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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여지도 - 두 발과 땀으로 써내려간 21세기 대한민국 노동의 풍경
박점규 지음 / 알마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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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되어야 할 노동의 지도, 노동자를 위한 책

노동여지도, 박점규 지음, 알마, 2015. 5.

 

<내일을 위한 시간>(2014), <또 하나의 약속>(2014)

 

한반도 노동의 풍경을 써내려간 노동운동가 박점규의 노동여지도를 읽으며 계속해서 장 피에르 다르덴, 뤽 다르덴 감독의 <내일을 위한 시간>을 떠올렸다. 실직 상태인 산드라(마리옹 꼬띠아르)는 하루 종일 동료들을 찾아다닌다. 동료들이 각자 받아야 할 보너스 대신 산드라의 복직에 투표해줄 것을 설득하기 위해서다. 동료들은 보너스를 포기할 수 없는 각박한 상황에 놓여 있다. 상황을 모르는 바 아니기에 산드라의 마음은 복잡하기만 하다. 동료의 복직을 원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동료 가족에게 산드라는 불청객이 되어 있다. 모든 것은 상황의 문제다. 선택은 동일한 조건일 때 가능할 것인지도 모른다. 여기에는 그들이 자유의지와 보편 선을 지켜낼 수 없도록 하는 힘이 외부에 존재한다. 동료들의 도덕성 너머에서 개인의 선택을 강제하는 힘, 자본주의 시스템이다.

 

          

               

                                                      

 

내일 투표할 때, 보너스 대신 나의 복직에 투표해줄 수 있니?”

 

어떤 선택에 대해서도 개인에게 책임을 물을 수 없는 답답함이 길지 않은 러닝 타임 95분 동안 계속된다. 실직 노동자의 삶을 이해하는데 95분은 부족하지 않다. 동료 한 사람 한 사람을 만날 때마다 반복되는 이 동일한 대사는 조금씩 비틀어지며 긴장을 만든다. 머리는 이해하지만, 심정은 바닥으로 내려앉으며 분노로 솟구친다. 그럼에도 희망이 없는 것은 아니다. 자기 몫을 포기하는 벗들이 던져주는 메시지. 제목처럼 현재는 내일을 위한 시간이 될 것이므로.

 

같은 해에 개봉한 또 한편의 한국 영화, <또 하나의 약속>은 삼성공화국에서 이십대 꽃다운 삶을 마감한 노동자의 삶에 대한 우리 각자의 책임을 묻는다. 거대한 골리앗 삼성 수원 1~3 산업단지 466개 업체에서 8,030명이 일하고 있지만, 노동조합이 있는 곳은 거의 없다(15).” 얼마 전 택시를 탔더니, 택시 기사님이 아들 자랑을 하신다. 예의 상 응대의 질문으로 어느 회사 다니냐고 물었더니, “대한민국에서 최고 좋은 회사 다녀요.” 하신다. 삼성이다. 대한민국 최고 좋은 회사라는 삼성에 노조는 없고, 직업병으로 죽어도 사람들은 있다. “딸을 읽은 아빠와 아빠를 잃은 딸들 있다.

 

삼성반도체 기흥공장 노동자로 일하던 황유미씨가 백혈병으로 사망했다. 스무 살 어린 딸을 가슴에 묻어야 했던 택시 기사 아버지 황상기씨는 삼성의 회유와 압력에 굴하지 않고, 진실의 문을 여는 힘겨운 싸움을 홀로 시작했다. 숨진 딸을 태우고 태백산맥을 넘었던 아버지는 딸과의 약속을 7년 만에 지켜낸다. 아버지의 사투는 꽃다운 나이에 세상을 떠난 삼성반도체 노동자의 죽음을 헛되지 않게 만들었다. 이제 또 하나의 약속은 동료들과 시민이 함께 지켜내야 한다.

 

쌍용차 봐라, 회사 망한다.”(68)

 

2009년 쌍용차 노동자와 가족들이 기나긴 싸움에서 세상을 등졌다. 쌍용차 실직자 남편은 투쟁 중이었고, 고등학교에 다니고 있는 아들과 딸을 등교 시킨 후 아내는 베란다에서 그대로 뛰어 내린다. 개인의 선택이라고 말할 수 없는 이러한 죽음이 계속 이어졌으나, 일면 뉴스로 보도되지 못했다. 사내하청노동자가 산에서 목을 매 자살한 이후 24명의 동료와 가족이 목숨을 잃었다. 쌍용차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높아지면서 멈췄던 숫자는 2014423일 스물다섯 번째 죽음으로 이어졌다. ‘쌍용호선장은 구명조끼도 없는 하청노동자들을 가장 먼저 배에서 내몰았고, 배가 위험하다는 가짜 방송을 하며 정규직들에게 배에서 내리라고 했다. 노동조합은 함께 살자라며 싸웠다(73~74). 투쟁이 길어질수록, 길어진 싸움은 희망을 절망으로 만들었을 것이다. 정부는 나쁜 일자리를 늘리는 데(72) 우리는 세금을 사용했다. 2009년 여름, 77일 전쟁의 상흔은 깊은 트라우마를 남겼다.

 

우리는 희망버스에서 희망을 발견한다.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부산지역 본부 지도위원, 김진숙씨는 2011년 한진중공업 35m 크레인에서 309일 고공농성을 벌이며 사투했다. 바싹 마른 몸, 강단 있는 눈빛으로 신념을 이야기하는 그녀의 모습이 아직도 선연하다. 말 그대로 목숨을 건 투쟁이었으나, 그녀는 단지 세상과 사람에게서 희망을 발견하는 따뜻한 사람이다. 다시 돌아올 수 없을지도 모르는 집을 정리하고 떠날 때, 어떤 심정이었을지 상상하는 일은 쉽지 않다. 그녀의 선택은 내일을 위한 시간이 되었고, 희망은 함께 만들어가는 것임을. 남의 문제를 나의 문제로 끌어안을 때 가능한 것임을 스스로 증명한 것이다.

