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가리키는 말은 숲 환상문학전집 34
어슐러 K. 르 귄 지음, 최준영 옮김 / 황금가지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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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해러웨이의 Staying with the Trouble  6을 읽었을 때, 이 책의 존재를 처음 알게 되었다. 그때는 르 귄도, 그녀의 헤인 시리즈도 전혀 알지 못했다. 당시 나의 시선이 머물던 곳은 제임스 캐머런의 <아바타>(2009)가 르 귄의 이 소설을 헐리우드 스타일로 각색한 것이라는 언급였다. 그리고 이 소설이 아니라 르 귄의 캐리어백 픽션 이론이 나를 더 사로잡았다. 그때부터 조금씩 르 귄을 읽어 왔다. 나의 느린 독서 속도로 인해 언제쯤 , 이제 르 귄 쫌 안다고 할 수 있을 날이 올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르 귄과 해러웨이는 읽을 때마다 새로운 앎과 느낌을 준다. 그리고 나의 마음은 어떤 힘찬 기운으로 가득 찬다. 이 기분이 아마도 르 귄을 본받아 해러웨이가 애용하는 형용사 ‘mindful’로 재현할 수 있는 정동이 아닐까 싶다.

 

1972년에 처음 출판된 이 소설은 1968년 겨울 영국에서 완성되었다. 당시 이 중편에는 작은 녹색 인간들(The Little Green Men)”이라는 이름이 붙었지만, 출판하면서 지금과 같은 세상을 가리키는 말은 숲(The Word for World is Forest)”으로 바뀌었다. 르 귄은 미국에서 1960년대 내내 많게는 수백 명, 적게는 열 명쯤의 시위대에 속해 반핵과 반전 구호를 외쳤지만, 속마음으로는 무력함을 느꼈다고 고백한다. 그녀가 1968년 한 해 동안 타국땅에 머물면서 그 전에 평화시위의 조직과 참여에 쏟았던 에너지를 이 중편의 집필에 쏟아부었다. 이 소설은 당시의 베트남전쟁에 대한 대응일 수도, 또는 15세기 이후 유럽인의 아메리카 대륙 침략, 정복, 학살, 착취(<미션>)에 대한 알레고리일 수도 있다. 어쨌든 <아바타>에게 영감을 준 것만은 확실해 보인다. 르 귄의 모든 스토리가 그렇듯 읽는 사람에 따라 여러 이야기들을 할 수 있겠지만, 이 리뷰에서는 그동안 내가 읽은 르 귄의 다른 글들과 맞닿는 주제들을 다루고자 한다.


 


1. Terran Vs. Athshean

작품 중 갈등을 구성하는 두 축은 지구인(Terran) 정복자 데이비드슨 대위와 애스시아인(Athshean) 셀버다. 이들을 살펴보기 전에 먼저 지구인과 애스시아인을 비교해보자. Earth, terra, tellus가 지구의 흙(soil)과 행성(planet)을 동시에 뜻하는 것처럼, Athshea는 행성 이름이면서, 세계(world, 세상)라는 뜻과 숲(Forest)이라는 뜻을 함께 지니고 있다(95). 애스시아인들은 지구인과는 다른 생체 리듬으로 살아간다. 지구인처럼 밤에 자고 낮에 일하는 것이 아니라, 낮에도 종종 반쯤 자는 상태에서 꿈을 꾼다. 그들은 세계(==자연)의 일부로 살아가며, 나이든 여성이 통치한다. 족장도, 사냥꾼도 여자다. 자연과의 관계나 성별분업의 측면에서는 지구와 정반대다.


지성은 남자에게, 정치는 여자에게, 윤리는 그 둘의 상호작용에 맡겨져 있지”(104).

지구인들은 무분별한 개발로 자연이 완전히 파괴된 지구를 떠나 애스시아를 식민화해 이 행성에서 나무를 벌채하여 지구로 보내는 일을 한다. 모두 남자인데 2천여 명쯤이고, 지구에서 212명의 여자들을 태운 우주선이 도착하는 장면으로 소설이 시작된다. 애스시아에는 이미 다른 인간들이 살고 있는데, 지구인들은 이들을 크리치라고 부르고, 애스시아인들은 지구인들을 유멘이라고 부른다. 지구인들은 키가 1미터밖에 안 되고 녹색털을 갖고 있는 크리치들을 인간으로 여기지 않고, 애스시아인들은 같은 인간을 죽이는 유멘들을 인간으로 여기지 않는다.

 

그러나 이들은 엄연히 인간 에 속하는 두 (two species of the genus Man)이다(105). 이들의 계통적 관계에 대해서는 설이 분분하다. 헤인인들은 오래전 자신의 조상들이 지구와 애스시아를 포함한 여러 행성들을 식민화했고, 그들의 후손이 각 행성의 환경에 맞게 진화했다고 주장하지만, 지구인들은 지구에서 사라진 아틀란티스의 거주자들이 애스시아를 식민화했지만 그들은 모두 죽었고, 그 행성에 있던 원숭이들이 오늘날의 크리치들로 진화했다고 생각한다(14).

