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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의 지역질서 - 제국을 넘어 공동체로
백영서 외 지음 / 창비 / 2005년 11월
평점 :
품절


명의 필자에 의해 쓰여진 책은 동아시아 공간이 역사적으로 개의 제국적 질서에 의해 교체 지배되어 왔다는 그림을 그리면서 논의를 시작한다. , 동아시아의 역사를 (1)중화제국의 華夷질서, (2)일본제국의 대동아공영권, (3)냉전기 미제국의 아시아-태평양 질서가 교체되어 것으로 파악한다. 책의 기획의도는 일국사 서술을 넘어서 동아시아 전체를 대상으로 하되 제국중심의 시각이 아니라, 주변의 시각에서 동아시아의 제국질서의 역사적 전개를 파악함으로써, 탈중심화된 공동체로서 동아시아를 건설하겠다는 전망을 제시하는 것으로 있을 같다. 기획의도는 노무현 정권이 후기에 접어들면서 한미동맹강화론이 재등장함에 따라 동북아균형자론이 온데간데 없이 사라져버린 시점에서 시의적절해 보인다.

 

각론으로 들어가서 살펴보면, 정용화의 주변에서 조공체제 김명섭의 동아시아 냉전질서의 탄생 가장 주목할만하다. 정용화는 고려와 조선에게 조공관계는 경제적 것이기 보다는 정치적 것이었다는 시각을 취하면서, 동아시아국제관계에 사대교린정책을 통해 정권의 안보를 보장받는 동시에 스스로 小中華가 되고자 했던 조선의 역사를 살펴보고 있다.  그는 조공관계를 책봉을 전제로 맺어진 왕조간의 교류형식이자, “동아시아 문명국가간의 소통양식으로 바라본다. 그에 따르면, 19세기말 조선은 이전까지의 조공체제에 잔존하는 동시에 만국공법제 기반한 조약체제에도 편입된다. 그러나 조선은 조공체제와 조약체제의 충돌의 격류 속에 힘없이 몸을 맡기고 말았으며, (서구가 아닌) 일본의 주도로 조약체제가 조공체제를 대체하게 된다. 동아시아의 눈으로 세계를 보고, 동아시아 주변국의 눈으로 중심국을 보며, 주변국의 피지배층의 눈으로 지배질서를 바라본다는 삼중의 주변의 대한 강조는 특히 귀담아들을만 하다. 하지만 조선의 피지배층의 시각에서 서술이 글에서는 다소 부족하다는 느낌이다.

 

김명섭의 글은 미국의 설계 하에 어떻게 유럽의 식민지적 유제는 부정되었던 반면, (군사력이 아닌 자본으로 무장한) 일본 중심의 질서가 동아시아에서 온존하게 되었는 지를 다루고 있다. 정용화의 글에서만큼이나 여기서도 (공산주의 진영과의 냉전이라는) 정치적 요소가 강조된다. 그는 선진제국에 대한 열세의 만회라는 후진 제국들의 동기에 주목하는 동시에, 여기에서 나아가 서양침략세력에 대한 동방의 방패로서 일본 제국주의의 반인종주의적 정당화를 지적한다. 이러한 관점은 전에 보았던 Geoffrey Barraclough An Introduction to Contemporary History에서도 지적되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김명섭은 안중근이 러일전쟁의 승리를 백인종에 대한 황인종의 승리로 크게 기뻐했다는 (내게는 나름대로 충격적인) 사실로서 관점을 뒷받침한다 (271-72). 전쟁을 현상유지국가와 현상타파국가 간의 대결로 보는 코노에 후미마로의 주장 역시 인상적이었다. 태평양전쟁은 脫亞入歐 주창했으면서도 백인우월주의의 문턱을 넘어서지 못했던 일본이 아시아의 수장으로서 스스로를 자리매김하고 현상타파의 길을 택한 것이었다. 2차대전후, “미국은 일본을 아시아의 지역중심으로 활용했고, 일본은 과거의 영일동맹 대신 미일동맹을 통한 국가발전을 도모했다. 미국이 동아시아지역에서 추구한 상호수혜적 교환체계는 일본을 수장 기러기 하는, 이른바 기러기 편대’[雁行] 모델로 발전했다” (294-5).

