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이아 - 살아있는 생명체로서의 지구
제임스 러브록 지음, 홍욱희 옮김 / 갈라파고스 / 200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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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0.

오늘날 외면할 수 없는 기후위기와 인류세 논의를 살펴보면,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개념이 가이아(Gaia)”. 특히, 신기후체제에 관한 라투르의 후기 저작들은 약간의 변용을 거치긴 했지만, 바로 이 가이아 개념을 중심으로 회전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가이아라는 이름 자체는 윌리엄 골딩이 작명한 것이지만, 이 가설의 저작권은 이 책의 저자인 제임스 러브록(James Lovelock, 1919~2022)과 진화생물학자 린 마굴리스(Lynn Margulis, 1938~2011)가 공동으로 갖고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런데 러블록이라고 읽는데 왜러브록으로 표기할까? “마구리스라고 안 하고 마굴리스라고 표기하면서? “마구리스가 구린 것처럼 러브록이란 표기도 구림). 러브록은 작년(2022)에 자신의 103세 생일에 영면하였다. 장수하셨다. 그러고 보니 작년에 유명을 달리한 거장들이 참 많다. 러브록, 라투르, 그리고 마이크 데이비스… (내가 존경하는 맑스주의자 데이비스에 대해 추모 서평을 쓰고 싶은데 쓸 수 있을까? 당분간은 못 쓸 듯…)


린 마굴리스와 제임스 러브록 - 가이아 여신상 앞에서


1. 가이아

가이아 가설의 공동저작권자이긴 하지만, 러브록과 마굴리스의 출발점은 정반대다. 마굴리스가 현미경을 통해 겨우 살펴볼 수 있는 세포 안의 물질들에서 시작한다면(https://blog.aladin.co.kr/eroica/13739842), 러브록은 달에서 망원경을 통해 본 지구의 모습으로부터 논의를 시작한다(18, 35, 47, 144 247, 286). 이처럼 두 거장 간의 마이크로와 매크로의 대화가 가이아 가설을 구성하게 된다.  



가이아는 대기, 해양, 지표면의 암석 등과 밀접하게 결합된 모든 생물체들로 구성되는 초생명체(superorganism)”(17-18), “지구의 생물권, 대기권, 대양, 그리고 토양까지를 포함하는 하나의 복합적인 실체”(51-52), “지구상의 모든 생물을 위하여 스스로 적당한 물리화학적 환경을 조성할 수 있도록 피드백 장치나 사이버네틱 시스템을 구성하고 있는 거대한 총합체”(52, 256). “능동적 조절시스템”(75, 123, 159), “각 부분들이 갖는 가능의 합보다 훨씬 커다란 능력과 속성을 지닌 복잡한 협조 체제의 네트워크”(78) 등으로 정의된다. 그리고 가이아의 주요한 세 가지 속성은 다음과 같이 정리되어 있다(248~249).

 

1)     가이아는 지상의(terrestrial) 모든 생물들에게 적합하도록 주위 환경 조건을 끊임없이 변화시킨다.

2)     가이아는 중요성이 서로 다른 부분들로 이뤄져 있다곧 핵심부에는 꼭 필요한(vital) 기관들이, 주변부에는 소모성(expendable)이거나 있어서 좋을 수는 있지만 꼭 필요하지는 않은(redundant) 기관들이 있다.

3)     가이아가 나쁜 방향으로의 변화를 감지하면, 사이버네틱스의 원리에 따라 반응한다.

 

이 중 1) 3)은 가이아가 생물의 번성에 적합하도록 행성의 항상성(homeostasis)을 유지하는 데에 있어서 일종의 능동적 조절 체계로 기능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특히, 1)의 논리는 러브록이 가이아를 지구 생태계의 항상성을 유지하기 위한 의도를 지니고, 이를 위해 의식적으로 개입하는 실체로 규정하고 있다는 과학자들의 비판을 유발하였다. 2)의 규정은 이 책 뒷부분에서 러브록이 전개하는 논의의 기반을 이루는 것으로 가이아 안에서 인간의 기능, 중요성, 의미, 역할에 관한 것이다.

 

2. 가이아는 존재하는가?

러브록은 지구가 자기조절적 체계라는 생각을 “1965년 어느 날 오후 갑자기떠올렸고(25), 1967년에 가설로 확립했고(49), 1970년대 초 가이아라는 이름을 골딩으로부터 선사받았으며, 그 후 몇 편의 논문들을 발표하고, 1974년부터 이 책을 쓰기 시작해서 1979년에 초판을 출판하였다. 여러 사람의 관심을 받았지만, 1990년대 중반까지 과학계는 이 가설에 대해 냉대로 일관하였다. 그러나 1994년부터 지구에 대한 전체론적(holistic) 접근방식이 부상하면서이제 이 이론은 과학계의 승인을 기다리는 후보 이론이 되었다”(16).

