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끝에서 춤추다 - 언어, 여자, 장소에 대한 사색
어슐러 K. 르 귄 지음, 이수현 옮김 / 황금가지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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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글들의 모음이지만 그 안에 녹아 있는 르 귄의 사유는 깊고 넓고 따뜻하다. 여름에 읽은 책인데, 한 해가 저물어갈 때쯤에야 리뷰를 쓴다. 지난 주말에 바로 쓰고 싶었는데 김장 담그느라 못 썼고, 주중에도 일(과 월드컵) 때문에 잠시도 짬을 내기 힘들었다. 리뷰를 하기 전에 다시 빠르게 넘기며 초점을 잡는데 또 새로운 것들이 보인다. 특히 1986년에 발표한 세 글 - <브린 모어 대학 졸업식 축사>, <여자/야생>, <캐리어백 픽션 이론> -이 돋보인다. 원래 두 주제에 초점을 맞춘 하나의 리뷰를 쓰고 싶었는데, 마음을 바꿔 주제별로 두 개의 리뷰를 작성해야 할 것 같다. 두 번째 것은 쓸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이 첫 번째 리뷰는 르 귄의 캐리어백 픽션 이론에 관한 것이다. 이 책에는 소설판 장바구니론”(292~301)이라고 번역되어 있다.

 

1.

이 책의 발행일이 2021910일로 되어 있는데, 내가 해러웨이의 트러블과 함께하기를 읽고 리뷰(https://blog.aladin.co.kr/eroica/12900997)를 쓴 것이 그보다 열흘 남짓 빠른 829일였다. 처음 읽은 해러웨이의 책이었고, 그 책에서 르 귄의 이름을 처음 알았다. 언제나 그렇지만 내가 몰랐다고 별볼일없는 사람이 아니다. BTS 팬들은 그녀에 대해 이미 알고 있었고, 우리 말로도 그녀의 여러 작품이 번역된 유명한 SF 작가였는데, 그때 난 존재 자체를 모르고 있었다. 해러웨이는 트러블과 함께하기2(73~81)에서 르 귄의 이 글을 라투르, 마굴리스, 스탕제르 등의 논의와, 그리고 신의 트릭(God’s trick)”에 대한 자신의 이야기와 함께 엮어낸다. 그때는 아직 이 책이 번역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리고 음경 이야기(prick tale)”라는 유머를 질식시키는 극악무도한 번역 때문에 이 글의 원문을 찾아볼 수밖에 없었다. 그로부터 1년 반 동안 (스탕제르는 엄두를 못 냈지만,) 라투르, 마굴리스, 르 귄의 글들을 짬짬이 읽어 왔다. 해러웨이가 르 귄으로 들어가는 문을 열어준 것이다. 처음에는 해러웨이를 이해하기 위해 르 귄을 읽었는데, 읽으면 읽을수록 르 귄은 (이런 비교가 참 속물스럽지만) 어쩌면 해러웨이보다 더 훌륭한 사람 같다는 느낌이 든다.

  

르 귄의 캐리어백 픽션 이론에 관한 독보적인 이 짧은 글(한글로는 10페이지, 영어로는 6페이지)을 내가 몇 번이나 읽었을까? 열 번은 조금 안 될 것 같다. 그런데 이번에는 이전에 넘어갔던 한 구절이 나의 눈길을 끌었다.

 

버지니아 울프는 3기니라는 제목으로 완성될 책을 계획하고 있었을 때 공책에 용어사전(Glossary)”이라는 제목을 썼다. 당시 울프는 색다른 이야기를 하기 위해, 자신의 새로운 계획에 따라 영어를 재창조할 생각을 했다. 이 용어 사전 항목 중에 영웅주의는 보툴리즘(botulism)”으로 정의된다. 그리고 울프의 사전에서 영웅은 보틀(bottle)”이다. (bottle)이 영웅이라니, 혹독한 재평가다. 나는 이제 그 병을 영웅으로 제시하려 한다"(294).


이것은 무슨 말일까? 그 분야에 무지하지만, 버지니아 울프라는 이름은 들어봤다. 읽은 것은 없다. 그런데 그녀가 영웅담(heroism)을 보툴리즘으로, 영웅을 병으로 재정의하려고 하였다니. 출처가 어디인지, 맥락이 무엇인지 도무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르 귄의 이 책은 출처에 대해서 보통 미주를 달아 놓았는데, 유독 이 구절에 대해서는 아무런 실마리가 없었다. 버지니아 울프와 보툴리즘을 구글링한 끝에 Virginia Woolf’s Reading Notebooks(1983)의 존재를 알게 되었고, 내가 종종 이용하지만 장서가 그리 대단치 않다고 여겨온 도서관에서 이 책을 발견했고, 이 책의 53쪽에서 르 귄이 언급한 부분을 찾아냈다(https://blog.aladin.co.kr/eroica/14114280). 그런데 내용이 별 것 없다.