 

김경일의 글은 일본을 태평양 전쟁으로 이르게 과정을 조금 다른 각도에서 보여준다. 세계체제 시각에 따르면, 현상유지국가와 현상타파국가 간의 갈등은 헤게모니 국가와 헤게모니 도전국 간의 갈등으로 이해될 있다. 1930년대말까지 일본은 미국에 경제적으로는 의존적이었지만, 정치적으로는 긴장관계를 형성하고 있었는데, 만성적인 국제수지 적자에 시달리던 일본이 1937 중일전쟁을 일으키자, 1939 미국은 이에 대한 보복으로  미일통상항해조약을 파기한다. 이에 일본은 서구 제국주의를 구질서 비난하고, 미국의 대일경제제재에 대항하여 원유를 확보하기 위해 동남아시아를 노리게 된다. 유럽본토에서 동남아시아에 식민지를 보유한 제국들이 독일에게 밀리는 것을 목격한 일본은 본격적으로 남방진출을 시도하게 된다. 김경일의 이러한 설명은 유럽과 동아시아 서로 다른 지역들에서 전개된 헤게모니 도전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강진아, 박태균, 백지운의 글들도 나름대로 괜찮았다. 강진아의 글은, 기시모토 미오와 미야지마 히로시의 [조선과 중국 근세 오백년을 가다]와의 연결 속에서, 그리고 책의 정용화의 글과의 긴장 속에서 읽으면 특히 재미있다. 강진아는 조선이 (다른 나라들과는 달리) 경제적으로는 조공무역체제로부터 별로 이익을 보았다고 주장한다.   유럽과 일본이 각각 라틴아메리카의 은으로 연결된 세계경제체제, 일본 은으로 연결된 동아시아무역체제를 통해 중국의 선진상품에 중독되고 소비하면서 따라잡기형 발전을 준비해갔다 가설을 제시한다 (47-8). 그녀에 따르면, “따라잡기형 발전이라는 면에서 조선과 일본은 모두 중국을 정점으로 달려가고 있었지만, … 도자기, 면직 등에서와 마찬가지로 농업에서도 일본이 시기적으로 한국에 뒤처져도 발전 폭이 훨씬 컸다” (61). ? 첫째, 일본은 은이라는 지불수단이 되는 고유상품을 1530-1750년대까지 2백여년간 동아시아 시장에 지속적으로 대량공급할 있었다. 조선은 이에 필적할만한 대표상품이 없었다. 인삼수출은 상대적으로 규모에 한계가 있었다 (57). 둘째, 일본은 자급화의 과정을 국가가 계획적이고 적극적으로 주도하여 수입대체를 이룰 있었다 (62). 그런데 여기서 이상한 것은 강진아가 조선의 국가는 그랬는지를 설명하지 않고, 갑자기 일본의 비교대상을 유럽(62)이나 라틴아메리카(58) 둔다는 점이다. 그러다 뜬금없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조공체제에 강하게 편입되어 있는 국가일수록 정치적 취약성 때문에 자립적인 따라잡기형 발전을 추구할 있는 강력한 국가의 역할은 하기 어렵지 않았을까” (64).

 

강진아는 주장을 자신있게 수는 없었을까? 결국 조선이 일본에 따라잡히게 것은 일본에게는 있었고, 조선에는 없었던 (<1>‘이라는 천혜의 조건과 <2> 중심으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로웠던 국가’) 때문이다. 과연 그런가를 따져보기 전에 주장이 좀더 설득력이 있으려면, 일본이 조선을 추월했다는 사실을 역사적으로 증명해야  한다. 언제까지는 조선이 살았는데, 언제부터는 일본이 앞섰다 하는 식으로이것이 증명이 되어야지, 이후에 사실에 대한 설명을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증명과정은 생략되어 있다.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 치더라도, 강진아의 사실에 대한 설명은 과연 옳은가도 의문이다. 또 일단 설명이 옳다 쳐도, 그것 외에 다른 설명요소들도 있을 있다. 강진아는 일본의 수입대체산업화를 마찬가지로 귀금속이 풍부했던 라틴아메리카와 비교하면서, 독립된 정치권력을 가졌던 일본이 그렇지 못했던 라틴아메리카 국가들과 달리 수입대체산업화에 성공할 있었다고 한다. 강진아는 16-19세기를 하나의 역사적 시간대로 다루지만, 그것이 오다 노부나가로부터 메이지유신에 이르기까지의 일본 입장에서는 어느 정도 타당하다 하더라도 19세기 초반 독립을 달성한 라틴아메리카에게는 단절적인 개의 시간대에 걸쳐있는 것이며, 따라서 시기 전체에 걸쳐 라틴아메리카는 독립적이지 못했다고 말할 없다. 만약 외세로부터의 독립이 중요했다면, 정치적 독립 이후 라틴아메리카는 일본과 같은 수입대체발전을 이루지 못했는가도 설명할 없다.

 

여기에는 다른 답들이 존재할 있다. 스기하라 카오루는 라틴아메리카와 달리 아시아 나라들이 연쇄적으로 안행적 발전 (flying geese development) 이룰 있었던 것을 역내 무역네트웍의 발달에서 찾고 있다. 생각에는 일본이 조선을 어느 시점에서 경제적으로 추월했다는 사실이라면, 그것은 일본이 세계체제의 접경지대, 중국중심의 세계체제와 유럽중심의 자본주의 세계경제 사이의 interstitial location 이점 때문인 같다. 은광 개발 기술이나, 도자기 기술은 조선에서 전해졌다. 의류 뿐만 아니라 화약, 무기류를 만드는 데에 필수적이었던 면포도 조선에서 수입되었다. 다른 한편 포르투갈로부터 전해받은 조총이 있었기 때문에 오다 노부나가 세력은 일본을 통일할 있었고, 임진왜란으로 조선을 침략할 있었다. 일본의 통일은 국민경제의 탄생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문명간 hybrid 결합해서 일본의 조선경제 추월을 가능하게 했고, 자본주의 세계경제에 편입된 이후, 핵심부의 지위에 올라설 있게 했던 아닐까?

