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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의 탄생 - 사라진 암호에서 21세기의 도형문까지 처음 만나는 문자 이야기
탕누어 지음, 김태성 옮김 / 김영사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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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로, 더불어 고유한 이름을 갖게 된 아름다운 글자

 

한자의 탄생, 탕누어 지음, 김태성 옮김


 

한문에 해박한 중년의 수학 선생님이 계신다. 말씀도 많이 하지 않지만, 가끔 하시는 이야기도 한학자처럼 고전적이다. 이해하기 어려운 수학을 느리고 묵직한 목소리로 가르치는 선생님을 요즘 아이들이 견뎌낼 수 있을까? 졸음 쏟아지기 딱 좋은 조건이다. 예상외로 반전이 있다. 선생님은 꽤 인기 있는 수학 선생이다. 수학 원리를 한자로 풀어가며 설명하는 선생님을 아이들은 참 좋아한다. 요란하지 않은 웃음소리가 교실에 번진다. 다양한 멀티미디어가 없어도 아이들 눈빛이 맑아진다. 한자가 품고 있는 이야기가 수학을 향한 아이들의 호기심을 자극하고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어주는 모양이다.

 

글자마다 고유성(개별성)을 지닌 갑골 문자는 각자의 형상에 알맞는 특별한 의미를 함의하고 있다. 글자마다 조형이 될 수 있었던 기원이 있다. 유사할 수 있어도 동일한 글자는 없다. 시간에 따라 글자의 쓰임이 바뀌고, 쓰임은 글자의 외양을 다르게 만들며 분화했다. 글자에 쌓인 의미는 (보르헤스의 말처럼) 문자와 문자가 서로 다치지 않으며 의미의 호환을 이룰 수 있었다. 거북 뼈에 새겨진 글자는 의사소통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그 시대 사람들의 사유 방식과 생활양식을 담고 있다. 글자를 도구가 아닌, 철학으로 바라보게 하는 까닭이다. 시간을 분절하여 사용할 필요가 없었던 시대에는 시간을 구체적으로 표현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소용되지 않는 단어는 자연스럽게 사멸하거나 정체된다. 태양이 중요한 농경사회에서는 태양에 관한 글자가 많을 수밖에 없다. 태양은 생존과 생산에 없어서는 안되는 존재였다.

 

문자는 시간을 붙들려는 인간의 노력이다. 갑골 문자는 상형, 전주, 가차를 거쳐 왔다. 소멸하는 시간은 글자로 물화(物化)되어 새겨지면서 축적되었다. 인간의 사유 과정이 주체적 위치를 상실(22)하게 만들었을지라도, 문자는 인간을 소멸하지 않는 존재로 만들었다. 인간은 죽음과 함께 사라지지 않는다. 인류 유산은 문자를 통해 켜켜이 쌓여왔다.

 

이 책의 미덕은 갑골 문자의 아름다움을 이야기하는데 그치지 않고, 한자를 근현대의 문학·철학·미학과 연결하는데 있다. 사상가의 주장을 갑골문자 해석에 차용하는 방식이 놀랍고 재미있다. 꼬리 미()를 보고 마르케스의 백 년 동안의 고독과 자신의 아내이자 작가인 주텐신의 나는 법을 배우는 멍멍을 떠올리며 꼬리 가 아름답고 선명하게 다가오는 사적인 감수성을 풀어낸다. 과도한 주관, 헤밍웨이와 보르헤스까지 들어가면 꼬리 를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글자로 표현한다.

 

저자는 야만인의 신화 형성 과정을 연구한 레비스트로스를 차용한다. 레비스트로스의 수선공이야기를 가지고 언어의 변천사를 설명한다. 수선공의 수선 과정은 이미 형성된 문자를 새로운 요구에 맞게 고쳐 쓰는 것을 의미한다. 제한된 공구를 가지고 원래 있던 사물을 다시 쓸 수 있게 수선하는 과정, 처음의 것으로 되돌리는 것이 아니라, 필요에 맞게 고쳐내는 것, 제대로 갖추어 있지 않지만, 용도에 적합하게 만들어 내기 위해서는 내 손에 어떤 도구(글자)가 있는지의 한계 상황이 지배한다. 글자는 완제품의 형태가 될 수 없는, 어딘지 부족한 상태로 계속 만들어지고, 그렇게 쓰일 수밖에 없는 숙명에 처해 있다.

 

아인슈타인이 추구한 대리석 무늬 속의 세계는 부호 세 개로 구성된 투명하고 확고한 세계다. 이와 반하여 나무 무늬 속의 세계는 짐작하겠지만, 수선공이 머무는 세계로 우연을 통해서 끝없이 변주되는 세계다. 글자의 세계는 부서지고 못이 박히고, 박힌 못이 빠지고, 빠진 흔적에 나무 조각이 덧이어지는 과정이 반복된다. 매끄럽고 완벽한 빛의 세계가 아니라, 부서지고 고쳐 쓰는 불안한 어둠의 세계다.

