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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후감 - 대중문화의 정치적 무의식 읽기
김성윤 지음 / 북인더갭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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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문학(잉여+ 인문학)에서 인문학으로

덕후감, 김성윤 지금, 북앤더갭, 2016. 1.

    


신간 덕후감은 문화사회연구소 연구원이자 소장인 대중문화 연구가 김성윤이 그간 써왔던 비평 글을 모아 새롭게 구조화한 책이다. 대중문화 텍스트에 대한 분석도 좋지만, 대중문화 연구 자체를 메타적으로 접근한다는 점에서 유익함이 크다. 이 때문에 독자는 저자와 함께 고민의 지점을 찾을 수 있다. 텍스트에서 콘텍스트로, 콘텍스트에서 사람으로 옮겨가며 사회적인 것에 관심을 갖고 있는 저자의 고민을 오롯이 느껴진다. 마르크스 이론을 학습하고, 1990대 문화의 수혜를 받은 486세대 저자는 대중문화를 정치경제적 역사 맥락에서 이해하고자 한다.

 

언젠가 친구가 문화연구를 계속할 거냐고 묻길래, 난 한번도 문화연구자인 적이 없었고 오히려 역사유물론을 할 거라고 답한 적이 있었다(19).”

 

이 책은 크게 6장으로 구성된다. (새로운 대중들 : 팬덤의 사회학, 우리가 알던 세계의 종언, 사회를 유지시키는 마술, 이데올로기의 귀환, 정치적 소실점으로서의 신자유주의적 윤리, 정치의 표류 : 스펙터클 또는 유령의 정치) 각각의 장은 주제에 따라 분량도, 방식도 개별적으로 서술되기 때문에 어떤 장을 먼저 읽더라도 크게 부담되지는 않을 것이다. 아쉬운 점은 주제가 갖는 시의성이다. 대중문화의 특성 상 기고했던 글을 모아 놓다 보니, 시기적으로 이미 과거에서 종료된 현상 분석도 더러 있어서 실제성이 조금 떨어진다.

 

전반적으로 어렵지 않게, 공감과 문제 제기가 가능한 글들이다. 특히 영화 <써니> 이후, tvn<응답하라 시리즈>로 이어지는 복고에 대한 비평 글은 새로운 성찰을 일깨운다. 레이건노믹스와 함께 신자유주의가 팽배해지자, 미국의 호황기였던 1960~70년대를 배경으로 한 드라마가 큰 인기를 끌었고, 지금도 방영되고 있다. 이를 공동체주의에 대한 향수, 보편적 추억의 공유와 같은 단편적인 이해로만 소비해서는 안 된다. 이러한 현상이 한국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고도의 경제 성장기였던 70~80년대 한국 경제에 대한 환상이 과거를 추억하게 하는 동력일수도 있다. 베트남 전쟁 파병, 탄광 광부와 간호사의 독일 취업, 한일 협정의 보상으로 일본에서 넘어온 자본을 통한 경제 성장이라는 역사적 사실을 덮고, 과거를 아름다운 추억만으로 연출할 수 없다. 우리에게 호시절은 없다. 대중문화는 우리가 싫어하는 걸 절대 건드리지 않는다(172). 때문에 문화연구는 여전히 힘을 갖는다. 문화 현상의 이면을 읽어내는 힘이 우리에게 필요하다.

 

미래에 대한 비전이 암울할 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본은 계속 회전되어야 할 때, 가장 채택하기 쉬운 방법은 과거로 돌아가는 것이다(152).

 

<6장 정치의 표류>에서 다루는 박정희의 유령, 노무현의 유령 : 국제시장변호인을 둘러 싼 해석 전쟁에 대해서는 논의가 필요하다. 두 편의 영화가 모두 반() 정치적이지만, 지극히 정치적이라는 측면에 동의한다. 두 편 모두 정치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시대와 인물을 다루고 있다. 인간 노무현을 다루겠다는 제작자의 선언 비슷한 입장에서도 이 영화는 절대 정치인 노무현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국제시장의 아버지는 위로의 아버지의 아들로서, 아래 세대를 지켜야하는 아버지의 지위에서만 존재한다. 초월적 아버지의 아들이며, 적잖은 식솔을 거느린 가부장의 아버지(301) 외에는 주체의 존재론적 고민을 찾아볼 수가 없다. 주인공의 존재 방식은 오로지 희생적인 아버지. 두 편의 영화는 모두 텍스트적 징후로서 정치인 박정희와 노무현을 호출하고 있다. 하지만 두 인물의 삶과 정치적 지향점을 판단 중지하고, 이 두 영화가 동시에 같은 수준의 정치적 퇴행이라고 말하기엔, 괄호 안에 갇히는 사실( 혹은 진실)이 너무 크다.

