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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 계급의 출현 - 스스로를 의식하고 자랑스러워하는
브뤼노 라투르.니콜라이 슐츠 지음, 이규현 옮김, 김지윤 외 해설 / 이음 / 2022년 6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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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투르 책 중에서 가장 수월하게 읽은 책이다. 그 이유는 이 책이 라투르의 단독 저작이 아니라 니콜라이 슐츠와의 공저이기 때문일 수도, 비교적 친숙한 주제인 계급을 다루기 때문일 수도, 또는 번역이 무난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라투르는 별로 다시 들어가고 싶지 않은 물이었는데, 신기후체제 하의 새로운 계급 형성의 문제를 다룬다는 말에 도저히 외면하기 힘들었다.
1. 계급투쟁: 기술적이면서도 수행적인 개념
엄밀한 분석과 주장이라기보다는 단상들의 메모이다. 저자들은 계급투쟁 개념의 기술적(descriptive)이면서 수행적인(performative) 성격에 주목한다(16). 맑스와 엥겔스의 『공산당선언』은 이 성격을 잘 보여준다. 1장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는 부르주아의 탄생, 성장, 국가권력의 장악, 자본주의의 세계화, 상업공황, 프롤레타리아의 탄생과 성장에 이르는 과거와 현재의 훌륭한 역사적 기술이다. 2장 “프롤레타리아와 공산주의자”는 처음에는 기술로 시작되지만 역사적 경향을 식별해내서 프롤레타리아의 투쟁을 공산주의자들의 목적이라는 관점에서 재배열하면서 현재부터 미래에 이르는 투쟁의 청사진을 제시한다. 이 2장과 마지막 4장은 일종의 투쟁의 시나리오, 그것에 맞춰 투쟁을 지도하고 수행(perform)해야 하는 대본이다. 『공산당 선언』의 이러한 수행적 성격에 주목했던 하트와 네그리는 맑스가 그랬듯 자신들의 『제국』도 도래할 계급에 대해서 쓰는 것이라고 이야기한 바 있다.
그렇다면 이 『녹색 계급의 출현』이 『공산당 선언』에 필적할 만큼 훌륭한 분석적이면서도 수행적인 글일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아니다. 그러나 흥미로운 논의들이 있고, 다음 이야기가 더 궁금하기도 하다. 사실 『공산당 선언』도 교리문답 같은 엥겔스의 『공산주의의 원리』라는 견실한 초고가 있었기 때문에 명확히 쓰여질 수 있었다. 짧은 단편 영화라기보다는 영화 예고편 광고 같다. 내용을 살펴보자.
2. 전통적인 계급투쟁과의 연속성과 불연속성
저자들은 녹색계급이 존재하기 원한다면 적어도 맑스주의만큼은 “자기 역사의 방향을 규정해야 한다”고 말하면서, 녹색계급도 노동자계급에 대한 맑스주의적 시나리오처럼 자기 존재의 물질적 조건의 생산과 재생산에 대해 규정해야 한다고 말한다(22-23). 그러나 바로 여기에 두 개의 단서를 덧붙인다. 하나는 물질에 대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생산에 대한 것이다. 첫째, 이제 물질은 맑스가 분석했던 인간의 재생산과 관련된 의식주에 국한되지 않고, 인간에게 직접적으로 유용하지 않은 비인간 존재들의 재생산으로까지 확장되어야 한다. 곧 분석대상으로서 하부구조의 경계가 확장되어야 한다. 둘째, 오늘날 생산체계가 파괴체계와 같은 말이 되어버린 현실에서 지구의 자연을 생산을 위해 추출해야 하는 자원이 아니라, 거주가능 조건으로 사유해야 한다(26). 곧 생산에 대한 배타적 관심에서 벗어나야 한다. 이러한 시각은 노동, 토지, 화폐는 원래 상품이 아니었다는 칼 폴라니의 논의에 접목된다. 사실 맑스의 정치경제학 비판의 생태적 한계를 지적하면서 폴라니의 논의를 끌어들이는 것은 많은 생태사회주의자들 – 제임스 오코너, 미카엘 뢰비 등 –이 오래 전부터 하던 이야기라 새로울 것은 없다.
그나마 새로운 것이 있다면, 생산이 거주가능조건의 파괴와 동일시되는 임박한 파국의 확실성에도 불구하고 기후변화를 멈출 수 있는 동원은 지지부진하다는 사실에 대한 솔직한 인정과 이를 극복할 필요성의 제기이다. 맑스주의에 대해 적대적이면서 사회운동에 대해서도 별 관심이 없었던 라투르가 이런 말을 하다니, 그 차가웠던 물이 조금은 미지근하게 느껴진다. 생산 체계(system of production)는 생성 체계(system of engendering)에 둘러싸여 있다는 인식론적 지도를 그리면서, 다른 계급들이 생산관계의 영역을 확장하고자 한다면, 녹색계급은 이를 제한하고자 하며, 이제 계급 갈등이 생산체계 내부(제1열)뿐만 아니라 생산체계와 생성체계의 인터페이스(제2열)에서도 벌어지고 있다고 한다(34-35). 이 제2열의 투쟁에서 녹색계급은 지구 차원의 거주가능성 문제를 중심으로 옛 계급들과 충돌하면서 자신의 긍지를 끌어낸다(38-39). 이 서술은 분명 기술적이기보다는 수행적이다. 곧 그러기를 바라고, 저자들이 그렇게 되는 데에 일조하겠다는 바램과 다짐이 투영된 말이다.
