3기니』에서 작가가 반전 투쟁을 통해 남성과 여성 간에 새로운 단결이 탄생했음을 축하하면서 "페미니스트"라는 말을 태우는 장면을 연상시킨다. 그러나 그 때에도 그녀는 "폭군, 독재자"라는 단어들도 똑같이 시효가 소멸되었다고 할 수 없음을 한탄한다. - P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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낡은 것은 가고 새것은 아직 오지 않은 - 신자유주의 헤게모니의 위기 그리고 새로운 전망
낸시 프레이저 지음, 김성준 옮김 / 책세상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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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미국 중간선거가 끝났다. 2차대전 이후 지금까지 총 열아홉 번 중 열여섯 번의 중간선거에서 대통령 소속 정당은 하원에서 최소 5석 이상의 감소를 보였다고 한다. 하원 의석이 감소하지 않았던 가장 최근의 예외가 2002년 조지 W. 부시가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했을 때라니, 벌써 20년 전이다. 이번 선거 역시 민주당이 하원에서 과반을 잃었으므로 예외는 아니었다(20221120일 현재 공화당은 과반인 218석을 확보하였고, 민주당은 212석으로 이전보다 9석 감소한 상태다). 그러나 상원에서는 과반을 유지하게 되었으므로 나름 선전했다’, “졌잘싸등의 평이 나온다. 여기에는 펜실베니아에서 상원의원으로 당선된 민주당의 존 페터맨(John Fetterman)의 활약이 결정적이었다



이번 선거에서 가장 주목을 받은 그는 트럼프 바람이 거세게 불었던 러스트벨트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 펜실베니아의 색깔을 빨간 색에서 파란 색으로 바꿔놓았다. 그가 공화당의 붉은 물결(red wave)”, 트럼프 아들이 트위터로 바라마지 않았던 피목욕(bloodbath)”을 막아낸 것이다. 그의 상대는 트럼프의 후원을 받는 닥터 오즈(Dr. Oz)였는데, 그 역시 건강의학 토크쇼로 전국적 유명세를 누리는 셀럽 의사이다. 페터맨은 펜실베니아 부지사로 재임하면서 트럼프가 펜실베니아의 선거부정을 치졸하게 물고 늘어질 때도 물러서지 않고, 조사를 통해 발견한 부정투표 사례 네 건이 다 트럼프를 찍은 것임을 밝혀내어 세간의 주목을 받은 바 있다. 시간당 15달러의 최저임금, 전국민건강보험 등을 공약으로 내세운 그는 버니 샌더스의 지지자이면서 샌더스가 자신의 지지자이기도 하다. 어쨌든 트럼프의 기세를 한풀꺾을 수 있었던 데에는 그의 공헌이 매우 크다. 공화당에서도 트럼프 회의론이 고개를 들고 있는 듯한데, 과연 다음 미국 대선에서 또 그를 볼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현실이 앞으로 어떻게 돌아갈지는 미지수이지만, 작금의 미국 정치의 전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신문을 접고 이 책을 펴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1. 진보적 신자유주의 헤게모니 블록의 성장과 몰락, 그리고 그 이후

헤게모니란 지배계급이 자신의 세계관을 사회 전체의 상식으로 상정함으로써 자신의 지배를 자연스러운 것으로 보이게끔 만드는 과정을 가리키는 그람시의 개념이다. ... 헤게모니 블록이란 지배계급이 모은 이질적인 사회 세력들의 연합이며, 지배계급은 이 연합을 통해 자신의 리더십을 확고히 한다.”(16)

 

이 얇은 책에서 프레이저는 그람시의 헤게모니 개념을 분배와 인정에 관한 자신의 이론과 접속시켜 현재 미국의 정치 현실을 진단한다. 20세기 중반 이후 자본주의 헤게모니는 사회 경제구조(분배)와 사회적 지위 질서(인정)의 두 측면에서 옳음(right)과 정의(justice)를 결합하였는데, 이 분배와 인정의 연계(nexus)가 그 헤게모니의 규범적 토대를 구성한다고 그녀는 주장한다. 이러한 일반적 이론화는 현재적 비판대상인 신자유주의에 대한 인식전환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녀는 신자유주의가 하나의 전체적 세계관이 아니라, 여러 인정 프로젝트들과 조응할 수 있는 하나의 정치-경제 프로젝트라는 점을 깨달았으며, 최소한 미국에서는 신자유주의가 진보주의와 견고하게 연결되어왔다는 사실이 비로소 보였다고 한다(56-57). 진보적 신자유주의약탈적이고 금권정치적인 경제 프로그램을 자유주의적·능력주의적 인정 정치와 결합했다”(18).

