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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하는 고민들이 젊음으로 포장될 수 있는 건 득일까 실일까? 

사실 젊음 자체는 그리 길지 않다. 젊음이 주는 자유도 고작해봐야 3년으로 짧다.

청기백기도 아니고 자유를 뺏었다 줬다 뺏었다 ...


지도교수님은 우리가 졸업 후 얻을 첫 직장이 우리가 그나마 자유롭게 택할 수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후엔 외부적인 환경으로 인해서 반강제적으로 주어지는 미래를 걷게 될 것이고, 뭐 그런 얘기를 한 적이 있었는데 난 옳은 말이라고 본다. 다만 내가 간과하는 건 내가 아는 한국이란 서울이고 서울 중에서도 강남 3구만을 알고 있는 것이고 사실상 한국 사회를 살아가는 건 아니라는 점이고... 난 나의 세상이 좁다는 걸 인지해야만 한다.


여하튼,

그렇다면 그 세상을 교환학생을 통해 넓혔느냐? 까놓고 말하면-이제 고작3개월이 지났지만- 넓혔다고 하면 피노키오가 되는 꼴이다. 내가 지금 하는 거라곤 싼 가격에 여러 나라 놀러다니면서 그들의 여유에 동참할 여유조차 없다는 사실을 자각하며 복수전공에 대한 생각에 머리만 굴리고 있다. 그래 어쩌면 내가 이곳에서 듣는 수업이 나의 진로설정에 약간의 영향을 줄지도 모른다. 흥미가 중동과 북한으로 옮겨진 점 정도랄까. 하지만 그 외엔... 내가 무엇을 얻기 위해 왔었지? 생각해보니 엄마와 할아버지로부터 해방을 위해 왔다는 점을 방금 상기해냈다. 내 세상으로부터 잠시 도망친 것에 불과하다. 


3년을 제외한 시간엔 결국 다시 10대로 회귀한다. 강압적인 세계로 돌아온다. 한 인간을 지원한 부모로부터, 그들을 더이상 젊은이로 보지 않는 세상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한다. 이런 생각조차도 나의 편협한 시각 속에 있는 세계 때문이겠지만 어쩌겠습니까 제가 경험한 세계는 이뿐임. 

대학도 우리의 세계를 넓히진 못한다. 오히려 다들 자기만의 세상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으로 보인다. 점차 간극이 벌어지고 교집합이 사라진다. 나는 코로나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안주하는 성격때문이었을까? 나는 결국 고이고 고여 썩게되고.... 한심하다.


따지고 보면 그 3년은 참 귀한 시간이다. 1000일하고도 약 100일간 나로써 숨쉴 수 있게 한다. 새로운 세계를 경험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나에 대해서 더 탐구할 수 있도록 하며 설령 그 결과가 우울증일지라도 젊음 이라는 명칭 아래 나를 자유케 한다. 3년이 지나면, 나는 이제 1년도 채 남지 않았지만, 이후의 시간을 나를 태어나게 한 세계로 돌아갈지, 나의 세계를 만들어갈지는 모르겠다. 내가 바라는 건 나의 세계를 구축하는 것이지만...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것 중 그나마 쉬운 건 부모로부터 벗어나는 것이지만 어려운 건 매한가지다. 벗어나야겠지만 아직도 내가 그들에게 갖는 애정이 그들의 사랑보다 커 계속 뒤를 돌아보게 된다. 나를 무조건적으로 지지하는 사람이 있을까? 그들의 애정은 뒤틀렸고 나의 애정도 뒤틀렸다. 돌이킬 수 없는 일이지만 가끔은 그 가능성을 더듬어본다. 





아무튼 결론은

막학년에 복수전공 해 말아. 대학원 가 말아. 에서 여기까지 넘어옴

글이 많이 산만하긴 한데 그게 지금 내 머리라서 그럼. 지금 이렇게 놀 때가 아닌데...................하

지금 이 상황이 많이 한심하긴 한데 조건부적인 지지가 아니라 나밖에 나를 믿어주는 사람이 없어서 어쩔 수 없음. 노시발킵고잉. 본때를 보여주겠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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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북한학 전공해? 말어? 해? 말어?

막학년에 꽉끼게 들어?

완전 꽉껴 그럼

들어?

말어?

들을까?

들으면...럭키비키지

안들어도..뭐...죽진않아...그냥 내가 슬플뿐....

들으면..기분이 날아가겠지...