 

괜찮은 책이긴 했는데, 여러명의 필자의 글이 실려 있는 편집서라는 근원적인 한계가 있는 같다. 필자들 간의 의견조율과정을 거쳤다 해도, 통일성이 떨어지는 것은 아무래도 어쩔 없는 같다. 특히 이들이 얼마나 주변의 시각에 충실하였는 지는 미심쩍다. 그래도 이러한 연구성과들이 차곡차곡 쌓여, 역사학계 안팎에서 논의가 활발하게 이루어진다면, FTA, 독도에, 신사참배에, 일본군 성노예에, 탈북자문제에, 북미관계에, 동북3성에 바람잘날 없는 동아시아 공간에서 3중의 주변의 목소리에 힘이 실리게 되는 순간도 것이다. 그리고 3중적 주변의 목소리가 추구해야 바는 민족간 경쟁이 아니라, 동아시아 공동체의 평화공존일 것이며, 이를 위해서는 책의 끝에서 이남주가 제시하고 있듯이, 국민국가 협력과 더불어, 국민국가 자체의 극복이 필요할 것이다. 그리고 3중적 주변 세번째 주변, 주변국의 피지배층도, 그러니까 남한의 좌파도, 동아시아 평화공동체 건설에 관심을 기울여야 것이다.

 

[덧붙임: 그러나 또 중심의 매개 없이 주변끼리 직접 소통하기란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 서경식의 [디아스포라 기행: 추방당한 자의 시선](돌베개, 2006)이나, 이즈츠 카즈유키(井筒和幸) 감독의 영화 [박치기(パッチギ!)]를 보고 공감했던 주변부적 삶의 아우라(aura)들은 또 얼마나 섞이기 힘든 것인가? 또 남한은, 나는, 당신은, 우리는 단일민족이라는 미명 아래 고단한 삶을 살고 있는 많은 이웃을 이미 주변부화하지 않았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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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로이카 2006-05-05 00: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프레시안]에 연재되고 있는 김영길의 남미 리포트 153화는 볼리비아의 자원국유화로 인해 브라질, 아르헨티나 등의 라틴아메리카 국가들도 피해가 예상되며, 각국 정상들이 이 문제 때문에 협의테이블을 갖고 있다는 소식을 전한다. 이후에 이 문제와 관련된 국제공조가 어떻게 펼쳐지게 될지 궁금하다. 특히 이남주가 제시한 국민국가간 협력과 더불어 역내 국가간체제의 틀 자체의 변형은 이미 남미에서도 움트기 시작하고 있는 것 같다. 주시해야할 흐름이다.

에로이카 2008-03-29 00: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겨레신문]에서는 주경철 교수가 '문명과 바다'라는 꼭지에 글을 올리고 있다. 2008년 3월 28일 자에는 이 꼭지의 26회로 조선의 인삼과 일본 은화의 교역에 관해 대단히 흥미로운 글을 올렸다. http://www.hani.co.kr/arti/society/life/278640.html

에로이카 2008-04-26 09: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주경철 교수의 '문명과 바다'에 실린 또 다른 글. 일본에 어떻게 포르투갈의 화승총이 전해졌으며, 이것이 조총으로 개량되었는 지에 관한 흥미진진한 글. http://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282710.html
 
조선과 중국 근세 오백년을 가다 - 일국사를 넘어선 동아시아 읽기
기시모토 미오·미야지마 히로시 지음, 김현영·문순실 옮김 / 역사비평사 / 200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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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긴 글을 읽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특히 컴퓨터 모니터를 통해서 긴 글을 읽는 것은 딱 질색이다. 그런데 내 서평이 갈수록 길어지고 있다는 것을 얼마전에야 깨달았다. 이제부터는 더 짧고, 대신 더 명확하게 쓰려고 의식적으로라도 노력해야 할 것 같다.]

