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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여지도 - 두 발과 땀으로 써내려간 21세기 대한민국 노동의 풍경
박점규 지음 / 알마 / 2015년 4월
평점 :
품절
기록되어야 할 노동의 지도, 노동자를 위한 책
『노동여지도』, 박점규 지음, 알마, 2015. 5.
<내일을 위한 시간>(2014), <또 하나의 약속>(2014)
한반도 노동의 풍경을 써내려간 노동운동가 박점규의 『노동여지도』를 읽으며 계속해서 장 피에르 다르덴, 뤽 다르덴 감독의 <내일을 위한 시간>을 떠올렸다. 실직 상태인 산드라(마리옹 꼬띠아르)는 하루 종일 동료들을 찾아다닌다. 동료들이 각자 받아야 할 보너스 대신 산드라의 복직에 투표해줄 것을 설득하기 위해서다. 동료들은 보너스를 포기할 수 없는 각박한 상황에 놓여 있다. 상황을 모르는 바 아니기에 산드라의 마음은 복잡하기만 하다. 동료의 복직을 원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동료 가족에게 산드라는 불청객이 되어 있다. 모든 것은 상황의 문제다. 선택은 동일한 조건일 때 가능할 것인지도 모른다. 여기에는 그들이 자유의지와 보편 선을 지켜낼 수 없도록 하는 힘이 외부에 존재한다. 동료들의 도덕성 너머에서 개인의 선택을 강제하는 힘, 자본주의 시스템이다.
“내일 투표할 때, 보너스 대신 나의 복직에 투표해줄 수 있니?”
어떤 선택에 대해서도 개인에게 책임을 물을 수 없는 답답함이 길지 않은 러닝 타임 95분 동안 계속된다. 실직 노동자의 삶을 이해하는데 95분은 부족하지 않다. 동료 한 사람 한 사람을 만날 때마다 반복되는 이 동일한 대사는 조금씩 비틀어지며 긴장을 만든다. 머리는 이해하지만, 심정은 바닥으로 내려앉으며 분노로 솟구친다. 그럼에도 희망이 없는 것은 아니다. 자기 몫을 포기하는 벗들이 던져주는 메시지. 제목처럼 현재는 ‘내일을 위한 시간’이 될 것이므로.
같은 해에 개봉한 또 한편의 한국 영화, <또 하나의 약속>은 삼성공화국에서 이십대 꽃다운 삶을 마감한 노동자의 삶에 대한 우리 각자의 책임을 묻는다. 거대한 골리앗 삼성 “수원 1~3 산업단지 466개 업체에서 8,030명이 일하고 있지만, 노동조합이 있는 곳은 거의 없다(15쪽).” 얼마 전 택시를 탔더니, 택시 기사님이 아들 자랑을 하신다. 예의 상 응대의 질문으로 어느 회사 다니냐고 물었더니, “대한민국에서 최고 좋은 회사 다녀요.” 하신다. 삼성이다. 대한민국 최고 좋은 회사라는 삼성에 노조는 없고, 직업병으로 죽어도 사람들은 있다. “딸을 읽은 아빠와 아빠를 잃은 딸”들 있다.
삼성반도체 기흥공장 노동자로 일하던 황유미씨가 백혈병으로 사망했다. 스무 살 어린 딸을 가슴에 묻어야 했던 택시 기사 아버지 황상기씨는 삼성의 회유와 압력에 굴하지 않고, 진실의 문을 여는 힘겨운 싸움을 홀로 시작했다. 숨진 딸을 태우고 태백산맥을 넘었던 아버지는 딸과의 약속을 7년 만에 지켜낸다. 아버지의 사투는 꽃다운 나이에 세상을 떠난 삼성반도체 노동자의 죽음을 헛되지 않게 만들었다. 이제 ‘또 하나의 약속’은 동료들과 시민이 함께 지켜내야 한다.
“쌍용차 봐라, 회사 망한다.”(68쪽)
2009년 쌍용차 노동자와 가족들이 기나긴 싸움에서 세상을 등졌다. 쌍용차 실직자 남편은 투쟁 중이었고, 고등학교에 다니고 있는 아들과 딸을 등교 시킨 후 아내는 베란다에서 그대로 뛰어 내린다. 개인의 선택이라고 말할 수 없는 이러한 죽음이 계속 이어졌으나, 일면 뉴스로 보도되지 못했다. 사내하청노동자가 산에서 목을 매 자살한 이후 24명의 동료와 가족이 목숨을 잃었다. 쌍용차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높아지면서 멈췄던 숫자는 2014년 4월 23일 스물다섯 번째 죽음으로 이어졌다. ‘쌍용호’ 선장은 구명조끼도 없는 하청노동자들을 가장 먼저 배에서 내몰았고, 배가 위험하다는 가짜 방송을 하며 정규직들에게 배에서 내리라고 했다. 노동조합은 “함께 살자”라며 싸웠다(73~74쪽). 투쟁이 길어질수록, 길어진 싸움은 희망을 절망으로 만들었을 것이다. 정부는 “나쁜 일자리를 늘리는 데(72쪽) 우리는 세금을 사용했다. 2009년 여름, 77일 전쟁의 상흔은 깊은 트라우마를 남겼다.