 

소망의 거울

 

저자는 대중문화를 소설 해리 포터에 등장하는 소망의 거울에 비유한다. 우리는 거울과 나의 관계에 직시하듯, 대중문화와 자신의 관계에 직면해야 한다. 대중문화가 대중 외부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대중의 선택에 따라 해석되는 콘텍스트로 받아들여져야 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텍스트는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텍스트와 텍스트, 생산자와 소비자, 텍스트와 사람 사이에서 촘촘하게 의미가 부여된다.

 

대중자신을 경계하기

 

문화 연구가 교양 있고 비판적인 대중에게 행복을 약속해주는 좌파 담론이자 정치적 태도였지만, 그런 식의 행복이 독자 대중에게 자기 위안과 기만을 제공하는 헛된 것이라는 저자의 관점에 동의하면서, 대중에 대한 신화도, 맹목적인 자기 과신도 경계해야 함을 깨닫는다.

 

제목에 담기지 않았지만, 저자가 다루고 있는 것은 대중문화의 정치적 무의식 읽기. ‘덕후감이라는 낯선 단어가 일본어 오타쿠에서 오덕후, 덕후로 변형되어 한국에서 사용되고, 이를 출판사가 마케팅 전략으로 반영한 듯하다. 여기에 덕후감독후감을 연상하게 하는 효과 또한 발휘한다. 하지만, 책은 - 덕후에 대한 감상문이라기보다는 대중과 자신에 대한 거리두기와 비판을 가하는 진지한 연구가의 고민으로 가득하다.

 

최근 내가 꾸준히 참여하고 있는 독서 모임에서 느끼는 복잡한 심정과 맞닿아 있어서 내 생각을 정리하는데도 도움을 받았다. 이런 저런 고민을 키울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의미 있는 독서였다. 읽고 쓰는 행위에 대한 타인과 자신의 질문 속에서, 답을 찾는 과정에 있기도 했다. 평범한 독서 모임으로 알았는데, 연구회 성격이 강하다는 어려움을 토로하시는 회원이 계셨다. 몇 달이 가도 얼굴 보기 어려운 회원도 계시고, 발제가 부담스러운 청강생도 여럿 계신다. 애정과 차이를 인정하면서도 맥이 풀리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과연 읽고 쓰는 것에서 우리 회원들이 기대하는 것은 뭘까? 혹시 이 책에서 말하는 자기 위안과 기만은 아닐까? 그도 아니라면, 교양인으로 살아가기 위한 지적 포장지가 필요한 것일까? 이 질문은 외부에 대한 시선에서 시작되었으나, 결국 나 자신에 대한 반성이기도 하다. 하지만 여전히 자학하고 싶지는 않다.

 

읽고 쓰는 행위는 자기 과시도 지적 유희도 아니다. 제대로 존재하기 위한 최선의 도구로서 읽고 쓸 뿐이다. 글을 쓴다는 것. 변화하는 의식의 한 지점을 박제하여 드러내는 일이 마음 편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고통스럽기만 하다면 글을 쓰고 공개하고 평가받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쓰는 일을 멈추지 못하는 것은 그것만큼 우리의 의식을 견고하게 만들고, 자기 인식과 배려의 윤리를 실천할 수 있는 기술이 없기 때문이다. 잉문학(잉여+ 인문학)에서 인문학으로, “학문애호가적 기질 인문학을 소비하고 있는지에 대한 자기 점검을 철저히 해야 한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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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의 문을 두드리며 - 우주와 과학의 미래를 이해하는 출발점 사이언스 클래식 25
리사 랜들 지음, 이강영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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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누구이며, 어디에서 왔는가?

천국의 문을 두드리며리사 랜달(Risa Randal), 사이언스북스, 2016. 1.