 

보르헤스는 인간 세계에 완벽한 사전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했다. 현실 세계의 사물에 일일이 대응하는 언어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럴 가능성도 없다. 우리의 모든 감정과 우리가 끊임없이 새로 만들어내는 개념과 창조물,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져버리는 생각들을 재빨리 찾아서 신나게 표현할 수 있는 사전은 존재하지 않는다.(122) 나의 생각이 타인에 전달되는 과정에서 의미가 미끄러질 때마다 언어로 형용할 수 없는 갑갑함이 내면을 채운다. 결국 우리는 차선책으로 언어를 존재 표현의 수단으로 사용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모든 분야를 넘나들었던 한가로운 구경꾼, 진정한 문인, 발터 벤야민은 탕누어가 꿈꾸는 진정한 학자인 듯하다. 암울했던 삶과 비운의 죽음 속에 밀봉되어 있는 벤야민의 글은 반세기 이후에야 사람들의 주목을 받는다. 고대의 중국 글자를 대했을 때 벤야민이 어떻게 반응했을지에 대한 저자의 상상은 유쾌한 농담처럼 받아들여진다. 벤야민에 대한 저자의 연모는 나 또한 공감하는 내용이어서 여기에 직접 인용한다.

 

벤야민은 내가 개인적으로 가장 가슴 아파하는 사람, 가장 애석한 영혼이기도 하다. (그 다음으로 애석한 인물은 폐병으로 마흔넷의 나이에 세상을 떠난 러시아의 위대한 소설가 체호프이고 그 다음이 반 고흐다. 고흐는 자신을 완전히 불태이고 나서총으로 자진했다.) 그는 좌익 유태인이라는 신분 때문에 제2차 세계대전 동안 내내 게슈타포의 추적과 박해에 시달려야 했고, 생의 마지막에는 가난과 병이 한꺼번에 닥치면서 1940년 프랑스와 스페인의 국경에서 절망적인 자살을 선택하게 됐다. 마흔여덟의 나이, 당연히 그의 사상도 가장 성숙했을 시기였다.”(160~161)

 

 

저자 탕누어는 과거로의 회귀를 주장하고 있는가?

 

빠르게 쓰기 위한 목적의 간편화가 진행되면서 표음&표의 문자. 과연 표음 문자는 부호화에 투항한 것일까? “어떤 세속의 권력도 문자를 통제할 수 없다.”(286)는 그의 주장에 동의하지만, “질량이 가볍고 부호가 투명하며 운동 저항력도 적은 완벽한 언어 기록 도구”(50)가 되면서, 언어가 자주성을 상실했다고 보는 저자의 주장에 동의하기는 어렵다. 6천종의 서로 다른 말들이 매달 두 종씩 사라진다는 데이비드 크리스털(언어의 죽음)이 맞다 하더라도 언어 역시 생로병사의 과정을 거치며 사멸해가는 유기체라는 생각이 든다. 인간의 사유방식이 변화하듯, 언어 역시 인간과 함께 변화의 과정을 겪기 마련이다. 언어의 출발이 타인과의 의사소통, 과거·현재·미래를 연결하기 위한 기록에서 시작되었다면, 세계인으로 살아가는 21세기 인류에게 공통의 언어는 연대의 힘이기도 하다. 그것이 모국어의 사멸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탕누어의 말대로 보호해야 할 것은 문자가 아니라 우리 자신(331)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영화 <어바웃 타임, About time>을 떠올린다. 집안의 특수한 유전자로 인해 시간을 되돌리는 능력을 가진 주인공은 그의 아버지에게 되돌린 많은 시간 동안 무엇을 했는지 묻는다. 아버지는 명랑한 표정으로, 세익스피어와 같은 고전을 여러 번 다시 읽었다고 답한다. 그 아버지가 탕누어의 메타포처럼 느껴진다. 탕누어는 시간을 회귀하여 고전을 읽고 또 읽는 사람이지 않을까 싶다. 고대 문자와 현대를 접합하는 놀라운 힘을 가지고 있다. 읽고 또 읽어도 새로운 의미를 가져오는 고전만 보기에도 인간의 시간은 매우 짧다. 한번 밖에 주어지지 않은 삶, 저자 탕누어의 책과 삶의 태도는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을 어떤 일로 채워나가야 할지를 고민하게 한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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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은 어떻게 작동하는가 - 그리고 삶은 어떻게 소진되는가
류동민 지음 / 코난북스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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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항대립 속에 존재하는 21세기 서울,

 

서울은 어떻게 작동하는가 - 그리고 삶은 어떻게 소진되는가, 류동민, 2014. 12.

 


 

 이 도시를 굴러가게 하는 힘은 무엇일까?

    

 

면적 605.28, 인구 천만의 도시 서울에 대한 정치, 경제, 사회, 문화에 대한 분석은 끝이 없다. 서울에 대한 분석은 한국 사회를 작동하는 모든 기제에 대한 분석을 동반한다. 서울과 서울 아닌 곳, 둘로 나뉘지는 21세기 한국은 서울에 대한 분석만으로도 사회 전체를 바라볼 수 있다. 대부분의 거대 도시가 가지고 있는 보편성 속에서도 서울만의 특수성이 존재하기 때문에 고유명사 서울은 보통명사의 속성을 갖는다.