이 책은 여러가지 장점을 갖고 있다. 읽는 내내 정말 재미있었다. 그러나 내가 이 책을 흥미롭게 읽었던 이유는 무엇보다 19세기 중반 이후 서구 열강들과 불평등 조약을 맺으며 자본주의 세계경제에 편입되기 이전 (15세기 경부터 19세기 초까지)의 근세 동아시아 세계의 모습을 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요점을 딱 집어 말하자면, 동아시아 세계는 (그 외연의 가변성과 불분명함에도 불구하고) 그 부분들끼리 연결되어 있었을 뿐만 아니라, 외부의 "긴 16세기(1450-1640)"에 출현한 유럽 중심의 자본주의 세계경제의 움직임과도 연동하였다는 것이다(181-4, 359). 동아시아에서 은(銀)의 흐름의 변동을 추적하는 것이 이 연동의 키워드이다. 정리하면, 16세기초 은의 흐름은 조선에서 중국과 일본으로 향하였으나, 1540년대부터 일본이 주요 수출국이 된다. 여기에 16세기 중반 이후부터 포르투갈과 스페인 상인들을 통해 남아메리카 포토시 은광에서 채굴된 은까지 들어오게 되고, 중국은 "세계 은의 종점"이 된다. 아메리카 대륙과 달리 아시아는 유럽 세계경제와의 접촉 이후에도 바로 편입되지 않았다 (183) [cf. M. N. Pearson. Before Colonialism: Theories on Asian-European Relations, 1500-1700].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아시아 세계는 자본주의 세계경제와 연동하게 되는 것이다. 

여기까지 이 책은 그 자신의 임무를 비교적 충실히 소화해낸다. 물론 이 책은 일국을 넘어선 역사를 지향하긴 했지만, 기본적으로 명, 청의 중국본토와 조선의 역사를 중심적으로 다루고 있기 때문에 '미완의' 동아시아 각국사이지, 그 자체로 동아시아 전체사이지는 못하다. 곧 일본 이웃나라들 중 나름대로 영향이 컸던 두 지역(중국본토와 한반도)에 관한 역사일 뿐이다. 지은이들이 일본인이라 해도 일본을 중국과 조선과 같은 비중으로 다루지 않기 때문에 "자본주의 세계경제가 일본이 조선 경제를 추월하는 데 어떠한 영향을 끼쳤는가"와 같은 물음에 대한 대답은 주고 있지 않다. (이것은 내가 이 책에서 제일 아쉬운 부분이다. 그리고 이 아쉬움과는 별도로 먼저 과연 이 질문이 성립 가능한 질문인가, 곧 일본이 전국통일을 이루기 전에는 조선보다 못 살았다는 것이 확실한 것인가 하는 문제도 매우 궁금하다.) 또 사실 조그만 나라 조선과 큰 나라 중국을 두 명의 저자가 같은 비중으로 다루면서 어떻게 동아시아 전체의 모습을 가감없이 보여 줄 수 있겠는가? 이러한 구성은 일본사라는 일국사의 배경을 이해하기 위한 두 주변국의 역사 서술이라는 원래 저자들의 목적에는 부합하는 것일지언정, 그 자체로서 근세 동아시아의 "있는 그대로의 역사"는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이만큼이라도 할 수 있었던 저자들의 功에 비하면, 그 過는 아주 작은 것이다. 이 한계는 저자들을 비롯한 동아시아의 역사학자들이 앞으로 머리를 맞대고 싸우기도 하면서 힘을 모아 넘어야할 과제를 제시해주었다는 점에서 오히려 긍정적인 것이다. 

이 책이 내게 제시한 이후의 연구방향을 잠정적으로나마 짧게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자본주의 세계경제로의 편입 이전의 근세 동아시아 세계의 성격을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 서유럽과 일본의 경우를 제외하고, 자본주의 이전 단계를 봉건제라고 규정하는 것은 이제는 웃음거리일 뿐이다. 그렇다면 어떤 방법이 있을 수 있을까? 월러스틴의 세계체계(world-system) 개념을 다소 교조적으로 동아시아에 적용한 대표적 사례는 하마시타 다케시의 중국 중심 조공무역체계론이다. 명과 청을 세계제국(world-empire)으로 보고 이의 경제적 토대를 조공무역체계로 보는 것인데, 월러스틴의 틀에 너무 집착한 나머지 역사적 사실들을 과도하게 단순화, 과장, 왜곡하고 있다 (reification). 하마시타에 대한 반론의 근거는 이 책 여러 곳에서 찾을 수 있다. 347-51쪽에서도 인용되고 있는 모테기 도시오(茂木敏夫)의 [변용하는 근대 동아시아의 국제질서](1997)에 따르면, 조공국들의 구성은 위계적이기는 하지만, 내적 구성이나 중국과의 관계 모두 이질적이다. 또 한 나라가 청의 조공국이란 것의 의미가 과연 무엇인지도 논의거리이다. 그것이 청 세계제국의 부분이라는 것을 뜻하는가? 만약 그렇다면 청과 조공관계를 맺고 있었다는 것이 어느 정도로 그 사회를 규정하였는가를 규명해야 한다. 가장 손쉬운 방법 중 하나는 조공을 통해서 주고 받는 물품이 생필품이었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일종의 기축적 분업(axial division of labor)이 중국과 조공국 간에 존재하였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일텐데, 적어도 조선의 경우 당시 조공은 사치품 중심이었다. 이는 월러스틴의 세계체계 구성 기준에는 못 미치는 것이다. 프랭크 식으로 사치품 교역도 소위 "상호침투적 축적"을 통해 서로 다른 사회들을 규정할 수 있다고 주장할 수야 있겠지만, 이 주장은 당시 동아시아가 내부적으로 뿐만 아니라 외부적으로도 이른바 "세계 체계(world system)"의 다른 부분과 연동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줄 수는 있을지언정, 동아시아 지역체계의 성격을 규명하는 데에는 별 도움이 되지 못한다. 또한 명대 정화의 아프리카 원정의 중단이나 청까지 시행되었던 해금령, 조선과 일본의 쇄국 등으로 나타나는 내향적 발전 (autarky) 지향은 당시 동아시아 각국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난다. 이는 조공체계가 당시 동아시아 국가간 체계의 상징적 위계를 보여줄 뿐, 실질적인 경제적 의미를 지니지 못한 것이라고 주장할 수도 있게 한다. 하지만 이것은 하마시타에 대한 즉각적인 반동일 수는 있어도 사려깊은 통찰이 될 수는 없다. 분명한 것은 근세 동아시아 세계는 위계적인 국가간 체계 플러스 알파라는 것이다. 여기에는 자본주의 세계경제의 국가간체계에서 전제되는 주권국가 간의 형식적 동등성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또 중요한 것은 조공국마다 그 조공무역이 각국 경제를 규정하는 정도가 다 제각각이었으며, 이에 따라 통합의 정도를 달리한다는 인식일 것이다.

