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출판이라 기대하며 읽기 시작했는데, 아... 웬걸... 번역이 참 후지다. 문장이 누락된 것들도 꽤 있고, 또 역자들이 영어독해를 못한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부분도 많다. 짜증을 삭히다가 언제 다 읽을 수 있을지 몰라 미리 좀 투덜거려본다. 


영어 못하는 역자는 번역하지 마세요. 그리고 이런 번역을 북펀딩하는 출판사도 반성하세요! 
어디가 틀린지 알고 싶다굽쇼? 오역 지적하는 것도 귀찮고 해서 안 알려줄래요... 

한 자 한 자, 한 줄 한 줄 대조하며 고쳐야 하는 것은 역자와 출판사의 몫이지, 독자의 몫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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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비 2024-07-09 15: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흠 저도 이 책 비싼 돈 주고 사 놓았는데 실망이네요. “영어 못하는 역자는 번역하지 마세요” 속이 다 시원합니다!
 
한 장의 잎사귀처럼 - <사이보그 선언문>의 저자 다나 J. 해러웨이의 지적 탐험, 다알로고스총서 2
사이어자 니콜스 구디브.다나 J. 해러웨이 지음, 민경숙 옮김 / 갈무리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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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러웨이의 20세기 저작들을 비교적 쉽게 이해할 수 있게 도와주는 길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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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장의 잎사귀처럼 - <사이보그 선언문>의 저자 다나 J. 해러웨이의 지적 탐험, 다알로고스총서 2
사이어자 니콜스 구디브.다나 J. 해러웨이 지음, 민경숙 옮김 / 갈무리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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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이 책은 1997년경에 이뤄진 구디브와 해러웨이 간의 대담을 싣고 있다. 구디브는 해러웨이의 학생였고, 현재는 뉴욕 시각예술대학 미술사학과의 교수지만, 그때는 아직 교수가 아니었다. 해러웨이가 막 겸손한_목격자@두번째_밀레니엄.여성인간_앙코마우스를 만나다(1997)라는 기괴한 이름의 책을 펴낸 직후에 몇 번에 걸쳐 이뤄진 대담을 한 권의 책으로 묶은 것이다. 이 두 명은 겸손한_목격자출판 20주년을 기념해서 다시 한 번 더 대담을 하였고, 그 대담은 2018년에 출판된 겸손한_목격자 2판 서문으로 실려 있다. 이 두 번째 대담을 아직 읽어보지는 못했는데, 그때는 트러블과 함께하기가 나온 직후이기 때문에, 그 글을 본다면 아마도 과거 작업과 현재 작업 간의 연관성을 더 잘 파악할 수 있을 것 같다. 그건 나중 일이고, 일단 이 책 이야기나 정리해보자.

 

이제 해러웨이에 대해 조금은 익숙해졌나?(싶다). 그녀의 글은 결들이 많아서 다시 읽어도 이전엔 안 보이던 것들이 늘 보인다. 그래서 해러웨이 독서는 공이 많이 들고, 공들인 만큼의 어떤 앎의 수확이라는 기대를 갖게 한다. 저번에 종과 종이 만날 때는 그 기대에 못 미쳤다. 이건 어쩌면 내가 사는 상황과 그녀의 상황의 상이성에서 기인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 책은 2007년에 나온 책이었고, 나는 트러블과 함께하기(2016)를 처음 읽고 그녀에게 매료되었고, 해러웨이 선언문에 실린 두 글(1985/2003)과 대담(2014)을 읽고 설득되었으며, “상황적 지식들”(1987)을 보며 비로소 그녀를 이해하기 시작한 것 같다. 물론 이해는 또한 새로운 의문을 동반한다. 한 장의 잎사귀처럼에서는 그 질문들에 대한 해러웨이 본인의 친절한 답들이 제공된다. 출판연도가 2000년이므로, 그녀의 20세기 저작들에 대한 일종의 중간결산 정도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나는 현재에서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는 독서를 한 셈인데, 마음잡고 해러웨이를 알고자 하는 요량이라면 80년대 저작 중 중요한 것, 영장류, 사이보그 그리고 여자, 특히 그 중에서도 3부에 실린 글들을 먼저 읽고 질문을 정리한 후 이 대담집을 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답은 그냥 나온 것이 아니라, 내가 의문을 가졌기 때문에 나오는 것이다. 그리고 트러블과 함께하기를 비롯한 21세기 저작들을 보고, 구디브와 해러웨이의 두 번째 대담을 보면 해러웨이 이해가 한결 수월할 것이다.

