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과 종이 만날 때 - 복수종들의 정치 아우또노미아총서 80
도나 해러웨이 지음, 최유미 옮김 / 갈무리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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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 개의 고원 - 자본주의와 분열증 2
질 들뢰즈.펠릭스 가타리 지음, 김재인 옮김 / 새물결 / 200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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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어도 못하고 그렇기 때문에 본격적인 시비가림을 하자는 것은 아니다. 돈 주고 책 산 독자의 불평쯤 될 것이다.


어려운 책이라 번역이 어려웠겠지만, 용어 선택에 있어서 납득할 수 없는 것이 많다. 


예컨대, progression을 "진보", regression을 "퇴행", involution을 "역행"이라고 옮겨 놓았는데(446~453), 각각 "전진", "후퇴", "연루/엮임/얽힘/관계맺음"으로 옮겨야 말이 된다.


"진보"는 말 그대로 "시간의 화살"을 전제하는 근대주의적 개념이다.

이 책 <천 개의 고원>에서 progression은 "무엇을 향해 더 앞으로 나가다/전진하다"라는 공간적 이동의 의미이지, 시간의 흐름을 전혀 지시하지 않는다. 

한편으로 <자연>은 단계적인 닮음에 의해 계열의 모델과 근거로서 존재자들 모두가 모방의 대상으로 삼는 신이라는 최고항을 향해 나아가면서 진보적이거나 퇴행적으로 끊임없이 서로를 모방하는 존재자들의 사슬이라는 형식으로 고려된다.

"나아가면서 진보적이거나 퇴행적으로" -> 전진하거나 후퇴하면서 - P446

우리들로서는 이처럼 이질적인 것들 간에 나타나는 진화 형태를 "역행(involution)"이라고 부르고 싶은데, 단 이 역행을 퇴행과 혼동해서는 안된다. 되기는 역행적이며, 이 역행은 창조적이다. 퇴행한다는 것은 덜 분화된 것으로 향해가는 것이다. 그러나 역행한다는 것은 자신의 고유한 선을 따라, 주어진 여러 항들 "사이에서", 할당가능한 관계를 맺으면서 전개되는 하나의 블록을 형성하는 일을 가리킨다.

1. 역행 -> 엮임, 휘감김
2. 마지막 문장 (영어본, p. 239)
But to involve is to form a block that runs its own line "between" the terms in play and beneath assignable relations.
그러나 연루된다는 것은 서로 관계하는 항들 "사이에", 그리고 할당가능한 관계들 밑에 나있는 자신의 선을 달리면서 한 덩어리를 형성하는 것이다. (연루된다는 것은 복수의 항들이 한 덩어리가 된다는 것) - P4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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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의 언어 - 판타지, SF 그리고 글쓰기에 관하여
어슐러 K. 르 귄 지음, 조호근 옮김 / 서커스(서커스출판상회)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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빼앗긴 자들(1974)(https://blog.aladin.co.kr/eroica/14627603)의 진한 여운이 채 가시지 않은 상태다. 그 책에서 주인공 셰벡은 원고를 다듬던 오도가 보이는 비전(vision)을 접한다. 나도 빼앗긴 자들을 쓰던 당시 르 귄의 모습과 생각이 궁금해서 작품 밖의 그녀가 보고 싶었고, 50년 전쯤에 쓰인 글들이 모여 있는 이 책을 통해 살짝이나마 본 것 같아 좋았다. 따뜻한 음색의 명료한 영어를 구사하는 지금 내 나이 또래의 똑똑한 백인 여성. 이 책에서 만난 르 귄은 그렇다. 원래부터 유명하지만 나는 몰랐던, 세상을 떠난 다음에야 비로소 알게 되고 좋아하게 된 많은 사람들이 있지만, 요즘 내게 르 귄이 그렇다.

 

1979년에 처음, 그리고 1989년에 다시 손봐서 출판된 책이다. 수록된 글들은 1973년부터 79년까지 출판된 에세이들이다. 세상 끝에서 춤추다(https://blog.aladin.co.kr/eroica/13896013)1976~88년 시기에 쓰여진 글들의 모음이니, 그 책과 시기가 살짝 겹치면서도 약간 더 오래된 글들이라고 보면 될 것 같다. 생각하기에 따라 큰 흠은 아닐 수도 있겠지만, 한국어판은 편집자 수잔 우드가 주제별로 배열한 순서를 해체하고 발표 연대순으로 글을 재배열해놓았다. “옮긴이의 말에서 이유를 밝혀놓았는데, 별로 납득이 되지는 않는다.