 

2. 데이비드슨, 그 순수한 악: 영웅서사

르 귄은 의식적으로는 순수하게 악한 인간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단다. 그러나 그녀의 무의식은 달랐다고 고백한다. 빗속에 몇 명 되지도 않는 시위대에서 느꼈던 무력감을 뒤로 하고 영국에서 이 작품을 집필하던 시기, 그녀의 그 무의식이 악당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는 데이비드슨의 캐릭터를 만들어낸다. 지구에서 온 정복자 중 한 명인 데이비드슨은 훗날 캐리어백 픽션 이론이 비판하는 뾰족한 무기를 휘두르는 영웅 이야기의 전형이다. 그는 애스시아의 자연, 여성, 식민지를 수탈하는 데에 아무런 죄의식을 느끼지 못한다.


 사내가 정말로 그리고 완전히 사내인 유일한 때는 여자를 소유했을 때나 다른 남자를 죽였을 때뿐이다. 그건 그가 만들어 낸 생각이 아니었다. 몇몇 옛날 책들에서 읽은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사실이었다. 그가 그런 장면들을 상상하는 것을 좋아하는 것이 그 때문이었다. 크리치들은 실제 인간이 아닐지라도 말이다.” (87)

 

데이비드슨은 주워듣거나 책에서 본 말들을 몸으로 행함으로써, 이야기를 사실로 만든다. 크리치 여성을 강간하고 죽이고, 그에 항의하던 여성의 남편을 반쯤 죽어라 팬다. 아니 죽였을 것이다. 지구인 인류학자 류보프가 말리지 않았다면. 크리치에 대한 그의 혐오와 분노는 자신의 목숨을 구걸해야 하는 순간을 제외하고는 늘 계속된다. 전 은하계 동시 통신장비인 앤서블(ansible)을 통해 지구에서 애스시아인들에 대한 기존의 구금과 착취를 중지하라는 명령이 내려왔을 때에도, 그는 상관의 눈을 속이고 크리치 살육에 나선다. 그는 애스시아인들이 인간을 공격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들은 맞아도, 죽여도 대들지 않았다. 셀버만이 예외였다.

 

3. 셀버, 신이자 번역자: 단어의 중의성

데이비드슨의 반대편에 애스시아인 셀버가 있다. 그는 데이비드슨이 강간살인한 여인의 남편이다. 애스시아인은 원숭이를 사냥해서 먹기는 하지만 같은 인간은 절대로 죽이지 않는다. 아니, 않았다. 그러나 이 오랜 전통을 깬 것이 바로 셀버다. 그리고 이 전통을 깬 순간 그는 신이 되었다. 데이비드슨에게 맞아 죽을 뻔하다 살아난 이후 그는 바뀌었다. 데이비드슨이 지구에서 새로 온 여자들과 즐기러 센트럴빌에 간 사이에 셀버는 다른 애스시아인들과 함께 뉴 타히티 기지를 완전히 불태우고, 거기 있던 모든 지구인들을 살해한다. 다시 돌아온 데이비드슨은 보고도 못 믿을 광경에 아연실색하고, 무릎을 꿇은 채 처음으로 셀버를, 애스시아인들을 올려다 보며 목숨을 구걸한다. 셀버는 그를 살려주지만, 데이비드슨은 정신 못차리고 까불다가 결국 애스시아에 있는 모든 지구인 기지들이 불타게 되고, 지구에서 온 여자들은 한 명도 남김없이 다 죽고, 남은 남자들은 그들이 크리치들을 가뒀던 아주 좁은 구덩이에 갇히게 된다.

 

셀버 샤압(Selver sha’ab). 샤압도 두 가지 뜻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 하나는 이라는 뜻이고, 다른 하나는 번역자(translator)”라는 뜻이다. 무엇이 번역되는가? 애스시아의 꿈꾸는 사람들(Dreamers)은 다 남자 말(Men’s Tongue)”, 곧 꿈과 철학의 언어를 일상의 언어인 여자 말(Women’s Tongue)”로 옮길 수 있다. 이들은 무의식이 지각한 것을 소리내어 말함으로써 두 현실(two realities), 곧 꿈 시간(dream-time)과 세계 시간(world-time)을 연결한다. 이들은 말함으로써 행위한다(111). 셀버는 원래 꿈꾸는 사람였지만, 이제는 신이 되었다. 꿈꾸는 사람의 말 자체가 행위이지만, 셀버는 이전에 애스시아에 없던 말, 곧 살인(murder)을 무의식 속에서 지각했고, 이를 일상의 언어로 번역해서 애스시안인들 모두를 인간을 살해할 수 있는 존재로 만들었고, 이를 통해 지구인들에게 피의 복수를 행할 수 있었다.

