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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 국가와 제국주의
남구현 지음 / 한신대학교출판부 / 200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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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은 1993년에 완성된 남구현 교수의 박사논문의 일부를 10년도 지난 2004년에 번역 출판한 것이다. 지구화에 관한 마지막 장은 2003년에 새로 쓰여졌다고는 하나, 귀담아들을 만한 주장이 있지는 않다.

 

저자는 가치, 잉여가치, 자본, 계급, 국가, 제국주의로 확장되는 범주적 발전 방법론을 적용하여 국가와 제국주의 개념을 이론적으로 엄밀하게 규정하고자 시도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논문 심사시에는 동구의 정통 맑시즘과 서구 맑시즘의 한계를 뛰어넘을 있는 새로운 이론적 단초를 열어주었다는 과찬 받기도 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뻥에 너무 순진하게 넘어가서 책을 사고 말았다. 다음과 같은 허장성세도 눈에 거슬린다: "잉여가치의 범주를 출발점으로 '국가'와 '제국주의'의 두 범주를 발전시키고자 시도한 것은 필자가 처음이다. 이는 오로지 범주적 발전, 대립물의 통일과 반대물로의 전환, 내용과 형식의 변증법, 내부 모순과 외부 모순의 이중적 변증법 등 주로 맑스의 자본 분석에 구사되어진 변증법적인 사고로부터 배운 방법론을 적용하려고 노력함으로써 가능했다" (7). 남구현 선생이 처음 했다는 게 사실인지 아닌지 잘 모르겠지만, 책의 품질이나 저자의 성취를 평가할 때, 그 부분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저자가 스스로 목적으로 설정한 가치로부터 제국주의로까지의 "범주적 발전"을 얼마나 잘 구성했는가 하는 문제일 것이다. 그러나  책의 구성은 용두사미의 전형이다. 나는 책에서 읽을만한 부분은 2장밖에 없다고 감히 주장하고 싶다. (2장과 다른 장들을 사람이 과연 동일인일까 싶을 정도이다.) 

 

-범주적 발전의 분할

일단 범주적 발전 방법론을 보자. 주지하는 바와 같이, [자본] 3권의 마지막 장인 계급은 미완성인 채로 끝이 난다. 따라서 가치에서 계급까지의 범주적 발전은 힘들긴 하지만, [자본] 정성껏 읽으면 추적이 비교적 가능하다. 다른 한편, 애초 맑스의 정치경제학 비판 플란에 들어있던 국가, 세계시장과 해외무역, 식민지 부분에 대한 연구는 그의 생애에 불행히도 실현되지 못하였다. 따라서 40년에 걸쳐 저술된 방대한 맑스의 저작들 곳곳에국가와 제국주의에 대한 그의 통찰은 흩어져 있으며, 통찰들을 추적하여 [자본론] 같은 형태로 맑스의 국가론 제국주의론 곳에 재구성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제국주의라는 자체를 맑스는 쓰지도 않았다).* 동구사회주의가 붕괴한 직후인 1990년대 초반 당시 박사 논문을 쓰던 젊은 학자 남구현 선생은 맑스 저작에 대한 열정적인 독해를 통해 바로 야심만만한 작업에 도전했던 것으로 보인다. 나는 그가 구성해낸 범주적 발전을 서너 단계로 나누어 있다고 생각한다 ( 단계 구분은 서평자의 것이지, 저자의 것이 아니라는 명토박아두자). 먼저 그는 [자본] 정성껏 읽음으로써, 가치로 시작하여 잉여가치, 자본을 거쳐 ([자본] 3권의 마지막 장인) 계급까지의 범주적 발전 a 추적한다. 그리고 부가적으로 맑스의 기타 주요 저작의 독서와 개의 국가론 논쟁 – (1) 밀리반드와 풀란차스 간의 도구주의-구조주의 논쟁, (2) 알트파터와 히르쉬가 주도한 국가도출논쟁 힘입어 국가까지의 범주적 발전 b 구성한다. 이어서 제국주의를 핵심부 자본주의 국가 내부의 노동과 자본의 대립이 외화된 것이라고 주장하며 범주적 발전 c 구성한다. 그리고 70년대 이후의 신자유주의와 지구화를 제국주의의 연장으로 혹은 현대적 표현으로 이해하는 범주적 발전 d 구성한다고 봐줄 수도 있을 같다. (그런데, 지구화 부분에 대해서는 저자가 딱히 발전시키고 있는 것이 없기 때문에 범주적 발전이라고 보기에는 미흡할 같다).

 

-범주적 발전 a, b 구성의 상대적 성공

범주적 발전 a, b 2장에서 추적, 구성되며, c 3, d 5장에서 다루어진다 (4장은 주변부 국가를 다루는데, 내용 없다). 2장은 상당히 훌륭하다. 저자 남구현 선생의 [자본] 대한 꼼꼼한 독해와 [자본] 1, 2, 3권을 넘나들며 계기 간의 연관을 포착하는 능력이 돋보인다. , 기존 국가론 논쟁에서 제시된 대립구도에 개입하면서, 러시아의 법철학자 파슈카니스가 일찍이 1920년대에 제기했던 문제 계급적 내용이 공적인 국가에 의한 계급중립적 형식을 취하게 되는가 다시금 제기하고, 저자가 구성해낸 맑스 독해에 기반하여 이는 최대한의 자기 가치증식을 기본 동인으로 하는 자본 운동의 기본 법칙인 잉여가치법칙이 서로간에 평등한 상품판매자와 상품구매자를 규율하는 가치법칙의 관철을 매개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라고 대답한다: “자본주의적 생산에서는 노동력 상품의 판매자인 노동자와 구매자인 자본가 사이의 상품교환관계(임금을 매개로 계약관계) 기초하여 착취가이루어진다 (89). 국가의 계급성(내용) 계급중립성(형식) 간의 대비는 잉여가치 창출(내용) 가치에 기반한 등가교환(형식), 착취(내용) 평등한 개인간의 계약(형식) 간의 대립에 조응하는 것으로 유추되고, 이로부터 연장된 것으로 설명된다.