 

1. 르 귄의 창작법과 예술론: “SF와 브라운 부인

르 귄이 좋은 글을 많이 쓸 수 있었던 것은 좋은 글을 아주 많이 읽었기 때문이다. 그녀의 에세이에는 언제나 독서 이력이 진하게 묻어난다. 던세이니, 자먀친, 톨킨, 스타니스워프 렘, 필립 K. 딕 같은 판타지/SF 작가들뿐만 아니라, 톨스토이, 도스토예프스키, 버지니아 울프, 제인 오스틴, D. H. 로렌스, 솔제니친 같은 소설가들, 카를 융 같은 정신분석학자들이 등장한다. 사실 나는 이들 모두에 대해 이름만 들어봤을 뿐 문외한이다. 버지니아 울프에 대해서만 약간의 정성을 더 기울여 르 귄이 다루는 울프 글을 읽어봤지만, 정작 이해하기가 쉽지는 않아 공들인 것이 좀 아쉽다. “SF와 브라운 부인”(1975)은 울프의 베넷씨와 브라운 부인(1924)에 대한 일종의 오마주 또는 업데이트다. 울프의 글은 100년 전 글이고, 르 귄의 글은 50년 전 글이다. 두 글 간에는 50년 정도의 격차가 있고, 르 귄이 “SF와 브라운 부인을 쓴 시점과 독자인 내가 그 글을 읽는 시점 사이에도 50년의 시차가 있다.

 

울프는 브라운 부인으로 상징되는 인물(character)에 대한 글을 썼다. 브라운 부인은 “Catch me, if you can!”을 외치고 사라지며 작가들에게 글을 쓰게 만든다. 르 귄은 그 글을 물고 늘어지면서 묻는다. “SF 작가가 소설을 쓸 수 있을까? 그것은 바람직한 것일까?”(200). 르 귄에 따르면, SF는 오웰이나 헉슬리 등에 의해 1930년대에야 태동하였고, 1920년대 초에 그 글을 쓰던 울프는 SF의 존재를 몰랐다. 그리고는 넌지시 말한다. 판타지 문학은 브라운 부인이 존재하지 않을 수 있는 문학 분야라고, 판타지는 민담, 동화, 신화처럼 인물(character)이 아니라 원형(archetype)을 다룬다고 말이다. 그러나 곧 다시 반문한다. 반지의 제왕을 영화로 본 나도 익숙한 누군가의 모습과 이름이 나온다. “프로도 배긴스!” 톨킨이 대단한 점은 프로도라는 하나의 캐릭터에 실제로는 너댓 원형들(archetypes)을 조합해낸 것이다. 프로도, , 골룸, 스미아골, 그리고 아마 빌보까지 다섯 개의 부분이 프로도라는 하나의 퍼스낼러티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이어서 SF 소설 두 작품(필립 K. 딕의 높은 성의 사나이D. G. 콤튼의 인조쾌락)의 사례를 들어 이제 SF에도 브라운 부인, 그러니까 캐릭터, 또는 우리가 따르며 사는 영혼(the spirit we live by)”이 존재함을 확언한다.

 

[“the spirit we live by”212쪽에서는 우리가 따르며 사는 영혼으로, 218쪽에서는 우리가 그 인도를 따르며 사는 영혼으로 다르게 번역된다. 갈라디아서 525절의 구절이라는 각주가 붙어 있다. 그러나 역자가 이 말이 울프의 베넷씨와 브라운 부인의 맨 마지막에 나왔다는 사실을 알지는 못한 것 같다. 알았다면 좀더 번역이 말이 되지 않았을까 싶다. 그건 그렇고, spirit영혼으로 옮겨도 되나?]

 

반지의 제왕이야기가 나올 때는 재미있었는데, 다른 SF를 몰라서 살짝 지루해졌다. 그런데 때마침 자신의 작품 이야기를 하기 시작한다. 르 귄은 책에 대한 영감을 줄거리나 메시지의 형태가 아니라, 문득 보이는 사람의 모습, 사람이 있는 어떤 비전(vision)에서 얻는다고 한다(214). 그리고 자신은 그 사람과 그가 있는 곳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일단 그 사람을 보면, 그곳으로 넘어간다고 한다. 르 귄은 빼앗긴 자들의 메인 캐릭터인 셰벡도 그렇게 보았다고 한다. 이 남자 물리학자의 모델은 젊은 시절의 로버트 오펜하이머란다. 원자폭탄 발명가. 때마침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영화 <오펜하이머>도 개봉 예정이다. 외모는 그렇게 보였다 한다. 그 다음은?