근데? 나 곧이십사야. 졸업해야해. 취업도 해야해. 나이 다 먹었어. 늦었다고.

그냥..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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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착 농도가 현저히 묽었던 이전과 달리 지금은 비교적 짙은 농도를 띄고 있다. 아마도 이건 단약하겠다는 나의 의견을 곤란하다는 듯이 넘기곤 약 168알을 지어준 의사선생님 덕분일 것이다. 다만 한 가지 안 좋은 점은 집중력이 50분을 넘기지 못한다는 점이랄까.. 미친 것 같다. 열품타를 이용해서 다시 조금씩 늘리고 있다. 

이따금 나는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생각한다. 의사쌤은 나의 안식처가 사람이 되길 바라고 있다. 내가 숨 쉴 수 있는 구멍이 가족이 되기는 이미 그른 시점에서... 내가 과연 잘할 수 있을까? 내가 풀지 못한 감정이 가끔씩, 어쩌면 자주, 빈번하게 나를 옭아맨다. 분노가 갈 곳을 잃어 다시 제 주인을 찾아 돌아온다. 주술적 사고는 원동력이 되기도 하지만 곧 지치게 만든다. 갈 곳 잃은 설움.. 그리고...

그들을 그만 탓하고자 하면서도 속에서는 곪은 것들이 끊임없이 미련덩어리가 불쑥 튀어나온다. 그들을 그만 마주하고 새벽을 향해 나아가야 하는데 방향을 틀기가 쉽지 않다. 담배와 바다를 생각한다. 생각만 한다. 담배와 바다..... 담배와 바다? 

나는 시민의식이 매우 투철한 한 소시민으로서 프랑스에서 살아가면서 미친 듯이 어지러운 경험을 겪는다. 끊임없이 길거리에서 펴대는 담배와 잊을만하면 코를 찌르는 사람 냄새.. 그리고 불어인지 중국어인지 알 수 없는 낮에 들리는 고성방가들.. 참 웃기는 자식들이다. 나는 마치 정사각형 같은 인간이기 때문에 누구들처럼 술에 취해 다니지 않는다. 네모의 꿈같은 삶. 세상을 어떻게 둥글게 살아가느냐 말이다. 그럼에도 그런 네모한테도 선생님이 있고 존경하는 은사님이 있겠지.. 그걸로 네모난 세상을 조금씩 둥글게 깎아가면 되는 거지. 세상을 바라보는 창은 가족 말고도 많으니까 그렇게 세상을 봐도 괜찮을 거다. 근데 이 프랑스놈들만큼은 용서할 수 없다.

여하튼 다시 맨 앞으로 돌아가자면 오늘 애착의 농도를 높여준 일은 요거트 얼려먹기의 재발견이다. 새로운 요거트를 매일 하나씩 새로 시도하는데 하루도 빠짐없이 실패하고 있어 염병!!!!을 외치며 살아가고 있었는데 아까 문득 요거트를 얼려먹으면 아이스크림으로 먹는 거니 일석이조가 아닌가 싶어 3시간 동안 얼려봤고 결과는 대성공이다. 음.. 세상은 아직 살만하다.

곧 생일이 다가온다. 혼자 맞이할 생일이 매우 기대된다. 이 역시 애착 농도를 올려줄 일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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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살 제안들 31
에두아르 르베 지음, 한국화 옮김 / 워크룸프레스(Workroom)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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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이 짙어지면 어느 순간 내가 아닌 관찰자로 남게 된다. 그러나 관찰자로 남기 전까지 수많은 노력을 했을 것이다. 사는 것이 얼마나 행복하고 놀라운 일인지 스스로 답을 찾으려고 노력했을 것이고, 운동을 하면 우울감이 옅어질 것이라는 누군가가 남긴 글을 보고 운동을 시도했을 것이고, 아프면 병원을 가는 것이 당연하다는 소리를 듣곤 스스로 병원을 찾아가 약을 먹는 짓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결국 행복하고자 하는 노력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깨닫고, 운동을 시도하는 것조차 힘든 것을 깨닫는 순간이 오고, 약을 먹어도 우울을 짙어지지 않게 막아주는 수단일 뿐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이 깨달음의 순간은 다시 한 번 절망하게 만든다. 이 과정을 반복하다 보면 사는 것에 의미를 부여하지 말자는 어느 마약같은 말에 빠지게 된다. 그냥 있는 그대로 바라보자. 더이상 의미를 부여하지 말자. 그렇게 노력을 한다. 수많은 노력을 하다가 다시 한번 절망하게 된다. 사람은 결국 죽지 않고서야 이 사회 속에서 살아가야 한다. 그런데 어떻게 의미를 부여하지 않고 살아갈 수가 있나.