  

  

서울에 대한 인문·사회과학적 분석은 어제오늘의 이야기가 아니다. 근대 이후, 지식인 산책자들은 경성 곳곳에서 인문학적 성찰을 가져왔다. 작년 딱 이맘때 출판된 류신의 서울 아케이드 프로젝트(민음사, 2014. 1.)는 소설가 박태원에 의해 탄생한 구보와 벤야민의 산책자적 시선을 차용하여 2013년 서울을 산책한다. 객관적인 사실에 의존하기보다는 저자가 경험한 서울 속에서 여전히 차고 넘치는 자본주의 속성을 섬세하게 호출한다. 구보와 벤야민을 향한 헌정과도 같은 이 책은 다른 시공간 속에서 벤야민, 구보, 류신 세 사람이 함께 산책하고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이동 속도와 시선을 낮추면서 서울은 맨얼굴의 실체를 드러낸다. 도시 거주자에게 보이지 않는 것들이 도시 산책자의 눈에 게스탈트적으로 한꺼번에 속살을 드러낸다.(http://blog.aladin.co.kr/educaso/6918092) 서울의 밑 낯을 보는 일은 '산다는 것'에서 '존재하는 것'으로 탈주다.

 

 

넘쳐나는 서울에 대한 분석이 여전히 의미 있다는 것은 과잉 개발의 건조한 도시가 여전히 진화하는 생물과 같기 때문일 것이다. 어떻게 접근하는지에 따라서 우리가 얻어낼 수 있는 해법도 다양해질 것이다. 경제학 교수 류동민의 서울은 어떻게 작동하는가는 류신과 다른 시점에서 서울에 접근한다. 시간과 공간, 구조와 개인의 교차점에서, 보편과 특수의 총체로서 서울을 바라본다. 경제학자의 인문학적 기술은 사이사이 분석을 요구한다. 낭만적 키워드나 (‘그땐 그랬지식의 어법을 사용하는) 추억의 말랑말랑함은 아니란 이야기다. 경제학과 민족지학이 결혼해서 한집에 사는 느낌이다. 류동민 교수의 감수성과 문체는 그가 얼마나 문학에 천착해왔는지를 짐작하게 한다.

    

 

삶은 어떻게 소진되는가?”라는 부재는 구체적으로 저자의 관점을 드러낸다. 4개의 장을 구성하는 소제목은 좀 더 서울을 명확하게 한다. 배제와 물신, 남겨진 공간 & 사라진 공간, 등고선의 은유, 높이 날고 싶은 은유가 서울의 키워드다. 이와 관련하여 개인적인 경험 하나가 떠오른다. 매번 서울에서 열리는 학회를 이번에는 참신하게(??) 지방에서 진행하자고 하여 전주에서 열렸다. 학회 참석한 교수님과 연구자들은 거의 여행자의 복장과 태도였다. 청명한 공기에 대한 찬사, 한상 번듯하게 차려진 음식에 대한 칭찬, 느린 삶의 방식에 대한 부러움, 서울에 비해 상대적으로 싼 아파트값에 대한 감동이 한참 이어졌다. 그리고 결론은 그래도서울을 떠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 한국 사회에서 서울은 여전히 성공한 사람들의 베이스캠프다. 몇 배의 어려움이 있더라도 한번 벗어나면 재진입이 어려운 공간이다.

    

 

몇몇 공간에 대한 분석이 인상적이다. 스타벅스의 영업 방식이 얼마나 이율배반적인지에 대해서 곱씹어 생각하게 한다. 다른 나라에서 문제가 되지 않은 스타벅스 컵 사이즈에 대한 논란이 한국에서 시작된 것을 보면, 고급문화를 지향하는 한국인이기 때문에 스타벅스를 선호하는 것 같다는 스타벅스 관계자의 말은 틀리지 않았나 보다. 한국의 소비자들은 스타벅스의 사이즈가 tall, grande, venti라는 것에 문제 제기를 했다. 스타벅스에는 아메리카노 short 사이즈가 없다. 그런데 문제는 다른 카페 short 사이즈와 스타벅스 tall 사이즈가 같다는 것. 나는 왜 한번도 그것에 대해 질문하지 않았는지에 대해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냥 스타벅스 방식을 내 방식으로 자연스럽게 수용한 것이다. (이는 IKEA의 한국 상류에서 발생하는 문제를 봐도 알 수 있다. 한국인이 값싼 가구를 좋아할 것이라는 분석은 정확했지만, 인터넷 정보력은 세계적이라는 것을 간과해서 구매에 타격을 받고 있는 것을 보면 그냥 만만한 소비자는 아닌 모양이다.^^) 커피 한잔 주문하는데도 여섯 가지를 결정하도록 만듦으로써 정체성을 규정해주는 곳(39)”이 스타벅스다. 우리 동네 카페도 아메리카노를 주문하면 레드, 블루, 엘로우 중 선택하라고 한다. 그야말로 선택 과잉이다. 명동 신세계 백화점의 버버리를 입고 스타벅스에서 커피를 마시고 있는 반백의 노인들이라면 모를까, 연로하신 우리 부모님은 자녀들의 도움 없이 오늘날의 한국 카페에서는 편안한 마음으로 커피 한잔 마실 수 없다.