 

우리가 오감을 통해 직접적으로 감각할 수 없는 것의 존재를 상정할 때에는 그것이 존재할 때에야 비로소 존재가 설명될 수 있는 감각할 수 있는 다른 대상들이 있기 때문이다. 신의 관념도 이렇게 탄생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러브록이 가이아의 존재를 상정하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다시 말해, 왜 가이아라는 개념이 필요했을까? 45억년 전 지구가 생겼고, 이 곳에 생명체가 등장한 것은 35억년 전이다. 이후 태양이 방사하는 열에너지의 양, 지구 표면의 형태, 대기권의 화학적 조성은 변화했음에도 불구하고, 지구의 기후는 거의 변화가 없이 평균 기온 섭씨 10~20도를 유지해 왔다(49-50, 71). 지구의 대기에 산소가 생기기 시작한 것은 20억년 전쯤인데, 이는 산소를 필요로 하지 않았던 기존의 생물들에게는 엄청난 재앙이었지만, 생물들은 그 변화에 적응하여 이 살인적인 침입자를 유쾌한 친구로바꿀 수 있었고, 대기 중 산소가 차츰 증가하다가 어느 시점에서는 오늘날과 같은 21%에서 더 올라가지 않고 유지되고 있다(84-85, 216-217). 생물은 바다에서 처음 탄생하였고, 이는 바닷물의 염분 농도가 6% 이하임을 뜻하는데, 그 이후 차츰 감소해서 수억년 동안 오늘날과 같은 3.4%를 유지하였다(178~188). 기후, 대기 중 산소의 비중, 바닷물의 염도가 이렇게 오랜 기간 동안 안정적으로 유지되었다는 점은 과학적 설명이 필요한 사항이다. 왜냐하면 이것들은 무언가의 개입이 없다면 그렇게 오랫동안 존재할 수 없는 화학적 비평형 상태이기 때문이다. 이 지구의 비평형 상태의 항상성(homeostasis)은 오늘날 생물의 번성에 적합한 조건을 이루는데, 러브록은 그 이유를 가이아의 존재에서 찾고 있다(52, 128, 282-285).

 

그렇다면 이 가이아 가설이 도전한 기존의 관점 또는 우리의 상식이란 무엇인가? 크게 두 가지 관념을 들 수 있을 것 같다. 먼저 과학적 지식이라는 측면을 살펴보자. 우리는 오늘날 우리가 익숙한 대기, 바닷물의 농도, 평균 기온을 모든 생물이 번성할 수 있는 이상적이면서도 정상적인 조건이라고 가정하는데, 지구에 이 조건이 어느 순간 갖춰진 다음에야 비로소 생물이 등장했을 것이라고 생각해왔다. 그러나 최초에 지구가 생겼을 때뿐만 아니라, 그후 바다가 생기고, 그 바다에서 생물이 처음 생겼을 때에 지구의 조건은 오늘날과 완전히 달랐다. 생물이 점차 번성하면서 산소도 늘어나고, 바닷물의 염분 농도도 줄어들었다. 곧 생물이 존재했기 때문에 어느 순간부터 인간이 출현한 시기와 비슷한 삶의 조건이 형성된 것이다. 이는 생명활동이 배제된 채, 지구가 생명의 존재를 준비했다는 것을 뜻하지 않고, 생물들이 대기, 해양, 암석 등과 함께 삶에 적합한 조건들을 능동적으로 만들어냈음을 의미한다. 그런데 생명체가 없었다면 존재하지 않았을 이 비평형 상태가 잠시 존재하고 없어진 것이 아니라 지속되어 왔다는 것은 생명체가 대기, 해양, 암석 등과 함께 복잡한 피드백 루프들을 작동시켜 항상성을 유지하는 능동적 조절체계처럼 작동해왔음을 뜻하는 것이다.

 

3. 가이아는 의도와 지능을 갖고 있는가?