 

Soldier = Gutsgruzzler. Heroism = Botulism. a Hero = Bottle” (Virginia Woolf's Reading Notebooks, p. 253)

 

울프가 자신만의 노트에 남긴 이 짧막한 생각의 파편을 보았을 때, 르 귄은 궁금했을 것이다. 이것이 무슨 뜻일까? 그리고는 상상력을 발휘해서 짧지만 빛나는 위대함으로 가득찬 이 글을 써낸 것이다.

 



2.

르 귄은 프랑스 대혁명 이전의 사회계약론자들 홉스, 로크, 루소 등 처럼 채집사회에서 수렵사회로 넘어가는 일종의 자연상태에 대한 이야기로 글을 시작한다. 농업이나 문명이 시작되기 전의 시대, 일주일에 15시간 정도 일하면 충분히 생활을 꾸릴 수 있던 시절이다. 여자들은 아기를 보며 야생귀리를 까던 시절, 아기도 없고 노래나 별 다른 기술도 없던 남자들은 심심해서 나가서 매머드 사냥을 한다. 남자들은 상아와 고기만 갖고 돌아온 것이 아니라, 수렵 과정에서 있었던 일들에 대한 흥미진진한 이야기들까지 갖고 돌아온다. “액션으로 가득찬 영웅담. 이제 아이를 보며 야생귀리 까는 이야기는 목숨을 걸고 매머드를 찔러 죽이고 마침내 전리품을 짊어지고 귀환하는 액션 히어로 이야기와 비교가 될 수 없다.

 

르 귄은 이들의 영웅담에 들어 있는 때리고 찌르고 두들길 길고 단단한 도구”, “그 멋진 크고 길고 단단한 물건잎사귀, 박껍데기, 조개껍데기, 그물, 가방, 멜빵, 자루, , , 상자, 용기, 담는 것, 그릇같은 물건을 담을 용기”, 무엇인가를 담는 물건을 의미하는 병을 반정립시킨다(294-295). 막대기, , 창 이야기는 많이 들어봤지만, 그릇이나 병 이야기는 별로 들어본 적이 없다는 의미에서 새로운 이야기, 곧 뉴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언가를 담는 도구는 단검이나 도끼보다 훨씬 이전부터 존재했다. 이것이 인류학자 엘리자베스 피셔가 인간진화의 캐리어백 이론이라고 부른 것이고, 울프가 남긴 실마리를 르 귄이 재탄생 시킨 것이다.

 

르 귄은 제국주의적인 본성과 통제불가능한 충동을 다스리기 위해 법을 만드는 영웅들의 액션 스토리의 특징을 세 요소로 정리한다(298-299). 1) 한 시점에서 출발해서 그 후의 다른 시점의 목표에 도달하는 시간의 화살의 서사, 2) 갈등 중심의 전개, 3) 남자 영웅(he)이 나오지 않는 이야기는 좋은 이야기가 될 수 없다고 보는 관점이다.

 

르 귄은 이 셋 모두에 반대한다. 첫째, 처음, 중간, 끝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정리(48~49, 73)는 마치 시작 이전과 끝 이후에는 아무 이야기도 없는 것처럼 가정하지만, 실제로는 그 시작 이전에는 전편들(prequels)이, 끝 이후에는 속편들(sequels)이 존재한다. 이 시간의 화살에 우로보로스의 형상이 반정립된다. 둘째, 중요한 것은 관계이고, 갈등은 그것의 한 종류일 뿐이므로 모든 관계를 갈등으로 환원할 수 없다. 셋째, 소설에는 영웅이 아니라 사람들(people)이 있어야 한다.

 

르 귄은 소설을 시간의 화살이나 승리라는 결과를 갈등 끝에 쟁취하는 전투가 아니라, 자루나 가방으로 보는 것이 더 적합하다고 한다.

 

책은 말을 담는다. 말은 사물을 담는다. 의미를 품는다. 소설은 약보따리이며 그 속에 담긴 것들은 서로와, 그리고 우리와 특별하고 강력한 관계를 맺고 있다... 가방 속에 집어넣으면 영웅도 토끼처럼 보이고, 감자처럼 보일 것이다. 바로 그래서 나는 소설을 좋아한다. 소설 속에는 영웅이 아니라 사람들이 있다”(299).

 

뾰족한 것으로 찔러 죽이는 이야기가 아니라, 관계들에 대한 이야기 보따리로서의 소설이라는 르 귄의 관점은 SF의 재정의로 이어진다. 기술과 과학은 누군가를 지배하는 무기가 아니라, 문화의 장바구니로 다시 정의하게 되면, SF는 리얼리즘보다 덜 신화적인 장르로서 기묘한 리얼리즘이지만, 기묘한 현실이다”(301). 우리의 세상은 거대한 자루이고, 그 안에는 여러 존재들의 관계가 맺어졌다 풀려난다. 이 세상은 새로 태어날 것들의 자궁이며, 이전에 있던 것들의 무덤이며, 남자뿐만 아니라, 야생귀리를 잔뜩 따서 담고 그 씨앗을 뿌리는 이들, 그 와중에 포대기로 업은 아이들에게 불러주는 노래와 아이들의 농담이 다 들어 있다. 이 얼마나 기꺼이 잠겨 쉬고 싶은 편안하고 따뜻한 목욕물인가?