 

2장에서 방금 범주적 발전 a, b 구성을 읽은 독자들은 저자 남구현 선생의 내공에 기대를 하게 것이다. 그러면 됐다. 그냥 책을 덮어라. 이후의 장들은 기대가 실망으로 바뀌는 환멸의 연속이다. 실망을 글로 표현하는 필요가 있나 싶기도 하지만, 나는 저자에 의해 실패한 범주적 발전이 애초부터 불가능했던 것이 아니라 다른 식으로라면 가능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몇 자 적어둬야 하겠다.

 

- 제국주의, 범주적 발전 c의 궤도 이탈:

저자는 중심과 주변 간의 제국주의 모순을 자본과 노동 사이의 내적 대립이 외화된 것이라고 주장하는데, 이는 상품과 화폐 사이의 모순을 사용가치와 가치의 내적 대립이 외화된 외적 대립으로서 파악하는 맑스의 방법론에서 영감 받았다(93, 강조는 인용자)” 밝힌다. 그러면서 맑스가 일반적 등가물로서 기능하는 화폐의 역할을 밝힌 부분을 인용하고 있는데, 인용부분에서 맑스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하나의 등식이다. , 특정 상품 A [사용가치] = 일정액의 화폐 [교환가치]. 등호가 의미하는 등가성, 교환가능성은 등식 내부에서만 존재한다. 남구현은 등호를 대립으로 해석하며, 이를 개로 분리한다. (1) 상품 내부의 사용가치와 가치의 내적대립과 (2) 서로 대립하는 상품, 좌변(특정 양의 특정 상품 A) 우변(등가물/일반적 등가물/화폐) 간의 대립으로 분리한 , (2) (1) 외화라는 맑스의 설명을 제시한다. (이진경의 [자본을 넘어선 자본] 등가물로부터 화폐로의 발전에 대한 훌륭한 설명을 제시하고 있다. 지금 책이 없어서 정확하게 어느 부분인 지는 모르겠다. 한편, 맑스는 [잉여가치학설사] 2권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상품의 통일 속에 내포되어 있는 교환가치와 사용가치의 모순, 그리고 더 나아가 화폐와 상품의 모순은 하나의 연관된 운동으로서의 형태변형으로만 존재한다." ). 여기까지는 좋다. 그렇다 치자. 그런데 여기에서 받은 영감 어떻게 중심과 주변의 대립이 노동과 자본의 대립의 외화라는 주장을 정당화시킬 있는가? 뒤에 가서 설명이 나오나 열심히 찾아보았지만 헛수고였다. 중심과 주변의 대립(특별잉여가치의 이전transfer) 결코 노동과 자본의 대립(잉여가치의 착취exploitation) 외화로서 설명될 없다. 왜냐하면, 중심과 주변의 대립은 착취를 통해 설명될 없으며, 강한 (중심)자본과 약한 (주변)자본 간의 경쟁으로, 자본간 경쟁으로 설명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cf. Enrique Dussel). 강한 자본이 약한 자본을 착취한다고 말한다면, 착취 자본이 노동을 착취한다고 말할 때의 착취라는 개념과는 다른 헐렁한 수사일 뿐이다. 만약 저자가 중심-주변 간의 대립을 자본-노동 간의 대립이 외화된 것으로 정식화하려면, 우선 (1) 노동과 자본 간의 대립(곧, 자본 일반)이 어떻게 자본간 경쟁(다수 자본)으로 외화될 있는가, 그리고 (2) 이 자본 일반(자본-임노동)과 다수 자본(중심-주변)의 관계가 어떻게 상품내부의 교환가치/사용가치와 화폐/상품 간의 관계와 조응하는지를 설명해야 한다. 그러나 이 설명이 있어야 할 자리에 설명은 없고 영감만 달랑 있다.**   

 

한번 엇나간 범주적 발전은 교정이 불가능하다. 그러나 아쉬운 점은 계속 이어진다. 저자가 부족하긴 하나마, 그리고 별로 독창적이지도 않지만, 레닌의 제국주의론을 올바르게 비판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애초에 가치부터 시작해서 제국주의까지의 범주적 발전을 추적/구성하겠다는 야심만만한 작업을 요량이었으면, 레닌 말고 다른 고전맑스주의자들의 제국주의 연구나 60년대 이후의 맑스주의자들이 세계적 수준의 불균등발전을 맑스의 부등가교환에 의거 어떻게 설명하고자 했는지에도 주의를 기울였어야 했을 것이다. 저자가 힐퍼딩이나 로자 룩셈부르크, 니콜라이 부하린의 제국주의 논의를 제대로 살펴보았다면, 그리고 Emmanuel, Bettelheim, Palloix, Mandel, Carchedi 등의 부등가 교환 논의를 제대로 살펴보았다면, 범주적 발전의 궤도가 그런식으로 틀어지는 것을 미연에 방지했을 수도 있다. 저자는 문헌들에 대한 검증을 자신의 뛰어난 맑스 독해에 기반한 대단한 영감으로 떼우고 넘어가려고 한다. ( 걸렸다!)