 

이 부분은 장자의 도덕경과 칼 융의 이론을 르 귄이 소설에 녹여낸 것으로 보인다. 도덕경은 못 보았지만, 호접지몽을 모티브 삼아 애스시아 인들의 동등한 두 현실을 창조해낸 것 같다. 밤의 언어(119~125)에서 르 귄은 개인의 자아(ego) 깊은 곳의 무의식의 심연은 자기(self)에 닿아 있는데, 이는 집단 무의식이며, 인류라면 공유하는 최소공통분모, 집합적인 마음(mass mind)이라는 융의 이론을 설명한다. 그때 낮의 언어에 대비되는 밤의 언어라고 칭했던 것이 애스시아인의 두 현실 중 하나, 꿈 시간에서 만나게 되는 비전(vision)일 것이다. 신의 속성인 번역밤의 언어의 키워드이다. 애스시아의 남자 말여자 말은 이 소설이 출판된 후 1986년에 발표한 브린모어 대학 졸업식 축사에서는 그것의 지구식 판본이라 할 수 있는 학교에서 배우는 힘의 언어인 아버지 말(Father Tongue)과 그전에 익숙하게 썼던 어머니 말(Mother Tongue)로 변주된다.



 

4. 살인 이후의 무구하지 않은 삶

애스시아 말로는 나오지 않지만, 애스시아에서는 꿈을 가리키는 말은 뿌리(root)”. 지구인들에 대한 살해로 애스시아는 평온을 되찾았지만, 이제 사람을 죽이는 일을 할 줄 알게 된 애스시아 인들은 지구인들이 물러간 다음에 과연 이전으로 돌아가 다시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평화롭게 살 수 있을까?

 

소설의 끝은 헤인인 레페논과 셀버와의 대화로 끝난다. 레페논이 질문한다. 애스시아인들이 단결하여 지구인 정복자들을 살인한 이후에 애스시아인들 사이에서 살인이 벌어지지는 않았느냐고. 아직까지는 없었다. 그러나 앞으로도 그럴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셀버도 확신할 수 없다. ?


셀버: “서로를 죽이는 데 합당한 이유가 있는 척해서는 안 됩니다. 살인에는 합당한 이유가 없어요.”

레페논: “우리는 갈 겁니다. ... 우리 모두. 영원히. 그러면 애스시의 숲들은 예전처럼 존재하게 될 겁니다.”


레페논의 희망이 이뤄질지에 대해서 셀버는 자신할 수 없다. 사람들 사이의 살인이든 나라 간의 전쟁이든 처음에는 어떤 이유가 있어서 시작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지속된다면 처음의 이유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고 망각된다. 상대가 죽고 내가 살아야 한다. 내가 상대를 쳐부수고 이겨야 한다. 이것만이 중요하게 된다. 지금도 전쟁이 진행중이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 주변 기운도 하수상한 요즘 살인에는 합당한 이유가 없다는 셀버의 말이 마음에 무겁게 내려 앉는다.

 

Haraway(2016: 120)는 여러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세상을 가리키는 말은 숲이 영화 <아바타>와 다른 점을 두 가지 지적한다. 첫째, 이 소설에는 과거의 오류를 반성하는 백인 영웅이 존재하지 않는다(인류학자 류보프가 조금 비슷할텐데, <아바타>에서는 시고니 위버가 연기한 여성 인류학자가 나오는데, 둘 다 인류학자지, 지구인 점령군에 대항해 싸우는 전사는 아니다). 둘째, <아바타>의 판도라 행성에서 나오는 구원 서사 같은 것이 르 귄의 이 작품에는 없다. 애스시아인들은 이전에는 몰랐던 살인을 할 줄 알게 되었고, 그 기억은 한 번 존재하게 된 이상 계속 존재하게 된다. 그들은 더 이상 무구(innocent)하지 않다. 그들이 과연 지구인들이 오기 이전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5.

레페논이 셀버에게 이제 그 누구도 당신들의 행성을 침략하거나 나무를 베러 오지 않을 것이라고 하면서 어쩌면 학술적인 연구 목적으로는 올지도 모른다는 말을 남긴다. 이것이 아마도 단편 <제국보다 광대하고 느리게>에 대한 복선이 아닐까 싶다.

 

2023년 한해가 저문다. 하고자 했던 일 두 가지를 못했다. 하지만 그저 놀면서 마음 편히 지내지는 않았다. 못한 일을 새해에는 꼭 해치웠으면 좋겠다. 한해를 마치면서 뭘 해야 하나 짱구 굴리다 고작 생각해낸 것이 이 책 읽고 리뷰 쓰는 거였는데, 어쨌든 이거 하나는 했다. 언제 읽을지 모르겠지만, 네 번째 읽기는 로캐넌의 세계가 될 듯하다.

 

모두들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그리고 평화를 빕니다~  

Shalom! May peace be with you! And a happy new "mindful" ye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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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가리키는 말은 숲 환상문학전집 34
어슐러 K. 르 귄 지음, 최준영 옮김 / 황금가지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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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아바타>의 원작이라고 봐도 무방한 중편. "에코페미니즘"이란 말이 있기 전에 나온 에코페미니스트 소설. 세상을 가리키는 말은 숲, 신을 가리키는 말은 번역자, 꿈을 가리키는 말은 뿌리인 행성 애스시아에서 벌어진 지구인 침략자에 대한 행성해방 투쟁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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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의 언어 - 판타지, SF 그리고 글쓰기에 관하여
어슐러 K. 르 귄 지음, 조호근 옮김 / 서커스(서커스출판상회)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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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이기보다는 나중에 이 소설이 어떻게 쓰여졌나에 대한 회고담이다.