 

르 귄은 원래 이 이야기를 단편으로 썼다. 그런데 이것이 “30여년 작가 인생 최악의 작품, 정말 한심한 단편였다나... 이 단편을 발표했을까? 발표했다면 제목을 언급했을텐데, 그런 이야기는 없다. 어쨌든 그 실패작 단편에서 제대로 잡아내지 못한 남자 물리학자 캐릭터가 르 귄에게 말한다. 아마 썩소를 날리면서 말했을 것이다. “Catch me, if you can.” 이때부터 르 귄의 캐릭터 잡기 = 둘 간의 대화 = 르 귄 머릿속에서 펼쳐지는 상상이 시작된다.


르 귄: 이름이 뭐니?

셰벡: 셰벡. (이 때에야 비로소 이름이 지어진다.)

르 귄: 그래서 당신은 누구지?

셰벡: 글쎄... 아마도 유토피아의 시민?  


르 귄은 유토피아가 어떤 모습일까 알기 위해 여러 해에 걸쳐, 엥겔스, 마르크스, 폴 굿맨, 셸리, 크로포트킨을 읽는다. 셰벡과 대화하며 상상하는 과정은 아직은 캐릭터로 구현되지 않은 spiritlive by하는 과정이다. 그런데 르 귄에게 셰벡이 있는 곳, 그가 돌아갈 곳 등을 고민하는 것은 결국 자신의 사회와 세계에 대한 고민과 겹쳐 있다. “Catch me, if you can!”하며 달아나는 셰벡을 르 귄은 결국 잡아내서 빼앗긴 자들안에 온전히 담게 된다.

 

이쯤에서 끝나도 좋았을 글인데, 르 귄은 계속한다. 인간중심주의를 거부하면서도, 우리는 객체가 아닌 주체이며, 자연이라는 위대하고 궁극적인 객체도 오직 우리가 함께 해야 전부 주체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 베넷씨가 주체를 객체에 대한 묘사로 대체해버리려 했다는 울프의 비판에 동참하면서, 르 귄은 베넷식의 소설작법뿐만 아니라, 현대 심리소설’, ‘사회주의 리얼리즘’, 그리고 당시의 대중적 SF를 싸잡아 비판한다. 곧 이들은 신 흉내를 내면서 불편부당함을 강조하는 과학자들처럼 주체의 경험을 무시하는데, 이는 비전(vision)을 재생산해야 한다는 예술가의 의무를 회피하는 것이라고 강도높게 비판한다(230, 그런데 번역이 잘못되어 있어 이런 말인지 알기 힘들다).

 

르 귄은 픽션의 매력을 언제나 트러블을 일으킨다는 점에서 찾는다(231). 시와 음악과 달리, 픽션은 초월, 곧 이해(understanding)를 건너뛴 평화를 줄 수 없다. 픽션의 본질은 바로 진창(muddle)이다. 진창은 흐느적거리며 유연하고, 새로운 것이 생겨난다. 무언가가 새롭게 생겨나는 진흙탕이 바로 소설인 것이다. 소설은 거짓 희망이 아닌 진실한 희망을 주며, 빵은 아니지만 우리가 의지해 살아갈 대상”(what we live by)을 준다. 그리고 브라운 부인이 계속해서 남아 있을 것을 약속한다.

 

이 글 “SF와 브라운 부인은 르 귄의 판타지처럼 글 자체가 하나의 여행이다(74, 125). 버지니아 울프에서 출발해서 톨킨과 다른 SF를 거쳐서 자신의 빼앗긴 자들, 그리고 다시 애초에 울프의 글로 돌아가서 멋진 마무리를 짓는다. 그러나 이 글을 쓰던 당시 르 귄은 몰랐을 것이다. 이 마지막 부분에 그녀가 남긴 실의 형상(string figure)이 도나 해러웨이라는 걸출한 생물학자이자 SF 팬에게 넘어가 트러블과 함께 하기라는 흥미로운 저작이 태어나는 진창 역할을 하게 될지를. 마치 1923베넷씨와 브라운 부인을 쓰고 있던 울프의 실이 50년 후 르 귄에게 넘어가 새로운 형상의 실뜨기 모습으로 릴레이되리라는 것을 울프가 몰랐듯이.