 

- 지구화: 범주적 발전 d의 구성실패

게다가 저자는 19세기 후반의 고전적 제국주의의 역사적 특정성을 전혀 파악하고 있지 못하다. 당시의 제국주의가 자본주의 이전을 포함하여 이전의 제국주의와 어떻게 구분되는지, 그리고 오늘날의 글로벌리제이션과는 어떻게 유사하면서 동시에 또 어떻게 구분되는지 설명하지 못한다. 93쪽의 설명을 보라. 자본주의적 제국주의가 이전의 중국이나 로마 제국과 구분되는 것은 그것이 자본주의적이기 때문이다. 이건 설명이 아니라 동어반복이고, 기껏해야 환원주의이다. 이 주제에 관해서, 곧 자본주의적 제국주의와 전자본주의적 제국주의 간의 구분의 문제에 관한 가장 탁월한 개념화는 슘페터에 의해 이루어졌다. 논쟁의 여지가 있긴 하지만, 자본주의와 제국주의는 그 작동원리상 서로 충돌하기 때문에 자본주의 하에서 제국주의는 '격세유전'의 성격을 띠게 된다는 것이다. 한 번 나타났다가 사라지고, 잠복기 이후 다시 나타나며, 또 사라지는 이 격세유전으로서의 제국주의가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로마제국과 20세기 초반 당시의 제국주의를 비교하는 것을 시간낭비라고 생각했던 레닌은 다섯 개의 표지를 통해 당시 제국주의의 역사적 특정성을 포착하고자 하였다. 그 중 홉슨과 힐퍼딩이 감지했던 자본수출이나 금융자본의 급속한 팽창은 자본주의 장기파동의 특정한 국면에 나타나는 주기적 현상으로 바라볼 수 있다 (물론 홉슨, 힐퍼딩, 레닌은 장기파동을 인식하지 못했다). 장기파동의 한 국면, 그것은 나타났다가 사라지고, 다시 나타나는 것이다. 브로델이 "자본주의의 가을"이라고 부른 것, 그것은 농익은 자본주의, 하지만 열매를 수확하고 나면, 낙엽도 다 져서 앙상한 가지만을 남기고 겨울을 맞이한다. 다시 생명의 봄이 오고, 여름이 오고.. 가을은 늘 사라지지만, 다시 온다. 이 가을은 슘페터에 의해서는 자본주의적 제국주의의 특징인 '격세유전'(반복성)으로, 레닌에 의해서는 자본주의 '최고의 단계'(성숙)로 포착된다. 또 이 금융자본의 급속한 팽창은 1970년대 이후 과잉축적 위기에 대한 반동으로서 신자유주의를 통해 다시 나타난다. 자본의 집중과 집적의 증가와 금융자본의 팽창은 현재의 국면과 1870년대 후반 이후 20세기 초까지의 국면 양자에 동일하게 나타난다. 물론 현재는 과거 국면의 반복이 아니다 (하트와 네그리는 [제국]에서 아리기가 마치 역사를 반복되는 것으로 개념한 것처럼 왜곡함으로써 자신들의 몰이해를 드러낸다). 19세기 후반을 특징짓던 제국주의 열강 간의 경쟁은 지금의 국면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저자 남구현 선생은 슘페터의 개념화가 갖고 있는 이러한 함의는 전혀 잡아내지 못한다. 대신 슘페터 제국주의론의 지엽적인 측면에만 꼬투리를 잡아 흠집을 내는 (아마 레닌이 보기에도) 별로 생산적이지 못한 일에 시간 낭비를 한 것이다. 이로 인해 저자는 범주적 발전 d를 구성할 수 있는 하나의 가능성을 스스로 저버린 셈이 되는 것이다.   

 

- 그 밖의 아쉬움들

사실 3, 4, 5장에 나오는 독일어권 학자들의 논의를 일부(한글이나 영어로 번역되어 있거나, 애초부터 영어로 쓰여진 Schumpeter, Momsen, Senghaas, Elsenhans) 제외하고는 모른다. 따라서, 일단 어그러진 범주적 발전은 그렇다쳐도, 저자가 맑스를 읽었던 애정의 반의 반만큼이라도 기울여서 독일 학자들의 논의를 제대로 소개하고 저자 나름대로 비판했다면, 책은 나름대로 의미를 지녔을터이고, 책의 평가에 별을 한두 첨가할 용의가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전반적으로 자의적 해석과 성급한 비난 같다는 인상을 지우기 힘들었다

 

책의 가독성도 무척 떨어진다. 문장이 열몇 줄에 이르는 만연체(73-4) 그렇고, 잘못된 직역 (거대도시 metropolis[위성(satellite)과 대비되는 뜻에서 중핵이나 중추로 번역되는 것이 낫다]), 비일관적인 번역 (저발전의 발전/저개발의 개발, 폴란차스/풀란짜스) 등이 독자를 피곤하게 한다. 어렵게 밖에 없는 것을 어렵게 쓰는 것과  조금만 노력하면 쉽게 있는 것을 노고가 귀찮아 어렵게 쓰는 것은 천지차이이다. 10여년 전에 박사논문으로 써놓았던 책을 동안 기회될 때마다 챕터별로 번역해서 논문 형태로 여기저기 발표하고,안식년에 독일까지 가서 다시 손보고, 제자들까지 동원되어 번역 도와주고, 학교에서 학술연구비 지원까지 받아 출간했으면, 좀더 썼어야 하지 않는가? 그리고 형식은 돈받고 시장에서 팔리는 책인데 이렇게밖에 없단 말인가? 우울한 일이다

 

 

 

* 2010. 3. 29. 추기: "제국주의(역주?)는 태동하는 중간계급 사회가 봉건 제도로부터 스스로의 해방수단으로서 정교하게 다듬기 시작하였으며 또한 성숙한 부르조아 사회가 마침내 자본에 의한 노동의 노예화 수단으로 변형시켜왔던, 국가권력의 가장 매춘적이고 궁극적인 형태인 것이다. ... 역주: 보나빠르뜨 제국과 그 팽창적인 대외정책을 의미한다. 19세기 말 - 20세기 초의 자본 수출을 목적으로 하는 독점 자본주의 시대의 본격적인 제국주의와는 구별되어야 한다." (<프랑스 내전>, 임지현, 이종훈 옮김, <<프랑스 혁명사 3부작>> (1991년 개정판), 소나무, 343쪽) 

  

맑스가 "제국주의"라는 말 자체를 쓰지 않았다는 나의 문장은 틀렸다. 제국주의란 부르조아 스스로의 해방수단이면서 동시에 노동의 노예화 수단으로 발전한 국가의 가장 노골적인 형태라는 맑스의 언급은 <프랑스 내전> 저작 전체의 맥락 속에서의 주변적 위치에도 불구하고, 중요한 언급이다.   