책을 읽으면서 또 눈에 띄었던 것은 조선 부분을 담당하고 있는 미야지마 히로시 교수의 서술 스타일의 독특함이었다. "중도적 해석의 추구"쯤으로 이름붙일 수 있을 듯 싶은데, 어떤 사실에 대한 기존의 양극단의 해석을 제시하고, 이 사이에서 중도적인 입장이되 단지 절충이 아닌 자신의 독창적인 견해를 제시하는 방식이다. 이 방식은 (1)조선이 세계 최초로 금속활자를 발명했음에도 불구하고, 서구의 인쇄혁명 같은 발전이 없었던 이유를 한자의 특성에서 찾는 부분(125-6)이나, (2) 당쟁(244), (3) 조선사회정체론과 자본주의맹아론 양자 모두를 지양해야 할 필요성에 대한 강조(264)에서 두드러진다.

마지막으로 번역과 출판상의 흠에 대해 한마디 해야 할 것 같다. 번역은 무엇보다 일제시대 무성영화 변사식 말투가 무척 거슬린다. '뭐뭐했던 것이(었)다'하는 표현이 시도때도 없이 나오는데, 손을 좀 보는 게 좋을 것 같다 (....194, 238, 253, 260, 261.....).  맞춤법(192쪽 밑에서 셋째줄 '빠트리다', 207쪽 '삼가하게')이나 punctuation (178, 191) 상의 실수도 보이고, 연표에서는 색깔 처리를 잘못한 것들도 보인다. 그러나 가장 큰 문제는 "세계 시스템"이라는 번역어이다. 이는 일본에서 월러스틴의 world-system을 가타가나로 世界システム로 번역한 것을 이에 대해 모르는 번역자가 우리말로 중역했기 때문에 생기는 문제이다. "세계체계"라고 번역해야 옳다. 많이 팔리는 책인 것 같은데, 출판사에서 신경 좀 쓰면 좋을 것 같다.

[할 말 더 많지만, 짧게 쓰기로 했으니 여기서 그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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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부후사 2006-04-08 18: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추천합니다. '세계 시스템'으로 번역된 부분 읽으면서 미심쩍긴 했었는데 월러스틴의 세계체제의 번역어였군요. 많이 배우고 갑니다.

에로이카 2006-04-08 23: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피메테우스님 추천 감사합니다.

2006-04-09 01: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일반화된 마르크스주의 개론 공감이론신서 26
윤소영 지음 / 공감 / 200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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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개념: [자본] 난점과 공백 (67), 마르크스주의의 일반화(67), 자본의 추상화와 노동의 구체성 (68, 91, 142-143), 현실의 대상(Gegenstand) 사고의 대상(Objeckt) / concept notion (106-108), individuality (개인성) singularity (특이성) (128, 277), 자본주의적 기술진보의 편향성 (134-5, 220), 역사동역학과 역사적 자본주의론 (143,), 자본주의적 축적의 엔트로피법칙과 네겐트로피 (149-150), 에포크 (164-5, 185, 188,) 경향적 불안정성 (191), 전방효과와 후방효과 (242), 아포리아(277), 인권의 정치 (278, 282-3), 주체화와 예속 (281, 296), 상징의 가상화 (283), R-S-I 셰마의 전도 (285), 착취의 모순과 이데올로기적 반역의 해후 (143, 153, 287-289), 과잉결정과 과소결정 (288), 봉기와 구성 (296-8), 공산주의의 가지 역사적 형태 (302-4), 지적 차이와 성적 차이 (309-18), 네가지 차이 (318).