『세상을 가리키는 말은 숲』 자체도 훌륭한 중편 소설이지만, 자신이 어떤 상황에서 그 글을 썼고, 그 안의 캐릭터들을 어떻게 창조해냈는지 잘 설명하고 있다.

『빼앗긴 자들』 읽으면서, 에이이오국에서 대규모 시위가 발생하고 분위기가 고조되다 진압되는 과정을 묘사한 장면을 보면서 너무 탁월하다고 생각했었다. 오래전 나도 그런 기분을 느꼈던 적이 있었던 것 같다.
그 장면을 읽으면서 르 귄도 한 때는 데모꾼였겠다 싶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1960년대 반핵시위와 베트남전쟁 반대 시위 조직에 앞장섰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세상을 가리키는 말은 숲』 리뷰를 써야 하는데, 며칠이나 더 걸릴지 모르겠다. ㅋ


『세상을 가리키는 말은 숲』은 처음에는 순수하게 자유와 꿈을 추구하며 시작했으나, 결국 부분적으로 그런 설교단의 유혹에 넘어가 버린 작품이다. SF 작가들은 이런 유혹을 아주 강렬하게 느낀다. 다른 소설가들에 비해 개념(ideas)을 보다 직접적으로 다루며, 개념에 의해 다듬어지거나 개념 자체를 내포한 은유를 사용하며, 따라서 항상 개념과 의견을 혼동할 위험에 노출되어 있기 때문이다. - P280

내가 "작은 녹색 인간들 The Little Green Men"을 처음 쓴 것은 ... 1년간 런던에 체류하던 와중인 1968년 겨울이었다. 나는 미국에서 60년대 내내 비폭력 시위를 조직하는 일을 돕고 직접 참여하기도 했다. 처음에는 핵무기 실험 반대 시위였고, 나중에는 베트남전 속행 반대 시위가 되었다. 무력하고 어리석고 완고한 사람이 된 기분으로, 열 명이나 스무 명이나 백 명의 다른 무력하고 어리석고 완고한 사람들과 함께 비를 맞으며 올더 가를 거닌 적이 몇 번이나 되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어쨌든 시위는 평화적이었고, 나는 거기 참여하며 내 작품과 완벽하게 유리된 방식으로 내 도덕 및 정치적 의견을 표현할 수 있었다. - P281

류보프도 셀버도 단순히 ‘위풍당당한 미덕‘(Virtue Triumphant) 그 자체인 인물은 아니다. ... 그러나 데이비드슨은 복잡하지 않은 인물은 아니지만 순수하다. 그는 순수한 악이다. 그리고 나는 의식적으로는 순수하게 악한 인물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는다. 그러나 내 무의식은 의견이 다르다. 무의식은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그 안에서 데이비드슨 사령관(Captain Davidson; 대위)이라는 인물을 창조해 냈다. 그를 부인할 생각은 없다. ...

미국의 베트남 개입은 이제 옛일이 되었다. ... 이야기 속의 훈계조가 이제 또렷이 드러나 보인다. 후회가 되기는 하지만 이 또한 부인할 생각은 없다. 작품을 살아남거나 스러지게 만드는 요소는 결국 모든 특정한 분개와 항변 속에 숨은 내밀한 갈망이다. 분노와 절망 속에서 정의나 재치나 우아함이나 자유를 향해 아무리 머뭇거리는 손을 뻗어봤자 변명은 될 수 없다. - P282

가상의 외계인을 홀로 창조해 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세노이 족을 묘사하고 있었을 뿐인 것이다. 잘 찾아보면 무의식 속에 존재하는 인물은 데이비드슨 대위뿐이 아니다. 서로를 살해하지 않는 조용한 부족도 그 안에 존재한다. 사실 무의식 안에는 꽤나 많은 것들이 존재하는 듯싶다. 우리가 가장 두려워하는 (따라서 부인하는) 것들도, 우리가 가장 필요로 하는 (따라서 부인하는) 것들도. - P2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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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과 과학
샌드라 하딩 지음, 이재경, 이박혜경 옮김 / 이화여자대학교출판문화원 / 200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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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0. 2023년 연말의 득템


연말, 곧 한 해의 끝이 시작되었다. 약속들이 잡힌다. 약속이 퇴근 시간에 바투 잡히지 않으면 지하철역 너댓 개의 거리는 걸어간다. 12월 역대 최고 기온을 경신하고 있는 올 연말은 더 걸을 만하다. 걸음은 빠른 편이다. 시간이 남는다. 어디서 삐댈까? 고민하며 속도를 늦춰 두리번거리며 걷는다. 오. 그런데 헌책방이다. 큰 기대 없이 들어간다.