이 형성 중인 녹색계급은 행위 지평을 생산의 외부로, 또 한 나라의 외부로 넓혀나가야 한다. 이 녹색계급이 대립하는 근대화와 세계화를 추구하는 계급들은 과거로 회귀하려 하는 것이므로 반동적이고, 거주가능조건을 유지하고자 하는 녹색계급은 진보적이며 해방적이다(43). 여기에서 저자들은 “해방”의 의미를 변화시킨다. 이들의 해방은 무언가로부터 자유로워진다는 해방이 아니라, 비로소 무언가에 의존할 수 있게 된다는 의미의 해방이다. 자유라는 이상은 발전(development)의 끝에 놓인 채 전진할수록 더 물러나는 잡히지 않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감싸고 있는 것(envelopment), 곧 거주가능조건에 편안히 몸을 맡긴다는 것을 뜻하게 된다. 전자가 생산 안에서의 사고라면, 후자는 생성 안에서의 사고라고도 할 수 있겠다. 생성 안에서 우리는 의존하면 의존할수록 더 좋다. 인클로저 운동이 인간이 자연을 소유하고자 울타리를 친 것이었다면, 이제 이 “해방하는 속박”은 자연이 인간을 소유하고 있음을 깨닫는 것이다(50-52). 이제 진보는 “시간의 화살”을 따라 하나의 방향으로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생산체계 둘레를 감싸고 있는 생성체계로 사방팔방으로 분산하는 것이 된다(60).
그렇다면 누가 녹색계급을 구성하는가? 7장에서 잠재적 구성원들이 제시된다. 프롤레타리아, 페미니즘, 탈식민주의, 토착 민족, 미래 세대, 지식인, 종교가 녹색계급을 구성 중이지만, 정작 그 계급은 자신이 잠재적으로 다수파임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곧 자신과 자신의 미래를 확신하는 긍지가 없다(73). 상황이 급박함에도 불구하고 행동하지 못하고 있다. 라투르와 슐츠는 이 상황을 돌파하고 싶어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주축 계급으로서의 긍지를 얻을 수 있을까? 저자들은 그람시의 “진지전” 개념을 빌어온다. 이러한 차용은 두 가지 맥락에서 이뤄지는데, 하나는 미래의 기동전을 준비하기 위한 사전작업으로서의 의미이고, 다른 하나는 자신들의 “객관적” 이익 – 심지어 그것이 생태적 이익이라고 해도 -에 매달리지 않고, 매번 문화 전체를 휘저어 섞어야 다른 계급들을 설득시켜서 동맹을 맺을 수 있는 헤게모니 계급으로서 등장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이 점에서는 사회주의보다는 자유주의를 모방해야 한다고 저자들은 주장한다(81-82).
녹색계급이 쟁취하고자 하는 권력은 어떤 권력이며 무엇을 할 것인가? 이것이 9장의 제목으로 들어가 있는 질문인데, 여기에 대한 충실한 답을 제시하고 있지는 못하다. 녹색 계급의 주제는 일국의 영토에 제한된 것이 아니고 지구(global? earth?)정치에 속하기 때문에 권력 획득이 쉽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가장치를 차지해야 하며(97), 풀뿌리부터 건설되는 정당이 필요하다(103). 그래야 투표할 수 있다. 근대화와 글로벌화의 국가가 아니라 생태화를 추구하는 국가를 만들어야 한다.
그런데 이들이 말하는 녹색계급의 정당은 아마도 그람시가 이야기하는 “현대의 군주”로서 지도를 수행하는 당은 아닌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명확하지는 않지만, 칼 슈미트의 논의를 연상시키면서 동지와 적을 새롭게 구분하며, 기존의 계급제휴를 붕괴시키고, 녹색계급의 계급의식을 고취하는 데에도 뭔가 역할을 하기는 바라는 것 같다(111-112). 또 언젠가 올지 모르는 뜻밖의 기회를 포착하기 위한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는 말도 맞는 말이다(113). 그런데 그 당의 이미지, 또는 “짙은 안개 속에서” 마침내 모습을 드러낼 녹색계급의 모습이 알록달록한 옷을 입은 삐에로(112, 97)라면? 맥이 빠지면서 헛웃음이 나온다. 물론 반전이 있을 수도 있지. 그 삐에로가 허당이 아니라, 호아킨 피닉스가 연기한 조커로 변신하여 모든 기후악당들을 심판하는 시나리오가 가능도 할 수 있겠다만... 글쎄... 이 맥빠짐은 무엇일까? 내가 그저 우리가 잠재적 다수임을 확신하지 못한 채 “한탄과 불평”만을 일삼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104).