 

우주와 과학의 미래를 이해하는 출발점이라는 부제에 꽂혀 이 책을 추천했다. 서문에서 이 책은 현재의 이론 및 실험 물리학을 더 잘 이해하고 싶어 하는 독자들, 건전한 과학적 사고의 원칙 및 현대 과학의 본질을 더 정확하게 이해하고자 하는 독자를 위한 것(10)” 이라고 언급한다. 리사 랜달이 대중 강연을 열심히 하고, 대중이 이해할 수 있는 과학서를 쓰는 것을 보면, 독자와의 대화가 과학을 발전시킨다고 보는 듯하다. 과학은 본질적으로 진화하는 것이고, 이 과정에서 논쟁은 불가피하다. 과학의 놀라운 성과를 대중과 공유하고 싶은 간절한 바람 또한 엿보인다.

 

과학은 절대 불변의 진리는 아니다. 오랜 시간을 견뎌대는 잠정적 진실이다. 절대적 진실을 찾기 때문에 훨씬 더 불확실설과 대면한다. 앎의 지평이 넓어지면서 과학은 진화한다. 귀납적으로 사유한다면, 과학은 예외가 나타나면 기각되는 잠정적 진실일 수밖에 없다. 누군가 셜록 홈즈에게 그가 사용하는 수사 방법이 연역적인 것이 아니라, 귀납적인 것이라는 것을 알려주면 좋겠다는 저자의 농담은 그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이론 물리학자인 저자 리사 랜달은 기본 입자에서 우주론까지 연구 범위가 따로 없다. 미시와 거시가 교차하며 우주를 알고자 노력한다. 극미의 스케일에서 우주 전체라는 광대한 크기에 이르기까지 모든 영역에서 어떻게 서로 맞물리고 결합되는지 큰 그림(12)을 그린다. 리사 랜들은 1962년 생으로, 뉴욕 과학 영재를 위한 스투이버슨트 고등학교, 하버드 대학에서 박사과정을 마친 엘리트 과학자다. 2006년 대중을 위한 숨겨진 우주을 출판하면서 스타 물리학자가 되었다. 이후 2011년 이 책 천국의 문을 두드리며가 출판되었다. 입자물리학 연구를 질적으로 바꿔 놓은 LHC의 성과에 집중하면서 과학 연구를 전 방위적으로 다루고 있다. 입자물리학의 기초에서부터 우주까지 시공간을 막힘없이 넘나든다.

 

이 책은 크게 여섯 장으로 구성된다.

 

1. 지식에 접근하는 몇 가지 서로 다른 방법의 비교

2. 물질세계를 이루는 물리적 구조

3. LHC의 작동 원리 및 실제 가동

4. 힉스 보손 탐색과 이 입자와 관련된 각종 모형

5. 우주, 정체불명의 존재인 암흑 물질, 입자 물리학과 우주론의 연관성

 

책을 읽다 보면, 굳이 각각의 장에 연연하며 순차적으로 읽을 필요는 사라진다. 동일한 주제가 중복되기도 하고, 확장되기도 한다. 과학 문외한 또한 항상 궁금했던 주제를 아주 쉽게 설명한다. 물론 이 책을 이해하는 일이 쉽지 않다. 개념을 활용할 수 있는 것은 기대하지도 않는다. 이해하기 어려운 몇 가지 개념을 복기하며 보면 훨씬 편안하다. (예를 들어 이 책의 핵심 개념은 스케일(scale)이다. 스케일은 규모 또는 척도다. LHC(Large Hadron Collider)은 대형 하드론 충돌기 또는 대형 강입자 충돌기를 의미한다. 이 정도는 과학에 관심 없는 대중도 이해할 수 있을 듯하다.)

 

나는 무엇보다 왜 이 책의 제목이 천국의 문을 두드리며(Konkin’s on heaven’s door)’인지 궁금했다. 저자는 이 제목을 밥 딜런과 락 그룹 그레이트풀 데드가 함께 한 콘서트에서 처음 들었다고 한다. 왠지 성경의 뉘앙스가 풍기는 문구다. 이 책의 표지와 제목만 접한 독자는 우선 이 책이 종교 서적으로 오해할 수도 있다. 과학자가 정한 제목 치고는 참으로 역설적이다 싶었다. 역시나 리사 랜들은 철학, 종교와 달리 과학은 수동적이거나 맹목적이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어서 이 제목을 선택했다.