 

2. 판타지는 밤의 언어로 말한다.

르 귄의 책을 읽을 때에는 그것이 소설이 아닌 에세이집이라 해도 제목에 상당히 신경이 쓰인다. “밤의 언어”? 무슨 말일까? 영어책 맨 앞에 실린 수잔 우드의 Introduction은 한국어판에서는 책 뒤에 실린 해설이다. 어쨌든 우드의 그 글은 르 귄이 1976년에 발표한 에세이의 한 구절을 제사(題詞)로 택한다. “... 판타지는 시처럼 밤의 언어로 말한다.” 르 귄은 일단 출판한 글을 다시 손대는 일을 타부로 생각했지만(6), 그녀의 팬이 편집자가 되어, 자신의 수많은 글들을 추리고, 그 중에 나오는 멋진 말 밤의 언어(the language of the night)”를 콕 집어 제목으로 정한 것이다.

 

그렇다면 그 밤의 언어란 무엇인가? 먼저 우드의 요약에 따르면, 꿈은 말이 아닌 이미지(nonverbal images)로 되어 있는데, 의식의 정신(conscious mind)이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꿈이 단어-상징(word-symbols)으로 번역되어야 한다(362). 그래서 우드는 이 책의 핵심어로 번역을 꼽는다. 실제로 르 귄은 아이와 그림자”(1974)에서 톨킨의 반지의 제왕에 대한 훌륭한 비평(130~131)을 제시하는데, 바로 이것이 밤의 언어를 낮의 언어로, 직관적인 과정을 이해가능한 언어-상징으로 번역한 것이다.

 

르 귄은 밤의 언어를 낮의 언어로 번역하는 데에도 능하지만, 밤의 언어로 창작하는 것에 더 능한 이이다. 르 귄의 출중한 밤의 언어 구사 능력에는 칼 구스타프 융의 영향을 간과할 수 없을 것 같다. 이 책을 읽기 전 르 귄이 융을 좋아한다는 이야기를 어디선가 얼핏 본 기억이 난다. 그런데 난 융을 모르고, 사실 관심을 가질 일이 없었다. 그런데 르 귄은 내게 융의 매력을 제대로 알려주었다. 좀처럼 하지 않는 일인 것 같은데, 르 귄은 아주 친절히 융을 독자에게 설명해준다.

 

융 이론의 핵심은 자아ego는 더 큰 자기self의 부분이라는 것이다. “자기는 개인적인 것이 아니라, 집합적인 것이며, 모든 인류, 어쩌면 모든 생명체와 공유하는 것, 어쩌면 신이라 불리는 존재로의 연결 고리이다. 곧 자기는 집단 무의식collective unconscious’으로서, 이 안에서 우리 모두가 만난다. 곧 진정한 공동체의 근원이다(121). 이 곳에 가는 방법은? 융은 자신의 그림자를 따라가라고 말한다. 그림자는 인간 의식의 그늘 속 형제, 카인, 칼리반, 프랑켄슈타인의 괴물, 하이드 씨, 골룸, 도플갱어다. 의식에 의해서 부정당한 자신의 일부분. 그러나 그림자는 단순히 열등하고, 원시적이고, 서투르고, 짐승 같고, 아이 같은 악한 존재가 아니라, 강인하고, 생명력 넘치고, 즉홍적이다. 막 사춘기를 벗어난 젊은이는 자신의 그림자를 총체적인 악으로 취급하곤 하지만, 결국 그것 역시 자신의 일부라고 인정해야 자기비하와 자기혐오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러면 그림자는 그에게 안내자가 된다. 판타지는 그 그림자를 따라가는 여행이다. 여행자가 그 여행을 통해 바뀌는 여행(74, 128, 188).


자기라는 집단 무의식의 존재가 바로 인간의 소통가능성을 보장한다. 아마도 이것이 프로이트와 융의 결정적 차이 중 하나일 것이다. 고립적으로 존재하는 내 속에서 자아(ego)id, superego와 겹쳐 있다는 프로이트 이야기는 이제 좀 지겹다. 융은 저마다의 자아가 그 깊은 곳에 최소공통분모(the lowest common denominator), mass mind[120, 번역하기 어려운 말이라 그런지 역자가 번역을 안 했다]를 갖고 있다고 말한다. 다 같은 인간이고, 같은 우주의 부분이다. 이 말은 당신 마음 깊은 곳에 있는 것이 바로 내 마음 깊은 곳에 있다는 것이다. 르 귄은 이를 다음과 같이 멋지게 정리한다.