 

책에는 다섯 개의 강의가 본문 격으로 실려져 있고, 부록으로 뒤메닐과 레비의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의 현재성] 실려 있으며, 책의 끝에는 정운영 선생에 대한 추도사가 실려져 있다. 뒤메닐과 레비의 부록글은 윤소영 교수의 입장에 동의하건 동의하지 않건 좌파 경제학 비판에 관심이 있는 이라면 정독이 필요한 글이며, 책에서 가장 마음에 부분이었다. 그러나 부록과 추도사는 서평에서 제외하고 다섯 개의 강의를 통해 지은이 윤소영 교수가 펼치는 논의를 살펴보겠다. 워낙에 이말 저말 많이 하고 있기 때문에 일단 개요를 정리하고, 다음에 평을 하기로 한다. 개요는 다섯 부분으로 나눴다: 1. 역사동역학, 2. 역사적 자본주의론, 3. 이데올로기 비판, 4. 윤소영의 역사, 현실 인식, 5. 윤소영의 정치적 판단. 앞의 개요 부분, 특히 중에서도 1, 2, 3 책을 읽지 않았다면 다소 지루할 것이다.

 

 

개요

 

지은이 윤소영 교수가 책에서 포괄하는 대상의 범위는 알튀세르가 [자본] 난점(논리와 역사의 관계) 공백(이데올로기 비판)이라고 칭한 것에 의해 결정된다. "일반화된 마르크스주의"란 이러한 두 가지 한계를 극복하려는 시도를 칭하는 것이다 (67). 따라서 지은이가 스스로 설정한 과제는 난점을 어떻게 해결하며, 공백을 어떻게 메꿀 것인가 이다. 전자는 2강과 3강에서 역사동역학과 역사적 자본주의론을 통해 다루어지며, 후자는 4강에서 이데올로기 비판을 통해 구성된다. 또 지은이는 알튀세르적인 경제학 비판은 곧 그로스만의 경제학 비판을 현대화시키려는 노력이라고 주장한다 (69, 105). 단순화의 위험을 무릅쓰고, 알튀세르 초기의 개념을 차용해 본다면, 이중의 프로젝트는 다음과 같이 도식화될 있다.

 

1.

                            일반성I                                                               일반성II                                          일반성III

난점    발리바르, 브뤼노프, 뒤메닐, 아리기         알튀세르-발리바르의 유물변증법       혁신된 그로스만적 계보

공백    스피노자, 게루, 마트롱, 바디우, 이리가레, etc.                 상동                                              인권의 정치

 

[약간의 caveats 추가되어야 한다. 여기서 일반성 III 현재 주어진 결과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지은이가 염두에 두고 있는 목표의 상이다. 이데올로기(일반성I) 과학(일반성 III) 대한 초기 알튀세르의 엄격한 구분은 무시한다. 윤소영은 구분이 비판사회학(일반성I) 경제학 비판(일반성 III), 소외론(일반성I) 이데올로기 비판(일반성 III) 간의 대조에는 적용될 있고, 이것은 알튀세르에 의해 완료된 것으로 ( 싶어하), 비판사회학과 소외론은 흘러간 옛노래 정도로 취급한다.]

 

1. 역사동역학

마르크스의 경제학 비판은 뉴턴의 동역학과 마찬가지로 운동의 법칙과 힘의 법칙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가치법칙과 잉여가치법칙은 가속도법칙과 같은 운동의 법칙이며, 자본생산성 하락의 법칙은 중력법칙과 같은 힘의 법칙이다. 그리고 양자의 상호작용을 통해 이해할 있는 행성운동법칙에 해당하는 것이 이윤율 하락의 법칙이다 (133). 뒤메닐과 폴리에 따르면, 마르크스의 가치법칙과 잉여가치법칙은 경험법칙이 아니라 가속도 법칙과 같은 정의법칙이며, 이윤율 하락의 법칙은 행성운동법칙과 같은 경험법칙이다 (133, 138, 141). 

 

 

2.

                                운동의 법칙                                    힘의 법칙                         행성운동법칙

정의법칙         가치법칙, 잉여가치법칙            

경험법칙                                                           자본생산성 하락의 법칙         이윤율 하락의 법칙

 

 

발리바르는 자본에 의한 노동의 포섭이라는 개념을 자본의 추상화와 노동의 구체성이라는 개념으로 발전시키는데, 자본의 추상화는 가치증식과정에 대한 논리적 분석을 가리키며, 노동의 구체성은 노동과정에 대한 역사적 분석을 가리키며, 논리와 역사 양자의 결합은 역사동역학 역사적 자본주의론으로 구체화된다. 이윤율 하락의 법칙은 동역학 모델에서의 궁극적인 설명대상인 동시에, 동역학 모델 외부의 상쇄 경향과의 경계 지점이다. 따라서 역사적 자본주의론은 역사동역학 바깥에 위치해 있다. 반면, 열역학 모델은 이윤율 하락 법칙과 이에 대한 반작용 요인을 모두 포함하고 있다 (150). 열역학 모델에서 자본주의의 역사는 엔트로피(비가역성) 증가의 법칙인 이윤율 하락의 법칙과 이에 반작용하는 제도적 요인의 네겐트로피(가역성) 상호작용을 통해서 설명된다. 뒤메닐은 이러한 역사동역학에 개의 동역학(부문간 경쟁, 경기순환) 추가한다.