 

과학이 다루는 것은 수동적으로 얻은 지식이나 믿음이 아니다. 우주의 진리 그 자체가 목적이다. 과학자는 적극적으로 지식의 문을 두드린다. 이 문이 바로 우리가 알고 있는 영역의 경계에 해당한다. 우리는 묻고 탐구하고, 사실과 논리에 따라 우리의 견해를 바꾼다. 우리는 오로지 실험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것이나 실험적으로 확인된 가설로부터 추로한 것들만을 믿는다(104).”

 

 

- 스케일과 재다

 

과학은 불확정 요소를 가지고 있으나, 전체적으로 조직적이다. 우리가 이해하는 길이와 스케일이 다양해지면, 이론은 진화한다. 현상을 보다 근본적으로 설명하고, 통찰을 가져오는 것이 바로 과학의 진보이다. ‘생각하다의 라틴어 어원에는 무게를 재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영어에서는 어떤 아이디어를 고찰하는 것을 재다(weigh ideas)’(57)라고 한다.

 

리사 랜들은 대표적인 과학자로 갈릴레오를 언급한다. 그는 가 아니라, ‘어떻게를 고민했다. 관측의 중요성을 알고 실천했기 때문에 우주의 중심이 지구가 아님을 알 수 있었다. 갈릴레오가 망원경을 발명하지 않았다고 할지라도, 그 스스로 망원경을 만들고 이용해서 더 작은 세계와 우주를 관찰했다.

 

과학에 대해 과학자마다 무수히 많은 자기만의 정의를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 의미를 넘어 서서 저자가 설명하는 과학은 독자의 명확한 이해를 돕는다. 과학의 엄밀한 규칙의 지배를 받으며 작용하는 물체를 기술하고, 그러기 우해 정량적 예언 능력을 갖춘 개념 틀을 구축하는 것이다(72~73). 과학은 언제나 온갖 관측을 설명할 수 있고 온갖 현상을 예측할 수 있는 가장 경제적인(가장 단순하며, 다른 변수를 필요로 하지 않는) 해석을 찾는다(73) 사실 이러한 측면 때문에 무수히 많은 변인들이 배제된다는 과학의 한계에 대한 오명을 벗기도 어려울 것이다.

 

- ‘무관심한 우주

 

우주는 우리에게 무관심하다. 좋은 나쁨의 척도가 될 수 없다. 객관적 과학에 필요한 것은 오로지 우주를 무관심한 것으로 다루는 것(84)이다. 이 지점에서 과학과 신학의 차이가 발생한다. 궁극적인 목적이 다르다. 종교는 사회적으로 바람직한 가치를 함의한다. 종교인들이 하나님께서 인간의 물질세계에 관여한다고 말하는 것의 불편함이 어디에서 기원하는지 성찰하게 된다. 그것이 일상에서 나를 매우 불편하게 하기 때문에 더욱 통쾌했다.

 

경험을 기반으로 한 논리 중심의 과학과, 계시를 바탕으로 한 신앙은 진리에 도달하기 위한 방법 자체가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다(102).”

 

- 입자의 성질, 질량을 이해하는 열쇠

    

내부 세계로의 여행이라고 말할 수 있는 입자 물리학은 근본적인 구성 요소와 그들을 지배하는 물리 법칙을 이해하는 데(123) 있다. 입자를 밝히는 기술적 한계 너머에는 물리학 이론이 존재한다. 실험적인 결과를 바로 보여줄 수는 없지만, 이러한 이론들이 측정 가능한 스케일에 적용되는 아이디어들을 새롭게 고찰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다(148)고 한다. 대표적인 이론이 끈 이론으로, 기본 입자 대신 기본 끈을 채용해 물질의 기원을 설명(147)한다.

 

입자 충돌과 검출을 하는 LHC는 입자의 성질, 질량을 이해하는 열쇠다. 힉스 메커니즘은 힉스 장이 아닌 곳에서 입자들의 질량이 0이었다가 0이 아닌 값이 되는지를 설명해준다. 질량을 갖지 않고 날아다니는 입자들이 힉스 장과 관련하여 상전이가 일어나면 질량을 가지게 된다. 반면 빛의 속도로 날아다니는 것이 점점 느리게 움직이다. 암흑 물질은 중력의 영향을 받지만, 빛을 흡수하지도 방출하지도 않는 물질(183)이다. 암흑물질을 포함해도 지구상의 물질 중 우리가 설명할 수 있는 것은 27%에 불과하다고 한다. 나머지는 73%는 암흑 에너지로 구성되어 있다고 한다. 결국 옳고 그름의 판단은 믿음이 아니라 실험(190)일 것이다. 과학의 힘은 거기에 있다.