 

이 책의 저자인 박점규 노동운동가는 수원, 울산, 인천에서 시작해서 28개 도시들을 발로 뛰며 노동현장을 온몸으로 경험한 기록했다. ‘노동여지도라는 제목답게 자신이 살고 있는 지역을 발견할 수 있는 책이다. 전국의 노동 현장을 기록하는 방식도 마음에 든다. 지역의 노동 역사를 두 페이지에 걸쳐 기록하여 객관성을 유지한 다음, 자신이 발로 뛰며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와 현실을 풀어나간다. 객관과 주관이 적절하게 조화를 이룬다. 단 연재된 글 모음의 한계는 있다. 책을 읽다보니, 신영복 선생님의 말씀이 떠오른다.

    

독서 삼독입니다. 텍스트를 읽고 필자를 읽고 최종적으로 독자 자신을 읽어야 합니다.”

 

한국 노동 역사와 현실을 텍스트로 읽고, 필자인 박남규를 통해 비정규직 노동자의 숨결을 읽는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정규직인 내가 가지고 있는 (무의식적) 인종주의를 읽는다. (정말 무의식적인 순간에) 비정규직 직원을 비정규직으로 대한다. 무기계약이 그들의 특권이 되었다는 듯 의식하며, 사소한 문제에도 그들의 인성을 탓한다. 결정적인 순간에 정규직은 정규직 편이 된다. 비정규직은 조직 내에서 권력의 소수자일 뿐 아니라, 양적으로도 적다. 의도적으로 의식하지 않는 한, 비정규직은 유령처럼 존재한다. 잠시 긴장을 늦추는 순간 노동 현실은 타인의 문제로 멀어진다. 자기 문제에 몰입하는 반복적인 삶이 계속되면 개인은 파편화되고, 불행은 개인의 책임으로 남게 된다. 연대는 와해된다.

 

썬 전자 파업 노동자는 안녕 할까?

 

언젠가 블로그에도 올린 적이 있다. 대학 1학년 봄, 운동권 선배들을 따라서 파업 현장에 동참했다. 학교가 끝나면 팔복동 썬 전자 파업 노동자들과 함께 지냈던 스무 살 봄은 회색으로 가득했다. 매연으로 가득 찬 을씨년스러운 공단에는 손톱만큼의 희망도 보이지 않았다. 머리로는 그들과 함께했지만, 가슴으로 그들을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 두고두고 죄스러웠다. 지나고 보니 (교육 받았던 대로) 자본가의 시선으로 그들을 바라보고 평가했다. 그들 불행이 적어도 그들 책임에서 귀결되었다는 생각에서 한끝도 비켜서지 못했다. 생각은 어떻게든 들키게 마련이다. 선배들도, 동기들도 내가 가지고 있는 쁘띠적 성향을 이미 알고 있었다. 파업 중에도 나는 수업을, 학점을, 사사로운 이해관계를 놓치기 싫었다. 선배들과 멀어지면서, 나에게 팔복동 썬 전자 노동자의 이야기는 언급해서 안 되는 금기가 되었다. 극히 짧은 시간을 그들과 함께 했지만, 자책의 시간은 길었다. 누군가를 이해하는 것은 머리가 아니라는 것을 뼈아프게 경험했던 시간이었다.

 

소액주주자의 권리보호가 정의로운 경제를 실현할 수 있을까?

 

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1195316909

 

노동여지도를 읽는 동안 장하성 교수의 한국 자본주의를 함께 읽고 있었다. 소액 주주의 권리를 통해서 정의로운 경제를 실현할 수 있다는 주장에 쉽게 동의할 수 없어 답답한 지점에서 노동여지도는 정의로운 경제 실현의 주체가 누구인지를 확실하게 해준다. ‘기업하기 좋은 나라 한국에서 소액 주주자의 권리가 실현된다고 해도 그것은 중산층의 이야기다. 노동 문제는 주주권리 보호로 해결되는 것이 아니고, 생산의 주체가 배제된 정의로운 경제는 존재하지 않는다. 주주 배당금 얘기 속에 빠져 있는 한국의 노동현실이 답답하기만 하다. 망치가 주어진 손이 세상을 만든다. 노동에서 인간이 소외되지 않는 한국의 노동여지도는 언제쯤 그려질 수 있을까?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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혐오와 수치심 - 인간다움을 파괴하는 감정들
마사 너스바움 지음, 조계원 옮김 / 민음사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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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사고에 담긴 감정 - 평등한 인간성에 대한 공적 신화

혐오와 수치심 인간다움을 파괴하는 감정들,

마사 너스바움 저, 조계원 옮김, 믿음사, 2015.

 

이성의 힘을 믿는 자, 당신은 근대적 인간이다.