 

지은이는 이러한 개념적 패러미터들을 정립한 , 뒤메닐과 아리기를 따라, 이윤율의 이론궤도와 현실궤도를 추적한다 (161-165, 219).

 

2. 역사적 자본주의

지은이는 1차 산업혁명 이후 자본주의적 기술혁신의 역사를 대략 다음과 같이 본다 (242).

(1) 1차 산업혁명              1780년대-   : 면직물 산업,

(2) 1차 교통, 통신혁명      1850-60년대: 철도, 전신            1880-90년대: 전화

(3) 2차 산업혁명              1910-20년대: 자동차 산업

(4) 2차 교통, 통신혁명      1950-60년대: 항공, 우주산업      1980-90년대: 컴퓨터, 인터넷산업

 

위의 1에서도 나와 있듯이 윤소영은 발리바르, 브뤼노프, 뒤메닐, 아리기 등에 주로 의지하여 이윤율 하락의 법칙과 이에 반작용하는 제도라는 관점에서 20세기 자본주의의 역사적 전개를 살펴보고 있다. 역사동역학은 신자유주의 시대가 금융화에 의해서 추동되는 에포크라는 사실을 설명한다. 제도의 측면에서 보았을 , 20세기 자본주의의 중요한 변화는 법인자본주의의 형성이다. 여기에서는 단계가 관찰된다 (196, 202-220): (1) 1890-1900년대의 법인혁명, (2) 1910-20년대 관리자혁명, (3) 1930-40년대 케인즈혁명. 신자유주의는 이렇게 형성된 법인자본의 다양한 제도가 해체되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신자유주의는 2차 교통, 통신혁명이라는 맥락 속에서, 그리고 금융화와 법인자본주의 제도의 해체라는 측면에서 이해 되어야 하며, 여기에 9.11 이후 금융세계화와 군사세계화의 평행적 발전 (251)이라는 측면이 고려되어야 한다.

 

3. 인권의 정치

발리바르에 의해 스피노자가 주목받는 이유는 마르크스에게는 공백으로 남아있는 이데올로기 비판을 보충할 있는 가능성 때문이다. 그러나 스피노자의 인간학에는 자체만으로는 해결할 없는 논리적 궁지, 아포리아가 존재하는데, 이는 특이성이 아닌 개인성에 기반한 인권의 정치에 의해 보충됨으로써 비로소 이데올로기 비판으로  기능하게 된다. 발리바르는 스피노자의 아포리아를 대중의 공포에서 찾으며, “스피노자의 철학을 현재화하기 위해서 대중의 공포라는 스피노자의 아포리아를 인권의 정치라는 비철학을 통해서 해결해야 한다” (283). [cf. 여기서 철학과 비철학의 결합은 난점으로부터 야기된 논리와 역사의 결합에 상응하는 것처럼 보이며, 이진경이 말하는 내부와 외부 같은 것처럼 읽힌다.]

 

인권 개념은 주체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양산한다. 이제 주체는 단순한 인간이 아니라, 시민, 시민-주체를 뜻한다. 인권의 정치, 시민권의 정치의 메커니즘이 봉기(주체화) 구성(주권적 주체로서 시민 자신에 대한 예속)이다. 인권의 정치는 바로 인간=시민이라는 등식에 더하여 자유=평등이라는 등식을 더한 것이다. 그리고 가지 등식을 선언하는 , 그것이 바로 봉기이다. 봉기적 명제를 실현하기 위한 구성(constitution, 헌법)이라는 측면에서 프랑스 혁명 이후에 전개된 헌법의 토대가 소유인가 공동체인가라는 쟁점은 현대정치를 결정하는 첫번째 모순[소유-공동체 모순]이며, 자유주의와 공화주의의 대두는 모순의 표현이다. 그러나 모순은 지양되고 가지 새로운 모순이 등장한다. 소유 내부에서는 소유권-노동권 모순이, 공동체 내부에서는 민족공동체-계급공동체(노동자연합) 모순이 등장한다. 새로운 전개를 통해서 소유권과 민족공동체가 결합하고, 노동권과 노동자연합이 결합하면서 현대정치의 이데올로기적 형식으로서 인권의 정치가 본격적으로 전개된다 (301). 결합 간의 대결, 공화주의적, 민족주의적 자유주의와 공산주의 사이의 갈등이 현대정치를 특징짓는다.

 

발리바르에 따르면, 공산주의는 가지 역사적 형태를 갖고 있다: (1) 기독교적 공산주의, (2) 시민적 공산주의, (3) 마르크스주의, (4) 페미니즘.