예술가는 타인의 내면에 닿으려면 자신의 내면으로 들어가야 한다. ... 자신의 내면으로 더욱 깊숙이 들어갈수록 타인에게 더 가까워질 수 있는 것이다”(188).


역설적으로 들리는 이 말이 가능한 것은 바로 융이 말하는 자기, 곧 집단 무의식의 존재 때문이다.


책꽂이나 텔레비전에서 살아 있는 원형(archetype)을 찾을 수는 없다. 오로지 나 자신에게서만 찾을 수 있는 것이다. 인류 공통의 마음 속 어둠에 도사린, 개인성의 핵심에서 말이다”(189).

타인은 (사르트르처럼) 지옥이 아니라 구원이다”(254).

르 귄의 판타지가 성공한 가장 큰 이유가 있다면, 르 귄이 자신의 내면 깊숙이 들어가서 그녀의 독자를 포함한 인류의 집단 무의식, 곧 자기에 잘 도착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행 경험을 다른 이들의 내면에 맞닿아 있는 밤의 언어로 뛰어나게 형상화했기 때문일 것이다.

 

3. 나의 그림자

처음 아이와 그림자”(1974)를 읽으면서는 <악귀>머리를 풀어헤친 그림자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 그림자가 나오는 장이 떠올랐다. 한국과 서양은 그림자에 대한 의미 부여가 좀 다른 것 같다. 프로도의 골룸, 나의 또 다른 나.

 

그림자는 평상시 잊고 지내던 과거의 나의 어떤 모습을 투사한 것이다. 아니 반대로 투사하기를 거부하려는 것, 투사되지 않고 안에 남은 불편함의 응어리일 것이다. 누구에게나 그림자가 있을 것이다. 가끔 꾸게 되는 힘든 꿈. 보통 나는 그 꿈이라는 직관의 과정을 번역하지 않는다. 아니, 번역을 거부한다. 그리고 나는 잊었다 말한다. 그랬다. 조금 더 어른이 되면 그 시절을 다시 기억하려고 할까? 그러면 뭐가 좀더 좋을까?

 

공상은 이어진다. 그래. 나에게도 그림자가 있다. 밤에 이대로 오랫동안 머물 수는 없다. 날씨가 좀 좋아져서 밤에 걷기 좋을 때쯤 그림자랑 대화를 한 번 해봐야 하겠다. 낮으로 넘어온다.

 

4. 쉬었다 계속하는 꼬리물기처럼...

베넷 부인이 버지니아 울프에게, 꺽다리 물리학자가 어슐러 르 귄에게 말했다. “Catch me, if you can!” 그 말을 들은 사람은 처음에는 순진한 호기심에, 그 후에는 오기도 생기고 재미도 있어 그 캐릭터 꼬리물기를 계속한다. 창작자가 아닌 나는 덕질하는 팬의 마음으로 르 귄의 꼬리물기를 계속한다. 여기에만 탐닉하면 안 될 것 같아 강도와 속도 조절을 한다고는 하지만 그것이 쉽지만은 않다


그런데 내가 따라가던 르 귄은 트릭스터처럼 모습을 바꾼다. 바로 나의 그림자로... ... 이 예측하지 못한 반전이란... 내가 따라가던 것이 달라졌다. 그러니까 따라가던 나도 달라진다. 책장을 덮은 나는 책을 읽으려고 첫 장을 읽던 나와 달라져 있다


어슐라, 이번에도 재미있었어요. 당분간은 못 와요. 다나 해러웨이한테 가봐야 할 것 같아요. 다음에 또 올게요. 잘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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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의 언어 - 판타지, SF 그리고 글쓰기에 관하여
어슐러 K. 르 귄 지음, 조호근 옮김 / 서커스(서커스출판상회)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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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슐러 르 귄이 칼 구스타프 융의 집합적 무의식 이론이라는 렌즈를 통해 톨킨의 <반지의 제왕>을 ˝낮의 언어˝로 친절하게 해설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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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읽기를 정말 좋아하는 사람들 아닌가 - 버지니아 울프 산문선
버지니아 울프 지음, 정소영 옮김 / 온다프레스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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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리뷰는 책 전체에 대한 리뷰가 아니라, 오직 "베넷씨와 브라운 부인"에 대한 리뷰이다. 르 귄의 <밤의 언어>를 재미있게 읽는 중이다. 하루에 에세이 한 두 편 정도씩 보고 있어서 일주일쯤 후면 리뷰를 쓰기 시작할 수 있을 것 같다. 중간쯤 읽었는데, "SF와 브라운 부인"을 읽자니, 그 글은 버지니아 울프의 "베넷씨와 브라운 부인"을 읽어야 좀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처음으로 읽은 버지니아 울프의 글이다. 소설은 아니고 짧은 에세이.