3.

이렇게 르 귄은 영웅이 길고 단단한 막대기를 휘두르는 영웅담(heroism)을 무언가를 담는 그릇의 보툴리즘(botulism)으로 대체한다. 대단하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울프의 노트에 나온 뜻모를 수수께끼를 이렇게 풀어내다니, 스핑크스의 퀴즈를 풀어낸 오이디푸스보다 위대한 인간, 더 닮고 싶은 인간 아닌가?

 

르 귄은 같은 해에 작성된 <브린 모어 대학 졸업식 축사>에서는 우리가 학교에서 배운 언어, 힘의 언어인 아버지말(father tongue)과 학교에 들어가기 전 배웠던 어머니말(mother tongue)을 대조시키면서, 후자는 그냥 의사소통이 아니라 관계와 관계 맺기의 언어”, “언제나 침묵 언저리에 있고, 자주 노래 가장자리에 있는 언어, ... 이야기들을 전하는 언어로 정의한다. 이 언어의 힘은 쪼개는 데 있지 않고 묶는 데 있으며, 거리를 벌리는 데 있지 않고 통합하는 데 있다고 말한다(263~264).

 

나는 이 문장들에서 어떤 경이를 느낀다. 그 경이를 아버지말에 오염된 나의 무딘 언어로 표현하기는 쉽지 않다. 그저 내 배꼽을 만져볼 뿐. 인간이라면, 곧 배꼽을 갖고 있다면, 어머니말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미 들어 왔던 말이고, 이미 할 줄 아는 말이기도 하다. 어머니말을 쓰는 비중을 늘리고, 그 말이 적합한 상황에서 그 말을 쓰고, 가끔은 아버지말을 어머니말로 번역도 하고, 번역 와중에 아버지말이 놓친 것들에 대해 어머니말로 실컷 이야기해야 하겠다.


4.

해러웨이는 트러블과 함께하기2(73~81)두번째 밀레니엄의 겸손한 목격자, 여성인간 앙코마우스를 만나다6(448~453)에서 이 캐리어백 픽션 이론을 발판삼아 아버지말과 어머니말을 넘나들며 새로운 스토리텔링의 방식을 보여준다. 철학적인 배경지식이 없다면, STS에 관심이 딱히 있는 것이 아니라면, 해러웨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데리다나 라투르가 아니라 르 귄에서 시작하는 것을 권하고 싶다. 해러웨이를 전공하거나 번역하는 이라면, 르 귄을 꼭 읽어야 할 것이다. 그래야 황당한 창조적 오역들을 피할 수 있겠다 싶다.

 

5. 딴 얘기 하나, 김장

일주일 전 김장을 했다. 전날 장보다 감기가 걸렸다. 오전부터 시작한 김장 노동은 자정이 가까워졌는데도 끝나지 않았다. 쪽파를 까면서 내 엄지와 검지는 팟물이 들어 흑록색으로 바뀌었다. 입은 계속 투덜댔지만 손은 쉬지 않았다. 씻고, 까고, 채썰고, 자르고, 나르고, 버무리고, 설거지하는 것이 무한반복되었다. 허리가 휘도록 일한다는 게 이런 거구나 했다. 일어나거나 앉을 때마다 아이구구구하는 소리가 계속 저절로 나왔다


 

마음 속으로 생각했다이런 게 야생귀리를 따고 까는 일이겠구나. ^^ 그러니 기분이 한결 좋아졌다마음 속으로 계속 생각했다김장이 엄청난 노동이지만이 노동은 착취당하는 노동이 아니다. 가격으로 수량화되는 '교환가치'를 위한 것이 아니라, 김치라는 사용가치의 생산을 위한곧 나의 재생산을 위한 노동은 필요노동과 잉여노동으로 구분되지 않는다온전히 나를 위한 노동이다새벽이 되어서야 끝난 김장 끝에 김치냉장고에서는 김치가 익고 있다.



허리는 이제 다 나았지만, 감기는 아직 안 나았고, 터진 엄지손톱 양쪽 끝 살들도 그대로다. 액션 영웅담인 월드컵을 보는 시간도 16강전 진출로 연장되었다. 배꼽 있는 인간에게 이 액션 히어로물은 오락물일 뿐이다. 반면 끊임없이 내가 씻고 채우고 비우고 날랐던 김장매트, “다라이”, 김냉 저장용기, 김치 냉장고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삶의 일부였다


이제는 김장하시기에는 기력이 없으신 어머니와 김장에 별 흥미를 못 느끼는 동생들에게 갖다 주니 좋아 한다. 나의 노동의 산물인 김치가 플라스틱 박스에 담겨 돈으로 바꿀 수 없는, 값을 매길 수 없는(priceless) 선물이 된다. 별로 재미없지만 배꼽달린 사람의 삶은 이런 것이다. 어머니말에 별 재주가 없는 나는 이렇게밖에 못 쓰지만, 르 귄은 다를 것이다. 그리고 또 다른 젊은 르 귄들이 유려한 어머니말로 유치한 파워레인저 이야기들을 가방 속 토끼로 만들어버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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