    

 

대립이항의 분리 속에 존재하는 서울, 한국은 서울 아니면 모두 지방이다. KTX는 모두 서울에서 출발하고, 서울로 향한다. 서울은 지방을 외부로 분절되어 있고, 강북과 강남이 내부적으로 나뉘어 있다. 그 안에도 무수한 대립 항이 존재한다. 문제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으나, 해결하려는 사람은 드물다.

    

 

당신이 사는 곳이 당신을 말해줍니다.”(61)

 

아파트가 여전히 부의 상징인 점은 한국 사회의 매우 특이한 점이다. 다른 선진국은 개발 초기 아파트가 부의 상징이었더라도, 어느 정도 안정기에 접어들면 교외 전원주택으로 상류층이 대거 이동해왔다. 한국은 산업사회를 넘어선지 오래되었으나, 여전히 부자들이 아파트를 선호한다. 모 아파트 광고에서 이민정이라는 배우를 처음 봤던 기억이 난다. 데려다 준 선배에게 자기가 사는 아파트를 가리키자, 선배의 얼굴에 미소가 번진다. 아파트의 브랜드는 그녀의 사회·경제적 지위뿐 아니라, 어느 정도의 교육을 받고 성장했는지, 취향이 무엇인지를 총체적으로 드러내준다. 그 이후에도 아파트 광고는 당신이 사는 곳이 당신을 보여주는 자격증이라고 홍보해 왔다. 서울을 벗어나면 주변 외곽일 거라는 기대를 깨고, 이제 서울은 일터, 제주를 삶터로 닦아가는 상류층이 늘고 있다. 제주도 땅값을 뒤흔드는 그들은 시공을 포갤 수 있는 경제력을 바탕으로 지방과 바다를 넘어 제주도를 제2의 서울로 만들고 있다.

    

 

알고 있는 것을 글로 재현하는 저자의 어려움이 컸던 만큼, 읽는 독자의 감동은 컸다. “중의적이고 불투명한 글”, 그래서 발생하는 미학적 가치는 읽는 사람을 행복하게 한다. 문맥 사이 호흡도 길어지고, 말랑말랑하는 문장 속에서 맑스 경제를 떠올려야 한다. 때때로 저자가 읽은 문학과 영화가 곳곳에 적절하게 안배되어 있다. 저자가 자신의 경험에서 서울을 연구의 대상으로 변주했듯, 서울에 대한 개별적 경험은 보편적 문제의식에서 총체적으로 만난다. 잠시 서울에 머물고, 오래오래 지방에 살고 있는 나에게 이 책은 서울을 현재로 호출한다. 누군가를 좋아해도 매번 서툰 우리는 때를 기다리는 설레임 속에서, 언젠가 사람이 떠나도 장소는 추억으로 남게 될 것이라는 명징한 확신을 한다. 서울은 그렇게 과거이자 현재로, 분석의 장소이자 느낌의 장소로 남게 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서울은 공간 실천을 행동을 불러오는 특수성의 공간임에 틀림없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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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의 나라의 행복한 젊은이들 - 어려운 시대에 안주하는 사토리 세대의 정체
후루이치 노리토시 지음, 이언숙 옮김, 오찬호 해제 / 민음사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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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관적인 세계, 비관적인 대안. 행복한 젊은이들

 

절망의 나라 행복한 젊은이들, 후루이치 노리토시 저, 이언숙 옮김, 오찬호 해제

    


2011. 3. 11. 오후를 잊을 수 없다. 금요일 저녁 식사 모임, 식당 TV로 일본 대지진 상황이 방송되고 있었다. 세상의 종말 같은 느낌이었지만, 우리나라도 심각한 피해를 입을 거라는 염려도 했지만, 인류는 이제 2011년 대지진 전후로 나뉠 거라고 생각했지만, 3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세계를 흔드는 가시적인 변화는 없는 듯하다.

 

 

20127. 일본 여행을 다녀왔다. 대지진 이후 사람들은 어떻게 살고 있을지 염려스러웠다. 눈에 보이는 변화는 없었다. 평온한 일상을 사는 사람들에게 처참한 대지진 우울 징후를 발견하지 못했다. 수잔 손텍이 내전 중인 유고슬라비아와 보스니아를 여행하면서 고도를 기다리며연극을 연출할 수 있었던 것이 바로 전쟁의 일상성이 아닐까 생각했다. 전쟁은 단시일에 끝나지 않는다. 수년간의 전쟁 속에서도 사람들은 일상을 살아야 한다. 대지진 이후에도 일본에서도 삶은 계속된다. 단 패러다임은 변한 듯하다. 미래를 준비하던 이들이 이제 현재만을 살게 되었다는 것. 소비가 증가했다.

 

 

90년대 초반까지도 함께 우리나라와 세계의 평화와 인권을 염려했던 친구들 중 많은 이들이 종교 속에서 구원 받았고, 명상과 수련을 통해서 삶의 평화를 얻었다. 그들의 얼굴엔 미소가 번진다. 정치를 삶에서 배제한 대부분의 지인들은 일단. 경제적으로 안정적이다. 내향적으로 끼리끼리 무리 짓기과정 속에서 외부와 차단된 채 자기 충족화의 삶을 살아간다. 우리 나이가 되면 인간은 두부류로 나뉜다. 생존을 목적으로 살거나 개인의 안위를 사는 사람이 존재한다. 그 경계선에서 흔들리는 나와 같은 회색분자들은 위, 아래에 존재하는 클래스를 보면서 흔들린다. 이렇게 살아도 되는 걸까?