앗! 그런데... 대물을 낚았다!
짜~잔~



알라딘 중고시장에서도 고가로 거래되는 샌드라 하딩의 <페미니즘과 과학>이다. 2002년에 출판되었다 절판된, 정가가 1만2천원인 책.
서가에서 책을 뽑아 고이 사장님께 드렸더니, 대뜸 "5천원만 주세요."
대박! 땡큐 사장님~
사실 저 짧은 시간 동안 마음 속에서는 사장님께서 알라딘 중고가격 검색하시지는 않을까 걱정했다. ㅋㅋ
이 날 밤 나는 그날 있었던 마음 쓰이는 일과 다음날 해야 할 일을 다 잊고, 코알라가 되었다.


2. <사이보그 선언>(1985)과 <상황적 지식들>(1988)의 징검다리

술이 깬 다음에야 책을 찬찬히 읽기 시작한다. 일단 해러웨이 나오는 부분만 살펴봤다.
4장 "생물학과 사회과학의 남성중심주의"와 6장 "페미니스트 경험론에서 페미니스트 입장론적 인식론까지"는 <영장류, 사이보그, 그리고 여자>의 4장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1981)에 대한 논평이다. 6장은 해러웨이보다 훨씬 더 명확한 어휘와 논리로 맑스주의를 비판한다. 더 찬찬히 봐야 하겠지만 일단 말장난하지 않고 진지해서 마음에 든다.  


제일 재미있는 것은 7장 "다른 '타자들'과 정체성의 분열"인데, 해러웨이의 "사이보그 선언"(1985, <영장류, 사이보그, 그리고 여자>의 8장)에 대한 매우 진지한 논평이다. 일반 독자라면 딱히 눈치채지 못했을 해러웨이의 변화가 지목되고, 해러웨이와 자신의 일치점과 차이점에 대한 고찰이 인상적이다. 해러웨이는 하딩의 이 논평에 응답하며, "상황적 지식들"(1988)을 발표하였는데, 이는 <영장류, 사이보그, 그리고 여자>의 9장으로 실려 있다. 따라서 이 책은 <영장류, 사이보그, 그리고 여자>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꼭 읽어야 할 책이라고 할 수 있다. 



3. 밑줄을 긋다가


절판되서 못 구하게 된 이 책은 그야말로 페미니스트 고전이라 칭할 만하다. 책을 다 살펴본 것은 아니어서 번역이 어떤지는 잘 모르겠다. 그런데 해러웨이 번역은 워낙 어려우니 너무 극악무도하지 않으면 이해해주고 넘어가도 된다. 어쨌든 이 책은 내게 너무 귀하다. 나보다 더 진지하게 페미니즘과 과학, 해러웨이를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전해지는 것이 마땅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은 완전 새 책인데, 괜히 줄 그으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이미 몇 개의 표시를 한 다음에야 들었다. 아뿔싸!) 

   


도나 해러웨이는 인본주의에 대한 자유주의와 마르크스주의 설명에서 근본적인 세 가지 경계들이 현대 사회 경험 속에서 깨져 버렸다고 지적한다. 첫째, "인간과 동물 사이의 경계는 완전히 깨어졌다. 놀이공원으로 보내지지는 않았다 해도 독특성의 마지막 교두보는 오염되었다 - 언어, 도구 사용, 사회 행동, 정신적 사건, 어느 것도 인간과 동물의 분리를 진정으로 확실하게 이루어 내지 않는다." 둘째, 현대의 기계들이 "자연적인 것과 인공적인 것, 정신과 육체, 자생적인 것과 외적으로 고안된 것 사이의 차이와, 유기체들과 기계들에 적용되곤 하던 다른 많은 구분들을 완전히 모호하게 만들어 버렸다. 우리의 기계들은 불온하게도 살아 있고, 우리 자신은 자력으로 움직일 힘이 놀라울 정도로 없다." 마지막으로, 두 번째 경계의 실패의 부분집합은 물리적인 것과 비물리적인 것 사이의 구분의 부정확성의 증대이다(Haraway 1985, 68-70). - P250

그러나 ‘인간‘이라는 인본주의적 가공물은 동물이나 기계와는 본질적으로 구분되는 것으로, 혹은 물리적인 것들과 비물리적인 것들이라는 구분 가능한 요소들로 - 이러한 것들이 물질과 정신인지, 몸과 영혼인지, 신경물리학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인지, 내분비학적인 것들과 문화적인 것들인지 - 구성되어 있는 것으로 본질화할 수 없기 때문에 그것의 계, 특 ‘여성‘을 본질화하는 것도 마찬가지로 문제가 있다. 페미니스트 경험론 및 입장론의 정당화 전략들이 호소력을 갖는 사회 경험을 한 ‘여성‘은 없고 대신에, 여성들이 있다. 즉 멕시코계 미국 여성들과 라틴계 미국 여성들, 흑인, 백인, 한국 전자 공장에서 일하는 ‘해외의‘ 여성들과 카리브의 성 산업에 종사하는 여성들이 있다. - P250