 

1. 개인사

1장에서 대화의 주제는 그녀의 성장기다. 이전에 해러웨이를 읽을 때 낯설었던 것 중 하나가 유한성(mortality)에 대한 강조였다. 인간은 유한한 존재라는 것은 누구나 다 알지만 그것이 딱히 학술적 담론의 일부를 이룰만한 대단한 통찰은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였다. 그저 해러웨이의 전공이 생물학여서 그 사실을 좀더 민감하게 생각하나 보다 하고 넘어갔었다. 그런데 그녀의 가족과 지인들(친구/연인)과의 관계가 평범하다고 보기는 힘들 것 같다. 한쪽의 죽음으로 끝나는 관계는 그녀에게 익숙하지만, 그것이 주는 슬픔이 어떤 이론적 통찰로 이어졌다고 볼 수도 있을 듯 싶다. 그녀의 회상에는 15년쯤 후 울프와의 대담(2014)에서 보여준 담담함이 아닌 어떤 촉촉함이 느껴진다. 이 촉촉함이 유한한 존재들의 얽힘에 대한 관계적 사유에 깃들어 있는 따뜻함과 연관되어 있을 것 같다.

 

외국 학자나 문인들의 학창 시절 이야기를 읽다 보면 부러운 것 중 하나가 다양한 분야의 공부를 경쟁에 대한 스트레스는 덜한 상황에서 열심히 한다는 것인데, 해러웨이 역시 그렇다. 생물학, 영문학, 철학을 함께 전공하는 것이 물론 쉬운 일이 아니겠고, 그런다고 그것들이 어른이 된 후 자신의 작업에 직접적인 자양분을 제공한다는 것도 흔한 일이 아니겠지만, 대학 전공대로 살 길을 찾는 것이 힘든 우리한테는 참 부러운 일이다. 물론 나는 그녀를 부러워할 뿐 질투하지는 않는다. 그녀를 존경하고 내 주제를 알기 때문이다. 해러웨이는 어렸을 때 겁도 많고 호기심도 많은 여자아이였을 뿐이다. 소련과의 핵전쟁을 두려워했고, 하느님에 대해 경외심을 갖고, 외국에 나가 선교를 업으로 삼는 수녀가 되리라고 생각했던 적도 있다. 대담에는 나오지 않지만, 학업에 엄청난 노력을 기울였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생각하는 대로, 그녀가 만든 이론대로 살고자 노력한다. 이 노력들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자신에게 찾아온 행운에 감사할 줄 안다(114). 이 겸손함은 얼마나 인간적인가?

 

2. 추상적 관념에 대한 알러지, 메타포, 그리고 세속적 실천

2, 3장에서는 해러웨이의 박사논문 Crystals, Fabrics and Fields,영장류의 시각』, 그리고 영장류, 사이보그 그리고 여자를 저술할 당시 그녀의 삶과 생각을 짚고 넘어간다. 나는 그녀가 형상(figure)과 메타포에 대해 설명해주는 4장이 제일 흥미로웠다. 형상은 그 자체로 말(words)이 아니며, 비문자적(non-literal)이다(145~146). 그러나 이 형상들은 말로 이뤄진 이야기(story)로 옮겨진다. 그런데 말과 이야기는 비문자적인 형상들의 세계에 대한 문자를 통한(literal) 기술과 묘사뿐만 아니라, 은유(metaphor) 역시 포함하고 있다. 이것이 해러웨이가 사실(fact)과 픽션, 물질성과 기호성, 대상과 비유(trope)의 동시성에 주목하는 이유다(141). 따라서 과학 담론인 생물학에도, 곧 생물들의 형상을 관찰하여 기술하고 설명하는 이야기에도 은유가 존재한다. 그리고 우리가 세계를 이해한다는 것은 결국 이야기 안에서 사는 것이다. 이 이야기들이 우리가 이해하고자 하는 대상들에 문자화됨으로써, 우리는 그것을 이해한다. 다른 말로 대상들은 이야기로 얼어 있다(frozen, 178).

 

해러웨이는 말과 언어가 관념(ideas)보다는 육체(flesh)와 더 밀접한 관계를 갖는다고 생각한다(146). 구디브가 이에 대해 맞장구치면서 인용하는 롤랑 바르트의 구절은 매우 인상적이다. 언어는 피부처럼 다른 언어에 닿는다고, 말들은 손가락을 갖고 있다고. 말은 행위하고, 기호는 하나의 신체와 같은 것이 된다. 곧 해러웨이는 물질성/신체성과 기호성이 결부되어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148). 더 이상 가톨릭 신자는 아니지만, 이 메타포의 문자적(literal) 본성과 상징화의 신체적 성질에 대한 그녀의 감수성은 어린 시절 성당의 성체성사 경험에서 나온 것이다(222). 심지어 우리 몸도 말 그대로 은유라고 이야기한다(178). 따라서 해러웨이의 이야기는 메타포로 가득 차 있으면서도 메타포 이상의 것이다(140). 여러 결들의 존재가 가능한 것은 바로 이러한 대상에 대한 문자 그대로의(literal) 기술과 메타포가 그녀의 글쓰기에 공존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점은 바로 그녀에 대한 오해가 야기되는 지점이기도 하다(179). 해러웨이의 이런 글쓰기는 추상적 관념을 피하기 위한 포석인데, 학술언어에 익숙한 독자들은 그녀의 글쓰기에서 어떤 추상적 고갱이, 문자로 딱 정리된 핵심을 캐내려고 한다는 말로, 어떤 상황에든 어느 정도 보편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대안을 찾으려고 한다(는 말로, 나는 이해했다). 이 잘못된 독법 때문에 그들은 해러웨이를 상대주의자로 오해한다(182).