  

* * 추기: 박승호의 [좌파 현대자본주의론의 비판적 재구성](pp. 256-7)을 읽으면서 알게 된 것인데, 맑스는 [잉여가치학설사] 3권에서 국가간 착취의 존재를 말한다: 일국의 3노동일이 타국의 1노동일과 교환될 경우, 가치법칙은 본질적으로 변형되고, "이 경우 부국은 빈국을 착취한다. 이 착취관계는 ... 무역을 통해 빈국이 상호이득을 얻는 바가 있어도 마찬가지이다"(Marx 1971: 106). 그런데 이 경우 착취는 가치법칙의 본질적 변형이라는 전제 하에서, 곧 부등가 교환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착취(exploitation)란 자본과 노동력 간의 등가교환을 전제하고 있는 것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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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자본주의의 역사 - 빼앗긴 들에 서다
강만길 엮음 / 역사비평사 / 200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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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으면서야 비로소 깨달을 수 있었다. 내가 한국통사에 관한 책을 읽은 게 아주 오래된 일이라는 것을… 80년대말 90년대초에 읽은 [다현사], [바보사], [청년을 위한 한국현대사], 서사연에서 펴낸 [한자발], 그리고 정확한 이름은 기억나지 않는 역사비평사에서 나온 누런 근현대사 책 이후 10년도 더 된 일이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고등학교 때부터 대학교 저학년 때까지의 아스라한 기억들을 더듬으며 여기 나오는 역사적 사실들을 배열하는 데에 시간이 좀 걸렸다. 사실 그동안은 1945년 이전의 한반도 역사를 공부하는 것을 의도적으로 삼가고 있었다. 현대에 관심을 국한시킴으로써 주의가 분산되는 것을 피하고 싶었다. 또 제도교육과 운동권 교육 모두를 통해 접했던 민족사 중심의 서술에 적잖이 물리기도 하였고, 한국과 일본 양국의 수구파들 덕에 최근 들어 더욱 시끄러워지고 있는 한국근현대사의 쟁점화에 내 눈과 귀를 더럽히고 싶지도 않았다. 20세기 초반을 이해하지 않고는 그 후반과 21세기를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정작 이러저러한 이유를 들어 미루고 있던 공부를 [한국 자본주의의 역사]를 통해 하게 된 셈이다.

 

이 책은 강만길 교수가 큰 틀을 잡고, 그 제자들이 알맹이를 채우는 방식으로 쓰여져 있다. 아무리 같은 학풍을 따르는 이들이고 조정작업을 거쳤다 하더라도, 책의 여기저기에 스며들어 있는 책 전체를 관통하는 역사상(歷史像)을 잡아내는 맛은 한 개인의 독자적인 저서에 비해 떨어진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아쉬운 점으로 인해 내가 얻을 수 있었던 이 저서의 통찰이 상쇄되는 것은 아니다. 이 책은 무엇보다도 그간의 한국통사 책을 통해 접했던 한반도를 '닫힌 공간'으로 서술하는 민족사완결주의적 사관과 거리를 두고 있다. 곧 이 책에서의 역사 서술대상 -곧 일제시대의 한반도와 해방 이후의 남한 – 이 자본주의 세계경제의 역사적 전개에 배태되어 있다는 점이 책 곳곳에서 드러난다. 이처럼서술대상을 전체의 부분으로 파악함으로써 역사서술의 범위를 시공간적으로 한정짓는 것은 그 자체로서 이 책이 말하지 않는 부분 – 예컨대, 강만길 교수가 언제고 보충되기를 희망하는 해방 이후 북한의 역사 – 을 명확히 함으로써, 그 부분과의 연관을 어떻게 구성해나갈 것인가, 나아가 한반도와 한반도를 포괄하는 더 큰 실체인 동아시아나 자본주의 세계경제 간의 연관을 어떻게 구성할 것인가, 곧 한반도라는 부분을 자본주의 세계경제라는 전체의 역사적 전개 속에 어떻게 위치지울 것인가 하는 과제를 제시하는 것이다.  이 점에서 이 책은 그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할 수 있을 것 같다.

 

내 나름대로 몇 가지 문제를 제기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봉건제라는 용어의 사용이다. 조선 땅이 일제 식민지화를 거치면서 자본주의 세계경제로 편입되었다는 올바른 인식에도 불구하고, 편입 이전의 사회 성격을 기술하는 데에 있어 ‘봉건제’ 혹은 ‘봉건적’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은 잘못이다. 저자들은 봉건제에 대한 어떠한 정의도 없이 이를 前자본주의 사회 일반과 관성적으로 동일시하는 우를 범한다 (30쪽, 79-80쪽,  etc.). 봉건제는 자본주의 세계경제 발흥 이전에 서유럽과 일본 정도에서만 발견되는 역사적으로 아주 특이한 사회형태이지, 그 자체로서 역사적 보편성을 획득한 개념이 결코 아니다.