‘유색인 여성들‘이라는 개념 속에서 해러웨이는 그것이 되살려 내는 많은 미국 페미니즘 이론이나 인본주의 담론들 속에서처럼 - 통합의 정치학으로 본성화되거나 본질화된 정체성보다는 ‘대항 의식(oppositional consciousness)‘과 연대의 정치학에서 나온 정체성과 세계에 대한 관점을 본다. - P250

나아가, 그녀는 서구의 페미니스트들이 기대고 있는 마르크스주의 대상 관계 이론들, 그리고 여성을 남성적 섹슈얼리티의 희생물로 보는 급진적 페미니즘 속에 우리 시대에 적절한 정치학과 인식론을 가로막는 장애물들이 있다고 본다. 이 세 가지 분석들 모두 자아 본래의 통일로 복귀하는 것이 ... 바람직하다는 가정에 의존하고 있다. 해러웨이는 이렇게 계속 주장한다. 우리의 ‘분열된 정체성들(fractured identities)", 말하자면 흑인 페미니스트, 사회주의 페미니스트, 레스비언 페미니스트 등을 포용함으로써 생겼던 설명상의 이점을 보라. 본성화되고, 본질화되고, 특유의 ‘인간적인‘ 것들이라는 가공물에 대한, 그리고 이러한 가공물에게 행해진 왜곡, 전도, 착취, 억압에 대한 우리의 반대 속에서 정치적 인식론적 연대를 구하면 왜 안 되는가? 페미니즘 관점의 영원한 당파성을 인식함으로써 열려진 새로운 가능성들을 탐구하면 왜 안 되는가?

- P251

해러웨이의 주장은 서구 인본주의의 기본적인 금기들을 광적으로 훼손하고서 나온 지식 주장들만을 정당화하는 인식론이 될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하나의‘ 페미니즘 입장이 있을 수 있다면, 그것은 ‘대항 의식‘을 가진 - 정확히 서구 과학의 정신적 동력이었던 ‘하나의 진실한 이야기‘를 갈망하는 것에 대한 반대 - 정치적 투쟁에서 나온 것이라면 무엇이든 다 될 수 있다. ... - P251

이러한 페미니즘적 포스트모더니즘의 인식론에 대해서, 우리는 근대 과학의 정당성을 정당화하기 위해 흔히 제기되는 인식론의 가정들과는 완전히 반대되는 가정들에서 시작해야 한다. ‘지식 주체‘가 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자원은 우리의 비본질적이고, 비본성적이고, 조각난 정체성들과 ‘본래의 통일성‘에로의 복귀의 망상에 대한 거부이다. 그러나 지식 주체들은 분리되었지만 세계는 하나가 될 수 있다. 본질적인 이분법들로 구성되어 있는 밖의 ‘하나의‘ 세계에 대한 가정에, 설명을 통해서 이것을 다시 연결시키는 것이 과학의 일인데, 대조적으로 대항 의식의 종류만큼 상호 관련되고 부드럽게 연결된 많은 현실들이 있다. ‘하나의 진실한 이야기‘를 말하려는 목표를 포기함으로써, 대신에 우리는 페미니즘 연구가 가지고 있는 영원한 당파성을 포용하는 것이다. - P252

해러웨이는 페미니스트 입장론 전략(feminist standpoint strategy)과는 분명히 반대로 설명을 전개하지만, 나는 그 설명이 입장론 전략의 두 가지 주요 요소들을 유익하게 통합시킨다고 생각한다. 첫째, "누가 이야기를 가졌는가(who‘s got one)"에 대해서 입장론적 인식론보다 해러웨이의 개념이 인종과 젠더 지배의 상호 관련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둘 다 대항 의식의 형성에 의존하고 있다. 둘째, 많은 주류 포스트모더니즘과는 대조적으로 페미니즘적 포스트모더니즘은 입장론적 접근들처럼 매우 정치적이다.(각주 42. ... 해러웨이는 그녀가 탐구하는 페미니즘적 포스트모더니즘은 도덕주의와 전위 정치학을 피한다고 주장한다. 나는 이러한 주장에 대해 회의적이며, 특정한 종류의 도덕주의를 포용하는 것을 그다지 싫어하지 않는다.) 그것이 많은 ‘부모격의‘ 담론과 불일치를 보이는 것도 역시 여기서이다. - P252