 

해러웨이는 실재론과 상대주의 간의 양자택일을 거부한다. 그녀 특유의 어휘인 세속적(worldly)”이라는 형용사는 이를 위한 노력의 일환이다. 이 말에는 여러 의미가 있는데(182~183), 나는 그것을 현실의 특정 상황 속에 위치지어진 비전(vision)과 그에 기반한 진솔한 대화와 실천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세속적인 것의 반대편에는 목적론과 결정론이, 신성함, 곧 남신뿐만 아니라 여신이, 구세주 또는 미륵불에 대한 희구가, 또는 억압받는 세계를 해방시키는 프로메테우스적 실천의 전망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어차피 인류는 멸망할 거라는 자조적 초연함(이라고 쓰고 무능함과 무책임, 응답하지 않으려고 눈감고 귀막음이라 읽는다)도 세속적인 것의 반대편에 있을 것이다.

 

3. 회절

구디브는 계속해서 독자들이 이해하기 힘들어하는 그녀 특유의 개념과 형상에 깃든 의미를 캐묻고 해러웨이는 이에 대해 친절하게 설명한다. 이 중에서도 나의 시선을 사로잡았던 것은 회절(diffraction) 개념이다. 반영(reflection)이 원본(original)을 그대로 재현(representation)하는 것을 당연시하는 개념이라면, 회절은 차이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찾아보니 겸손한_목격자@두번째_밀레니엄.여성인간_앙코마우스를 만나다의 처음과 끝을 관통하는 개념이고, 훗날 캐런 바라드가 물리학적 통찰에 기반하여 또 새롭게 발전, 변주시킨 개념였다.



 

다음 인용문은 이 책의 169~170쪽에 실린 부분인데, 겸손한_목격자마지막(영문판 p. 273; 민경숙 역, 503)에 실린 것이다.


해러웨이: 회절 패턴은 상호작용, 간섭, 강화, 차이의 역사를 기록한다(170). ... 반영과 달리, 회절은 동일자를 다소 왜곡하여 다른 곳으로 옮김으로써 형이상학 산업을 성장시키는 일 따위는 하지 않는다. 회절은 기독교 지배로 고통스러웠던 천년의 막바지인 오늘날 다른 종류의 비판적 의식을 위한 메타포로서, 동일자의 신성한 이미지를 반복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통해 차이를 만들어낼 메타포가 될 수 있다. ... 회절은 복수의 의미들을 결과적으로 산출할 수 있는 서사적, 회화적, 심리적, 영적, 정치적 테크놀로지이다.

 

랜돌프: 모든 여성의 삶의 기억의 스크린에는 힘센 남성의 형상이 비치는데, 이 곳이 바로 변화가 발생해야 하는 장소다. 나이가 들고 정신적 변화를 거치면서 발생하는 변화를 통해 복수의 자기들(selves)이 하나의 몸에 합체된다. 이 변화는 여기에서 두 개의 머리와 열 개보다 많은 손가락들, 그리고 중간세계의 형이상학적 공간에 존재하는 중심의 인물 형상으로 구현된다. 회절은 미래의 한 구석에 있는 장소, 미지의 심연 앞에서 발생한다. 은하계 물체(matter)의 구조적 패턴이 매그놀리아 꽃 안에서 반복될 수 있다. ... 나는 중요한 문제가 되는 몸(bodies that matter)을 창조하고자 한다. 여성의 현실을 간섭 패턴들로 구성되는 장소인 SF 세계 안에 위치지으면 어쩌면 오늘날의 여성은 동일자의 신성한 이미지와는 다른 어떤 모습, 부적절하고, 기만당하고, 이 세계에는 잘 맞지 않으면서도 마술적인 어떤 존재, 곧 어떤 차이를 만들어낼 수 있는 존재로 등장할(emerge, 창발할) 수도 있다. 


동일자의 반영과 재현(representation)이 회절을 통해 창발되는 새로운 의미들과 대립된다. 회절이란 현재와 미래에 걸쳐 있는 차이를 만들어낼 수 있는 시간성에 대한 이야기 아닐까 추측해본다. 그렇다면 이 회절도 실재론과 상대주의 간의 양자택일을 거부할 수 있는 하나의 방법이 된다(겸손한_목격자민경숙 역, 63). 이 회절 개념이 또 이번 독서에서 발견한 그녀의 새로운 결을 구성한다. 나중에 더 공부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5장은 주로 사이보그와 앙코마우스라는 기술생명정치의 형상들과 인종주의가 깃든 뱀파이어가 다뤄진다. 그런데 겸손한_목격자@두번째_밀레니엄.여성인간_앙코마우스를 만나다를 제대로 읽지 않아서 그냥 그런가 보다 하면서 읽었다. 나중에 새 번역본이 나오면 읽는 걸로...