항상성과 능동적 조절이 작동했다면, 가이아가 그야말로 대지의 여신처럼 의도와 지능을 갖고 있다는 말인가? 가이아 가설에 대한 과학자들의 비판은 이 점에 집중되었다. 이 책 앞에 실려 있는 2000년에 다시 쓴 서문(15-16)에서는 독자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쓰려고 했던 의도가 과학자들의 쓸데없는 오해를 불러일으켰다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사실 이 비판에 대해 러브록이 방어를 제대로 못한 것 같다는 인상이 든다. (물론 내가 러브록의 다른 책들을 본 것은 아니기 때문에 섣부른 판단일 수 있다.)

 

이러한 오해에 대한 교정은 마굴리스의 『공생자 행성』(210~220)에서 찾아볼 수 있다. 지구는 인간의 의식과 같은 것은 없지만 생리적으로 조절되는고유감각 체계(proprioceptive system)을 갖고 있고, 이것이 사이버네틱스 원리가 작동하게끔 하는 스위치가 된다는 것이다. 공 능동성과 의식은 다른 것이다.

 

사이버네틱스 원리를 구성하는 복잡한 음의 피드백 루프들(negative feedback loops)이 하나하나 규명될 때마다 가이아 가설은 이론의 지위에 더욱 가깝게 다가설 것이고, 현재의 지구시스템 과학은 이 가설에서 이론으로의 도정을 걷고 있는 학문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4. 가이아와 인간

마굴리스와 러브록의 책을 읽다 보면, 인간이 참 대수롭지 않은 존재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위에서 살펴본대로 지구는 자신의 항상성 유지에 더 중요한 부분과 덜 중요한 부분을 갖고 있다. 러브록이 보기에 지역적으로 제일 중요한 현장은 지상에서는 열대우림이며, 해양에서는 대륙붕이다. 생명체 중에서는 인간보다는 바다나 습지에 사는 미생물들이 항상성 유지에 더 결정적인 역할을 유지한다. 이 지점에 가이아 가설의 두번째 비판 대상이 존재한다. 그것은 멀게는 인간은 만물의 척도라고 본 프로타고라스의 관점, 가깝게는 사물의 가치를 그 사물의 인간적 유용함으로 판단하는 근대 공리주의(utilitarianism)이다. 그리고 사실 지금도 인간은 이런 방식의 사고에 젖어 있다.

 

인간중심적 세계관에 대한 비판은 좋다. 수긍할 수 있다. 그런데 사실 양가적인 감정이 든다. 먼저, 그 하찮은 인간 따위가 만들어낸 환경 오염(79-80, 84, 216, 238)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심지어 핵실험이나 방사능 폐기물도 그리 큰 문제로 생각하지 않는다(62-63). 또 러브록은 레이철 카슨의 『침묵의 봄』도, 그리고 그 저작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환경운동도 싫어한다(27-28, 10-11, 281). ? 비과학적이면서 정치적이기 때문이다. 말 잘하는 운동권 싫어하는 이과 천재 같은 느낌이다. 그가 기후위기의 시대를 살지 않았기 때문일까? 올해 후쿠시마 방사능 폐기물이 바다로 방류되면 이제 해산물을 과연 먹을 수 있을까를 심각하게 고민하는 나는 비과학적인 것인가?

 

그렇다고 해서 러브록이 인간이 유발하는 환경오염을 가이아가 다 해결해줄 것이라고 단언하지 않는다. 분명히 그 위험을 경고한다. 이 점은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고, 더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문제 같다.

 

가이아 가설은 우리 행성의 안정된 상태는 인간을 매우 민주적인 실체인 자신의 부분, 또는 그 안에서의 파트너로 포함하고 있음을 암시한다”(282, 번역수정)

 

러브록에 따르면, 인간을 포함해서 어떤 생물들은 의식적 사고, 지각 능력, 인식적 예지 능력을 소유하고 있다(284). 이러한 지능은 통상 살아 있는 생물의 속성이다. (물론 지능에는 여러 단계가 있을 수 있다는 러브록의 관점을 받아들인다면, 이는 생물뿐만 아니라 AI의 속성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가이아도?

 

이에 대해 러브록은 가설 수준의 추론을 제시한다. 지금과 같은 복잡한 방식으로 여러 정보를 수집, 저장, 활용할 수 있는 유일한 생물인 인간이 어쩌면 가이아의 신경계와 두뇌에 해당하는 역할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것이다(284~285). 이는 곧 인간의 호기심과 욕망이 단지 우리들의 것만 이 아니라 우리가 가이아와 함께 공유하는 것임을 뜻한다(287). 러브록은 에필로그의 끝부분에서 인간이 사실은 우리 자신들보다 훨씬 더 커다란 실체, 곧 가이아의 역동적 부분임을 깨달아야 한다고 제안한다(287).