3. 부록
이상이 100쪽 남짓의 분량으로 쓰여진 76개의 메모를 정리하고, 아주 약간의 느낌을 덧붙인 것이다. 출판사가 이 분량만으로는 책을 내서 가격을 매기기가 힘들다고 생각했는지, 역자 후기를 포함하여 다섯 편의 짧은 글들이 더 실렸다. 이 중에서는 미셸 세르의 자연계약론을 소개한 역자 후기와 슐츠의 계급이론을 소개한 김환석의 글이 볼 만하다.
4. 단상과 의문
라투르 책 치고 쉬워서 좋았지만, 그리 대단한 내용이 있는 것 같지는 않다. 약간의 단상과 의문을 글로 적어 남긴다. 라투르와 슐츠가 이 글을 쓴 이유는 녹색계급에게 “우리가 함께 싸우면 기후변화를 막아낼 수 있다”는 긍지, 곧 집합적 효능감을 불어넣기 위해서일 것이다. 이 글이 그 목적을 얼마나 잘 수행했는지와는 별도로 나는 이 의도가 좋다. 그토록 맑스주의를 싫어했던 라투르가 “계급투쟁”을 선동하다니. 장하십니다! 좋습니다! 나도 힘을 합해 싸울게요!
그런데 이것이 단지 바이럴 효과를 노리는 일종의 카피캣 마케팅이 아니려면, 몇 가지 지점이 좀더 명확해져야 할 것 같다. 먼저 저자들은 계급투쟁을 생산체계 내부의 기존 계급투쟁과 생산체계와 생성체계간의 투쟁으로 분류하는데, 두 투쟁은 어떻게 연결되는가? 여기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다. 또 사회적 계급과 지구사회적 계급에 대한 슐츠의 구분(140) 역시 양자를 추상적으로 범주화할 뿐이다. 물론 슐츠의 글을 직접 다 읽은 것이 아니기 때문에 실제로 그가 양자의 관계를 설정하고 있는데 여기에 소개되지 않은 것일 수도 있다.
둘째, (난 이것이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되는데) 라투르의 기존 저작들과 이 프로젝트의 정합성과 갈등의 지점이 명확해져야 할 것 같다. 라투르는 네트워크는 ‘선’으로 이뤄진 것인데, 맑스주의자들은 추상을 통해 이 선들의 네트워크를 ‘면’으로 인식하여 세계를 “절대적 총체성”의 관점에서 이해하였고, 이 면을 한 번에 뒤집으려던 맑스주의의 프로젝트는 총체적으로 실패했다고 조롱한 바 있다(『우리는 결코 근대인인 적이 없다』, 294-311). 그런데 그것이 생성체계가 밖을 감싸고 있는 생산체계의 이미지든, 슐츠가 표로 정리한 두 계급의 구별이든 추상의 산물 아닌가? 또 이 수행적인 글쓰기 어디에 라투르가 고수하던 “행위자를 따라가라”는 지극히 기술적인 글쓰기의 원칙이 적용되고 있는가? 전혀 아니다. 내가 라투르를 잘 모르기 때문에 오해를 하고, 그 오해의 뇌피셜이 자가발전한 꼬투리 잡기일까?
마지막으로, 저자들은 녹색계급은 해방을 지향하는 좌파이지만, 그저 “반자본주의” 투쟁의 연장선 위에 있다고 단언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데(21),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라투르가 자본주의에 대해 말하는 것도 듣는 것도 싫어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길게 왈가왈부하고 싶지는 않다. 그런데 개인의 호오를 떠나서 자본주의에 대한 녹색계급의 입장은 무엇인가? 녹색계급의 계급의식을 고취하여 계급투쟁을 수행할 정당은 자본주의에 대해서 뭐라고 말할 것인가? 나는 라투르가 자본주의에 대해 말해봤자 남는 것이 없기 때문에 언급 자체를 회피한다는 인상을 받는다. 자본주의에 대해서 말하지 않는 좌파가 가능한가? 내가 구닥다리라서 이런 말을 하는가? 자신이 녹색계급의 일원이 되기를 희망한다면 충분히 할 수 있는 질문이며, 이런 팜플렛을 쓴 저자들이 회피해서는 안 되는 질문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이 『녹색 계급의 출현』이 『공산당 선언』에 비교될 만한 대단한 글은 아니다. 단/연/코 아니다! 이것이 무언가 도래할 것에 대한 글이라면, 그 도래할 것은 새로운 계급투쟁을 수행하는 녹색 계급(ecological class) 자체라기보다는, 이 계급에 대한 새로운 연구일 것이다. 사이토 고헤이의 『지속 불가능 자본주의』가 과하다 싶은 맑스에 대한 맹목적 충성 때문에 지루했다면, 반대로 이 글은 맑스의 계급 이론에 대한 선택적 단순화 때문에, 그리고 라투르가 이전에 맑스주의에 대해 써댄 말들 때문에 그리 후한 평가를 내리기는 힘들다. 짧고 쉽다는 것은 장점이지만, 답을 주기보다는 더 많은 물음표들을 제기하게 만든 책이다. 물론 그것도 괜찮은 일이다. 내가 너무 박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