 

 

젊은이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는 이즈음, 읽게 되는 절망의 나라의 행복한 젊은이들은 참으로 반가운 책이다. 어느 시대보다 최고의 풍요속에 살고 있는 저항하지 않는 젊은이들, 모두 함께 누리는 듯하지만, 과거보다 더 불평등한 시대를 살아가는 그들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고 싶었다. 도쿄대학교에서 사회학 박사과정에 있는 1985年生 후루이치 노리토시는 젊은이의 탄생과 종언에 대한 분석에서 시작하여 작은 공동체 안으로 모이는 젊은이들, 일본을 위해 일어서는 젊은이들, 종국에는 절망의 나라에 사는 행복한 젊은이를 차례로 분석한다. 젊은이의 젊은이 분석과 일본을 한국과 비교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세상 많은 일들이 그렇지만, 젊음 또한 상대적이다. 신인류. 젊은이의 개념이 시대별로 어떻게 변천했는지를 탐색한다. 얼마 전 뉴스 앵커의 스물여덟 어린 나이에라는 표현을 들었다. 언제부터인지 스물여덟을 어리다고 표현하는 것이 어색하지 않다. 도대체 알 수 없는 젊은이들, X 세대가 등장한 것도 이십 여 년이 지났다. 하지만 젊은이에 대한 개념이 바뀌었어도 그 전형에는 변함 없는 속성이 있다. ‘버릇없는 젊은이, 당연한 듯 보이는 세상을 향해 문제를 던지는 것은 시공을 초월한 모든 젊은이들의 공통분모이자 전유물이었다.

 

 

이 책의 가장 큰 미덕 실제적인 사례가 풍부한 민족지학적 연구라는 점이다. 저자의 젊음에 대한 상투적인 표현이 필요할 듯하다. 역시 젊다. 상황이 나쁘다하더라고, 다행스러운 것은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는 자신의 자세에서 희망을 찾는다. 쉽게 쓰였고, 매번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이 책의 에필로그 뒤에 붙어 있는 주석 453개는 저자가 얼마나 성실한 사회학자인지 알게 한다. 핵심 질문은 간단하다.

 

첫째, 절망의 나라에서 행복해야 하는가?

둘째, 더 많은 사람이 행복해진다면?

셋째, 적어도 우리가 낭만적일 수만은 없는 이유는?

 

해제를 쓰신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 괴물이 된 이십 대의 자화상의 저자) 오찬호씨와 같은 질문으로 이 글을 마무리하고 싶다. 저항이 사라진 젊음에서 문제의식을 갖게 하는 일본의 젊은이들이 있고, 개인의 행복을 향해 끼리끼리 집단으로 들어가 버린 일본 사회의 문제를 우리도 누릴(?) 수 있을까? 체념의 행복이 한국에서는 불가능할거라는 불안이 몰려온다. 국가 없는 국민에 대한 공포가 이 시대를 살아가는 한국인을 잠식하고 있는 현실 속에서 우리는 결국 생존을 위해 살아가다 쓰러지는 젊은이를 훨씬 더 많이 보게 될까봐 두렵다. 그들이 맘껏 저항할 수 있게 하기 위한 미래 역량은 무엇일까? 생물학적 어른으로 고민하고 또 고민한다.

 

 

책 끝머리에서 우리 의 목표가 무엇인지 스스로 질문한다. 삶의 모든 과정은 나를 알고, 세계를 이해하는데 유용하다. 결국 삶을 미학적으로 가꾸기 위해서는 존재론과 인식론이 필요하다. 세상을 이해하는 일은 혼자서 할 수 없는 일이다. 노암 촘스키의 말처럼 세상에 새로운 아이디어는 없다. 읽고 쓰고, 사람과 부대끼는 접속을 통해서 세계는 나에게 다가온다. 이 땅에서도 저자 후루이치 노리토시처럼 세계와 접속할 줄 아는 불행한젊은이를 기대해보련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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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종교 이야기 -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 믿음과 분쟁의 역사
홍익희 지음 / 행성B(행성비)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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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틀림’이 아닌 ‘다름’, 반목이 아닌 평화의 관계의 가능성 『세 종교 이야기』

 

홍익희 지음, 행성:B 잎새, 2014. 8.

 


 

 

 

날라리 천주교 신자인 나는, 오늘 오전, 마주보고 앉는 독실한 개신교 신자인 동료와 잠깐 종교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우리는 서로 해서는 안되는 이야기를 나눈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 옳고 그름을 떠나서 우리 둘은 절대 자신의 신념을 굽히지 않은 채, 팽팽한 평행선을 달렸다. 그녀의 질문은 내가 수십 년은 족히 들어 왔던 똑같은 질문이었다. 천주교는 유일신을 섬기지 않고, (마리아를 믿는 종교라는 표현까지 썼다.) 천주교의 성경은 기독교 성경과 다르다는 것이다. 중학교 세계사의 교과 지식을 곁들여 얘길 했더니, 종교는 지식으로 믿는 것이 아니라고 단정한다. 그녀는 성당 주변에 가본적도 없고, 성당의 성경을 본 적도 없다. 워낙 많은 사람들의 반응이 그래왔던지라, 맘이 상하지는 않았다. 마무리는 내가 최근에 읽는 책이 홍익희 선생님이 쓴 『세 종교 이야기』인데, 종교인이든, 아니든 많은 도움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조언했다. 내가 사주지 않는 한, 그녀가 이 책을 가능성은 일단 1% 미만인 걸로 정리하자.