 

인간의 사고(思考)에는 감정이 담겨있다. 과거 상처 준 사람을 닮았다는 이유만으로 누군가를 회피했던 적이 있다. 좋아했던 사람을 닮았다는 이유만으로 호감을 불러일으킨 사람도 있다. 똑같은 행동을 해도 호의를 가지고 바라보면, 달리 보인다. 감정을 합리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성이 동원된다. 나름대로 근거를 만들어 감정에 치우친 것이 아니라는 점을 확실히 한다. 이러한 과정은 무의식적 선택으로 이루어진다. 사태를 의식적으로 바라보지 않고, 감정에 호소하는 경우, 누군가에게 상황은 불공정해질 수밖에 없다. 나를 현재 분노하게 하는 대상은 과거의 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대중의 마음을 움직여 수치심과 혐오를 불러일으키면 죄 값은 얼마든지 커질 수 있다. 집시, 유태인, 장애인에게 느끼는 감정이 그들을 아우슈비츠로 내몰았다. 이때 침묵은 암묵적 합의다. 그들은 혐오의 대상, 공공의 적이었다. 루소와 밀은 모두 공정한 제도가 안정되려면 시민의 심리상태가 뒷받침되어야 한다고 보았다(40). 무사무욕적인 판단으로 사태를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은 누구도 없다. 3자의 시선으로 보편적인 가치를 기준으로 판단한다는 것은 허구에 지나지 않는다. 대부분의 사회는 인간을 서열화해서 특정 계층을 오염되어 있고 혐오스러운 집단으로 단정(159)한다. 특정 집단(계층)은 다른 집단과 구별되는 혐오의 대상이다. 혐오는 주체와 대상을 구분 짓는 기준이 된다.

 

마치 자신은 죄인을 처벌할 기준을 말할 수 있을 만큼 도덕적인 것처럼 스스로를 기만한다. 법이 마치 사회 이전부터 존재했던 것으로, 인류 보편의 가치를 담고 있는 것처럼 착각한다.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실정법은 시대의 패러다임을 반영한다. 법은 취약한 집단의 사람을 낙인찍는 일에 적극적으로 관여한다. 정상성으로 포장된 사람들의 수치심을 불러일으킴으로써 그들의 인권은 사라진다. 이십대 여성을 잔인한 살해한 오원춘, 의붓딸을 성추행하고 살해한 남자는 피의자 신분에서 모든 매체에 얼굴이 공개되었다. 그들은 피의자임과 동시에 증오의 대상이 되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법적 판단에 감정이 실리고 양형 선고 과정에 영향을 미친다.

 

법 윤리학자인 저자 미사 너스바움(Martha C. Nussbaum)은 심리, 철학, 역사를 가리지 않고 전 방위적으로 혐오와 수치심을 탐색한다. 정치적 자유주의 관점에서 도덕 수준의 타당한 불일치를 인정하는 것이 훨씬 평등하다고 주장한다. 롤즈의 정의론이 전제하고 있는 이성적인 사람 사이에서 불일치는 존재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현대 사회에서 법은 양형에 혐오와 수치심을 활용한다. 낙인과 구별 짓기가 팽배한 사회에서 혐오와 수치심이 법적 잣대에 영향을 미친다면 이것은 감정이 아니라 특정 집단을 배척하는 사회적 무기가 된다.

 

서문에 저자가 책을 쓴 의도가 잘 나와 있다.

 

내가 원하는 사회가 완전히 성취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지 않는다. 그것은 자신이 인간성을 인정하고, 인간성을 감추거나 회피하지 않는 사회다. 또한 자신이 타인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취약한 존재임을 인정하고, 전능함과 완전함을 추구하는 것이 공적, 사적 측면에서 인간의 많은 불행을 초래해 왔다는 점을 인식하고 이를 과도하게 추구하지 않는 시민들로 이루어진 사회다(42).”

 

너의 힘으로 날아올라 봐. 그리고 약점을 감추는 법을 배워.(317)“

 

합리적 주장이라고 믿는 밑바탕에 혐오와 수치심이 깔린다. “우리가 올바르다고 여기는 것을 위반했음을 논증 없이 바로 직관적으로 느꼈기 때문이다. ‘정상으로 수용되는 행동을 벗어났을 때 눈살을 찌푸리게 된다. 이성으로 강제하지 않는 한, 불결한 상황을 보면 자연스럽게 부정적인 감정이 일어난다. 빈곤, 장애인, 성적 소수자와 같은 취약한 계층에 있는 이들과 마주칠 때, ‘정상인이라는 지배적 위치에서 존재를 들어 낸 그들에게 불쾌함을 느낀다. 암묵적으로 그들이 눈에 띄지 않게 존재를 숨기기를 원한다. 의식적으로는 인권이 선택적이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심정적으로는 수치심을 떠올리게 하는 대상과 마주치고 싶지 않은 숨길 수 없는 감정이 있다.

 

너스바움은 롤즈의 정치적 자유주의에 입각하여 감정이 어떻게 사회적 소수자의 인권을 침해하고 있는지를 분석한다. 다양한 역사적 사실과 판례를 바탕으로 사회적 소수자가 법 적용 감정에서 감정을 활용한 이중처벌을 받고 있음을 증명한다. 다수의 가치가 소수의 가치보다 정당하다고 말하는 근거는 어디에 있는가? 너스바움의 입장에서 사회적 동질성을 추구하기 위해서 다양성과 자유를 희생해야 한다는 것은 다수의 폭력이다. 수치심과 혐오가 법적 규제의 근거가 된다면 상호 존중을 헤치게 된다. 개개인이 동등하게 존중받는 사회에서 혐오와 수치심이 법적 잣대로서 부정적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크다(603). 두 감정으로 낙인찍지 않고 인간의 존엄을 보호하는 품격 있는 사회로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1. 범죄 혐의자의 개인적 권리에 대한 윤리적 딜레마

 