 

프레이저는 하이에크와 프리드먼 등이 고안하고 레이건이 실행한 신자유주의 우파 근본주의버전은 뉴딜적 사고방식과 신좌파를 계승한 사회운동이 상식에 영향을 미치는 미국에서는 헤게모니가 될 수 없었지만, 클린턴을 비롯한 신민주당(New Democrats)은 미국 경제의 골드만삭스화와 진보적인 인정 정치를 결합함으로써 새로운 헤게모니 블록을 구성해냈다고 주장한다. 성소수자 인권, 탈인종주의, 다문화주의, 페미니즘, 환경주의 등에 동원되는 능력주의’, ‘다양성’, ‘역량강화등의 담론이 바로 진보적 인정의 핵심적 정서를 이루는데, 이제 이 해방을 향한 비경제적 열망들이 경제적 양극화를 초래하는 신자유주의를 쌔끈하게 포장하는 역할을 수행하면서 진보적 신자유주의라는 위험한 동맹에 카리스마와 자본주의의 새로운 정신을 제공하였다(20-22). 


이들은 자신의 선배격인 뉴딜 연합의 기존 헤게모니 블록을 해체하면서 새로운 헤게모니 블록을 구성한다. 곧 오랫동안 민주당을 지지하였던 조직 노동자, 이민자, 흑인, 거대 산업자본 일부를 대신해서 기업가, 은행주, 교외 거주자, ‘상징 노동자’, 신사회운동, 라틴계 미국인, 청년 세대들을 새로운 헤게모니 블록의 구성원으로 받아들인다. 빌 클린턴은 다양성, 다문화주의, 여성인권을 외치면서 금융화(골드만삭스화)의 길을 성공적으로 개척하였다(22-23).

 

진보적 신자유주의가 신자유주의(분배)와 진보적 인정을 결합했다면, 옆집에서는 반동적 신자유주의가 신자유주의(분배)와 반동적 인정 정치를 결합하면서, 종족민족주의, 반이민, 친기독교적인 지위질서의 수호를 내세웠다. 따라서 양자의 차이는 분배가 아니라 인정의 차원에 있었다”(24). 클린턴이 NAFTA, 중국의 WTO 가입, 글래스스티걸법의 폐지로 본격화된 은행의 탈규제 등으로 세계화와 금융화를 선도하는 동안 미국의 오랜 산업도시들은 역풍을 제대로 맞게 되었고, 이들은 지지정당을 상실한 채 방치되었다.

 

트럼프의 등장 이전까지 겉보기에만 치열한 민주당과 공화당의 대립은 사실 두 버전의 신자유주의의 대립일 뿐이었다

사람들은 다문화주의와 종족 민족주의(ethnonationalism) 사이에서는 선택할 수 있었다. 그러나 어느 쪽을 고르든 금융화와 탈산업화로부터는 벗어날 수 없었다. ... 노동자계급과 중산계급의 생활수준이 무너지는 것을 막을 세력은 없었다”(26).

 

기성정치 세력은 세계화로 일자리를 잃고 금융화로 빚에 시달리다 집을 압류당한 이 노동자 가족들을 외면하였다. 2015~16년의 대통령선거는 진보적 신자유주의의 헤게모니 상실을 알리는 서막이었다. 오른쪽에서는 트럼프가, 왼쪽에서는 샌더스가 신자유주의를 대체할 새로운 상식의 개요를 제시하고자 하였다.

 

샌더스와 트럼프 모두 신자유주의적 분배 정치를 맹비난했다. 그러나 둘의 인정 정치는 선명하게 달랐다. 샌더스가 보편주의와 평등주의에 방점을 찍어 조작된 경제(rigged economy)’를 고발했다면, 트럼프는 똑같은 문구를 채택하면서도 거기에 민족주의적이고 보호주의적인 색채를 입혔다”(30). 

배제의 언어와 포용의 언어가 부딪혔다. 프레이저는 이들이 대변하고자 한 집단, 또는 상상적 헤게모니 블록을 각각 반동적 포퓰리즘진보적 표퓰리즘으로 명명한다(32). 이제 프레이저답게 깔끔한 인정(포용/배제)과 분배(신자유주의/포퓰리즘)의 양축을 가진 2X2 테이블이 완성된다.