 

둘째, 이 책의 대상 독자층은 아무래도 학부에서 근현대사 교양수업을 듣는 대학 1-2학년생들이 아닐까 싶은데, 이 때문인지 역사적 사료에 대한 각주 처리가 대부분 생략되어 있고, 각 장 끝에 주요참고문헌만을 덧붙이고 있다. 뭐 대중적으로 읽히겠다는 의도야 좋지만, 기왕에 연구자들이 공들여 연구한 내용일텐데, 논쟁의 여지가 있는 역사적 사실들은 각주처리를 하거나 박스 처리를 해서라도 그 사료를 명확히 게시하는 것이 좋았을 것이다. 특히, 식민지근대화론자들의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고 이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수구파들이 판치는 (또 노골적으로 그 수구파들에게 구애하는 일부 식민지근대화론자들이 존재하는) 작금의 상황에서, 역사상(歷史像) 간의 대결은 역사적 사실들 간의 실증적 대질을 통해 수행된다는 점을 염두에 두면 이는 꼭 필요한 일이었다고 여겨진다. 예컨대, 조선 말기 남발된 백동화의 상당 부분이 일본인에 의해 오사카에서 위조되었다는 서술이 나오는데 (89쪽), 이 사실의 출처나 근거 혹은 사료가 무엇인 지는 나와 있지 않다. 또한 노동력 강제동원의 추정치를 제시하면서 자료마다 심한 편차를 보인다고 하면서 그것을 단순히 “일제의 조선인 동원이 강제적이고 무차별적으로 진행되었다”(183쪽)는 사실을 반영하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은 다소 naïve하다는 느낌이다 (최근들어 문제를 많이 일으키고 있는 이영훈 교수가 얼마전 종군위안부의 추계에 대해 문제를 제기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이는 식민지근대화론자들의 좋은 공격거리이다).

 

셋째, 이 책에서 구사된 비판적 역사 기술의 준거에 관해 문제를 제기해야 할 것 같다. 이 책의 관점은 한반도의 운명에 영향을 끼친 엘리트들의 정책 운용에 대해 비판적이다. 문제는 역사적으로 실제로 있었던 일에 대해 비판적인 것 자체가 아니라, 그 비판의 준거이다. 이런 식이다. 일제 강점기나 미군정기의 역사 전개나 장면 정부의 역사적 한계 등을 비판할 때에는 '만약 자주적 국민국가를 세웠다면 그러지 않았을텐데' 하는 식으로 늘 反사실적 준거가 동원된다. 이 자주적 국민국가가 뜻하는 바가 무엇인가? 아무리 곰곰히 생각해봐도 자본주의 세계경제 내부에 이 국가가 존재해야한다는 현실적 전제를 유지한다면, 이 국가는 힘센 국가, 핵심부 국가일 것이다. 그리고 핵심부 국가들 중에서도 일본이나 영국 같은 나라들도 헤게모니 미국의 눈치를 보고 있으니, 과장을 약간 보태면, 자주적 국가는 결국 헤게모니인 미국 말고는 없을 것이다. 결국 이 反사실적 준거란 ‘우리가 미국만큼 힘이 셌으면’ 하는 소망적 사고(wishful thinking)에 다름 아니다. 이처럼 반사실적 준거에 의지하기보다는 역사서술대상(식민지 조선과 이후의 남한 경제)의 희생이 과연 가해자 혹은 강자(일본 제국주의와 미국 헤게모니)의 이득으로 연결되었는가, 그리고 만약 그랬다면 이러한 불평등 관계가 어떻게 구조적으로 재생산되었는가를 명확히 보여주는 것이 더욱 설득력 있는 서술이었을 것이다. 사실상 이러한 서술은 이 책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으며, 이를 더 발전시키는 것이 반사실적 판단준거를 들이대는 것보다 책의 품격을 더욱 높였을 것이다.

 

넷째, 이 책에서 다루어진 근현대사 공간의 역사적 사실들의 서술에 대한 평가는 본인의 역량 바깥의 문제이지만, 책 마지막에 실린 신용옥의 “보론: 박정희정권기 경제성장에 대한 비판적 고찰”에 대해서는 몇마디 해두어야 할 것 같다. 발전국가론에 대한 제대로 된 국내 비판을 별로 접해본 기억이 없는 내게 이 글은 무척 반가웠다. 특히 그가 이승만정권과 박정희정권을 대비시키면서 발전국가론이 간과하고 있는 재원의 성격변화(무상원조에서 유상차관으로)를 강조한 것은 발전국가론에 대한 역사학자의 개입으로서 매우 탁월하다고 생각한다. 또한 동아시아 발전국가들의 성취를 가능하게 했던 당시의 특수한 세계체제적 환경을 강조한 점 역시 옳다. 그러나 (1) 발전국가론을 ‘유교자본주의’론과 함께 “한국 자본주의 성격에 대한 ‘우파’의 종별 규정”(312쪽)으로 바라보는 것은 발전국가론에 대한 “지나치게 독창적인 오해”이다. 더구나 양자를 이데올로기적으로 한 통속으로 취급하는 것은 둘에 대한 몰이해를 드러내는 것이다. 또한 (2) 그의 주된 비판대상으로서 등장하는 발전국가론 문헌은 발전국가론의 기초를 닦았다 할 수 있는 찰머스 존슨(일본)이나 앨리스 앰스덴(남한), 로버트 웨이드(대만)의 대표적 저작도 아니다. 뿐만 아니라, 상이한 이데올로기적 구성을 보이는 저작들을 발전국가'론'으로 동질화하여 취급하는 것 또한 성급해 보인다. 게다가, 90년대말 경제 위기 이후 신자유주의의 이데올로기적 공세에 대한 방어의 성격을 띠고 있는 웨이드와 베네로소의 글을 단순히 발전주의 옹호론으로 독해하는 것도 무리라고 생각된다.  (3) 또한 발전국가론에 대한 비판의 준거도 좌에서 우로 오락가락 진동한다. 한 번은 전형적인 IMF의 논리를 들이대며 발전국가가 ‘연고자본주의(crony capitalism)’의 온실이었다(322쪽)는 우파적 비판을 하다가, 또 다른 곳에서는 발전국가 속에서 자본주의의 모순을 극복하기 위한 대안적 요소를 찾기란 불가능하다(327-8, 329쪽)는 좌파적 비판을 하기도 한다. (4)또 아시아 경제 위기에 대한 웨이드와 베네로소의 논문을 음모론 정도로 격하하고 있는데(329쪽), 도대체 이 글의 저자 신용옥 선생의 내공이 얼마나 대단한 지 궁금하다. 정치경제학 연구는 보통 특정 행위자의 행위가 구조에 미친 영향이 보다 강조될 경우 음모론처럼 보이는 반면, 개별 행위에 대한 전체 구조의 제약이 강조될 경우나 개별 행위가 전체 구조의 재생산에 어떻게 기여하는 지가 강조되면 기능주의처럼 보이게 마련이다. 따라서 정치경제학 연구는 음모론과 기능주의라는 양극단의 유혹에 언제나 맞서야 한다. 그러나 아시아 경제 위기는 ‘월가-미국 재무부-IMF 복합체’의 정책행위의 결과로서 드러난 것이라는 웨이드와 베네로소의 주장은 정당하다. 물론 이 복합체가 한국 경제를 말아먹으려고 음모를 꾸민 것도 아니며, 웨이드와 베네로소가 그런 주장을 하는 것도 아니다. 그들은 강력한 행위자(‘월가-미국 재무부-IMF 복합체’)의 행위 결과가 어떻게 구조의 약한 부분(경제위기에 노출된 동아시아 국가들)을 통해 드러났는 지를 훌륭하게 설명하였을 뿐이다. 이것이 어떻게 음모론인가?