 

 

종교에 관한 이야기는 매력이 없을 수밖에 없는 여러 이유들이 있다. 종교는 보편적인 세계를 바라보는 지식과 관점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에 같은 종교인이 아니라면, 논쟁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사실 타종교의 교리의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도 없다. 종교를 비교하는 것도 의미가 없지만, 종교 간에는 서로 다름이 존재할 뿐, 누가 맞고 틀린지를 가릴 대상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천 년 동안 얽혀있는 종교의 역사를 살펴본다면 조금 다른 태도로 타종교를 수용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이 책을 읽기 전까지 나는 세 종교의 역사에 대해서 나름 ‘상식’은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어렵지 않은 책이지만, 읽다보면 내 무지함을 구석구석에서 발견한다. 고전은 읽지 않았지만, 읽은 것 같은 책이라는 우스게 소리가 있듯, 이 책을 통해서 종교 또한 대체로 아는 것 같지만 실상은 정말 모르는 분야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면서 깨침이 생겼고, 세 종교에 새롭게 접근하는 계기가 되었다.

 

 

『세 종교 이야기』는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 간의 믿음과 분쟁의 역사를 다루고 있다. 9개의 장으로 구성된 이 책은 세 종교의 기원, 유대교의 탄생과 정착, 기독교의 탄생과 정착, 이슬람교의 탄생과 정착을 다루고 마지막으로 세종교의 공통점과 차이점, 반목과 갈등의 역사를 다루고 있다. 한 가지에서 시작하여 각각의 영역을 분석하고, 다시 하나로 모아 오는 구도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체계적으로 읽을 수 있는 강점이 있는 책이다. 아브라함의 자손에서 나온 이 세 종교는 모두 동일한 구약성경을 경전으로 삼는다. 저자의 말처럼 예루살렘은 기독교인만의 성지가 아니다. 한때 평화롭게 지내기도 있던 세 종교는 성전(聖戰)이라는 미명 아래, 오래 반목과 전쟁을 지속해오고 있다. 역사적 배경을 종합적으로 살펴보고 난 연후에야 종교 간의 분쟁을 이해할 수 있다. 이해의 지점은 화해가 열리는 시발점이기도 하다.

 

 

저자가 이 책을 쓴 이유에 대한 공명이 마음을 울린다. “역사를 보면 정치든 사상이든 관용성을 보이며 상대를 포용하면 융성했고 서로 반목하고 대립하면 어김없이 쇠퇴를 불러왔다. 종교도 마찬가지였다.”(5쪽) 종교뿐 아니라, 우리 삶의 타산지석이 될 만큼 뼈 있는 말씀이다. 세월 호 참사 이후 희망이 없는 한국을 방문하셨던 교황 프란체스코가 우리에게 보여준 모습은 종교를 초월한 서로 간의 사랑이었다. “신의 자비는 한계가 없으며 신앙이 없으면 양심에 따라 행동하면 된다.”(7쪽)는 그의 말씀은 가히 혁명적이다. 교황의 말씀은 천주교인에 한해서만 해당하지도 않았고, 천주교인만을 구원의 대상으로 삼지도 않았다. 종교를 초월하여 수용해야 하는 메시지를 함축하고 있다. 세 사람이 길을 가면 그 중 한명은 기독교인이다. 그런데도 아직 세상이 이 정도라면, 이것은 우리 기독교인의 탓이라고 (나를 세례해주신) 박중신 신부님이 말씀하셨다. 삼십년 전 들었던 이야기인데, 그 말씀은 슬프게도 여전히 유효하다.

 

 

나에게는 가끔 성당에 가서 미사를 보는 이○○ 목사님이 계신다. 나 또한 개신교 이모를 따라서 새벽 예배를 보러 가는 것에 불편함이 전혀 없다. 형식을 중시하는 성당 미사에 비해서 간소한 개신교 예배가 때론 더 좋기도 하다. 반대로 목사님은 경건한 성당 미시가 좋을 때가 있다고 말씀하신다. 칠순을 넘어섰지만 워낙 진보적인 청년의 심장을 간직하고 사시는 분인지라, 그분과는 어떤 종교 이야기를 나누어도 불편함이 없다.

 

 

몇 주 전 이 책과 더불어 역사에 대하여 새롭게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시민단체 특강에서 미시사학자 백승종 선생님의 ‘이순신’에 관한 역사 강의를 들었다. 그가 연구한 이순신은 이전에 내가 알던 이순신이 아니었다. “달빛만 고와도 잠을 이루지 못하는 섬세한 시인이 가슴에 살고 있는 (불멸의 이순신이 아니라) 불면의 이순신”이었다. 7년 동안 스물세번의 전쟁에서 모두 승전하였지만, 전쟁이 없는 시간이 훨씬 길었고, 대부분 노비출신인 병사를 먹여살려야하는 아버지 같은 자리에 이순신이 있었다. 탁월한 문장가, 선비적 감수성을 가진 그는 “경영의 귀재”이기도 했다. 수유연구실의 고미숙 선생님을 통해 들여다보았던 연암 박지원의 모습이 예전 내가 알던 인물과 달랐듯이, 이순신 역시 광화문 동상처럼 장엄한 군인의 모습이 아니었다. 역사를 제대로 이해한다는 것은 하나의 사물을 다차원적으로 줌인, 줌아웃하면서 바라보는 일일 것이다.