 

4. 윤소영의 역사현실인식

책의 도입 부분인 1강에서 윤소영은 1979-80년의 경제위기와 87년의 3저호황, 97년의 경제위기 등과 정권의 성격, 운동권의 흐름들을 일별하고 있다. 가장 특이한 것은 남한 신자유주의의 기원을 박정희 정부의 1979 4 경제안정화종합시책으로까지 소급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책에서 말하고 있지는 않지만 Volcker Recession 시기적으로 일치한다. 이에 따라 부마항쟁과 광주항쟁은 남한 최초의 반신자유주의 투쟁들이었다는 해석을 내놓는다. 따라서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정부는 신자유주의 정권이라는 점에서는 차이가 없다는 것이다. 해석에 대한 가치판단은 별개의 문제이지만, 일단은 무척 새로운 해석이다.

 

97 경제위기, 외환위기의 본질은 이윤율의 급속한 하락, 원인은 금융화와 재벌이다.

 

윤소영은 1981년경 시작된 미국경제의 에포크가 2012-13 정도에 종료될 것으로 파악한다 (58, 153, 158, 163-4, 185-186). 그는 1929 대공황을 전후로 해서 영국 노동당이나 독일 사민당도 집권에 성공했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며, 어쩌면 민주노동당이 2012 대선에서 집권할 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단다. 윤소영이 보기에, 위기에 집권한 좌파당들은 자본주의의 위기를 관리하고 공산주의적 이행을 저지하는 역할을 해왔기 때문에, 만약 2012 민주노동당이 집권한다면, 그건 축하할 일이 아니라 자본주의적 이행을 뜻하므로 역사의 반동. 그러나 윤소영이 보기에 2010년대의 최종적 위기는 영국자본주의에서 미국자본주의로의 이행으로 해결되었던 지난 위기와 달리, 그러한 자본주의적 이행으로 해결될 가능성이 거의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착취의 모순과 이데올로기적 반역이 해후한 공산주의적 이행이 도래할 수도 있다는 얘기다. 이 순간 노동자는 대중에서 계급으로 떨쳐일어난다. 크로노스의 시간이 카이로스의 시간으로 바뀐다. 이거 뭔가? 이게 윤소영이 복원하고자 하는 그로스만의 붕괴론인가?]

 

5. 윤소영의 정치적 판단

윤소영은 여기저기서 난삽하게 자신의 정치적 판단들을 밝히고 있다.  생각나는대로 몇가지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1) 산별노조 대신 일반노조, 지역노조로 가야 한다. (2) 성매매금지법은 얼치기 페미니스트들이나 주장하는 것이다. 성노동자성을 인정해 한다. (3) 학교는 확대되어야 하고, 가족은 축소되어야 한다. 결혼이 아니라 자유결합이 좋은거다. (4) 참여연대가 하고 있는 것은 뻘짓인데, 소액주주의 권리를 옹호하는 것은 초민족자본의 지배를 공고히 해주자는 것이다 (233-234, 236). (5) 스크린쿼터문화연대는 웃기는 거다 (297-8). (6) 신자유주의에 대한 투쟁에서 주목받는 구조조정에 대한 투쟁은 금융세계화의 결과에 대한 투쟁이다. 중요한 것은 원인에 대한 투쟁, 금융세계화 자체에 대해 투쟁해야 한다.

 

 

 

윤소영의 아포리아를 드러내는 식으로 엄밀한 서평을 써볼까 생각하다가, 경제수학도 젬병이고, 불어도 못하며, 마르크스의 가치법칙에 대해서 생각을 정리하지 못한 내가, 베토벤과 PD 음악에 대한 윤소영의 말들을 뻘소리라고 생각하는 내가, 그걸 하려다 보면 너무 피곤하고 헛물만 가능성도 있고 해서, 그렇게 거창하게 나가기로 했다. [ 사실 윤소영의 절대지에 대한 추구는 나름대로(!) 존경하지만, 절대미에의 탐닉과, 절대지와 절대미를 결합시키고, 그것을 어떤 진짜 마르크스주의자의 자격 같은 것으로 특권화하려는 것은 미안하지만 뻘짓이라고 생각한다.]

 

일단은 1강에서 나온 남한 신자유주의의 기원을 1979년으로 소급하는 논의는 새로웠다. 일리 있다. 그런데 논의를 지배블럭으로부터 확장시켜서, 부마항쟁과 광주항쟁을 반신자유주의투쟁이라고 주장하려면 세밀한 역사서술이 있어야 하는데, 나는 이것은 윤소영이 그럴 마음도 없을 것이고, 그럴 능력도 될거라고 본다. 주장이 약빨이 먹히려면, 항쟁참여자들이 자신의 적을 뭐라고 규정했으며, 그것이 어떻게 해서 신자유주의가 현실화된 것인 설명해야 한다. 그리고 윤소영은 '협상된 이행'으로서의 문민화 과정을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