혐오와 수치심은 사유애에서 나타나는 비동시성의 동시성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철학적 측면에서 누군가는 앞서 가고, 누군가는 뒤 따르고, 누군가는 후퇴한다. 완전한 인간성은 신화에 불과하다는 마사 너스바움의 주장에 동의한다. 반면 개개인의 도덕성의 편차가 누군가를 범죄의 희생양으로 만드는 케이스와 마주할 때, 피해자의 입장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 누구도 피해자의 심정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그 점이 저자의 주장을 100% 지지하기 힘들게 한다. 범죄 혐의자의 개인적 권리가 침해당하지 않도록 보호하는 문제는 늘 딜레마를 야기한다. 물론 저자 또한 그 점을 간과하지 않았다. 윤리학적 딜레마에서 인간이 얼마나 취약한지를 섬세하게 분석한다. 죄인을 다루는 방식에서 수치심과 혐오가 어떻게 활용되는지에 대한 충분한 통찰을 제공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평등한 인간성에 대한 공적 신화(42)”가 죄에 대한 형벌에 결정적인 변인으로 작용한다는 점을 인지하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2. 아이 수준의 평등 담론

 

평등만큼 패러다임 전환이 필요한 기본권이 없다. 자유권, 참정권, 사회권 등 모든 기본권은 평등하지 않고 실현 불가능한 필요충분조건이다. 자유와 평등은 대척점에 있거나, 충돌하는 가치가 아니다. 평등하기 위해서 자유는 필수 조건이다. 모든 사람이 자유롭기 위해서 평등은 전제 조건이 된다. 소극적 자유 & 적극적 자유로, 국가로부터의 자유 & 국가에의 자유가 함께 공존하는 것은 둘 관계가 상보적이기 때문이다. 롤스의 주장처럼, 어떤 상태에 놓이게 될지 모르는 탄생 이전의 상황이라면, 최소 수혜자에게 유리한 사회를 구성하는 것이 가장 합리적일 것이다. 누구나 장애를 가지고 있고, 잠정적 장애인이며, 불행을 통제할 능력이 없는 인간임을 받아들인다면, 우리가 약자를 고려해야 하는 것은 자신의 불행을 대비하는 지름길이 될 것이다.

    

사족 1 > 식욕과 성욕이 별로 다르지 않다는 생각한다. 그 둘의 비교가 흥미롭다. “성욕은 식욕보다 감정과 유사한 면이 많고, 관념적이다. 이런 점에서 성적 포르노는 사회적 삶에서음식 포르노보다 상대적으로 큰 영역을 차지한다(65).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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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의 언어 -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인문학 음식의 언어
댄 주래프스키 지음, 김병화 옮김 / 어크로스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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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od is everything. 음식의 언어-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인문학,

댄 주래프스키 지음, 김병화 옮김, 어크로스, 2015. 4.

 

 

치과의사는 환자의 치아 상태에 살아온 삶의 이력이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성악가는 목소리에서 그 사람이 살아온 삶의 궤적을 느낀다고 한다. 사회학을 전공한 나는 사용하는 언어에서 계급성을 읽는다. 택시 기사는 룸 미러에 비친 얼굴에 그 사람의 성정(性情)이 보인다고 한다. 대부분은 의 결과인 선입관과 편견일 수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수 십 년의 경험 속에서 자기만의 방법으로 세상과 사람을 분석하고 수용한다. 새끼 손톱만한 장기에서 세계적인 권위를 가지고 계신 어느 의대 교수님은 그 장기가 세상의 모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이러한 맥락에서 음식의 언어-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인문학 음식의 언어를 인류학의 텍스트로 적절하게 활용한다. 이 책에는 음식 언어의 어원 뿐 아니라, 레시피까지 실려 있다.

  

누구나 인정하듯, 음식만큼 계급적인 것도 없다. tvn 드라마 <식샤를 합시다>는 사회학적 텍스트로 음식을 적절하게 활용한다. 음식을 가지고 젊은 루저의 이야기를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게 잘 풀어나간다. 중심축을 이루고 있는 세 사람 신용카드도 만들 능력이 안 되는 작가 아닌 작가 백수지, 한때 보험 왕이었으나, 불미스러운 일로 세종 시로 내려온 보험세일즈맨 구대영, 낮에는 공무원, 휴일에는 강남 오렌지로 변신하는 사무관 의 음식 스타일은 각자의 계급성을 그대로 반영한다. 케비어, 송로버섯, 푸아그라로 식감을 즐기는 사무관과 달리, 백수지와 구대영에게 음식은 영혼을 치유하는 소울 푸드다. 사무관은 음식의 양보다 질을, 백수지와 구대영은 질보다 양을 중시한다. 그들은 고독한 식사 보다 왁자지껄 떠들면서 함께 나누는 한끼 식사를 더 사랑한다. 여기에 옳고 그름은 없다. 다만 음식의 권력성과 용법의 차이를 확연히 느낄 수 있다. ‘음식은 단순히 음식이 아니라, 계급의 취향이다 음식의 언어가 우리의 욕구와 열망을 반명한다.”

  

오랫동안 외국에서 생활한 사촌 동생에게 스테이크 레시피를 알려달라고 연락했더니, 자기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영국 쉐프에게 배운 요리 실력이라고 자랑했다. 어디서 요리 강습을 들었냐고 묻자, 유투브에 요리 과정이 올라와 있어서 수시로 따라서 요리 한다고 한다. 동영상을 보면서 스테이크 굽는 것을 따라했는데, 살짝 비슷한 요리가 나온다. 그 이후로 새로운 요리에 도전할 때는 항상 유투브를 참조한다. 국적을 뛰어넘어 사람과 함께 음식도 넘나들면서, 과거보다 더 빠르게 음식의 언어도 국적을 떠돌아 공존하면서 동화와 융합의 과정을 거친다. 500단어 영어로도 소통이 가능한 세계화 속에 살아가면서, 순백의 모국어로 민족성을 지키겠다는 것은 권력의 작동일 수 있다. 우리가 지키려는 순수 한글이 과연 순수한 것인지 고민해 보아야 한다.