 

5. 가이아와 에이와(Eywa)


책을 읽기 시작한 다음에 제임스 캐머런의 <아바타: 물의 길>을 보았다. 그리고 복습삼아 전편도 제대로 보았다. 따라서 책을 읽는 내내 <아바타>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판도라 행성의 여신 에이와는 아마 가이아에서 나왔을 것 같다. 모든 생명체들을 개별적 존재가 아니라, 하나로 연결된 시스템의 부분으로 보는 나비족(Na’vi)의 모습은 에필로그의 말미에서 러브록이 그리는 인간에 대한 희망과 동일하다. 나비족이 에이와의 부분이면서 그 사실을 잘 인식하고 있는 것처럼 인간도 가이아에 길들여질 수 있으리라(287).




흥미롭게도 러브록은 인간이 이러한 역할을 다할 수 없다면, 그 역할을 할 다른 후보로 우리보다 훨씬 더 커다란 두뇌를 가진 거대한 해양성 표유류들 가운데 하나인 고래를 꼽는다(287-290). <아바타: 물의 길>에서 지구에 온 인간이 자신의 노화방지에 특효인 고래 뇌의 기름을 얻기 위해 고래를 살육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는 전 나비족의 단결투쟁뿐만 아니라, 보통은 행성 생명계의 일에 개입하지 않는 에이와의 분노를 유발한다



인간 너머의 존재를 인식한다는 것, 그리고 인식을 너머 교감한다는 것은 필멸의 존재인 나뿐만 아니라, 유적 존재인 인간 자체의 재정의를 수반한다. 다르게 보이면, 다르게 생각하고, 다르게 행동하게 될 것이다. 기온이 널뛰기하는 올겨울 특히 의미있는 독서였다. 쉽게 정리되지 않는 생각을 요약하면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내가 살아있다는 것은 내가 더 큰 살아있는 것의 부분이며, 그 안에서 다른 살아있는 것들과 공생하는 파트너이기 때문이다. 가이아란 바로 이러한 부분적 연결들의 총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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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교양 도서라서 그런지 직역보다는 의역이 많다. 도움이 되는 역주도 있지만, 역자의 개입이 좀 거슬리는 부분도 있다. 그리고 역자는 러브록이 가설(hypothesis)”이라고 쓴 것을 자꾸 이론으로 번역하는데, 이것은 분명 오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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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나이가 든 걸까? 맨 정신에 들어서 그런 걸까? 별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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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reameajun123 2024-01-26 02: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나이가 든거 맞음 ㅇㅇ

linus080811 2024-08-14 00: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나이 많이 드신듯

minhoeyul74 2024-08-17 00: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좀 곱게 늙읍시다

bbb 2024-09-08 15:11   좋아요 0 | URL
본인이 그냥 싫다는데 병신같이 댓글다는 꼬라지하고는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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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로, 강허달림, 장필순 이름 보고 구입했고, 이들의 노래는 역시 좋다. 여자 가수가 아니라 엄마 가수의 노래들. 엄마로 사는 게 고단한 사람들에게는 좋은 선물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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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와 충돌하지 않고 착륙하는 방법 - 신기후체제의 정치
브뤼노 라투르 지음, 박범순 옮김 / 이음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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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브뤼노 라투르 (1947~2022)

2022109일 라투르가 췌장암으로 영면하였다. 딱히 그를 따르지는 않았지만 올해가 가기 전 뭘 하면 좋을까 고민하다가 나름대로 추모의 마음을 담아 이 책의 리뷰를 쓰기로 했다. 지난번 녹색 계급의 출현리뷰 쓸 때만 해도 이 세상 사람였는데, 리뷰 올리고 열흘쯤 뒤에 돌아가실 줄 알았다면, 좀더 다정한 리뷰를 썼어야 했다. 사실 그 리뷰 쓰고 나서 뭔가 켕기는 게 남았는데, 그 점에 대해서도 좀더 풀어보고 싶었다. 각을 세우기보다는 귀를 기울이는 방식으로 말이다.

