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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와 충돌하지 않고 착륙하는 방법 - 신기후체제의 정치
브뤼노 라투르 지음, 박범순 옮김 / 이음 / 2021년 2월
평점 :
0. 브뤼노 라투르 (1947~2022)
2022년 10월 9일 라투르가 췌장암으로 영면하였다. 딱히 그를 따르지는 않았지만 올해가 가기 전 뭘 하면 좋을까 고민하다가 나름대로 추모의 마음을 담아 이 책의 리뷰를 쓰기로 했다. 지난번 『녹색 계급의 출현』 리뷰 쓸 때만 해도 이 세상 사람였는데, 리뷰 올리고 열흘쯤 뒤에 돌아가실 줄 알았다면, 좀더 다정한 리뷰를 썼어야 했다. 사실 그 리뷰 쓰고 나서 뭔가 켕기는 게 남았는데, 그 점에 대해서도 좀더 풀어보고 싶었다. 각을 세우기보다는 귀를 기울이는 방식으로 말이다.
1. 1990년대: 새로운 역사의 시작
1990년대초 “역사의 종말”로 불리던 현실 사회주의의 몰락과 함께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었다. 라투르는 이 새로이 시작된 역사를 함께 구성하는 세 가지 현상을 지목한다. 그것은 1) 탈규제, 2) 불평등의 폭증, 3) 신기후체제 또는 (그에 대한 반동으로서) 기후변화 부정론이다(17, 29, 40, 42). 글로벌화의 부정적 결과쯤으로 이해할 수 있을 법한 이 현상들은 다른 모습으로 계속 반복되어 왔는데, 2010년대 중반 이후의 세 사건들 - 브렉시트, 트럼프 당선, 이주의 급증 - 도 이 세 현상의 복합적 현상태로 이해할 수 있다. 사실 이것들은 “하나의 위험”이다(29). 이 사건들은 “근대화”의 연장선상에서 “글로벌화”가 약속했던 보편성의 시효가 만료되었음을 보여준다. 이런 사례들은 2022년말의 뉴스에서도 계속 꼽을 수 있다. 코로나19바이러스 확산으로 인한 애플과 테슬라의 중국 공장 가동 중단, 영국의 난민 르완다 이송계획, 그리고 프랑스 노인의 쿠르드족 총격 살인사건 등도 “신기후 체제” 역사의 한 장면들임이 분명하다. 이 장면들은 모두 지금 머무는 이곳에서 두 발 뻗고 편히 지낼 수 없음을 보여주는 사례들이다. 의존할 것이 마땅치 않다. 근대화를 통해 남의 땅을 빼앗던 이들이 딛고 서있는 땅도 이제 빼앗길 위기에 처한다(26). 라투르는 이를 발밑에서 땅이 꺼지는 느낌으로 표현한다(27-28). 이제 우리 모두 딛고 의지할 땅이 필요하다. 그런데 새 땅은 이제 없다.
2. Global, Local, 그리고 Terrestrial
라투르의 “근대”가 원래 의미대로의 역사적 시대 범주가 아니라 사회/자연의 이원론적 세계관을 뜻하듯, 글로벌과 로컬도 규모(scale)의 의미라기보다는 사람들이 그쪽을 향해가고자 하는 지향, 그들의 나침반 바늘이 가리키는 유인자(attractor), 직선적 벡터의 양 끝(그림 1, 49, 52~57)이다. 『우리는 결코 근대인이었던 적이 없다』(p. 302)에서 네트워크에 비하면 별 볼 일 없는 것들로 취급되었던 로컬과 글로벌이 이 책에서는 그림 1부터 6까지 모두에 출현하는 유인자들이다. 로컬과 글로벌은 근대인의 단선적인 시간의 화살이라는 가상적 선분의 두 점, 곧 유토피아이다. 근대인들(또는 그들의 시간의 화살)은 로컬을 등 뒤로 한 채, 근대화의 전선을 밀어붙이면서 글로벌 쪽을 향해 질주해왔다. 그런데 애초 글로벌화의 장밋빛 약속(글로벌화 플러스)은 지켜질 수 없었고, 대신 서두에서 살펴본 글로벌화의 부정적 경향들(글로벌화 마이너스)이 명약관화해지면서 이에 대한 반동으로서 로컬-마이너스로의 질주 역시 확산된다(54). 트럼프주의는 이 정반대로의 두 질주들을 통합하려 하면서 “비현실로 이륙”하려고 한다(60~61). 라투르는 트럼프주의가 지향하는 네 번째 유인자를 “외계로 Out-of-This World”라고 칭하면서, 자신이 제안하는 세 번째 유인자를 그것의 대극에 자리매김한다. 라투르가 제안하는 the Terrestrial은 인간의 행동이 펼쳐지는 환경 또는 배경이 아니라, 그 자체로 하나의 새로운 정치적 행위자다(66).