매일이 똑같이 흘러간다. 집에서도 밖에서도 안식처를 찾지 못해 병원을 간다. 병원에선 항상 같은 이야기를 듣는다. 잠은 잘 자나요, 오늘은 어떠신가요, 오랜 시간이 걸릴 겁니다. 얼마나 많은 시간을 보내야 괜찮아지는 것인가. 용량을 늘리는 것이 좋겠네요. 그렇게 용량을 늘린 약을 가방 깊숙이 숨긴다. 아무한테도 얘기하지 못하는 비밀이 는다. 어느 날은 정신이 명료하다가도 또 어느 날은 몽롱한 상태로 하루를 보낸다. 그러다가 당혹스러운 순간이 찾아오면 구제받지 못할 추락을 경험한다. 추락을 막아줄 바닥은 어느 날엔 있고 어느 날엔 없다. 차라리 예상이라도 할 수 있으면 좋으려만 약을 먹어도 그런 날은 오지 않는다.

3주에 한 번씩 감정검사를 한다. 5번, 나는 벌을 받을지도 모른다. 나는 벌을 받을 것이다. 나의 안락함의 기반들을 미워하는 나는 언젠가 벌을 받게 될 것이다. 나는 나를 미워하고 가족을 미워해서 병원을 다니고 내가 가진 모든 것들을 놓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을 미워하는 나는 언젠가 벌을 받게 될 것이다. 이런 금수만도 못한 자가 벌을 받지 않을 리가 없다. 도망칠 수 있는 곳은 없다. 제 발로 실낙원을 찾아간 이는 당장이고 벌을 받게 될 것이다. 그러나 실낙원에 기어들어갈 만큼 괴롭다면 구제받을 조건이 되지 않는가? 언제까지 울고 죄책감에 젖다가 화를 내고 합리화해야 하는가. 의사선생님은 과거를 바라보지 말고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해야 한다고 했다. 나의 안식처를 내가 만들어야 한다. 애인이 됐던, 나의 신념이 됐던, 어떤 공간이 됐던 내가 발을 디딜 수 있는 나의 안식처를 구축해야 한다. 그러나 정상적이지 않은 이가 본인의 안식처를 만든다면 그것이 과연 정상적인 안식처일 수 있을까? 나도 다른 이들처럼 그들의 정상적인 왕국에 들어가고 싶었다. 미래의 나는 어느 안식처에 들어가 있을까.

공허함이 언젠간 자신보다 커지는 날이 오게 될 것이다. 약을 먹어서 괜찮아진 줄 알았던 것들이 삐져나올 것이다. 아침에 일어나도 울지 않았던 내가 과거가 되고 멍하니 시간을 보내는 순간이 길어진다. 약을 늘려도 이미 넘쳐흐른 감정들은 주워 담을 수 없다. 이유 없는 공허라는 게 있을 수가 있나? 원인을 찾고자 한다. 원인이 있어야 결과가 있으니까. 그러나 남는 것은 결과뿐이다. 나는 언제까지 이 과정을 반복해야 할까? ‘너’는 여든다섯까지 살고 죽겠다고 했다. 그러나 스물다섯, 마흔둘의 나이로 떠났다. 너는 지쳤던 걸까? 아니면 마침표를 찍어야 했기에 그랬던 걸까?

“네 죽음 앞에서, 네가 이 사람들과 경험할 수 있었을 가설들은 그에게 엄청난 상실감을 줬다. 너의 자살은 네 과거를 슬프게 물들였고, 미래를 지워 버렸다.
… 후회? 너는 너를 위해 우는 사람들의 슬픔을, 그들이 너에게 보여 주었던, 그리고 네가 그들에게 돌려주었던 사랑을 애석해했다. 너는 네 아내가 느낄 외로움과 네 지인들이 느낄 공허함을 애석해했다. 하지만 너는 이 후회들을 상상으로만 느꼈다. 이것들은 너와 함께 사라질 것이고, 오직 네 뒤에 남겨진 사람들만이 네 죽음의 고통을 느낄 것이다. 너는 자살의 이기적인 측면을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하지만 결국에는 죽음이라는 소강상태가 네 삶의 고통스러운 동요를 이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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