 

분배

인정

신자유주의

포퓰리즘

포용

진보적 신자유주의

(클린턴, 오바마, 펠로시?)

진보적 포퓰리즘

(샌더스, 페터맨?)

배제

반동적 신자유주의

(레이건, 부시 부자)

초반동적 신자유주의

(대통령 트럼프)                    

 

 

반동적 포퓰리즘

(후보 트럼프)


샌더스의 도전은 민주당내 대선후보 경선에서 패배함으로써 좌절되었지만, 트럼프는 힐러리 클린턴을 가뿐히 제압함으로써, 진보적 신자유주의의 종말을 명확히 했다. 당선 후 트럼프는 후보 시절 공약했던 포퓰리즘적 분배 정치를 폐기하면서 한층 더 강력해지고 사악해진 반동적 인정 정치에 몰두하기 시작했다”(33). 반동적 포퓰리즘이 초반동적 신자유주의로 모습을 바꾼 것이다. [어디 트럼프뿐이겠는가? 그의 뒤를 따랐던 브라질의 보우소나루도, 또 나름의 개성(?)을 지닌 채 지정학적 특수성을 활용하면서 위기 심화와 국격 저하에 기여하고 있는 한국의 굥도 마찬가지임을 우리는 확인하고 있다.] 프레이저는 그람시를 인용하며 트럼프의 반동적 포퓰리즘은 진보적 신자유주의헤게모니의 붕괴 후 낡은 것은 가고 새것은 아직 오지 않은시대의 병적 증상일 뿐이라고 일축한다(39).

 

2. 반트럼프 진영에 대한 우려와 대항 헤게모니의 형성

프레이저는 친클린턴 진영이 바라는 진보적 신자유주의의 복원은 결코 대안이 아니라고 단언한다. 이는 인정에 의한 분배의 잠식 the eclipse of redistribution by recognition”(55)에 지나지 않는다. 반트럼프 진영에서는 인종과 계급을 양자택일의 문제로 사고하는 좌파의 낡은 경향이 등장하고 있는데, 프레이저는 이에 대해 크게 우려한다. 실용적으로 생각하면 먼저 하나에 집중하려는 경향을 이해할 수는 있지만, 이전에 해온 방식대로 분배를 포기하고 인정을 택할 경우, 이는 다시 트럼프를 만들어냈던 조건들을 다시 만들어낼 뿐만 아니라 더 위험한 새로운 트럼프들의 등장으로 이어질지 모른다. 곧 반인종주의뿐만 아니라, 페미니즘, LGBTQ+, 환경운동 등도 다양성, 능력주의, 역량강화(empowerment) 등 신자유주의와 선택적 친화성을 가진 수사들을 동원하면서 분배 문제를 뒷전으로 미루면 문제는 해결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신자유주의에는 해방적 외양을 부여하고, 트럼프 진영에는 저 라떼나 홀짝거리면서 잘난 척하는 것들에 대한 적대심만을 높이는 역할을 할 뿐이다(20-22, 41-42, 64).

 

그렇다면 어떻게 하자는 말인가? 프레이저는 우선 두 가지 분리 전략을 제시한다. 첫째, 취약한 여성, 이민자, 유색인종을 신자유주의적 능력주의, 다양성, 역량강화 이데올로기로부터 분리시켜야 하고, 둘째, 경제적으로 버림받은 러스트 벨트, 남부, 농촌 노동계급의 트럼프 지지자들을 인종주의와 종족민족주의로부터 분리시켜야 한다. 그 다음으로는 물과 기름처럼 서로를 경원시하는 이 두 지지자 그룹이 함께 지지할 수 있는 대항 헤게모니 블록을 건설해야 한다. 이들은 모두 동일한 조작된 경제(rigged economy)’의 다른 곳에 위치한 희생자들이고, 이들이 함께 해야만 이 근원적 현실, 곧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와 금융화의 자본주의의 현재 형태를 변화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40, 46-48).