역자는 the Terrestrial은 “대지”, “대지인”(83)으로, terrestrials는 “대지의 것들”(120, 128)로 번역한다. “글로벌”, “로컬”은 음차해도 독자들의 이해에 무리가 없다고 판단한 반면, “테레스트리얼”은 그렇지 않다고 생각했나 보다. 그 판단을 존중하지만, 덕분에 한국 독자들은 “-al”로 끝나는 라임의 맛을 볼 수는 없다. 그런데 the Terrestrial에는 인간, 비인간, 지구의 생명막(가이아), 곧 러브록적 행위자 모두가 들어가서 수중 존재는 배제하는 것 같은 그냥 "대지"라고 하기도 좀 그렇고, 사람만을 가라키는 "대지인"도 좀 그렇고... 어쨌든 좋은 번역어는 아닌 것 같다.
3. 정치생태학의 실패
앙드레 고르와 알랭 리피에츠. 내가 존경해마지 않는 프랑스의 정치생태학자들이다. 정치경제(political economy)에서 정치생태(political ecology)로의 전환은 현실 사회주의 몰락 이후 계몽된 맑스주의자들 중 일부가 걸었던 도정이다. 라투르는 이들이 환경 이슈들을 공공 생활의 핵심 의제로 만드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근대인들의 시간의 화살이라는 덫 자체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자침을 끌어당길 수 있는 새로운 유인자를 만들어 방향을 재설정하지 못했기 때문에 실패했다고 평가한다(73~77). 라투르가 the Terrestrial이라는 새로운 극을 제안하는 이유는 정치생태학이 나침반 바늘을 끌어당길 수 있는 새로운 유인자와 이로 인해 가능해질 새로운 좌표를 마련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단지 그 극을 “지목”했을 뿐, 이를 정치적 행위자로 “엄밀하게 정의하지 못했”으므로, 그 극으로의 실제적 이동에 실패했다(72, 85). 다른 세 극들이 “토포스 및 땅과 토지가 없는 장소”로서 유토피아에 불과하다면, the Terrestrial은 국경과 정체성을 초월하면서도 지구와 토지에 결부된 새로운 세계-만들기(worlding)이다(82). 따라서 이는 “스케일의 전복과 시공간 경계의 파괴”를 수반하며, 글로벌도 로컬도 아닌 대기적(atmospheric) 스케일에서 펼쳐진다(132).
4. 칼 폴라니 비판
라투르는 정치생태학이 결합시키고자 하였던 두 흐름 – 사회주의와 생태학 –이 사회문제와 생태문제의 양자택일이라는 궁지에 빠졌기 때문에 실패했고, 이 결과 나침반의 바늘이 움직이지 못했다고 평가한다(86). 사회주의는 생태문제를 자신의 문제로 인식하지 못했고, 정치생태학은 사회주의의 배턴을 이어받지 못했다. 왜냐하면 이들은 ‘자연’의 역할을 서로 다르게 생각했기 때문이다(96). 지난 70년의 거대한 가속(the Great Acceleration) 시기 동안 자본주의는 변하였지만, 사회주의는 변하지 않았고, 생태주의는 주변적 위치에 머물렀다. 따라서 사회의 자기보호 운동은 폴라니의 기대만큼 활성화되지 않았고, 거대한 부동성(the great immobility)만을 보였을 뿐이다(85).
생태사회주의자들이 일종의 이론적 보완책으로 생각하였던 폴라니가 비판된다. 그는 시장자유주의를 과거의 일로 치부하였고, 시장화에 저항하는 사회의 능력을 과대평가했고, 계급 갈등이 아닌 “강력한 저항의 힘”을 예상하지 못하였다(85, 91). 폴라니에 대한 이러한 비판은 정치생태학을 매개로 하여 맑스주의 일반으로 확장된다. 이들은 자신의 주장만큼 충분히 유물론적이지도 않고, 리얼리스트도 아니다(91, 95).