 

할 말은 더 있는데, 이 쯤에서 접는 게 나을 것 같다. 그래도 이 책은 한국 근현대 경제사를 이해하는 첫 걸음으로서 손색이 없다. 보론은 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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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제국주의 한울아카데미 737
데이비드 하비 지음, 최병두 옮김 / 한울(한울아카데미) / 2005년 5월
평점 :
절판


1. 주요개념

(1) spatio-temporal fix

개념을 한국말로 옮기기 쉽지 않은 이유는 여기서 'fix' 중의적 개념이기 때문이다. 첫째, 문자 그대로의 뜻은 '고정' 정도로 번역할 있다 (내가 기억하기로 [포스트모더니티의 조건]인가 [자본의 한계]인가 (아님 [희망의 공간]?) 에서는 시공간 고정으로 번역되었던 같다). 투하된 총자본 일부는 상당기간 동안 물리적 형태로 토지에 '고정'된다 (건물, 하수도, 도로, 공공 교육체계, 의료복지 체계, etc.). 둘째, 은유적 함의로서, 어떤 오작동이나 고장에 대한 '수리'라는 뜻으로부터 도출된 것으로, 자본주의적 위기에 대한 해결책을 뜻한다. 자본주의의 과잉축적 위기에 대한 대응책으로는 가지가 있을 있다. 하나는 단기적 이윤 확보가 용이치 않은 공공 하부구조에 대한 장기적 투자를 함으로써, 고용창출 효과와 더불어 미래의 경제 활성화의 기반을 마련하는 (케인즈주의적 방식)이고, 다른 하나는 잉여가치 실현의 위기를 맞고 있는 상품들의 판로를 개척하거나 값싼 노동력을 고용하여 비용을 줄이기 위하여 지리적 팽창을 도모하는 (로자 룩셈부르크의 제국주의적 방식)이다. 실제의 경우에서는 양자가 조합되기도 한다. 전자의 경우는 이윤이 회수되는 시점을 시간적으로 지연시킴으로써, 후자의 경우는 자본의 순환범위를 공간적으로 확장시킴으로써, 위기에 처한 잉여자본의 순환과 잉여가치의 실현을 가능케 한다.

 

그러나 가지 의미들 - , '고정' '수리' - 서로 충돌한다. 자본이 고정된 곳에는 자본이 투여된 건축물들 뿐만 아니라, 자본에 고용된 인간들과 그들의 가족들, 생활공간들, 사회적 관계들이 존재한다 (첫번째 ). 만약 자본이 위기에 대한 타결책으로 보다 값싼 노동력이 있는 외국으로 이동했다고 해보자 (두번째 ). 사회적 관계는 자본이 철수한 후에는 공장 건물들만 남는 것이 아니라, 공장과 동네의 활기를 구성했던 사람들이 남는다. 사회적 관계는 관성을 갖고 있으며, 관성은 자본 철수에 대한 저항을 유발한다.

 

사회적 관계의 관성이 야기하는 저항은 하비가 'switching crises'라고 칭하는 - 자본의 흐름이 공간에서 다른 공간으로 움직임으로써 야기되는 효과 - 중요한 부분을 구성한다. 자본주의 전체는 상대적으로 안정성을 유지한 남아 있게 되지만, 부분들이 감내해야 하는 어려움들(금융위기, 탈산업화, 가치감소 devaluation) 갈수록 격화된다. 전지구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과정은 '강탈에 의한 축적 accumulation by dispossession' 동반한다.

 