 

4. 실뜨기

회절 개념 때문에 리뷰를 중단하고, 한참을 겸손한_목격자를 들춰봤다. 제대로 읽지는 못했다. 그런데 랜돌프의 <회절> 이야기가 나오기 직전, 그러니까 본문의 마지막 문장은 여성인간와 앙코마우스실뜨기이야기이다. 실뜨기라면 트러블과 함께하기에서 해러웨이가 다른 저자들에 대한 자신의 리뷰를 빗대 말한 것이다. 그런데 해러웨이의 훌륭한 학생 구디브는 일반 독자라면 할 수 없는 질문을 한다. 실뜨기는 그저 또 다른 형상(figure)인지 아니면 방법론인지 묻는다(241). 해러웨이는 이에 대해 그것은 소문자 methodology, 작업방식이면서도 그 작업에 대해 사고하는 방식이면서 결투가 아닌 방식으로 관계를 맺기 위한 형상이라는 멋진 대답을 제시한다. 상대방을 적으로 취급하는 결투의 방식이 아닌 우정어린 대화의 방식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대결과 전투 메타포에 대한 라투르의 지나친 의존을 비판하면서, 그녀가 계발한 대안적 스토리텔링이다(242-243). 내가 라투르보다 해러웨이를 더 좋아하는 이유에는 이런 것도 있었구나 하고 새삼 깨달았다.

 

5.

이제는 친구가 된 선생과 학생이 함께 저작에 대해 이야기하고, 나이든 해러웨이 교수님이 요즘 학생들은 너 때랑은 참 다르다고, 난 이제 얘들을 이해할 수 없다고 투정한다. 난 이들의 대화가 너무 실감이 난다. 앞에서도 잠깐 말했듯, 구디브는 겸손한_목격자2판에도 해러웨이와 함께 훌륭한 대담을 실었다. 다나 여사의 건강을 빌지만, 아마 훗날 누군가가 그녀의 전기를 써야하는 시간이 온다면 구디브는 가장 훌륭한 후보 중 한 명일 것이다. (별점은 번역과 무관하게 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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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장의 잎사귀처럼 - <사이보그 선언문>의 저자 다나 J. 해러웨이의 지적 탐험, 다알로고스총서 2
사이어자 니콜스 구디브.다나 J. 해러웨이 지음, 민경숙 옮김 / 갈무리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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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역들을 걸러가면서 재미있게 읽고 있다. 오역이 주는 짜증보다는 글이 주는 재미가 더 크다. 


자신의 Situated Knowledge를 사람들이 오독하는 것에 대해서 해러웨이가 이렇게 말한다.

내가 말하려고 하는 건 그게 아니라 이거다... 친절한 다나씨 되시겠다.

"상황적(situated)"이라는 말이 반드시 장소를 의미하는 게 아님을 이해하는 게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위치(standpoint)라는 표현은 잘못된 은유일 수 있지요. 가끔 사람들은 "상황적 지식" 챕터를 약간 평면적인 방식으로 읽는 것 같습니다. 단지 당신의 신분확인 표시가 무엇인지, 그리고 당신이 문자 그대로 무엇인지를 의미하는 거라고 읽지요. 이런 의미의 "상황적"은 한 장소에 있는 것만을 의미하게 됩니다. 반면 제가 강조하고 싶은 건 상황적이 상황적이라는 사실입니다(what I mean to emphasize is the situatedness of situated). 달리 말하자면 저는 장소와 공간을 모두 망라하는 다층적인 끼여 넣기 양태에 도달하려는 거지요. 지리학자들이 장소와 공간의 특성을 그리는 방식 같은 겁니다. - P126

또 달리 말하자면 과학적 객관성의 컨텍스트 안에서 페미니즘의 설명가능성(feminst accountability; 페미니스트로서의 책임)에 대해 말할 때 이분법이 아닌 공명에 맞추어진 지식(a knowledge to resonance, not to dichotomy)을 요구한다고 토론하는 겁니다. (영어판, p. 71) - P126

리차드 도킨스의 저서 『확장된 표현형』(The Extended Phenotype)...에서는 기생충의 관점에서 볼 때 숙주가 그 기생충의 표현형(phenotype)의 일부입니다. 거는 그런 일종의 확장됨 몸에서는 자기와 타자가 어떤 의미에서는 관점의 문제라는 주장에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무엇이 자기라고 간주되는지, 그리고 무엇이 타자라고 간주되는지의 문제는 관점의 문제이거나 혹은 목적의 문제입니다. 어떤 경계들이 어떤 컨텍스트 안에서 견고하겠습니까? 그러므로 기생충의 관점에서 보면 숙주는 자기자신의 일부입니다. 그리고 숙주의 관점에서 보면 기생충은 침입자처럼 보입니다. ... 숙주의 관점에서 보면 치명적인 친근한 관계가 존재합니다. ... - P130

서로를 인식하지 못하면 감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어떤 관계도 없는 거지요. 질명은 관계입니다. - P131