 

저자는 LHC가 발명되었기 때문에 우리가 입자의 내부 세계를 알게 되었다고 확신한다. LHC가 처음 구상된 것은 1984, 최초 충돌 성공은 2009년이다. 걸린 기간만큼 수많은 과학자들이 관여했고, 엄청난 예산이 소요되었다.(LHC의 가격 90억 달러, 실험에 참가한 과학자가 약 1만명이라고 한다.)

 

위험으로 가득 찬 이 세계에서 불확실성을 최소화하고, 예측할 수 있는 것이 스케일이다. 이 입자의 척도를 사회에 적용하여 위험 요소를 최소화하는데 활용한다. 기후, 금융과 같은 세계에도 스케일이 적용된다. 100%는 아니지만, 확률로 재앙을 예측하고 대비한다. 과학은 불확실성을 어디까지 허용할지 범위를 정하는(304) 것이지 완벽한 측정을 할 수는 없다.

 

-  영감과 상상력, 그리고 무한한 노력

 

저자 리사 랜들은 과학자이기 전에 작가인 듯하다. 예술적, 문학적 감수성 없이 쓸 수 없는 대단한 필력을 자랑한다. 또한 수도자의 자세와 별로 다르지 않은 그녀의 삶을 태도를 알 수 있다. 몰입과 집중, 더 진실에 다가가고 싶은 강렬한 지적 욕구를 지닌 한 과학자의 삶과 마주하게 된다. 과학도 철학과 마찬가지로 세계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자아에 대한 탐색이다. 인간의 탐구 정신은 지구의 가장 작은 입자에서 시작하여 무한의 우주 끝에 존재하는 물질까지 탐구한다. 이러한 성과를 추동한 것은 인간의 영감과 상상력이고, 그 과정에는 인간의 엄청난 노력이 있다. 천국의 문을 두드리며는 과학을 전공하고자 하는 학생들에게 가장 먼저 추천하고 싶은 책이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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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업사회]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무업 사회 - 일할 수 없는 청년들의 미래
구도 게이.니시다 료스케 지음, 곽유나.오오쿠사 미노루 옮김 / 펜타그램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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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성장, 저출산, 취직 빙하기 무업사회

구도 게이, 나시다 료스케 지음, 곽유나, 오오쿠사 미노루 옮김, 펜타그램, 2016.1.

 

무업사회는 일본 청년 지원 기관인 NPO법인 소다테아게넷 이사장인 구도 게이가 쓴 청년 실업에 관한 인류학적 보고서. 청년 무업자들의 사례를 통해 무업이 그들 개인의 문제가 사회 시스템의 문제임을 보여준다. 청년 무업자가 된 원인과 양태, 이를 해결하기 위한 사회 시스템의 필요성, 일을 시작한 청년 무업자들이 말하는 일한다는 것에 대해서 연구한 결과물이다. 이 책은 무엇보다도 실질적인 구체적인 사례로 독자를 사로잡는다. 통계 자료에서 읽을 수 없는 삶의 맥락과 의미를 이해하려는 연구자의 자세가 빛난다.

 

저자는 청년무업자를 바라보는 사회적 시선이 문제임을 지적한다. 낙오자, 실패자라는 시선으로 무업자를 바라보는 사회 담론을 해체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서 청년들이 무업자 상태인 원인과 양태에 대한 질적 연구가 필요하다. 일하지 않는 청년들의 사례는 다음과 같다.

 

1. 대학 졸업 후 대기업에 입사했지만 동경하던 비전과 괴리된 현장

2. 불합격 메일 100통에 좌절하고 미안하다는 생각에 면저을 볼 수 없어

3. 초보자를 환영한다고 하고는 교육도 휴일도 없더니 갑자기 날아든 퇴직 권고

4. 어려운 세무사 자격을 취득했건만 면접에 서툴러 히키코모리 생활

5. 두 번이나 해고 경험, 무엇보다 망하지 않을 회사에서 일하고 싶어

6. 친구와 회사를 설립했으나 다투고 결별, 자신 있던 재취업에 거듭 실패

7. 꿈도 일할 의욕도 없지만, 사람들과 소통만은 하고 싶다.