(2) accumulation by dispossession

개념을 통해 하비는 하나의 오래된 난국을 피할 있었다. 개념이 나오기 전까지 세계체계 시각의 학자들(아민, 프랭크, 월러스틴)이나 Socialist Register 필진 일부는 지속적인 원시적 축적, 혹은 지속적인 본원적 축적 (ongoing primitive/original accumulation)이라는 모순적 개념을 써야 했다. 형용모순의 시발점은 로자 룩셈부르크인데, 그녀는 자본주의의 확대재생산과 본원적 축적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동시에 진행되고 있으며, 이것이 제국주의의 본질이라고 주장한 있다. 자체는 그녀의 통찰력을 보여주는 것이었지만, 결론을 도출하는 방식에 있어서, 룩셈부르크가 보여준 이론적 설명은 맑스의 확대재생산도식에 대한 오해에 기반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부하린에 의해 철저하게 공박된다). 로스돌스키 또한 룩셈부르크의 자본주의 확대재생산과 본원적 축적의 동시적 진행 테제에 대해 비판한 있는데, 지금 기억하기로는 맑스에게 있어 소위 본원적 축적은 자본주의에 역사적으로는 선행하는, 그리고 분석적으로는 외부에 존재하는 것이라는 내용이었던 같다. 세계체계 시각의 학자들이 양자의 유기적 연결과 동시적 진행을 이야기했던 것은 맑스가 본원적 축적이라고 보았던 것이 현재의 고도 자본주의 사회에서도 끊임없이 재생산되고 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이는 맑스가 소위 본원적 축적이라고 불렀던 것의 어떤 내용이 현재도 존재하고 있다는 뜻이지, 그것 자체가 본원적 축적인 것은 아니다. (? 맑스의 본원적 축적이나 아담 스미스의 사전적 축적은 자본주의 이전에 존재한 것이니까; 또한 맑스에게 소위 본원적 축적은 자본주의의 확대재생산에 있어 계기로 고려되지 않으니까) 하비의 기여는 세계체제 분석이 본원적 축적의 지속적 진행이라는 잘못된 개념을 통해 제기하고자 했던 올바른 관찰을 '강탈에 의한 축적'이라는 개념적 교정을 통해 정당화한 것이다. '강탈에 의한 축적' 맑스가 본원적 축적이라고 것의 핵심이면서도, 자본주의 확대재생산의 내적 계기로서 여전히 지속되는 것이다. 이것의 효과는 재생산 도식에 대한 맑스의 설명을 제한시키는 것이다. 대신 하비는 ‘자본축적의 분자적 과정’(아쉽게도 여기에 대한 충분한 분석은 제시되지 않는다) 강탈에 의한 축적의 동시적 진행이라는 자신의 테제를 제시한다. 그리고 강탈에 의한 축적의 주요 담지자로서 국가와 금융기관을 들고 있다. 

 

2. 이론적 개입으로서의 의의

(1) 레닌주의적 제국주의 개념의 교정

평화적인 초제국주의 시대의 도래 가능성을 점친 카우츠키를 비판한 레닌에게 제국주의는 표현이 어떤 식으로 이해되든 간에, 그것이 자본주의의 최고의 단계이든, 최후의 단계이든, 최근의 단계이든 간에 자본주의의 임박한 파국을 알리는 하나의 단계이며, 이는 다섯 개의 표지를 통해 있는 것이었다. 하비는 좌파 내에서 지배적이었던 레닌주의적 개념을 한나 아렌트의 제국주의 개념과 대비시킨다. 레닌과 달리, 아렌트는 19세기 후반 - 20세기 초반의 제국주의를 부르주아의 첫번째 정치적 지배의 시대로 이해한다. 하비는 이런 대립적인 개념화 (최후와 최초) 간의 대비를 통해, 제국주의의 지배적 이미지(1. 레닌주의적 개념화따라서 2. 오류) 불식시킨다. 동시에 그는 맑스 뿐만 아니라 슘페터와 브로델에 의해 영향 받은 아리기의 자본주의적 팽창 논리와 영토적 팽창 논리 간의 교체 진행 테제를 도입한다. 여기에 위에서 '강탈에 의한 축적'이라는 자신의 개념적 교정을 통해 로자 룩셈부르크의 문제의식을 정당화시킴으로써 새로운 제국주의 논의를 진행해나간다.

 

(2) 보편주의와 특수주의 사이 어디선가에서의 새로운 주체 구성

하비는 하트와 네그리의 [제국]에서 상정된 무차별적, 동질적, 비정형적 집단인 '다중' 어느 마법처럼 분연히 떨쳐일어나 지구를 접수하게 거라는 한편의 순진한 환상과, 반대로 특수한 투쟁 고유의 1차적 중요성만을 강조함으로써 다른 집단과의 소통과 연대를 힘들게 하는 다른 한편의 국부적, 특수주의적 주체관 사이 어디 쯤에 새로운 주체를 구성하는 것의 중요성을 지적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반자본주의 반제국주의 투쟁 주체의 표적은 금융기관과 국가기구이다. 어느 정도의 공감에도 불구하고, 허탈함이란... 아마 그것은 하비가 채울 몫은 아닌 같다.

 

3. 아리기의 하비 수용

하비의 이 책에 끼친 지오바니 아리기의 영향력은 상당히 크다. 하지만 동시에 이 책에서 개진된 하비의 분석들 역시 아리기에게 영향을 끼쳤다. 얼마전 아리기는 New Left Review에 하비가 이 책에서 개진한 내용들을 역사적 자본주의의 전개에 관한 설명에 자신이 어떻게 활용하고 있는 지를 흥미진진하게 밝혀 놓은 바 있다 ("Hegemony Unravelling" I & II , New Left Review. 32: pp.23-80, 33: pp.83-116). 그는 대체로 하비에 공감하면서, 그를 추켜 세우기도 하고 (슘페터의 창조적 파괴의 공간적 표현이 어떻게 나타나는 지 하비가 잘 보여주고 있다 이런 식으로), 이의를 제기하기도 (예컨대 하비가 자신의 논리를 오독했다거나 하는 식으로) 한다. 아리기는 하비의 spatial fix라는 개념을 기존에 자신이 주장해왔던 축적체제 주기와 헤게모니 교체 메커니즘에 적용함으로써 자신과 하비의 설명 모두를 풍부하게 하고 있다. 이 글을 통해 아리기는 클린턴 시대의 신경제를 헤게모니 쇠퇴 직전의 번영기 (belle epoque)로 해석하며, 신자유주의로부터 신보수주의로의 전화를 이 번영기의 종말로 이해한다. 또한 이는 클린턴 시절 경제정책의 기조 역할을 했던 글로벌리제이션 담론이 아들 부시 시대에 이르러 급격히 소멸되었다는 점을 통해 강조된다. 현재 미국에 군사적으로 대적할 국가는 아무도 없다. 그러나 (피터 고완이 그의 역작을 통해 개념화한) '달러-월스트리트 체제'는 갈수록 위기를 맞고 있다. 이전의 쇠퇴하는 헤게모니는 모두 채권국이었던 데 반해, 현재 미국은 채무국이라는 점은 미국 헤게모니 쇠퇴가 이전의 역사적 헤게모니의 쇠퇴와 구분되는 가장 특이한 점이다. 아리기는 이를 통해 미국 헤게모니의 쇠퇴가 이전보다 훨씬 더 가파를 것이라는 사실을 암시한다. 또한 이전까지는 헤게모니의 교체에 (현재 이라크에서의 전쟁보다 훨씬 규모가 큰) 대규모 전쟁이 동반되었다. 과연 미국 헤게모니의 몰락은 어떠할 것인가? 몰락하기는 몰락하는가? 아리기보다 오래 살면서 지켜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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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4-20 04: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6-09-28 08: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근대 동아시아 역사상의 재구성
나카무라 사토루 지음, 정안기 옮김 / 혜안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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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 가을을 맞이하며 읽은 책이다. 간단하게 책의 미덕과 단점을 추려보자.