 

 

음식을 설명하는 보통명사의 어원을 살펴보는 과정은 새로운 상식을 넘어 새로운 통찰을 가져온다. 토마토() 소스()가 중국어에 어원을 두고 있을 농후한 가능성 / 달콤한 가루반죽이라는 의미의 메커룬, 마카롱, 마카로니 / 소금과 얼음을 섞은 소르베, 셔벗, 시럽 / 칠면조와 터키의 관련성을 살펴볼 때, 음식의 언어는 문명화와 지구화의 상호연관성을 생각하게 한다. 음식은 이민의 역사이고, 메뉴판은 식탁에 펼쳐진 세계지도이다. 낯선 도시를 여행하기 전에 그 지역의 맛 집 블로그를 검색하는 것은 당연하다. 관광지의 그저 그런 맛이 아니라, 직접 먹어본 블로거의 추천 식당은 실패할 확률이 매우 낮다. 새로 문을 연 레스토랑은 자신들이 개발한 소스를 전시하고 판매하기도 한다. 의식주의 가 그렇듯 또한 차별화된 삶을 드러내는 중요한 변인이다.

 

 

우리는 청소년 희망 직업 1순위에 쉐프가 앞자리를 다투는 시대를 살고 있다. 미디어의 위력이기도 하고, 동일한 인스턴트식품에 대한 반대급부의 취향투쟁의 측면이기도 할 것이다. 피라미드 성공 구도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라이프 스타일을 꿈꾸는 선택일 수도 있다. 여기서 비켜갈 수 없는 고민은 늘 존재한다. 직업군인을 꿈꾸면서 전쟁을 떠올리지 않고, 교육자를 꿈꾸면서 학부모, 학생과의 갈등 상황에 내몰리는 것을 염두에 두는 경우는 참 드물다. 명이 있으면 암이 있기 마련이다. 요리사가 되는 길은 좀 순탄할거라고 착각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쉐프는 요리 하나 제대로 만들기 위해서 평생을 건다. 팟 케스트에서 강레오 쉐프가 이제부터 정말 요리를 제대로 해보겠다고 말한다. 이 십 여 년을 요리로 살아온 쉐프가 초심으로 돌아가 음식다운 음식을 만들기 위해 준비해야겠다고 하는 것을 보면서, 요리의 전문성이 놀랍다. 전주 돌솥 밥의 명인께서 이제는 예전 비빔밥 맛을 낼 수 없다고 한다. 예전에는 푸성귀가 신선하고 맛있어서 원재료만 가지고도 맛을 낼 수 있었지만, 지금은 채소가 맛이 없어서 비빔밥도 예전 맛이 아니라고 한다. 강레오 쉐프가 직접 재배한 채소를 가지고 요리를 하겠다는 것이 그러한 맥락이 아닌가 싶다.

 

 

입맛은 그 사람의 교양을 말해준다.‘

 

 

음식을 즐기는 것이 누구에게나 가능한 것은 아니다. 한 사람의 태생에서부터 경험으로 이어지는 선천적, 후천적 모든 총합이 음식 취향으로 굳어진다. 나는 블라인드 메뉴를 내놓는 식당에 가본 경험도 적고, 복잡하고 고급스런 메뉴판을 들여다보는 것을 즐기지도 못한다. 현지 식당의 청결상태를 매번 의심하는 결벽도 심하다. 인도에서 빵을 먹고, 한국에서 커리를 먹는다. 태국에서 역시 빵을 먹고, 한국에서 팟타이를 먹는다. 중국에서도 빵을 먹고, 한국에서 중화요리를 먹는다. 세계의 요리를 사랑하지만, 한국에서 먹을 때만 안심이 된다. 와인에 대한 상식은 <신의 물방울>을 통해 얻은 상식이 전부다. 값비싼 상품으로 둔갑한 음식에 대한 믿음도 없다. 십 수 년 전부터 육식의 종말을 꿈꾸며, 편식하는 유사 채식주의자가 되었다. 맛 집에 대한 믿음도 없다. 가짜가 진짜인 듯 현란하게 포장된 요리를 숱하게 봐온 까닭이다.

 

 

미맹을 만드는 시대

 

 

시대의 탓도 있다. 어느 시대 불행하지 않았던 적이 있을까 싶지만, 반 토막 난 연금, 복지 없는 사회, 저 출산 고령화 사회의 미래를 생각하는 지금, 나는 미각을 느끼며 살 자신이 없다. 얼마 전, 다음 달 월세를 못 내고 자포자기한 다섯 명의 가족 중 마흔하나 아들이 네 명을 목 졸라 죽이고, 자살했다. 체념 상태에서 반항의 흔적은 없다. 삼백 여명의 학생이 제대로 된 구조를 받지 못하고 바다에서 세상을 등졌다. 왜 죽었는지, 누구의 책임인지 명확한 것 하나 없이 속절없이 일 년이 흘렀다.