 

1. 1990년대: 새로운 역사의 시작

1990년대초 역사의 종말로 불리던 현실 사회주의의 몰락과 함께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었다. 라투르는 이 새로이 시작된 역사를 함께 구성하는 세 가지 현상을 지목한다. 그것은 1) 탈규제, 2) 불평등의 폭증, 3) 신기후체제 또는 (그에 대한 반동으로서) 기후변화 부정론이다(17, 29, 40, 42). 글로벌화의 부정적 결과쯤으로 이해할 수 있을 법한 이 현상들은 다른 모습으로 계속 반복되어 왔는데, 2010년대 중반 이후의 세 사건들 - 브렉시트, 트럼프 당선, 이주의 급증 - 도 이 세 현상의 복합적 현상태로 이해할 수 있다. 사실 이것들은 하나의 위험이다(29). 이 사건들은 근대화의 연장선상에서 글로벌화가 약속했던 보편성의 시효가 만료되었음을 보여준다. 이런 사례들은 2022년말의 뉴스에서도 계속 꼽을 수 있다. 코로나19바이러스 확산으로 인한 애플과 테슬라의 중국 공장 가동 중단, 영국의 난민 르완다 이송계획, 그리고 프랑스 노인의 쿠르드족 총격 살인사건 등도 신기후 체제역사의 한 장면들임이 분명하다. 이 장면들은 모두 지금 머무는 이곳에서 두 발 뻗고 편히 지낼 수 없음을 보여주는 사례들이다. 의존할 것이 마땅치 않다. 근대화를 통해 남의 땅을 빼앗던 이들이 딛고 서있는 땅도 이제 빼앗길 위기에 처한다(26). 라투르는 이를 발밑에서 땅이 꺼지는 느낌으로 표현한다(27-28). 이제 우리 모두 딛고 의지할 땅이 필요하다. 그런데 새 땅은 이제 없다.

 

2. Global, Local, 그리고 Terrestrial

라투르의 근대가 원래 의미대로의 역사적 시대 범주가 아니라 사회/자연의 이원론적 세계관을 뜻하듯, 글로벌과 로컬도 규모(scale)의 의미라기보다는 사람들이 그쪽을 향해가고자 하는 지향, 그들의 나침반 바늘이 가리키는 유인자(attractor), 직선적 벡터의 양 끝(그림 1, 49, 52~57)이다. 우리는 결코 근대인이었던 적이 없다(p. 302)에서 네트워크에 비하면 별 볼 일 없는 것들로 취급되었던 로컬과 글로벌이 이 책에서는 그림 1부터 6까지 모두에 출현하는 유인자들이다. 로컬과 글로벌은 근대인의 단선적인 시간의 화살이라는 가상적 선분의 두 점, 곧 유토피아이다. 근대인들(또는 그들의 시간의 화살)은 로컬을 등 뒤로 한 채, 근대화의 전선을 밀어붙이면서 글로벌 쪽을 향해 질주해왔다. 그런데 애초 글로벌화의 장밋빛 약속(글로벌화 플러스)은 지켜질 수 없었고, 대신 서두에서 살펴본 글로벌화의 부정적 경향들(글로벌화 마이너스)이 명약관화해지면서 이에 대한 반동으로서 로컬-마이너스로의 질주 역시 확산된다(54). 트럼프주의는 이 정반대로의 두 질주들을 통합하려 하면서 비현실로 이륙하려고 한다(60~61). 라투르는 트럼프주의가 지향하는 네 번째 유인자를 외계로 Out-of-This World”라고 칭하면서, 자신이 제안하는 세 번째 유인자를 그것의 대극에 자리매김한다. 라투르가 제안하는 the Terrestrial은 인간의 행동이 펼쳐지는 환경 또는 배경이 아니라, 그 자체로 하나의 새로운 정치적 행위자다(66).

 

역자는 the Terrestrial대지”, “대지인”(83)으로, terrestrials대지의 것들”(120, 128)로 번역한다. “글로벌”, “로컬은 음차해도 독자들의 이해에 무리가 없다고 판단한 반면, “테레스트리얼은 그렇지 않다고 생각했나 보다. 그 판단을 존중하지만, 덕분에 한국 독자들은 “-al”로 끝나는 라임의 맛을 볼 수는 없다. 그런데 the Terrestrial에는 인간, 비인간, 지구의 생명막(가이아), 곧 러브록적 행위자 모두가 들어가서 수중 존재는 배제하는 것 같은 그냥 "대지"라고 하기도 좀 그렇고, 사람만을 가라키는 "대지인"도 좀 그렇고... 어쨌든 좋은 번역어는 아닌 것 같다.