 

 

역사 교육이 왜 필요한지에 대한 우문(愚問)에 백승종 선생님께서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이유를 들었다. 역사는 우선 재미가 있고, 교훈이 있으며, 자신의 정체성을 알아가는데 꼭 거쳐야 하는 공부라는 것이다. 그 답변은 『세 종교 이야기』에도 그대로 해당한다. 이 책은 재미가 있고, 교훈이 있으며, 나의 종교관에 대해서 되짚어 볼 수 있는 소중한 책이었기에 일독을 권할만하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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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도둑 2015-01-02 21: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숲님, 잘 지내시죠?
여전하시네요...^^ 정말 보기 좋아요.
오랜만에 들어와서 찬찬히 리뷰를 읽었네요,,,`
지나간 시간들이 그립네요...
며칠 전에 알라딘 중고서점에서 13권의 책을 샀어요.
조금 설레더군요,...
아주 오랜만에 느껴보는 감정이었어요....
예전의 그 설레임을 다시 찾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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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의 아토포스
진은영 지음 / 그린비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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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가는 소나기에 자책하는 시인의 문학의 아토포스

 

진은영 지음, 그린비, 2014. 8.

 

시가 아름답기만 한 날들이다. 시는 아름다워야만 했다. 서향으로 빨리 사라지는 오후 햇빛 탓이고, 일찍 세상 밖으로 얼굴을 내미는 달빛 때문이다. 사념에 젖는 시간을 충분히 누릴 수 있는 만추가 다가오고 있다. 10월 가을, 볕은 더 없이 따뜻하고 숲 그늘은 머리를 맑게 할 만큼 서늘하다. 시인의 자작시평, 시의 배경이 된 에피소드를 읽는 소소한 일상이 가미된 에세이를 기대했던가? 이 책은 기대를 배반한다. 문학의 아토포스는 묵직했다. 10편의 소논문에는 시인 진은영이 바라본 지난 수년 동안의 한국의 현실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갈 수 없고, 말할 수 없는 존재를 전제한 현실을 전면으로 부정하고, “어디로든 가고, 무엇이든 되고, 무언가를 말함으로써 우리가 가고 존재하고 말할 수 있는 존재임을 계시”(6)한다.

 

 

지난 주 일요일, 토론대회 심사에 참여했다. 고등학생의 “9시 등교 찬반 토론은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상식을 넘어서지 못했다. 9시 등교가 등장하기 전후의 한국 사회 상황, 그것을 제기한 집단과 문제를 제기하는 집단이 내세우는 논거를 충분히 살리지 못한 채, 중언부언 답변하는 모습이 안타까웠다. 입론, 교차조사, 반박의 토론 절차도 무시한 채, 자기가 준비한 자료를 과시하려는 태도를 보이는 십대 아이들을 보면서, 우리가 같은 언어를 사용하면서도 제대로 된 의사전달에 어려움이 자주 발견되는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토론은 절대 상대를 굴복시키기 위한 수단이 될 수 없음을 우리는 경험으로 안다. 토론으로 상대를 승복하게 할 수 있다는 것은 과도한 욕심이다. 토론의 과정에서 내 주장의 논거를 좀 더 튼튼히 세우는 것이 토론에서 얻을 수 있는 가장 큰 성과일 것이다. 또한 상대의 이야기를 경청하는 태도를 기를 수 있다는 점 또한 간과할 수 없다. 사람은 말(또는 글)을 통해서 배우는 것이 아니다. 괴테의 말처럼 오직 사랑하는 사람을 통해서만 우리는 배울 수 있다. 그런 면에서 진은영의 글은 힘이 있다. 책상에서 펜으로 완성된 관념의 글이 아니고, 사랑을 품은 글이기 때문이다. 한 시인의 진지한 고민과 고뇌가 정치, 예술, 삶을 하나로 아우르게 만든다.

 

 

감성의 분할, 감성적 분배

     

이 책을 읽는 내내 고귀한시인, 진은영은 독자로 하여금 열패감을 느끼게 한다. 시인, 철학자, 실천가가 이루어내는 트라이앵글의 한 중심에 그녀가 있다. 문학과 정치를 어떻게 관계 지을 것인가에 대한 시인의 고민의 성과가 한권에 오롯이 담겼다. 참여시를 쓰는 것과 사회 참여 사이에서 시인이 취할 수 있는 행동은 무엇일까? 문학의 아토포스- 그녀가 발견한 보물 쪽지 - 자크 랑시에르의 감성의 분할을 어떻게 읽어나갈 것인지에 대한 출발점이 되었다. 정치적인 것은 감각적인 것을 분배하는 활동, 감성적 혁명을 가져오는 활동이라는 랑시에르의 정의에 따르면, 낡은 분배를 바꾸려고 노력하는 예술은 정치가 된다. 시인에게 정치는 감성적 혁명’(311)이다. 이러한 정의와 분석에서 예술과 정치는 이분법으로 나눠지지 않는다.