 

치유의 힘

 

그럼에도 나는 음식이 갖는 치유의 힘을 믿는다. 봉준호의 <괴물>에서 경계선 장애를 갖고 있는 아빠는 딸의 밥을 챙긴다. 사라진 딸을 위해서도 밥을 짓는다. 딸이 죽고 고아 소년을 데려다가 그가 해주는 것은 따뜻한 고봉밥 한 그릇이다. 밥 먹었는지를 묻는 말 한마디로 살아갈 힘을 얻기도 한다.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체리 향기>에서, 자살하려고 산에 오르던 남자는 체리 열매를 맛보고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 오기가미 나오코의 <카모메 식당>, <안경>의 음식은 떠도는 인간을 아우르는 특별한 힘을 발휘한다. 세월 호 유가족 중 한 분은 인터뷰 중에 누군가 입 안에 떠 넣어준 죽 한 숟가락의 힘에 감사를 표현한다. 자식을 저 세상으로 보내고 물 한 모금 넘기는 것이 죄스러웠는데, 누군가 따뜻한 죽 한 숟가락을 입에 넣어주었을 때, 살아갈 힘을 얻었다고 고백한다. 누군가에게 따뜻한 밥한 공기가 되어 주고, 음식으로 환대의 공간을 만들어 연대를 구성하는 것. 그것보다 가치 있는 삶이 있을까 싶다.

 

 *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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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ureka01 2015-05-18 14: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아요 버튼이 하나 뿐이라서 아쉽네요 한 100개는 드리고 싶은 글.^^.

더불어숲 2015-05-19 08:58   좋아요 1 | URL
`극찬`, `과찬`입니다. 고맙습니다.^^
읽어주는 것도 말할 수 없는 감사함인데, 같은 책을 읽고 어깨 토닥이듯 힘을 실어주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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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랑 바르트, 마지막 강의
롤랑 바르트 지음, 변광배 옮김 / 민음사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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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글을 쓰는가?”

롤랑 바르트, 마지막 강의, 롤랑 바르트 지음, 변광배 옮김, 민음사, 2015. 3.

 

지난 3월 신간 중에서 눈과 마음이 꽂혔던 책이 롤랑 바르트, 마지막 강의였다. 사적 삶의 변화가 글쓰기를 가능하게 하듯, 바르트 철학은 나의 삶을 변화시키는 단초를 제공했다. 철학을 삶의 무기로 만들어주는 철학자 강신주의 쉬운 언어가 없었다면, 바르트는 여전히 난해한 철학자로 나와 피상적인 관계를 맺었을 것이다. 바르트의 사랑의 단상은 사랑을 나누는 언어가 메타포로 변주된다는 은유 가득한 책이다. 바르트의 문자(기호)를 해독할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강신주의 강의 덕분이었다. 한 시절, 바르트 철학은 내 실연의 원인을 분석하는 좋은 무기였다. 그의 사상을 조금 더 이해하고 싶은 욕망, 바르트 공부의 초석으로 삼고 싶은 바램이 이 책을 추천한 강력한 힘이다.

 

원래 말은 글보다 쉬운 법이니까, 이번엔 좀 쉽게 읽을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그러나 바르트의 녹취록과 강의안은 글보다 나을 것이 없었다. 역시나 기호학자답게 은유의 계보를 잇고 있다. (프랑스 철학자만큼 지식의 계보를 따지는 집단은 없을 듯^^)

 

김영하의 말하다를 읽으면서 글을 쓴다는 행위에 대해서 성찰적으로 사유하던 시점에 이 책을 만난 것은 행운이다. 글은 쓰고 싶어서 쓰는 것이 아니라, 쓸 수밖에 없기 때문에 쓰게 된다. 쓰는 행위는 나를 확인하고 발현하는 과정이다. 얼마 전 팟 캐스트 손미나의 싹수다방에서 건축가 오영욱이 초대되었다. 글 잘 쓰고, 그림 잘 그리는 여행가로 더 잘 알려진 오영욱. 그는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는 이유를 결핍에서 찾았다. 말을 잘하지 못하고, 음악적 재능이 없기 때문에 글쓰기가 자기 표현의 수단이 되었다고 한다. 자신을 어필하고 싶은데 실현할 방법이 없을 때 우리는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대안을 찾는다. 욕망은 욕망으로 연결되기 마련이니까. 글쓰기는 우리의 욕망을 실현하는 행위다. 다른 무수한 방법들을 놔두고 글쓰기를 선택했다면, 그것은 우리 삶의 어떤 경험에 의해 무의식적으로 글쓰기를 선택한 것이다.

 

바르트가 말년에 소설를 쓰고자 했던 것은 평생을 함께 한 어머니의 죽음이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파괴되지 않고 기억되기를. 사랑의 발화가 수신되지 못하는 사태에 직면했을 때, 자신을 불멸의 존재로 만드는 것은 문학적 글쓰기 밖에 없다고 생각했을 법하다. 전달되지 않는 사랑을 채워나가는 의지, 죽음에 대한 애도의 방식으로 그는 소설을 선택했을 것이다. 필멸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하는 인간의 삶은 소설을 통해서 완성된다.

 

글쓰기에서 바르트는 17음절로 구성된 짧은 글인 일본의 하이쿠에 주목한다. 하이쿠는 가공되는 기억보다 현재의 한 순간에 집중하는 철학자가 관심을 두기에 충분한 텍스트다. 언어에 담긴 권력과 doxa를 이해하는 탈구조주의 철학자는 사태 보다는 표면에 주목”(584) 했을 것이다. 탈구조주의, 포스트모더니스트가 저자의 죽음을 선언했다는 측면에서 바르트의 저자의 귀환은 역설적이기도 하다. 주체의 억압하는 권력을 밝혀냈던 이들이 다시 주체의 죽음을 선언했던 것과 마찬가지다. ‘저자의 죽음독자의 소생을 소리 높여 외쳤던(585) 바르트는 말년에 극단적으로 선회하여 독자의 귀환을 외친다. 작품을 쓰는 동안만큼은 저자의 삶이 하나의 작품 안에 완전히 녹아들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저자는 글쓰기의 주체적인 행위라기보다는 대상을 쓰는 수동적 위치에 놓인다. “나는 쓴다. 그러므로 존재한다.(586)” 글쓰기는 삶의 기록이고, 존재의 확인이다.