 

3. 정치생태학의 실패

앙드레 고르와 알랭 리피에츠. 내가 존경해마지 않는 프랑스의 정치생태학자들이다. 정치경제(political economy)에서 정치생태(political ecology)로의 전환은 현실 사회주의 몰락 이후 계몽된 맑스주의자들 중 일부가 걸었던 도정이다. 라투르는 이들이 환경 이슈들을 공공 생활의 핵심 의제로 만드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근대인들의 시간의 화살이라는 덫 자체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자침을 끌어당길 수 있는 새로운 유인자를 만들어 방향을 재설정하지 못했기 때문에 실패했다고 평가한다(73~77). 라투르가 the Terrestrial이라는 새로운 극을 제안하는 이유는 정치생태학이 나침반 바늘을 끌어당길 수 있는 새로운 유인자와 이로 인해 가능해질 새로운 좌표를 마련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단지 그 극을 지목했을 뿐, 이를 정치적 행위자로 엄밀하게 정의하지 못했으므로, 그 극으로의 실제적 이동에 실패했다(72, 85). 다른 세 극들이 토포스 및 땅과 토지가 없는 장소로서 유토피아에 불과하다면, the Terrestrial은 국경과 정체성을 초월하면서도 지구와 토지에 결부된 새로운 세계-만들기(worlding)이다(82). 따라서 이는 스케일의 전복과 시공간 경계의 파괴를 수반하며, 글로벌도 로컬도 아닌 대기적(atmospheric) 스케일에서 펼쳐진다(132).

 

4. 칼 폴라니 비판

라투르는 정치생태학이 결합시키고자 하였던 두 흐름 사회주의와 생태학 이 사회문제와 생태문제의 양자택일이라는 궁지에 빠졌기 때문에 실패했고, 이 결과 나침반의 바늘이 움직이지 못했다고 평가한다(86). 사회주의는 생태문제를 자신의 문제로 인식하지 못했고, 정치생태학은 사회주의의 배턴을 이어받지 못했다. 왜냐하면 이들은 자연의 역할을 서로 다르게 생각했기 때문이다(96). 지난 70년의 거대한 가속(the Great Acceleration) 시기 동안 자본주의는 변하였지만, 사회주의는 변하지 않았고, 생태주의는 주변적 위치에 머물렀다. 따라서 사회의 자기보호 운동은 폴라니의 기대만큼 활성화되지 않았고, 거대한 부동성(the great immobility)만을 보였을 뿐이다(85).

 

생태사회주의자들이 일종의 이론적 보완책으로 생각하였던 폴라니가 비판된다. 그는 시장자유주의를 과거의 일로 치부하였고, 시장화에 저항하는 사회의 능력을 과대평가했고, 계급 갈등이 아닌 강력한 저항의 힘을 예상하지 못하였다(85, 91). 폴라니에 대한 이러한 비판은 정치생태학을 매개로 하여 맑스주의 일반으로 확장된다. 이들은 자신의 주장만큼 충분히 유물론적이지도 않고, 리얼리스트도 아니다(91, 95).

 

5. 생산시스템의 사회적 계급 vs. 생성시스템의 지구사회적(geo-social) 계급

맑스와 폴라니, 그리고 그 후예들이 관심을 가졌던 것이 생산시스템, 사회계급, 사회문제였다면, 라투르는 생성시스템, 지구사회계급, 지구사회적 문제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양자의 차이는 18더욱 커지는 생산 시스템생성 시스템사이의 모순에서 주로 논의되는데, 녹색 계급의 출현에 실린 김환석의 라투르의 정치생태학과 슐츠의 새로운 계급이론의 표에 간략히 잘 정리되어 있기 때문에 여기에서 요약하지 않겠다. 이 책 16~17절에서는 양자가 기반하고 있는 자연관의 차이가 소개되는데, 약술하면 다음과 같다. 생산 시스템에 관심을 기울이는 전자가 자연을 갈릴레오적 객체들로 채워진 우주로서의 자연으로 보았다면, 생성 시스템에 관심을 기울이는 후자는 이를 러브록적 행위자들(Lovelocian agents)”로 이뤄진 과정으로서의 자연으로 파악한다(110, 115). 전자가 지구를 많은 행성 중의 하나로 멀리서 바라보는 관점이라면, 후자에게 지구는 거주지/서식지로서 그 안에서 다른 생명들이 함께 공동생산하는 것으로서 온전히 유일한(wholly singular) 것이다. 행위성(agencies)은 인간뿐만 아니라 비인간 존재들, 곧 전자의 관점이 객체들(objects), 심지어 자원들로 파악한 것들에게도 주어진다. 우리가 일부를 구성하는 이 지구가 바로 라투르의 제3, 정치적 행위자로서의 the Terrestrial인 것이다. 지구는 바로 나의/우리의 유일한 거주지이므로, 갈릴레오적 객체들에 대해 취할 수 있는 중립적 입장이나 거리두기는 불가능하다.