 

 

공간의 트랜스포머

 

어떤 방식으로든 정치는 자신의 미학이 있고 미학은 자신의 정치가 있다.”(29)

 

삶을 미학적으로 가꾸는 것에 대한 고민은 그리스 이후 오래된 철학적 고민이다. 모든 사람의 삶의 목적이 자신과 인생을 미학적으로 가꾸는 일이라고 한다면, 감수성 남다른 시인의 삶은 어떠하겠는가? 시인은 서정시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시대에 서정시를 쓸 줄 알아야 한다. “시인은 지나가는 소나기를 바라보며 자책한다.”(32) 진은영은 시를 쓰는 지게꾼의 전범인 박노해, 백무산, 김수영과 다른 방식의 혁명의 방식을 발견한다. 이 책의 제목이 언급하듯 문학의 아토포스(비장소성)은 문학이 특정한 공간에 해당하지 않음을 그대로 보여준다.

 

 

문학적 기투는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아토포스라고 불렀던 것을 닮아 있다. 아토포스(atopos)는 장소를 의미하는 그리스어 토포스에서 유래한 단어이다. 여기에 ‘a'는 부정과 결여의 접두사로서, 아토포스는 비장소성으로 번역될 수 있다. 이 단어는 어떤 장소에도 고정될 수 없어서 그 정체를 알 수 없다는 의미로 소크라테스의 대화자들이 그에게 붙여준 것이라고 한다.

 

 

문학은 문학이 이루어지는 특정한 공간이 따로 없다고 했을 때, 시인은 거리에서, 토론장에서, 시위에 참여하여 시를 쓴다. 공간이 변하면서 시는 온전히 시인 혼자서 쓰는 작업이 아닐 수 있다. 함께 쓰고, 단어를 선물하여 쓰고, 지인의 시로 트랜스하면서 변형할 수 있다. 주어진 공간의 경계에 틈을 만들고, 허무는 과정에서 미학은 예술의 영역을 벗어나 정치 그 자신이 될 수 있다. 때문에 문학은 시간에 고정되지도 않는다. 비공간성은 비시간성과 연결된다. 공간가 시간이 허물어지면서 일과 놀이의 구분이 사라진다면 사회적 지위와 역할의 경계 또한 서서히 사라질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사회적인 연대를 통해서만 이루어낼 수 있다.

 

 

오래 전, 대학 1학년, ○○ 전자 파업 노동자들의 투쟁에 참여했었다. 오랜 시간 체납된 월급으로 고생하고 있을 내 또래 여공들을 응원하는 시간은 쁘띠적 성향을 가진 나에겐 여러 가지로 힘든 시간이었다. 목숨을 걸고 싸울 것을 기대했지만, 여공들은 멋진(??) 대학생 오빠들과 유사 연애에 빠져 있었다. 당장 먹을 라면이 없다던 그녀들은 항상 꽃단장에 여념이 없었다. 그녀들의 모습이 천박하다고 느꼈다. 아주 오래전 이 기억이 이 책을 읽는 동안 내내 떠올랐다. 투쟁에서는 투쟁만 해야 아름다운가에 대한 성찰이 일었다. 투쟁의 장소에서 연애도 하고, 공부도 하고, 청춘을 가꾸는 일이 부끄러운 일이라고 생각한 나의 왜곡된 결벽증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예술은 천상의 것인가? 지상에 울려 퍼지는 노래인가? 진은영 시인을 통해서 다시 한번 가능성이라는 아름다운 말을 최선을 다해서 음미하는 일(321)을 경험한다. 손 안에 있음에서 눈 앞에 있음으로, 도구적 존재에서 현전하는 존재로 관계 맺는 것은 관념에서만 가능한 추상적인 일은 아니다.

 

 

다시한번 건드려지는 사족 같은 질문 하나.

 

가난은 왜 과거가 될 때 아름다운가? 가난은 왜 선택이 될 때 아름다운가? 가난하지 않아도 되는 시인의 가난은 아름답다. 가난하고 가벼운 시인의 글을 펼쳐 보니, 내 삶은 더욱 더 비곤해지고, 무거워진다. 할 수 있고, 가질 수 있으나 선택하지 않는 고고함을 원하는 나의 허영이다. 가난할 수밖에 없어 가난한 내 영혼을 꼭 안아주고 싶은 열패감이다.

 

그렇게 냉소하고 돌아설 예측이나 한 것처럼 신형철의 발문은 다시 발등을 꾹꾹 찌르는 압정이 된다. 그의 글은 핀으로 내 발등을 꾹꾹 누르며 원점으로 선회하게 한다. 세상을 다 삼켜버린 것 같은 검은 바다에서 남파선에 깜박깜박 신호를 보내는 그들의 등대를 발견하기 때문이다. 다시한번 나에게 묻는다. (반복되는 가방끈 긴 사람들의) 랑시에르 참조였다고 생각하는지, 나의 무의식에 묻고 또 묻는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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