환상적인(fantastic) 것, 신화적인(mythological) 것, 이데올로기적인(ideological) 것 등 이 세 개를 다른 상상적 관게의 등록으로 유지하는 게[하나의 상상적 관계의 세 가지 상이한 기입으로 분류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환상적인 것은 개별적으로 일어날 뿐 아니라 문화 속에서 벌어지는 정신역학(psychodynamic) 과정들과 관련이 있어야 합니다. 이데올로기적인 것은 이데올로기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적 의미와 관련이 있어야 하며, 사회적 이해관계를 재현하거나 잘못 재현한 관념들을 따르는 것입니다. 적어도 이 말은 이데올로기에 대한 하나의 괜찮은 정의이지요. 그리고 신화적인 것은 서사(narrative) 및 이야기하는 실천(storytelling practices)과 그 안에 들어 있는 스토리들과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 개는 서로 연관이 있지만 상대방의 상태로 환원될 수 없어요. 이들은 다른 종류의 의미작업(meaning work)을 합니다. - P134

생물학은 분명 메타포로 가득 차 있으나 메타포 이상의 것이지요.

구디브: ... "메타포 이상의 것이다"라는 게 무슨 뜻입니까?

해러웨이: 생물학에서 발견되는 생리학적∙담론적 메타포들뿐 아니라, 스토리들도 의미하는 겁니다. ... 생물학은 어떤 다른 걸 밝혀주는 메타포일 뿐 아니라, 문자 그대로가 아닌 세계에 접근할 수 있게 하는 고갈되지 않는 원천이에요. 또한 저는 사실과 픽션, 물질성과 기호성(semioticity), 대상(object)과 전의(trope, 비유) 등의 동시성에 주목하기를 원하지요.

구디브: 당신은 이런 문자 그대로의 생물학적 실재물들(entities)이 또한 "생명," 즉 생물학적∙존재론적 체계들을 이해시키는 매우 강력한 은유라고 말하시는군요. - P140

G: ... "세속적 실천"이라고 말할 때 무엇을 의미하는 겁니까?
H: 몸의 생리현상, 혈액과 호르몬의 흐름, 화학적인 것의 작용 - 유기체의 육체성 - 이 그 유기체의 전체 삶과 서로 맞물리는 내파된 물체들의 집합을 의미합니다. ...

G: ... 왜 "세속적"이란 단어를 선택했는지 궁금하군요.
H: 저는 실재론과 상대주의간의 논쟁을 피하기 위한 하나의 방법으로 그 단어를 선택했어요. ... 저는 죽어야 할 운명, 유한성, 육체성, 역사성, 우발성 같은 것들에 몰두하기 때문에 "세속적"이라는 단어를 선택하기를 잘 했어요. 세속적이라는 단어는 또한 권력과 돈 같은 것들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는 것도 의미하지요.
G: ... 세속적이라는 단어는 이 세상에 관한(earthly) 단어이며 근거가 확실한(grounded) 단어입니다. 그 단어는 공공연하게 허세부리지 않습니다. - P181

실뜨기놀이는 당신 손으로 할 수 있는 놀이예요. 그러나 다른 사람과 함께 하면 더 재미있어요. 그것은 결투가 아닌 관계성을 구축하기 위한 형상입니다. ...

실뜨기 놀이는 유일의 모델이 되지 않는다는 게 중요하지요. 우리에게는 반대의 적대적 입장을 취하고 싶은 많은 기술과학적 실천들이 있어요. 우리에게는 가끔 경쟁과 싸움, 그리고 군대 은유들이 필요할 수 있기 때문에, 조화와 집합성이라는 은유는 둘 다 이야기 전체가 아니지요. 그런데 그동안 기술과학 내에서는 결투(agonism)을 지나치게 강조해 왔어요. 저는 구체적으로 브루노 라투르의 책 Science in Action의 여러 양상들에 대해 반대하여 그 논문("포스트모던 몸의 생명정치")을 쓰고 있었어요. 라투르의 책은 결투와 전토의 은유들에 지나치게 의존하고 있거든요. 실뜨기놀이의 비유는 그것에 대한 직접적인 대응이에요. 그러므로 그것은 컨텍스트적인 은유지요. - P242