 

[이 책의 역자 박범순은 geo-social지리-사회적이라고 번역하였는데, 김환석은 이를 지구사회적이라고 번역한다. 김환석의 번역이 옳다. 김환석 선생의 글은 이번에 다시 보았는데, 그 글이 후기로 실려 있는 녹색 계급의 출현뿐만 아니라, 이 책 지구와 충돌하지 않고 착륙하는 방법에 대해서도 친절한 안내를 제공하기 때문에 이 책의 이해가 녹록치 않은 독자들에게도 권하고 싶다.]

 

6.

나는 2022년에 슐츠와 공저한 (아마도 그의 생전에 출판된 마지막 책인) 녹색 계급의 출현2017년에 나온 이 책보다 먼저 보았다. 그리고 우리는 결코 근대인이었던 적이 없다』(1991)를 무척 힘들게 읽었지만 다 이해하지 못했고, 그 전에 나온 그의 STS 저작들에는 사실 별 관심이 없으며, 신기후체제에 대한 그의 다른 책들도 읽어보지 못했다. 그런데 어떤 저자의 새로운 저작들을 읽으면 읽을수록 이전에 내가 잘못 이해했던 것들을 교정하게 되고 또 새로운 의문들이 생기는 경우, 나는 그에 대한 지적 흥미가 더 자라남을 느낀다. 지금 내가 그렇다.

 

이 책을 읽은 후에야 녹색 계급의 출현에서 녹색계급이 맑스주의처럼 자기 역사의 방향을 규정해야 한다는 말의 의미를 비로소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그 역사적 방향이란 것이 다름아닌 the Terrestrial였고, 이것은 글로벌과 로컬의 상상적 벡터 바깥에 놓인 지향점이었던 것이다. 그 책의 리뷰(https://blog.aladin.co.kr/eroica/13966311#Comment_13966311) 마지막 부분에서 나는 세 가지 질문거리를 썼는데, 그 중에서도 다음의 두 번째 질문에 대한 생각을 고쳐먹게 되었다.

 

이 수행적인 글쓰기 어디에 라투르가 고수하던 행위자를 따라가라는 지극히 기술적인 글쓰기의 원칙이 적용되고 있는가? 전혀 아니다.”

 

녹색 계급의 출현을 다시 보면 또 어떨지 모르겠는데, 지구와 충돌하지 않고 착륙하는 방법19(133)에서 라투르는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한 답으로 지구에 있는 것들에 대한 대안적 기술을 답으로 제시한다. 그러면서 그것의 사례로 프랑스 대혁명 직전에 국왕이 제출토록 한 진정서의 예를 들고 있다. 거기에는 여러 신분들의 불만과 고충들이 자세하게 기술되어 있다고 한다. 그리고 프랑스 대혁명이 다종다기한 불만들을 왕정이냐 공화정이냐의 양자택일의 문제로 총체화하기 전에 있었던 자신의 거주지에 대한 구체적 기술이 이 진정서들에 담겨 있었다고 한다. 그러면서 활성체들(animate beings)의 거주지의 세부적 사안들에 대해 구체적으로 기술해야 한다고 제안한다. 곧 그는 프랑스 대혁명 직전의 진정서들처럼 다시 구체적으로 현황을 점검하자고 제안한다.

 

대지 유인자(Terrestrial attractor)의 출현과 서술이 과연 정치적 행동에 의미와 방향을 부여할 수 있을지가 ... 의문이다. 세계 질서가 있으려면 현황을 점검해서 어느 정도 공유할 만한 세계가 먼저 있어야 한다”(138).

 

여기에서 라투르는 분명히 정치적 행동에 의미와 방향을 부여하려면, 그 이전에 우리가 어느 정도 공유할 만한 세계에 대한 기술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분명 라투르는 수행(performance) 이전의 기술(description)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따라서 여기 어디에 행위자를 따라가는충실한 기술이 있느냐고 물어봤던 나의 질문은 이 지구와 충돌하지 않고 착륙하는 방법을 읽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라투르는 분명히 “‘대지의 것들을 따라가는 것의 중요성을 말하고 있다(124). 그렇다고 이 질문이 마냥 라투르를 왜곡한 것이라고 무지한 내가 잘못했습니다하기도 힘든 것이 라투르는 기술(description)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그것의 역사적 선례를 들 뿐, 지구라는 공동 거주지에 거주하는 모든 행위자들과 활성체들(? 움직이는 존재들?) 또는 정치적 행위자로서의 the Terrestrial에 대해 세세히 기술하지 못하였다. 또 이제는 아예 할 기회가 없게 되었다. 지구와 충돌하지 않고 착륙하는 방법은 구체적인 기술을 제안하면서 끝났고, 녹색 계급의 출현정치적 행동에 의미와 방향을 부여하고자 하는 의도에서 쓰여졌지만, 정작 두 저작을 매개하는 데에 필수불가결한 요소, 곧 그가 강조했던 지구와 행위자들에 대한 구체적 기술은 누락된 것이다.