우리는 희망버스에서 희망을 발견한다.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부산지역 본부 지도위원, 김진숙씨는 2011년 한진중공업 35m 크레인에서 309일 고공농성을 벌이며 사투했다. 바싹 마른 몸, 강단 있는 눈빛으로 신념을 이야기하는 그녀의 모습이 아직도 선연하다. 말 그대로 목숨을 건 투쟁이었으나, 그녀는 단지 세상과 사람에게서 희망을 발견하는 따뜻한 사람이다. 다시 돌아올 수 없을지도 모르는 집을 정리하고 떠날 때, 어떤 심정이었을지 상상하는 일은 쉽지 않다. 그녀의 선택은 내일을 위한 시간이 되었고, 희망은 함께 만들어가는 것임을. 남의 문제를 나의 문제로 끌어안을 때 가능한 것임을 스스로 증명한 것이다.
이 책의 저자인 박점규 노동운동가는 수원, 울산, 인천에서 시작해서 28개 도시들을 발로 뛰며 노동현장을 온몸으로 경험한 기록했다. ‘노동여지도’라는 제목답게 자신이 살고 있는 지역을 발견할 수 있는 책이다. 전국의 노동 현장을 기록하는 방식도 마음에 든다. 지역의 노동 역사를 두 페이지에 걸쳐 기록하여 객관성을 유지한 다음, 자신이 발로 뛰며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와 현실을 풀어나간다. 객관과 주관이 적절하게 조화를 이룬다. 단 연재된 글 모음의 한계는 있다. 책을 읽다보니, 신영복 선생님의 말씀이 떠오른다.
“독서 삼독입니다. 텍스트를 읽고 필자를 읽고 최종적으로 독자 자신을 읽어야 합니다.”
한국 노동 역사와 현실을 텍스트로 읽고, 필자인 박남규를 통해 비정규직 노동자의 숨결을 읽는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정규직인 내가 가지고 있는 (무의식적) 인종주의를 읽는다. (정말 무의식적인 순간에) 비정규직 직원을 비정규직으로 대한다. 무기계약이 그들의 ‘특권’이 되었다는 듯 의식하며, 사소한 문제에도 그들의 인성을 탓한다. 결정적인 순간에 정규직은 정규직 편이 된다. 비정규직은 조직 내에서 권력의 소수자일 뿐 아니라, 양적으로도 적다. 의도적으로 의식하지 않는 한, 비정규직은 유령처럼 존재한다. 잠시 긴장을 늦추는 순간 노동 현실은 타인의 문제로 멀어진다. 자기 문제에 몰입하는 반복적인 삶이 계속되면 개인은 파편화되고, 불행은 개인의 책임으로 남게 된다. 연대는 와해된다.
썬 전자 파업 노동자는 안녕 할까?
언젠가 블로그에도 올린 적이 있다. 대학 1학년 봄, 운동권 선배들을 따라서 파업 현장에 동참했다. 학교가 끝나면 팔복동 썬 전자 파업 노동자들과 함께 지냈던 스무 살 봄은 회색으로 가득했다. 매연으로 가득 찬 을씨년스러운 공단에는 손톱만큼의 희망도 보이지 않았다. 머리로는 그들과 함께했지만, 가슴으로 그들을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 두고두고 죄스러웠다. 지나고 보니 (교육 받았던 대로) 자본가의 시선으로 그들을 바라보고 평가했다. 그들 불행이 적어도 그들 책임에서 귀결되었다는 생각에서 한끝도 비켜서지 못했다. 생각은 어떻게든 들키게 마련이다. 선배들도, 동기들도 내가 가지고 있는 쁘띠적 성향을 이미 알고 있었다. 파업 중에도 나는 수업을, 학점을, 사사로운 이해관계를 놓치기 싫었다. 선배들과 멀어지면서, 나에게 팔복동 썬 전자 노동자의 이야기는 언급해서 안 되는 금기가 되었다. 극히 짧은 시간을 그들과 함께 했지만, 자책의 시간은 길었다. 누군가를 이해하는 것은 머리가 아니라는 것을 뼈아프게 경험했던 시간이었다.
소액주주자의 권리보호가 정의로운 경제를 실현할 수 있을까?
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1195316909
『노동여지도』를 읽는 동안 장하성 교수의 『한국 자본주의』를 함께 읽고 있었다. 소액 주주의 권리를 통해서 정의로운 경제를 실현할 수 있다는 주장에 쉽게 동의할 수 없어 답답한 지점에서 『노동여지도』는 정의로운 경제 실현의 주체가 누구인지를 확실하게 해준다. ‘기업하기 좋은 나라 한국’에서 소액 주주자의 권리가 실현된다고 해도 그것은 중산층의 이야기다. 노동 문제는 주주권리 보호로 해결되는 것이 아니고, 생산의 주체가 배제된 정의로운 경제는 존재하지 않는다. 주주 배당금 얘기 속에 빠져 있는 한국의 노동현실이 답답하기만 하다. 망치가 주어진 손이 세상을 만든다. 노동에서 인간이 소외되지 않는 한국의 노동여지도는 언제쯤 그려질 수 있을까?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