 

책의 첫째 미덕은 오래 돕과 스위지에 의해 주도된 자본주의 이행 논쟁이나 국내의 내재적 발전론과 식민지 근대화론 간의 대립 등이 기반하고 있는 하나의 허위적 대립을 지양하고 있다는 것이다. 허위적 대립은 맑스가 {자본} 3권의 말미에서 구분한 초기 자본주의 발전의 가지 길이다. 구분을 통해 맑스는 생산력이 발전함에 따라 질곡으로 작용하게 기존 생산관계가 모순을 잉태, 발전시킴으로써 자본주의가 내적 모순의 작동 결과로 등장하게 되는 "진정으로 혁명적인 " 외부에 이미 성립되어 있던 자본주의적 시장 세력에 의해 기존의 전자본주의적 관계가 잠식되는 경로 가지를 설정한다. 그러나 이러한 구분은 베버적인 의미에서의 이념형이다. 현실에서 초기 자본주의 발전의 경로는 양극단 사이의 어디 쯤에 위치하고 있는 것이지, 결코 양자 하나로 clear-cut하게 나누어질 있는 성격의 것이 아니다. 만일 자본주의로의 이행의 역사적 사례들이 양자 하나로 범주화될 있다고 믿는다면이는 이론과 현실을 혼동하는 것이며, 추상의 폭력으로 현실을 재단하는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자본주의 이행 논쟁이나 식민지 근대화 / 내재적 발전 논쟁은 사실상 이러한 추상의 폭력을 재현하고 있을 뿐이다. 이에 비해 나카무라 사토루는 자본주의의 일국내재적 발전 경로는 영국이나 미국과 같은 아주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존재하지 않았다고 본다. 조선 뿐만 아니라 식민본국인 일본 역시 외부의 자본주의 세계경제와의 접촉을 통해 자본주의화가 진행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자본주의 세계경제로 편입되는 지역이 편입 이전에는 마치 진공상태나 처녀지였던 것처럼 취급되어서는 된다. 지역에 독특한 자본주의 경제를 형성하게 만드는 고유하게 존재해온 역사적 조건들이 존재하는 것이다. 내재적 발전론자들이 얘기해온 자본주의 맹아란 바로 이런 자본주의 세계경제와의 접촉 없이 체제의 한계 내에서 발전해온 생산력의 발전과 생산관계의 상품화가 아닐까?

 

책의 번째 미덕은 동아시아 자본주의 발전의 특수성에 대한 인식이다. 특수성은 다양한 수준에서의 비교 - 동북아시아와 북서유럽 간의 비교, 동북아시아와 다른 주변부 지역 간의 비교, 그리고 동북아시아 내부 국가들 간의 비교 - 통해 도출된다. 예컨대, 동북아시아의 소농경영의 발달은 북서유럽과의 비교 속에서, 화교와 인교에 의해 매개된 동아시아 역내 무역의 급증은 라틴 아메리카와의 비교를 통해서 (cf. 스기하라 가오루), 그리고 조선, 중국, 일본의 유사하면서도 상이한 자본주의 발전경로는 고립된 것이 아니라 이들이 상호작용하는 지역적 전체의 입장에서 해명된다. 이러한 지역간, 지역내 비교의 결합은 고립적으로 상정된 단위 국가들의 비교를 통해 제시되는 차이들의 나열을 넘어 차이 간의 연결을 보여준다. A B라는 국가의 공업 발전 경로에 차이가 존재한다면, 차이는 나라 내부의 조건만으로 설명될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며, 개별 차이들은 보다 과정의 계기를 이루는 것으로 조망된다. 

 

번째 미덕은 셋째 미덕으로 연결된다. 자본주의 세계경제에 대한 동아시아의 관점을 구성하고자 하는 저자의 의도이다. 일국적 분석단위에 대한 거부는 일찍이 세계체제 분석에 의해서 주장되었으며, 널리 호응을 얻었다. 그러나 월러스틴의 작업을 위시한 세계체제 분석 역시 선한 의도에도 불구하고 유럽중심주의라는 틀에서 벗어날 없었다는 지적은 제기되어 왔다. 이러한 문제제기는 자넷 아부룩호드, 에릭 울프 등과 같은 주변부 전공 연구자들에 의해 선구적으로 제기되어 왔으며, 너무 나가기는 했지만 얼마 작고한 안드레 군더 프랭크도 마찬가지였다 (프랭크는 '자본주의' 개념의 폐기를 주장하면서 브로델, 월러스틴이 넘어서고자 했던 랑케의 실증주의적 역사서술로의 복귀를 주장하는 우를 범한다). 최근에는 멕시코의 철학자인 엔리케 두쎌도 여기에 동참한 있다. 이러한 주장들의 함의는 분석단위로서 세계체제를 채택한다고 해서 그것만으로 서구중심주의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책의 저자 나카무라 사토루 역시 이러한 비판의 대열에 동참하고 있는 것이다.

 

번째 미덕으로는, 대가의 세계경제에 관한 전망 귀담아들어야 부분을 꼽고 싶다. 무엇보다 공업화를 통한 경제발전의 성취라는 기존 후발국들의 전략이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