사람들은, 겸손의 이중적 의미 - 사라지기, 혹은 무능력한 것으로 잘못 듣게 되는 숨기 - 때문에, 겸손을 희생자가 되는 거라고 오해해요. 진정한 겸손은 당신이 특정한 재주를 갖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거지요. 달리 말하자면, 강력한 지식 소유권을 주장할 수 있는 거예요. 어리석은 상대주의가 아니라 목격과 증언에 굴복하는 겁니다. 제가 주장하는 종류의 겸손한 목격자는 상황적임을 고집하는 사람이에요. 여기에서 상호아적이라 함은, 위치가 그 자체로 유산일 뿐 아니라 복잡한 구성물인 곳을 말하지요. ... 목격자는 참여하지 않는 관찰자가 아니며 화성인도 아니에요. ... 목격자는 어떤 진리들과는 다른 진리들을 증언하는 것이므로, 언제나 위험에 처합니다. 당신은 목격을 인내합니다. ... 그들은 또한, 목격하고 진실을 말하는 걸 자신들의 책임으로 삼으며, 진실을 말하는 필요조건 속에 연루되지요. ... 여기에서 진실(truth)은 ... 역사를 초월하거나 역사 밖에 있는 진리가 아니에요. - P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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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가리키는 말은 숲 환상문학전집 34
어슐러 K. 르 귄 지음, 최준영 옮김 / 황금가지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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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러웨이의 Staying with the Trouble  6을 읽었을 때, 이 책의 존재를 처음 알게 되었다. 그때는 르 귄도, 그녀의 헤인 시리즈도 전혀 알지 못했다. 당시 나의 시선이 머물던 곳은 제임스 캐머런의 <아바타>(2009)가 르 귄의 이 소설을 헐리우드 스타일로 각색한 것이라는 언급였다. 그리고 이 소설이 아니라 르 귄의 캐리어백 픽션 이론이 나를 더 사로잡았다. 그때부터 조금씩 르 귄을 읽어 왔다. 나의 느린 독서 속도로 인해 언제쯤 , 이제 르 귄 쫌 안다고 할 수 있을 날이 올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르 귄과 해러웨이는 읽을 때마다 새로운 앎과 느낌을 준다. 그리고 나의 마음은 어떤 힘찬 기운으로 가득 찬다. 이 기분이 아마도 르 귄을 본받아 해러웨이가 애용하는 형용사 ‘mindful’로 재현할 수 있는 정동이 아닐까 싶다.

 

1972년에 처음 출판된 이 소설은 1968년 겨울 영국에서 완성되었다. 당시 이 중편에는 작은 녹색 인간들(The Little Green Men)”이라는 이름이 붙었지만, 출판하면서 지금과 같은 세상을 가리키는 말은 숲(The Word for World is Forest)”으로 바뀌었다. 르 귄은 미국에서 1960년대 내내 많게는 수백 명, 적게는 열 명쯤의 시위대에 속해 반핵과 반전 구호를 외쳤지만, 속마음으로는 무력함을 느꼈다고 고백한다. 그녀가 1968년 한 해 동안 타국땅에 머물면서 그 전에 평화시위의 조직과 참여에 쏟았던 에너지를 이 중편의 집필에 쏟아부었다. 이 소설은 당시의 베트남전쟁에 대한 대응일 수도, 또는 15세기 이후 유럽인의 아메리카 대륙 침략, 정복, 학살, 착취(<미션>)에 대한 알레고리일 수도 있다. 어쨌든 <아바타>에게 영감을 준 것만은 확실해 보인다. 르 귄의 모든 스토리가 그렇듯 읽는 사람에 따라 여러 이야기들을 할 수 있겠지만, 이 리뷰에서는 그동안 내가 읽은 르 귄의 다른 글들과 맞닿는 주제들을 다루고자 한다.


 


1. Terran Vs. Athshean

작품 중 갈등을 구성하는 두 축은 지구인(Terran) 정복자 데이비드슨 대위와 애스시아인(Athshean) 셀버다. 이들을 살펴보기 전에 먼저 지구인과 애스시아인을 비교해보자. Earth, terra, tellus가 지구의 흙(soil)과 행성(planet)을 동시에 뜻하는 것처럼, Athshea는 행성 이름이면서, 세계(world, 세상)라는 뜻과 숲(Forest)이라는 뜻을 함께 지니고 있다(95). 애스시아인들은 지구인과는 다른 생체 리듬으로 살아간다. 지구인처럼 밤에 자고 낮에 일하는 것이 아니라, 낮에도 종종 반쯤 자는 상태에서 꿈을 꾼다. 그들은 세계(==자연)의 일부로 살아가며, 나이든 여성이 통치한다. 족장도, 사냥꾼도 여자다. 자연과의 관계나 성별분업의 측면에서는 지구와 정반대다.


지성은 남자에게, 정치는 여자에게, 윤리는 그 둘의 상호작용에 맡겨져 있지”(104).

지구인들은 무분별한 개발로 자연이 완전히 파괴된 지구를 떠나 애스시아를 식민화해 이 행성에서 나무를 벌채하여 지구로 보내는 일을 한다. 모두 남자인데 2천여 명쯤이고, 지구에서 212명의 여자들을 태운 우주선이 도착하는 장면으로 소설이 시작된다. 애스시아에는 이미 다른 인간들이 살고 있는데, 지구인들은 이들을 크리치라고 부르고, 애스시아인들은 지구인들을 유멘이라고 부른다. 지구인들은 키가 1미터밖에 안 되고 녹색털을 갖고 있는 크리치들을 인간으로 여기지 않고, 애스시아인들은 같은 인간을 죽이는 유멘들을 인간으로 여기지 않는다.