이 리뷰를 쓰는 목표는 아주 단순하다. 훌륭한 르 귄의 글을 읽기 전에 초심자인 내가 읽어서 일단 무슨 말인지를 내 말로 정리해 적어두기 위해서다. 르 귄의 고매한 통찰을 접하기 전, 배우는 마음으로 정리하는 글이다.  


1. 청순한 정리

에세이는 이렇게 시작된다. 작가에게 그 작가가 쓰고 있는 소설에 나오는 캐릭터가 놀리듯 이렇게 말한다. "Catch me, if you can." 그 캐릭터를 잡으려는 노력이 바로 소설 쓰기이다. 


에세이 안에 아주 짧은 소설의 한 장면으로 쓸 수 있을 법한 컷이 삽입되어 있다. 리치몬드에서 워털루로 가는 기차 안에서 픽션이 이뤄진다. 등장인물은 세 명, 스미스씨, 브라운 부인, 그리고 화자이다. 앞의 두 명만이 말을 한다. 픽션 밖 에세이는 화자인 젊은 "나", 곧 버지니아 울프가 요즘 소설 좀 쓴다는 것들의 방식이 별로 마음에 안 들어서 "소설 속 인물의 사실성(the reality of characters in a fiction)"을 강조하는 아널드 베넷("Five Towns"라는 소설의 작가란다)에게 반론을 펼치는 내용이다. 


베넷은 인물의 사실성이 그 인물에 대한 자세한 묘사에 의해 창조된다고 보는 것 같다. 울프는 이를 지나간 시대(에드워드 시대, 1901-1910)의 시류로 간주하면서, 그 이후의 조지 시대(1910-1936)에서 인물의 사실성은 그녀의 생김새, 출신계급, 옷차림 같은 표면, 또는 "사물의 짜임새"(fabric of things, 167)에 대한 사실적 묘사가 아니라, 그녀 내면의 경험에 대한 작가의 주목으로부터 탄생한다고 본다. 에드워드 시대의 작가들은 그녀가 보는 것, 또는 그녀의 옷, 그녀가 지금 있는 열차칸의 모습에 대해 디테일한 묘사를 할 뿐, 그녀를, 그녀의 삶을 보지 않는다(163-164).


작가는 자신이 창조하고 있는 캐릭터의 내면을, 그/녀가 무언가 경험하면서 느꼈을 감정의 파고에 주목해야 한다. 그래야 브라운 부인이 껍데기가 아니라, "무한한 가능성과 엄청난 다양함을 지닌 노부인"(176), 또 사람의 마음을 지닌 캐릭터로 존재하게 된다. 그리고 그제서야 작가와 독자는 같은 열차칸에서 여행하는 동행이 될 수 있을 것이다.


2. 약간의 거들먹

이게 맥락이 맞는 연관짓기인지 모르겠지만, 나는 이 글을 읽고 푸코가 쓴 <계몽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변에 관하여>가 생각이 났다. (제목이 정확하지 않을 수도 있는데 뭐 어쨌든...)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나기 좀 전의 프로이센에서 당시 유행하던 "계몽이란 무엇인가"라는 주제를 두고 설왕설래가 벌어졌고, 이에 대해 칸트가 멋진 말들을 했었다. 그리고 그 칸트의 멋진 글이 출판된 지 2백주년을 맞아 푸코는 죽음을 앞두고 글을 쓴 것이다. 계몽... 미성년에서 벗어남... 스스로 책임질 수 있음.... 이성의 공적 사용... 뭐 이런 말들이 아련히 기억나는데...


그 텍스트처럼 이 텍스트도 시대의 변화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캐릭터의 리얼리티를 살리는 방식에 대한 신구갈등이 소재이다. ... 음... 여기까지... 더 쓰려면 칸트 글도, 푸코 글도 다시 펴서 봐야 할텐데... 나는 지금 공부를 하고 싶지는 않다. 