5. 생산시스템의 사회적 계급 vs. 생성시스템의 지구사회적(geo-social) 계급
맑스와 폴라니, 그리고 그 후예들이 관심을 가졌던 것이 생산시스템, 사회계급, 사회문제였다면, 라투르는 생성시스템, 지구사회계급, 지구사회적 문제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양자의 차이는 18절 “더욱 커지는 ‘생산 시스템’과 ‘생성 시스템’ 사이의 모순”에서 주로 논의되는데, 『녹색 계급의 출현』에 실린 김환석의 “라투르의 정치생태학과 슐츠의 새로운 계급이론”의 표에 간략히 잘 정리되어 있기 때문에 여기에서 요약하지 않겠다. 이 책 16~17절에서는 양자가 기반하고 있는 자연관의 차이가 소개되는데, 약술하면 다음과 같다. 생산 시스템에 관심을 기울이는 전자가 자연을 “갈릴레오적 객체들”로 채워진 “우주로서의 자연”으로 보았다면, 생성 시스템에 관심을 기울이는 후자는 이를 “러브록적 행위자들(Lovelocian agents)”로 이뤄진 “과정으로서의 자연”으로 파악한다(110, 115). 전자가 지구를 많은 행성 중의 하나로 멀리서 바라보는 관점이라면, 후자에게 지구는 거주지/서식지로서 그 안에서 다른 생명들이 함께 공동생산하는 것으로서 온전히 유일한(wholly singular) 것이다. 행위성(agencies)은 인간뿐만 아니라 비인간 존재들, 곧 전자의 관점이 객체들(objects), 심지어 자원들로 파악한 것들에게도 주어진다. 우리가 일부를 구성하는 이 지구가 바로 라투르의 제3극, 정치적 행위자로서의 the Terrestrial인 것이다. 지구는 바로 나의/우리의 유일한 거주지이므로, 갈릴레오적 객체들에 대해 취할 수 있는 중립적 입장이나 거리두기는 불가능하다.
[이 책의 역자 박범순은 geo-social을 “지리-사회적”이라고 번역하였는데, 김환석은 이를 “지구사회적”이라고 번역한다. 김환석의 번역이 옳다. 김환석 선생의 글은 이번에 다시 보았는데, 그 글이 후기로 실려 있는 『녹색 계급의 출현』뿐만 아니라, 이 책 『지구와 충돌하지 않고 착륙하는 방법』에 대해서도 친절한 안내를 제공하기 때문에 이 책의 이해가 녹록치 않은 독자들에게도 권하고 싶다.]
6.
나는 2022년에 슐츠와 공저한 (아마도 그의 생전에 출판된 마지막 책인) 『녹색 계급의 출현』을 2017년에 나온 이 책보다 먼저 보았다. 그리고 『우리는 결코 근대인이었던 적이 없다』(1991)를 무척 힘들게 읽었지만 다 이해하지 못했고, 그 전에 나온 그의 STS 저작들에는 사실 별 관심이 없으며, 신기후체제에 대한 그의 다른 책들도 읽어보지 못했다. 그런데 어떤 저자의 새로운 저작들을 읽으면 읽을수록 이전에 내가 잘못 이해했던 것들을 교정하게 되고 또 새로운 의문들이 생기는 경우, 나는 그에 대한 지적 흥미가 더 자라남을 느낀다. 지금 내가 그렇다.
이 책을 읽은 후에야 『녹색 계급의 출현』에서 녹색계급이 맑스주의처럼 “자기 역사의 방향을 규정해야 한다”는 말의 의미를 비로소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그 역사적 방향이란 것이 다름아닌 the Terrestrial였고, 이것은 글로벌과 로컬의 상상적 벡터 바깥에 놓인 지향점이었던 것이다. 그 책의 리뷰(https://blog.aladin.co.kr/eroica/13966311#Comment_13966311) 마지막 부분에서 나는 세 가지 질문거리를 썼는데, 그 중에서도 다음의 두 번째 질문에 대한 생각을 고쳐먹게 되었다.
이 수행적인 글쓰기 어디에 라투르가 고수하던 ‘행위자를 따라가라’는 지극히 기술적인 글쓰기의 원칙이 적용되고 있는가? 전혀 아니다.”