 

내가 다른 두 질문들에 담았던 생산 시스템의 사회계급과 생성 시스템의 지구사회계급 간의 관계나 자본주의의 문제에 대한 의문은 그 때보다는 다소 물렁물렁해져 뾰족한 끝이 닳았다. 이 문제들에 관해서는 언제고 여유를 갖고 라투르의 다른 글들과 그의 동료들의 저작들을 살펴보고 싶어졌다. 물이 좀 따뜻해진 걸까? 내 눈이 좀 밝아진 걸까?

 

라투르는 이 책을 자신의 가설이 틀렸음을 증명하고 더 나은 것을 찾을 수 있도록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 썼다는 말로 시작해서, 지금까지 내가 얘기했으니 이제부터 당신이 얘기할 차례라는 말로 끝맺는다(19, 149). 라투르도 대화를 하고자 했던 것일까? 단지 여전히 근대인의 귀를 가졌던 내가 못 알아들었기 때문에 배배꼬인 프랑스 지식인의 혼잣말로 간주한 것일까? 근데 이제 좀 듣고 싶어진 것 같은데...

 

Adieu, Bruno! Adieu, 2022!!

 

<2022. 12. 31. 추기>

남은 자투리들 몇 개: 

1) 미주 44, 54, 55에서 현재의 생태사회주의적 저작들을 비판하는 것 같은데, 좀 자세히 써주지... 무슨 혼잣말 같아서 더 궁금증을 유발한다. 

2) 라투르는 폴라니를 비판하지만 결국 생산 시스템이 생성 시스템 안에 파묻혀 있는(embedded) 것이라는 폴라니의 문제틀로 귀환하는 것 아닌가?

3) 미주 70, 74에서 언급되는 필립 데스콜라의 Beyond Nature and Culture나 라투르의 Politics of Nature, Facing Gaia, 그리고 스탕게르스의 책들도 좀 번역되어 나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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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원 2022-12-30 19:1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감사해요. 글을 읽다보니 온정이 느껴집니다. 라투르의 열정에 에로이카님의 정성까지...

에로이카 2022-12-31 12:09   좋아요 1 | URL
초원님, 온정이요? 잘 모르겠지만, 감사합니다. 한 해 잘 정리하시고,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

초원 2022-12-31 21:23   좋아요 1 | URL
라투르를 더 잘 이해할 수 있도록 안내해 주셔서 감사드렸어요. 동의하지 않는 주장에 대해서도 여러 경로로 논증하려는 모습이 타인을 인정하는 온정으로 느껴졌구요.
그런데 두 번째 자투리는 상호포섭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이해되기도 하던데요.

몇 시간이 지나면 또 다른 新年이 되는군요. 복 많이 받으시고, 소원 성취하시길 바래요.

에로이카 2023-01-01 18:50   좋아요 0 | URL
아.. 네.. ^^ 초원님, 따뜻한 댓글 감사드립니다. 라투르 너무 읽기 힘들어서 저는 이해하려는 노력이 많이 필요합니다. 리뷰에 그 흔적이 남았나 보네요... 상호포섭은 누군가의 개념인가요? 아니면 그냥 일상적인 용법에서의 의미인 건가요?

초원 2023-01-03 08:08   좋아요 1 | URL
홀리즘이었던 것 같은데요, 세르의 상호포섭 개념으로 자연과 사회를 파악하는 관점에 영향을 받은 학자들 중에 라투르도 있었던 것으로 ... 봉지 넣기 비유가 설득력이 있었어요. 그 막연한 기억에 더해서 에로이카님의 출중한 해설을 읽다보니 안다는 착각이 생겼네요.

에로이카 2023-01-03 10: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세르요.. 공부하고 싶은데 뭐부터 봐야할지 모르겠는 학자였어요. 세르의 상호포섭, 봉지넣기.. 기억해두겠습니다.. 고맙습니다~

2023-01-05 16:42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