3. 다시 겸손해질 때

나는 해러웨이를 읽다가 르 귄을 읽게 되었고, 르 귄을 읽다 보니 또 르 귄이 너무도 사랑한 훌륭한 작가들을 만나게 된다. 노자, 폴 굿맨, 머레이 북친, 칼 융, 그리고 버지니아 울프. 다 이름만 들어본 이들이었다. 읽어보고 싶은 마음이 생기지만, 이들을 다 읽을 수는 없을 것이다. 일단 르 귄의 헤인시리즈부터 천천히 차근차근 읽는 것이 먼저다. 오지랖을 좁게 유지해야만 중심을 잃지 않고 집중할 수 있고, 궤적을 그릴 수 있다. 이렇게 다짐해도 또 호기심이 발동해서 시간을 들여 무언가 새로운 텍스트를 읽게 된다.

 

지난 번 <세상 끝에서 춤추다>를 읽으면서도 울프의 <3기니> 이야기가 한참 나와서 읽어봐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잘 참고 넘어갔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못 참고 읽어 버렸다. 1924년에 쓰여진 글이니, 백 년 전에 쓰여진 글이다. 영문학의 역사는 전혀 모르고, 빅토리아 시대는 들어봤어도 그 이후의 에드워드 시대와 조지 시대가 나와는 무슨 상관이겠는가? 단지 르 귄이 이 글을 읽고 자신의 글을 썼기 때문에 그 르 귄 글을 읽기 위해 읽었을 뿐이다. 따라서 대단한 감동이나 통찰을 얻지는 못했다. 정리나 해두었을 뿐...


자, 이제 다시 르 귄의 글을 읽을 차례이다. 또 나는 경탄하면서 겸손해질 것이다.






울프가 태어난 19세기 말은 영국이 번영을 구가하던 빅토리아 시대가 저물어가던 때였지만, 그의 부모님은 전형적인 빅토리아 시대의 인물이었다. 빅토리아 여왕의 재위 기간은 1837년에서 1901년이지만 사회문화적 변화라는 측면에서 빅토리아 시대는 1820년경부터 조지 5세가 즉위한 1910년이나 1차대전이 발발한 1914년까지의 기간을 지칭하는 경우가 많다. 새로운 소설 형식의 필요를 주장하는 <베넷 씨와 브라운 부인>에서 울프가 에드워드 왕 시대 작가와 조지 왕 시대 작가를 구분하며 1910년을 기점으로 드는 것도 이와 관련이 있다. - P7

울프가 <여성과 직업>에서 언급하는 ‘집 안의 천사‘(Angel in the House)는 우리의 ‘현모양처‘와 아주 흡사하게 가족 구성원의 필요와 욕구를 충족시키는 역할을 여성에게 부여했다. ... 그 전까지 사회적 지위와 재산 여부에 따라 제한되었던 투표권이 1884년에 노동자계급 남성에게까지 부여되었지만, 30세 이상의 대부분 여성이 투표권을 획득한 것은 그보다 수십 년이 지난 1918년이었다. 상황이 이러하므로 자연스럽게 공적 영역으로 분리된 생산 분야는 남성이 장악하고, 여성이 속한 가정은 예전과 달리 생산에서 배제된 사적 영역이 되었다. - P9

... 일단 에드워드 시대 인물과 조지 시대 인물, 두 진영의 구분부터 해보겠습니다. 웰스 씨와 베넷 씨와 골즈워디 씨는 에드워드 시대 인물이라 하고, 포스터 씨와 로런스 씨, 스트레이치 씨, 조이스 씨, 엘리언 씨는 조지 시대 인물로 칭하겠습니다. ...

에드워드 시대는 빅토리아 여왕의 뒤를 이어 1901년부터 1910년까지 통치한 에드워드 7세의 통치 기간을 말한다(1차대전 전까지를 의미하기도 한다). 조지 시대는 ... 1910~36년의 조지 5세의 통치 기간을 의미한다. - P143

여기 다른 사람의 이목을 끄는 인물이 있어요 (Here is a character imposing itself upon another person). 이 이야기의 브라운 부인은 거의 자동으로 소설을 쓰게 만드는 그런 인물이지요. 모든 소설이 맞은편 구석자리에 앉은 노부인과 함께 시작한다고 나는 믿습니다. 그러니까 모든 소설은 인물을 다루는 것이고, 소설이라는 형식은 ... 인물을 표현하기 위해서라는 거죠. - P152