내가 보기에, 해러웨이의 분석은 여전히 마르크스주의의 인식론적 가정들 안에 너무 갇혀 있기 때문에 약해진다. 이것은 사실상 정치경제학에 대해서 ‘하나의 진실한 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그녀의 노골적인 가정 속에서 알 수 있다. 그녀는 원리상 발달심리학은 역사 제도의 규칙성과 기저의 인과적 경향들에 대한 우리의 이해에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고 가정한다. 또한, 우리가 처음으로 급여를 받았을 때나, 여성이라면 처음 성인으로 사회적 이익을 위해 성적 호의를 교환하기 시작할 때라야, 우리는 독특한 사회적 인간으로 존재하기 시작한다고 본다. - P253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해러웨이의 공헌을 포함하여) 페미니즘적 포스트모더니즘이 단지 ‘죽은 것들의 역사‘, 즉 ‘남성‘, ‘그의 문화‘, ‘그의 지식‘ 그리고 그의 본성화되고 본질화된 ‘여성‘ - 인본주의 과학이 만들고 근대적 형태로 유지하는 데 분명한 역할을 했던 그 개념들-의 역사 그 이상의 것들을 탐구하는 데에 풍부한 개념적 도구들을 제공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이것은 강력한 내부 긴장을 발생시킨다. 즉 입장론적 인식론들은 포스트모던주의 인식론들이 위험한 거짓 이야기라고 여기는, 우리 자신과 세계에 관한 ‘하나의 진실한 이야기‘를 말하려고 하는 것으로 보인다. 입장론적 인식론이 당파적이긴 하지만 ‘덜 거짓된‘ 이야기들을 정당화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모더니스트 조상들과의 관계를 끊을 수 있을까?

승계 과학 프로젝트들을 포기하는 문제는 페미니즘 이론이나 페미니즘 정치학이 가부장제 이론 및 정치학에 대해 서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 - P253

... 만일 인본주의를 곡해함으로써 이익을 보는 우리 서구 수혜자들이 - 많은 페미니즘 사상가들도 이러한 수혜자들이다 - 분열된 자아의 대항의식을 가지고 있는 인간 종의 대다수 성원들을 위한, 단지 그에 관한 것이 아니라, 영원히 당파적인 과학의 이론화에 참여하겠다면, 우리에게는 우리들 대부분이 품어 왔던 것보다 더 강고한 연대의 정치학이 필요하다. 백인 페미니스트들은 우리가 이익을 얻고 있는 구조적 인종 차별주의를 제거하기 위해서 적극적으로 투쟁해야만 한다. 입장론적 이론가들이 지적하듯이, 대항 의식은 "모두가 참여하게 된 사회 관계의 표면 아래를 보는 과학"만이 아니라, "그러한 관계들을 변화시키기 위한 투쟁으로부터만 자라날 수 있는 교육"이 있어야 얻을 수 있다. - P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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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2-18 16: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12-18 16: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초록비 2024-02-07 05: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이 책 구해보고 싶었는데 부럽네요 ;;;

2024-02-08 03: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4-02-09 04: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4-02-09 17: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4-02-09 23: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세계 끝의 버섯
애나 로웬하웁트 칭 지음, 노고운 옮김 / 현실문화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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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서평을 써야지 다짐하고 앉았다. 다 읽는 데 한 달 좀더 걸린 것 같다. 중간쯤 읽을 때에 가끔 가는 꽤 큰 전통시장에서 송이버섯 구경을 하면서 높은 가격에 입맛만 다시기도 했다. 갓이 핀 송이는 더 쌌지만, 그 가격도 내게는 벅차 포기했다. 만약 그때 송이버섯을 살 여유가 있었다면 좀더 재미있게 읽지 않았을까? ㅋ 처음엔 재미있게 읽었는데, 나중엔 계속 똑같은 이야기 같아서 지겨웠다. 소위 포스트휴먼 인류학도 그저 그렇다.


1. 주변자본주의에서의 구제 축적

애나 칭은 송이버섯 채집현장에서의 참여관찰과 심층면접에 기반해서 버섯 채집인, 구매자, 중개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모든 감각을 동원하여 자연 존재들의 움직임을 알아차리고자 하는 인류학적 방법을 성실하게 실행한다. 인간과 비인간 행위자 모두에 대하여 귀기울여 듣기와 알아차리기의 기술을 실행하고자 노력한다. 그리고 그 결과를 그녀가 머리속에 갖고 있는 패치(patch) 자본주의의 밑그림에 기반하여 일종의 스토리텔링으로 재현한다. 패치는 어떤 장소에 자리잡고 있는 얽힘의 배치(assemblage, 56~61)이고, 이 배치들은 상품사슬에 의해 연결된다. 상품사슬의 각 마디에서는 일종의 번역이 이뤄진다. 여기에서 번역은 라투르가 정화의 대립항으로 쓰는 번역과는 조금 다르다. 상품사슬의 상류에서 번역은 야생의 노동과 자연이 자본증식 과정에 투입되어 조율되는 과정을 가리키기도 하고, 하류에서는 상품이 선물로 바뀌게 되는 과정이기도 하다. 칭은 상류의 번역을 구제(salvage)”라는 말로 포착하고자 하는데, 그 의도는 어느 정도 짐작은 하겠는데, salvage구제로 옮기는 것이 적절한지는 모르겠다. 딱히 대안이 생각나지는 않는다. 이 송이버섯이 채집되어 구매인에게 넘겨지는 구제 축적의 장소는 자본주의의 내부인지 외부인지가 애매하므로, 주변자본주의(pericapitalism)라는 그녀만의 용어로 불리운다. 칭은 그곳에 단일경작 플랜테이션 농장의 임금노동의 규율과 확장가능성(scalability)과는 대비되는 채집인들의 자유에 대한 열망이 있다고 해석한다. 이 자유는 그 순간 그 장소에 존재하지만, 상품사슬에 편입되면서 송이버섯이란 비인간 존재도 소외를 겪는다.