 

그러나 이들은 엄연히 인간 에 속하는 두 (two species of the genus Man)이다(105). 이들의 계통적 관계에 대해서는 설이 분분하다. 헤인인들은 오래전 자신의 조상들이 지구와 애스시아를 포함한 여러 행성들을 식민화했고, 그들의 후손이 각 행성의 환경에 맞게 진화했다고 주장하지만, 지구인들은 지구에서 사라진 아틀란티스의 거주자들이 애스시아를 식민화했지만 그들은 모두 죽었고, 그 행성에 있던 원숭이들이 오늘날의 크리치들로 진화했다고 생각한다(14).

 

2. 데이비드슨, 그 순수한 악: 영웅서사

르 귄은 의식적으로는 순수하게 악한 인간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단다. 그러나 그녀의 무의식은 달랐다고 고백한다. 빗속에 몇 명 되지도 않는 시위대에서 느꼈던 무력감을 뒤로 하고 영국에서 이 작품을 집필하던 시기, 그녀의 그 무의식이 악당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는 데이비드슨의 캐릭터를 만들어낸다. 지구에서 온 정복자 중 한 명인 데이비드슨은 훗날 캐리어백 픽션 이론이 비판하는 뾰족한 무기를 휘두르는 영웅 이야기의 전형이다. 그는 애스시아의 자연, 여성, 식민지를 수탈하는 데에 아무런 죄의식을 느끼지 못한다.


 사내가 정말로 그리고 완전히 사내인 유일한 때는 여자를 소유했을 때나 다른 남자를 죽였을 때뿐이다. 그건 그가 만들어 낸 생각이 아니었다. 몇몇 옛날 책들에서 읽은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사실이었다. 그가 그런 장면들을 상상하는 것을 좋아하는 것이 그 때문이었다. 크리치들은 실제 인간이 아닐지라도 말이다.” (87)

 

데이비드슨은 주워듣거나 책에서 본 말들을 몸으로 행함으로써, 이야기를 사실로 만든다. 크리치 여성을 강간하고 죽이고, 그에 항의하던 여성의 남편을 반쯤 죽어라 팬다. 아니 죽였을 것이다. 지구인 인류학자 류보프가 말리지 않았다면. 크리치에 대한 그의 혐오와 분노는 자신의 목숨을 구걸해야 하는 순간을 제외하고는 늘 계속된다. 전 은하계 동시 통신장비인 앤서블(ansible)을 통해 지구에서 애스시아인들에 대한 기존의 구금과 착취를 중지하라는 명령이 내려왔을 때에도, 그는 상관의 눈을 속이고 크리치 살육에 나선다. 그는 애스시아인들이 인간을 공격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들은 맞아도, 죽여도 대들지 않았다. 셀버만이 예외였다.

 

3. 셀버, 신이자 번역자: 단어의 중의성

데이비드슨의 반대편에 애스시아인 셀버가 있다. 그는 데이비드슨이 강간살인한 여인의 남편이다. 애스시아인은 원숭이를 사냥해서 먹기는 하지만 같은 인간은 절대로 죽이지 않는다. 아니, 않았다. 그러나 이 오랜 전통을 깬 것이 바로 셀버다. 그리고 이 전통을 깬 순간 그는 신이 되었다. 데이비드슨에게 맞아 죽을 뻔하다 살아난 이후 그는 바뀌었다. 데이비드슨이 지구에서 새로 온 여자들과 즐기러 센트럴빌에 간 사이에 셀버는 다른 애스시아인들과 함께 뉴 타히티 기지를 완전히 불태우고, 거기 있던 모든 지구인들을 살해한다. 다시 돌아온 데이비드슨은 보고도 못 믿을 광경에 아연실색하고, 무릎을 꿇은 채 처음으로 셀버를, 애스시아인들을 올려다 보며 목숨을 구걸한다. 셀버는 그를 살려주지만, 데이비드슨은 정신 못차리고 까불다가 결국 애스시아에 있는 모든 지구인 기지들이 불타게 되고, 지구에서 온 여자들은 한 명도 남김없이 다 죽고, 남은 남자들은 그들이 크리치들을 가뒀던 아주 좁은 구덩이에 갇히게 된다.

 

셀버 샤압(Selver sha’ab). 샤압도 두 가지 뜻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 하나는 이라는 뜻이고, 다른 하나는 번역자(translator)”라는 뜻이다. 무엇이 번역되는가? 애스시아의 꿈꾸는 사람들(Dreamers)은 다 남자 말(Men’s Tongue)”, 곧 꿈과 철학의 언어를 일상의 언어인 여자 말(Women’s Tongue)”로 옮길 수 있다. 이들은 무의식이 지각한 것을 소리내어 말함으로써 두 현실(two realities), 곧 꿈 시간(dream-time)과 세계 시간(world-time)을 연결한다. 이들은 말함으로써 행위한다(111). 셀버는 원래 꿈꾸는 사람였지만, 이제는 신이 되었다. 꿈꾸는 사람의 말 자체가 행위이지만, 셀버는 이전에 애스시아에 없던 말, 곧 살인(murder)을 무의식 속에서 지각했고, 이를 일상의 언어로 번역해서 애스시안인들 모두를 인간을 살해할 수 있는 존재로 만들었고, 이를 통해 지구인들에게 피의 복수를 행할 수 있었다.