이 모든 소설에서 이 위대한 소설가들은 우리가 보았으면 하는 것들을 이런 저런 인물을 통해 보여줍니다. 그게 아니라면 소설가라고 할 수가 없지요. 시인이거나 역사가거나 논문 저자면 모를까. - P155

이 열차는 리치먼드에서 워털루로 가는 것이 아니라 영국 문학의 한 단계에서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기차입니다. 왜냐하면 브라운 부인은 영원하기 때문이에요. 브라운 부인은 인간성 자체여서 단지 표면만이 달라질 뿐이라, 그 안을 들락날락하는 것은 소설가거든요. 그렇게 부인은 앉아 있지만 에드워드 시대 작가들 누구도 그녀를 거들떠보지 않습니다. 온 힘을 다해서 열심히 무언가를 찾으면서 공감하는 마음으로 창밖을 내다볼 뿐이죠. 공장을, 유토피아를, 심지어 열차 칸의 장식과 가구를 바라보면서도 절대 그녀를, 삶을, 인간 본성을 보는 법은 없습니다. 그렇게 그들은 자신의 목적에 맞는 소설 기법을 발전시킨 겁니다. 자신들이 원하는 일을 해줄 도구를 만들고 관습을 확립한 거죠. 하지만 그 도구는 우리의 도구가 아니고 그들이 하는 일은 우리의 일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그러한 관습은 파멸이고 그러한 도구는 죽음입니다. - P163

에드워드 시대의 도구가 우리가 쓰기에 적합하지 않다는 말은 이런 뜻입니다. 그들은 사물의 짜임새를 엄청나게 강조했거든요. 집을 제대로 보여주면 독자들이 그 집 안에 사는 사람을 추론해낼 수 있으리라는 희망이 있었어요. 집을 제대로 대접하기 위해 훨씬 살기 좋은 집으로 만들어냈죠. 하지만 소설은 일차적으로 사람에 대한 것이고 그들이 사는 집은 이차적인 문제라고 생각한다면 그런 식으로 소설을 시작할 수는 없어요. 그렇기 때문에 조지 시대 작가들은 당시 널리 쓰이던 그 방법을 집어던지기 시작했어요. 그래서 브라운 부인을 독자에게 전달할 방법이라고는 없이 홀로 부인을 대면하게 되었던 거죠. 하지만 이 말은 아주 정확하진 않아요. 작가는 절대 혼자인 법이 없거든요. 늘 대중과 함께하니까요. 같은 자리에 앉아 있지 않더라도 적어도 옆 칸에는 있는 거죠.
대중이란 여행을 함께하는 낯선 동행입니다. - P167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것은 쇠퇴의 과정이 아닙니다. 그보다는 더 신나는 우애의 교류를 위한 서막을 열어줄 어떤 관례, 작가와 독자가 함께 받아들일 관례가 부재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각 시대의 문학적 관습은 워낙 작위적-누군가를 방문하면 내내 날씨 얘기를 해야 하고, 오직 날씨 얘기만 해야 한다는 식으로-이라 약한 사람은 울화통이 터지고 강한 사람은 문학계의 기초와 규칙 자체를 아예 파괴해버리는 것도 당연해요.
어딜 보나 이런 징조가 뚜렷이 나타나고 있어요. 문법을 어기고 문장을 해체하죠. - P171

작품은 독자와 작가 사이의 친밀하고 동등한 동맹관계에서 태어나는 건강한 자식이어야 합니다. 작품을 무력하고 타락한 존재로 만드는 것이 바로 이러한 독자와 작가의 분리, 여러분 쪽에서의 겸손함, 우리 쪽에서는 전문가연하는 오만과 체면이거든요. 매끈하고 반지르르한 소설들과 거들먹거리는 우스꽝스러운 전기들, 물에 물 탄 듯 술에 술 탄 듯한 비평들, 그리고 현재 그럴듯한 문학으로 통하는, 고운 가락으로 장미와 양의 순수함을 찬미하는 시들이 바로 거기서 생겨나는 겁니다. ...

바로 지금 영국 문학에서 또 하나의 위대한 시대가 태동하고 있다고요. 하지만 그것은 우리가 절대, 무슨 일이 있어도 브라운 부인을 버리지 않겠다고 단호하게 결심할 때에만 가능합니다.(1924) - P1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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