 

프레이저는 이 새로운 대항 헤게모니 블록의 유력한 후보로 진보적 포퓰리즘을 꼽고 있는데, 진보적 포퓰리즘이 새로운 상식을 구성하는 대항 헤게모니가 되기 위해서 중요한 것은 현재의 금융 자본주의에서의 계급과 지위 문제가 공유하는 공통의 뿌리를 강조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진보적 포퓰리즘 블록은 금융 자본주의 체제를 하나의 통합된 사회 전체로 이해하면서 여성과 이민자, 유색인, 성소수자가 경험하고 있는 피해를 우익 포퓰리즘에 가까운 노동계급이 경험하고 있는 피해와 연결해야만 한다(46)”.

 

3. 자본주의의 새로운 지도 그리기

이 힘든 작업을 해내는 것이 정치인들이나 현장 활동가들만의 몫은 아닐 것이다. 올해 75세인 프레이저는 맑스와 폴라니를 결합하면서 자본주의에 대한 새로운 이론적 밑그림을 제시한다. 그녀에 따르면, 자본주의는 단지 경제체제가 아니라 그보다 큰 제도화된 사회질서(48)

 

제도화된 사회질서로서 현행의 자본주의는 자본주의 경제에 불가결한 비경제적 배경 조건의 집합까지도 포괄한다. 이를테면 경제적 생산에 필요한 임금 노동의 공급을 보장해주는 무임금의 사회적 재생산노동도 그러한 조건의 집합에 포함된다. 축적을 지속하기 위해 필요한 질서와 예측 가능성, 인프라를 공급하는 공적 권력의 조직된 장치들(, 치안, 규제기관, 운영 역량)도 그 예가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삶을 시탱할 수 있는 거주 가능한 지구를 비롯해 재화 생산에 필요한 필수적인 에너지와 원재료를 제공하는 자연과 우리의 신진대사 간의 상호작용과 관련된 상대적으로 지속 가능한 조직들도 마찬가지다”(48).

 

여기에서 간략히 요약된 그녀의 아이디어는 올해(2022) 출판된 카니발 자본주의로 결실을 맺은 것 같다.

 

4. 이론적 전유

프레이저는 논쟁과 대화를 즐기는 올해 75(1947년생)의 철학자이다. 푸코, 하버마스, 버틀러, 호네트 등 쟁쟁한 철학자들을 비판하고, 그 대상이 살아 있는 경우는 함께 논쟁하면서, 그 비판과 논쟁을 통해 자신의 입장을 재확인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들의 이론적 자양분을 자기화하면서 새로운 작업들의 내실을 다져나간다. 이 책 역시 예외가 아니다. 이 책은 단지 오늘날의 미국의 정치 현실에 대한 정치평론에 그치고 마는 것이 아니라, 가까이는 자유주의 페미니즘을 비판한 99%를 위한 페미니즘: 선언(2019), 멀리는 호네트와의 논쟁, 분배냐, 인정이냐(2003)와 후속 논쟁을 정리한 불평등과 모욕을 넘어서(2008)의 현재적 귀결이자, 카니발 자본주의로 가는 징검다리 역할을 하는 책이다. 카니발 자본주의의 내용이 자못 궁금하다.

 

5. 다시 미국 정치 얘기...

며칠 전 뉴스는 미국 최초의 여성 하원의장였던 낸시 펠로시가 의장직에서 내려오면서 차기 지도부 선거에 출마하지 않겠다고 한 연설을 보도하였다. “이제 새로운 세대를 위한 시간이 왔다.”




2007년 하원의장으로 선출되면서 여성의 유리천장 깨기신화의 주인공이면서 트럼프 탄핵에 누구보다 앞장섰던 그녀가 기꺼이 자리를 비켜준 새로운 세대는 누가 될까? 미국 대통령 개인에 대한 기대는 그 어느 때보다 낮은 반면, 페터맨 같은 민주당 내 좌익 또는 민주당을 선거를 위한 공간으로 활용하고자 하는 민주적 사회주의자들의 기세는 그 어느 때보다 높아진 것 같다. 이들이 프레이저가 바라는 진보적 포퓰리즘의 흐름에 기여할 수 있을지 지켜봐야 하겠다.

 

그러다가 한국의 현실을 생각해보면 한숨만 나온다. 21세기 들어서 미국의 좌파가 부러웠던 적은 처음인 것 같다. 하지만 그 전에도 미국에는 내가 모르는 수많은 이들의 헌신이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 한국에서도 유의미한 저항의 흐름을 꿈꾸고 만들고자 하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 불평등 감소를 위해 노력하는 모든 이들에게 미력하나마 연대의 마음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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