 

이 부분은 장자의 도덕경과 칼 융의 이론을 르 귄이 소설에 녹여낸 것으로 보인다. 도덕경은 못 보았지만, 호접지몽을 모티브 삼아 애스시아 인들의 동등한 두 현실을 창조해낸 것 같다. 밤의 언어(119~125)에서 르 귄은 개인의 자아(ego) 깊은 곳의 무의식의 심연은 자기(self)에 닿아 있는데, 이는 집단 무의식이며, 인류라면 공유하는 최소공통분모, 집합적인 마음(mass mind)이라는 융의 이론을 설명한다. 그때 낮의 언어에 대비되는 밤의 언어라고 칭했던 것이 애스시아인의 두 현실 중 하나, 꿈 시간에서 만나게 되는 비전(vision)일 것이다. 신의 속성인 번역밤의 언어의 키워드이다. 애스시아의 남자 말여자 말은 이 소설이 출판된 후 1986년에 발표한 브린모어 대학 졸업식 축사에서는 그것의 지구식 판본이라 할 수 있는 학교에서 배우는 힘의 언어인 아버지 말(Father Tongue)과 그전에 익숙하게 썼던 어머니 말(Mother Tongue)로 변주된다.



 

4. 살인 이후의 무구하지 않은 삶

애스시아 말로는 나오지 않지만, 애스시아에서는 꿈을 가리키는 말은 뿌리(root)”. 지구인들에 대한 살해로 애스시아는 평온을 되찾았지만, 이제 사람을 죽이는 일을 할 줄 알게 된 애스시아 인들은 지구인들이 물러간 다음에 과연 이전으로 돌아가 다시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평화롭게 살 수 있을까?

 

소설의 끝은 헤인인 레페논과 셀버와의 대화로 끝난다. 레페논이 질문한다. 애스시아인들이 단결하여 지구인 정복자들을 살인한 이후에 애스시아인들 사이에서 살인이 벌어지지는 않았느냐고. 아직까지는 없었다. 그러나 앞으로도 그럴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셀버도 확신할 수 없다. ?


셀버: “서로를 죽이는 데 합당한 이유가 있는 척해서는 안 됩니다. 살인에는 합당한 이유가 없어요.”

레페논: “우리는 갈 겁니다. ... 우리 모두. 영원히. 그러면 애스시의 숲들은 예전처럼 존재하게 될 겁니다.”


레페논의 희망이 이뤄질지에 대해서 셀버는 자신할 수 없다. 사람들 사이의 살인이든 나라 간의 전쟁이든 처음에는 어떤 이유가 있어서 시작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지속된다면 처음의 이유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고 망각된다. 상대가 죽고 내가 살아야 한다. 내가 상대를 쳐부수고 이겨야 한다. 이것만이 중요하게 된다. 지금도 전쟁이 진행중이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 주변 기운도 하수상한 요즘 살인에는 합당한 이유가 없다는 셀버의 말이 마음에 무겁게 내려 앉는다.

 

Haraway(2016: 120)는 여러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세상을 가리키는 말은 숲이 영화 <아바타>와 다른 점을 두 가지 지적한다. 첫째, 이 소설에는 과거의 오류를 반성하는 백인 영웅이 존재하지 않는다(인류학자 류보프가 조금 비슷할텐데, <아바타>에서는 시고니 위버가 연기한 여성 인류학자가 나오는데, 둘 다 인류학자지, 지구인 점령군에 대항해 싸우는 전사는 아니다). 둘째, <아바타>의 판도라 행성에서 나오는 구원 서사 같은 것이 르 귄의 이 작품에는 없다. 애스시아인들은 이전에는 몰랐던 살인을 할 줄 알게 되었고, 그 기억은 한 번 존재하게 된 이상 계속 존재하게 된다. 그들은 더 이상 무구(innocent)하지 않다. 그들이 과연 지구인들이 오기 이전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5.

레페논이 셀버에게 이제 그 누구도 당신들의 행성을 침략하거나 나무를 베러 오지 않을 것이라고 하면서 어쩌면 학술적인 연구 목적으로는 올지도 모른다는 말을 남긴다. 이것이 아마도 단편 <제국보다 광대하고 느리게>에 대한 복선이 아닐까 싶다.

 

2023년 한해가 저문다. 하고자 했던 일 두 가지를 못했다. 하지만 그저 놀면서 마음 편히 지내지는 않았다. 못한 일을 새해에는 꼭 해치웠으면 좋겠다. 한해를 마치면서 뭘 해야 하나 짱구 굴리다 고작 생각해낸 것이 이 책 읽고 리뷰 쓰는 거였는데, 어쨌든 이거 하나는 했다. 언제 읽을지 모르겠지만, 네 번째 읽기는 로캐넌의 세계가 될 듯하다.

 

모두들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그리고 평화를 빕니다~  

Shalom! May peace be with you! And a happy new "mindful" ye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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