 

과거보다는 현재, 현재보다는 순간을 기록하는 것으로 메모와 하이쿠만한 것이 없다. 하이쿠는 삶과 죽음 사이의 순간순간의 기록이기 때문이다. 이 책에 수록된 하이쿠 중에서 현전하는 느낌을 주는 작품이 몇 편 있다. 일상의 17개 음절이 만들어내는 느낌은 순간에 집중하고 있다. 평범하고 담백한 표현으로 순간을 담아낸다.

 

 

 

누워서

나는 구름이 지나가는 것을 본다

여름의 방

(야하)

 

   23. 정월 초하루

책상과 종이들은

지난해 그대로네

(마츠오, 뮈니에)

 

33. 첫눈을 보았다

오늘 아침

세수하는 것을 잊어버렸다

(바쇼, 야마타)

 

  

 

바르트는 일본의 하이쿠를 글쓰기의 전범으로 삼았다면, 나는 헤밍웨이의 하드보일드한 문체를 글쓰기의 정수라고 생각한다. 글쓰기의 자기다움에서 내가 꿈꾸는 마지막 소망은 부사 없이 내 마음을 온전히 표현해 보는 일이다. 나의 생각이 글로 살아나지 못할 때, 강도를 키우기 위해서 자꾸 덧붙여지는 부사가 글의 격을 떨어뜨린다. ‘라는 출처 모를 접두사가 유행인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정말 좋다는 표현이 살지 못하니 개쩐다고 하고, 멋있다는 말이 살지 않으니 개멋지다라고 표현하는 것이다 싶다. 그런 접두사와 부사 없이도 담백하게 내 생각과 감정이 전달되는 글로만 이루어진 책 한권을 남기고 싶다.

 

바르트를 수식하는 말만큼이나 그의 글쓰기는 전방위적이다. 문학 이론가, 구조주의자, 탈구조주의자, 기호학자, 문하 철학자(581), 그리고 소설 쓰기를 꿈꾸었던 문학가이기도 했다. 이 책은 롤랑 바르트의 소설의 준비를 우리말로 옮긴 것이라고 한다. 미셀 푸코(Foucault)사회를 개혁해야 한다이후, 녹취록을 글처럼 끊어 읽고 이해하려 했던 오랜만의 경험을 상기하게 하는 책이다. 유고집인 이 책은 소설의 준비’ 2부와 두 개의 세미나 텍스트로 구성(581)되어 있다.

 

글쓰기는 자기 우월감을 드러내는 행위라고 냉소적으로 바라보던 때도 있었다. 누군가의 글을 편견과 선입견으로 평가절하하기도 했다. 지금은 글 쓰는 행위는 인간답게 살기 위한 무기라고 생각한다. 댓가를 바라지 않고라도 쓸 수밖에 없는 자기표현 수단이 글쓰기다. 롤랑 바르트, 마지막 강의살아있는 한 포기하지 않을 글쓰기에 대해서 충분히 사유하게 한다. 단 한 번의 일독으로는 미진하다. 글을 쓰는 사람은 언어의 권력성을 상기할 때 다시 꺼내 들어야 할 책이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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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누구를 베꼈을까? - 명작을 모방한 명작들의 이야기
카롤린 라로슈 지음, 김성희 옮김, 김진희 감수 / 윌컴퍼니 / 2015년 2월
평점 :
절판


 


 

드러낸 존경 혹은 무의식적 카피

누가 누구를 베꼈을까? - 명작을 모방한 명작들의 이야기

카롤린 라로슈 지음, 김성희 옮김, 김진희 감수

 

책이 도착한 내내 행복했다. 침대에 두고, 서재에 두고, 차에 가지고 다니면서. 텍스트 보다 그림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시간이 어디에서 어디로 흐르는지 몰랐다. 이 책을 보다가 문득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유화가 없어 집에 있는 아크릴을 꺼내어 캔버스 밑 작업만 해도 하루가 달라진다. 그림을 그리고 싶다고 하면 아는 화가들은 늘 좋아하는 작품을 따라서 그려 보라고 했다. 그게 가장 좋은 그림 훈련(!!)이라고 했는데, 역시나 나를 매혹한 화가의 작품엔 나의 의식. 무의식이 맞닿아 있는 듯하다.

 

사람도 꽃도 힘들게 했던 꽃샘추위가 지나고 나니, 벚꽃 아름다운 것은 잠시였다. 해마다 봄이 있지만, 그 봄은 모두 달랐다. 자라면서 맞이했던 매 해 봄이 남긴 인상이 내 기억 안에 켜켜이 쌓여 유적을 만들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나서는 어떻게든 그해의 봄을 고유하게 보내고 싶은 마음이 있다. 여기 저기 아름다운 벚꽃을 많이 보았지만, 이번 봄엔 시간을 함께 보낸 벚꽃이 가장 아름답다는 것을 깨달았다. 달리는 차안에서, 사람 많은 곳에서 벚꽃을 보는 사람은 하수다. 인적 드문 장소와 시간, 도수 낮은 알콜을 마시며 서너 시간 족히 앉아서 바라보는 벚꽃 그늘은 천상의 세계를 열어준다. 미리 보는 천국. 거기에 우리가 꿈꾸는 삶의 메타포가 있다.