『녹색 계급의 출현』을 다시 보면 또 어떨지 모르겠는데, 이 『지구와 충돌하지 않고 착륙하는 방법』 19절(133)에서 라투르는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한 답으로 지구에 있는 것들에 대한 “대안적 기술”을 답으로 제시한다. 그러면서 그것의 사례로 프랑스 대혁명 직전에 국왕이 제출토록 한 진정서의 예를 들고 있다. 거기에는 여러 신분들의 불만과 고충들이 자세하게 기술되어 있다고 한다. 그리고 프랑스 대혁명이 다종다기한 불만들을 “왕정이냐 공화정이냐”의 양자택일의 문제로 총체화하기 전에 있었던 자신의 거주지에 대한 구체적 기술이 이 진정서들에 담겨 있었다고 한다. 그러면서 활성체들(animate beings)의 거주지의 세부적 사안들에 대해 구체적으로 기술해야 한다고 제안한다. 곧 그는 프랑스 대혁명 직전의 진정서들처럼 다시 구체적으로 현황을 점검하자고 제안한다.
대지 유인자(Terrestrial attractor)의 출현과 서술이 과연 정치적 행동에 의미와 방향을 부여할 수 있을지가 ... 의문이다. 세계 질서가 있으려면 현황을 점검해서 어느 정도 공유할 만한 세계가 먼저 있어야 한다”(138).
여기에서 라투르는 분명히 “정치적 행동에 의미와 방향을 부여”하려면, 그 이전에 “우리가 어느 정도 공유할 만한 세계”에 대한 기술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분명 라투르는 수행(performance) 이전의 기술(description)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따라서 여기 어디에 “행위자를 따라가는” 충실한 기술이 있느냐고 물어봤던 나의 질문은 이 『지구와 충돌하지 않고 착륙하는 방법』을 읽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라투르는 분명히 “‘대지의 것들’을 따라가는 것”의 중요성을 말하고 있다(124). 그렇다고 이 질문이 마냥 라투르를 왜곡한 것이라고 “무지한 내가 잘못했습니다” 하기도 힘든 것이 라투르는 기술(description)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그것의 역사적 선례를 들 뿐, 지구라는 공동 거주지에 거주하는 모든 행위자들과 활성체들(? 움직이는 존재들?) 또는 정치적 행위자로서의 the Terrestrial에 대해 세세히 기술하지 못하였다. 또 이제는 아예 할 기회가 없게 되었다. 이 『지구와 충돌하지 않고 착륙하는 방법』은 구체적인 기술을 제안하면서 끝났고, 『녹색 계급의 출현』은 “정치적 행동에 의미와 방향을 부여”하고자 하는 의도에서 쓰여졌지만, 정작 두 저작을 매개하는 데에 필수불가결한 요소, 곧 그가 강조했던 지구와 행위자들에 대한 구체적 기술은 누락된 것이다.
내가 다른 두 질문들에 담았던 생산 시스템의 사회계급과 생성 시스템의 지구사회계급 간의 관계나 자본주의의 문제에 대한 의문은 그 때보다는 다소 물렁물렁해져 뾰족한 끝이 닳았다. 이 문제들에 관해서는 언제고 여유를 갖고 라투르의 다른 글들과 그의 동료들의 저작들을 살펴보고 싶어졌다. 물이 좀 따뜻해진 걸까? 내 눈이 좀 밝아진 걸까?
라투르는 이 책을 자신의 “가설이 틀렸음을 증명하고 더 나은 것을 찾을 수 있도록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 썼다는 말로 시작해서, 지금까지 내가 얘기했으니 이제부터 당신이 얘기할 차례라는 말로 끝맺는다(19, 149). 라투르도 대화를 하고자 했던 것일까? 단지 여전히 근대인의 귀를 가졌던 내가 못 알아들었기 때문에 배배꼬인 프랑스 지식인의 혼잣말로 간주한 것일까? 근데 이제 좀 듣고 싶어진 것 같은데...
Adieu, Bruno! Adieu, 2022!!
<2022. 12. 31. 추기>
남은 자투리들 몇 개:
1) 미주 44, 54, 55에서 현재의 생태사회주의적 저작들을 비판하는 것 같은데, 좀 자세히 써주지... 무슨 혼잣말 같아서 더 궁금증을 유발한다.
2) 라투르는 폴라니를 비판하지만 결국 생산 시스템이 생성 시스템 안에 파묻혀 있는(embedded) 것이라는 폴라니의 문제틀로 귀환하는 것 아닌가?
3) 미주 70, 74에서 언급되는 필립 데스콜라의 Beyond Nature and Culture나 라투르의 Politics of Nature, Facing Gaia, 그리고 스탕게르스의 책들도 좀 번역되어 나왔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