2. 교란과 오염으로 함께 만드는 다종의 세계 만들기

미국, 중국, 일본 등의 송이버섯 숲의 이야기들이 등장하는데, 교란과 오염을 자연과 송이버섯에 해가 되는 것으로 이해하는 미국식 이해가 오히려 그것이 송이버섯 키우기에 도움이 된다고 이해되는 일본식의 이해와 대조된다. 중국 윈난성에서는 이것이 절충적인 방식으로 실행된다. 같은 윈난성에서도 티벳 채집인이 한족 구매자에게 버섯을 판매하는 과정에는 열띤 흥정이 존재하지만, 채집인과 구매자가 모두 이족인 마을에서는 신뢰와 장기적 관계에 기반해 있기 때문에 그러한 흥정과정이 존재하지 않는다.


이 부분의 이야기는 해러웨이와 카옌의 관계 같은 것, 곧 마굴리스의 이론을 발전시킨 공동발생 이야기의 연장이다. 서로 다른 종들이 얽히면서 세계를 만들어 나간다. 고전파 정치경제학과 집단유전학의 개체주의적 전제가 비판된다.


3. 잠복되어 있는 공유지

신자유주의 자본주의의 중심에서건 아니면 안팎의 경계가 불확실한 주변자본주의에서건 불안정성과 불확정성이 일반적이다. 그런데 칭은 이 제도화된 소외의 한가운데에 존재하는 얽힘의 일시적 순간들에서 잠복해 있는 공유지(latent commons)”의 가능성을 탐색한다(450~452). 꼭 있으라는 보장도, 꼭 더 좋으라는 보장도, 구원의 보장도 없지만 이 잠재적 공유지는 인간과 비인간 존재 모두가 함께 여기에서 만들어가는 희망의 과정이다.  


큰 꿈은 꾸지 말되 포기는 하지 말자. 뭐 이런 이야기 같다. 일상 속의 작은 희망, 그래그거 중요한 거다. 에효


4. Anti-ending??

연구질문에 대한 명확한 답이 없는 글들은 보통 결론 대신 결론에 대신하여같은 이름의 결말부로 끝나는 것을 종종 본다. 그런데 이 책처럼 마지막 장 직전 챕터인 20장의 제목이 “Anti-ending”인 글은 처음 본다. 이 책은 끝맺기를 거부한다(503). 나는 대체로 열린 결말로 끝나는 서사구조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글도, 영화도. 왠지 저자가 내지 못하는 결론을 독자, 청중, 관객에게 미룬다는 느낌을 받기 때문이다. 사실 이 책도 그래서 끝부분이 좀 실망스러울 뻔했다. 마지막 부분에 인용한 글이 르 귄의 「소설의 운반 가방 이론」(The Carrier Bag Theory of Fiction, https://blog.aladin.co.kr/eroica/14149146#Comment_14149146)이 아니었다면, 분명 이 책의 독서경험은 나의 고정관념을 강화시켰을 것이다.


르 귄의 캐리어백 픽션 이론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이 정형으로 제시한 시작, 중간, 끝이 있는 이야기에 반대하며, 오우로보로스가 상징하는 원환의 이야기를 긍정한다. 칭이 이 책의 마지막에서 인용한 르 귄의 스토리는 실뜨기가 되어 해러웨이의 손으로 넘어간다. 해러웨이의 『트러블과 함께 하기』 제2장을 보라. 칭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책은 끝나지만 이야기는 다른 사람들에 의해 계속된다. 포스트휴먼 인류학 이야기가 뒤로 갈수록 너무 지루해져서 별 네 개 줄까 하다가 르 귄 이야기로 끝나서 별 다섯 개다.


역자는 매우 훌륭한 번역을 하셨지만, 칭이 인용한 르 귄의 이 글 맨 앞 부분을 오역했다. 『세상 끝에서 춤추다』(이수현 역, 황금가지) 297쪽이니 찾아보시기를…. 번역에 관해서 한 마디만 하고 마치겠다. 정말 훌륭한 번역이다. 아무나 이렇게 유려하게 못한다. 그러나 putting-out내놓기로 번역하면 안 된다. Putting-out system(영어판 pp. 114~115, 한글판 214)은 보통 선대제(先貸制)로 번역한다. 베버의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을 비롯하여 경제사 책에 산업혁명 이전의 자본주의 관계의 등장을 이야기할 때 빈번히 나오는 개념이다. “주변자본주의의 구제축적 이야기를 하려면 자본주의에 대해서도 열심히 공부해야 한다. 인본주의적 개념화라고 깔보기 전에 말이다. 짜잘한 이의제기들을 더할 수 있지만, 역자의 노고에 진심으로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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