 

세상 어디에도 새로운 아이디어는 없다. 읽은 책이 늘어갈수록 드는 생각이다. (나를 포섭하지 못하는) 남들의 명품 백 욕망이 내겐 책이었다. 명품백과 책의 차이가 있는가? 탐욕스럽게 책을 쌓아두고, 보며 행복해했던 시간의 도덕적 명분은 저자에 대한 감사함이었다. 책은 매력적인 인간이 온전히 자신을 드러내주는 선물이었다. 당연히 신간을 가장 먼저 사서 보면서, 나는 이미 그 책을 읽었다는 우월감. 남보다 선점하는 기쁨을 누렸다.

 

욕망을 적당히 채우고 어느 지점에 도달해보니, 이제 신간의 매력이 조금씩 사라진다. 제목은 새로웠으나, 내용이 새롭지 않은 경우가 더 많다. 어른들의 구태의연한 말이 틀린 말씀은 아니었다. 신간 열권 보다 원전과 고전을 한 번 더 읽는 것이 더 낫다. 인류의 지적 자산은 선대의 지혜를 새롭게 번역하고 덧입혀 가는 과정인 듯하다. 최근 미움 받을 용기라는 책이 베스트에 올랐다. 책 제목을 기가 막히게 잘 뽑았다고 생각했다. 많은 사람들이 미움 받을 용기가 없어 현실에 안주해 살아가고 있다는 자괴감이 큰 탓이다. 용기가 필요한 시기에 그것보다 더 ‘hook’할 수 있는 것은 없을 터. 그런데. 책을 사서 읽어보니, 내용은 아들러의 심리학이었다. 아들러를 읽었던 사람에게는 전혀 새로운 내용이 아니다. 다시 돌아가서 아들러를 여러 번 제대로 읽는 편이 훨씬 낫지 않을까 싶었다. 그렇다면, 후학들은 앞선 학자의 생각을 적당히 가공하여 팔아 치우는 소매상에 지나지 않을까?

  

누가 누구를 베꼈을까?드러내놓고 존경하거나 혹은 무의식적으로 카피하거나 이는 모사의 과정이 다른 언어로 번역하는 작업임에 대하여 생각하게 한다. 고흐가 동생 테오에게 쓴 편지에서 “(모사는) 다른 언어로 번역하는 작업에 가까워. 흑백의 명암에서 느껴지는 인상을 색채의 언어로 풀어내는 거지.(5)”라고 말한다. 어쩌면 베낀다는 표현은 명확하지 않다. 그것은 다큐멘터리가 CCTV로 있는 현상을 풀로 찍어내는 과정이 아니라, 편집과 연출을 통하여 예술이 되는 과정에 비교할 수 있다. 유사하나 전혀 다른 새로운 작품의 탄생이며, 원작에 대한 경의의 표현이기도 하다. 원작의 권위를 파괴(12)하는 것은 아니다.

 

이 책은 카피의 과정을 살펴보기 위해서 표현된 주제, 채택된 형식, 장르의 개념을 지준으로 세 개씩 짝을 이루는 3부작으로 이루어졌다. 읽다(보다) 보면 주제 보다는 소재 중심으로 정리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최후의 만찬’, ‘누비 소매 옷을 입은 남자’, ‘시스티나의 성모’, ‘다정한 모자로 분류하여 분석하다가 나중에는 화가의 작업실’, ‘발코니’, ‘알제의 여인’, ‘유럽의 여다리등 소재 중심으로 선회한다. 시기별로 사조를 나누는 미술사에 대하여 다시 생각하게 된다. 시대별로 지배적인 장르가 존재하지만, 대부분의 장르는 여러 세기를 가로 질러서 지속되기도 한다. 단지 스포트라이트를 받지 못했을 뿐이다.

 

이 서평에 모든 작품을 모두 열거하는 것은 의미 없다. 렘블란트의 자화상, 로비스 코린트의 <삼미신>이 보여주는 나체, 사랑, 죽음, “꿈의 조립공구스타브 모로의 <환영>, 프랜시스 베이컨의 <벨라스케스의 교황 이노켄티우스 10세의 초상에 대한 습작>, 클로드 모네의 <런던, 국회의사당, 안개를 뚫고 비치는 햇빛> 등등 알고 있으나 다시 보면 새롭게 보이는 작품들이 가득하다.

 

한번 보고 서가에 꽂아두기 아까운 책이다. 그림은 글과 다른 방식으로 말을 건다. 이 책은 그림도 좋지만, 문학적 표현으로 격을 높였다. “말로 설명할 수 없다면 그림을 그릴 필요가 없다(207),”지만, 글은 그림으로 들어가는 열쇄가 된다. 과거는 과거로 존재하지 않는다. 매번 새롭게 해석하고 변주하는 과정 속에서 다시 현재가 된다. 메를로 퐁티의 말처럼 어떤 그림도 회화를 완결할 수는 없고, 어떤 작품도 그 자체로만 완결되지는 않는다.(7). 하늘 아래 새로운 아이디어가 없다는 것은 아이디어가 convergence의 과정에서 창출되기 때문이다. 어떻게 결합하느냐에 따라서 과거를 드리우며 새로운 작품을 만들어가게 마련이다.

 

책의 서문에 있는 말을 상기해보면, 피카소를 위대하게 만든 것은 그의 작품이 아니라, 그 작품에 내재해 있는 사유(思惟)라고 믿는다.

 

화가란 결국 무엇인가? 남들이 소장하고 있는 마음에 드는 그림을 자기고 갖고 싶어서 직접 그려 소장하는 사람 아니겠는가. 시작은 그러한데 거기서 다른 그림이 나오는 것이다.”

피카소, 1934.

.

시대와 시대를 가로 질러서 사이의 여백을 메우고, 새롭게 나아가는 것, 그것이 누군가가 누군가를 카피하는 이유이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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