 

이 시대 청춘들은 보람 있게 일하는 것은 바라지도 않는다. 녹색평론 김종철 선생님 말씀처럼 착취당하고 싶어도 착취당할 곳이 없다. 고성장 시대가 끝나고, 저성장에 마이너스 성장으로, 베이비붐을 지나 지속되는 출산 하락세, 여기에 인간의 일자리를 대체하는 AI와 같은 컴퓨터의 발달 등이 일자리를 축소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자유주의 세계관은 사회 문제의 원인을 개인의 책임으로 전가한다. 일자리가 없는 이유를 개인의 문제로, 노력이 부족해서, 자기개발이 덜되어서라고 환원한다. 이제 세상에는 공부 중인 젊은이가 가득하다. 도서관은 나이 불문, 청년 무업자의 가장 안전한 장소다. 이상적인 목표와 준비 사이의 간극은 계속해서 벌어지고, 아무리 준비해도 부족한 것은 더욱 많아지고, 늘어나는 나이는 부담으로 작용한다. 갖추어지기 전에 시작하는 법을 더는 알지 못한다. (일본에서는 2010년부터 39세까지 청년으로 보고 있다. 15세에서 39세까지 청년 무업자다. 여기에 고립 무업자는 40대에도 상당할 것으로 예측된다. 어디 일본만 그러하겠는가?)

 

일도, 사랑도, 결혼도 안착할 수 없는 이십대를 두고 가능성의 시기라고 말하는 것은 정말 가혹하다. 여기서 tvn 드라마 <응답하라 1988>를 언급하는 것은 무업 사회와 잠시 무관한 이야기가 될 듯도 하지만, 그 시기 나는 평생 일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불안으로 힘들었다. 철들고 벗어나본 적이 없는 학교를 떠나 세상에 나와 보니,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었다. 당시 나는 학력에 걸 맞는 일을 해야 한다는 사회적 시선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응답하라 1988>을 보면서 좋기만 할 수 없었던 그 시기의 불안이 고스란히 되살아났다. 이 드라마가 모든 남녀노소 시청자의 사랑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각각의 세대를 공략하는 요소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십대, 이십대 아이들에게는 밀고 당기는 연애를, 삼십대 이후 세대에게는 추억이라는 강력한 장치가 드라마 성공 요인이지 않을까 싶다. 90년대로 이어지는 각자의 추억이 갖는 보편성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그런 의미들이 있었던 거다. 90년대는 적어도 무업 사회는 아니었지만, 일할 수 없다는 것이 주는 무기력은 정말 컸다. 몇 달 일하지 않는 것이 1년처럼 느껴지는 무게감이었다. 집 밖을 나가지 않으니, 자연스럽게 자신감과 자존감은 떨어지고, 대인관계에도 서툴러졌다. 밤낮이 뒤집어 지고, 세상에 대한 피해 의식이 커져 갔다. 가장 가까운 사람들에게 원망의 화살을 겨누었다. 그 시기를 잊는 것은 평생 불가능할 것이다. 아니 잊지 않을 것이다.

 

어쩌다가 운이 좋아서 정규직, 연금 대상자가 된 나는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느끼며 살아간다. 나의 취업은 단지 운이 좋았을 뿐이다. 능력은 필요조건일지 몰라도, 충분조건은 될 수 없다. 정규직이 되고, 안정적으로 공부할 수 있는 여건이 만들어지자 석사를 시작했다. 도서관에 아는 얼굴이 있을까 싶었으나, 함께 공부했던 동기와 선배들은 여전히 자판기 커피에 의존하며 사법고시가 7급 공무원으로, 7급 공무원을 9급 공무원으로 조절하며 <여고괴담>의 주인공처럼 학교(도서관) 귀신이 되어 가고 있었다.

 

청년 무업자는 국가 차원에서 고려되지 못한 채 가족이 그 문제를 온전히 떠안는다. 무업 상태가 몇 년간 지속되다 보면, 본인의 체념과 가족의 해결책 부재 상태에 이른다. 무업자는 계속해서 노부모의 연금에 기대어 살아간다. 자녀 교육에 목숨 거는 우리 사회 현실을 생각한다면, 노후를 제대로 준비한 노인이 드물 것으로 예측된다. 그렇다면 무업자 가족의 상태가 어떨지는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국가 없는 사회라는 극단적인 표현을 사용하게 되는 지점이 바로 여기에 있다. 이점에서 한국과 일본은 매우 유사하다.

 

일본은 가족을 사회 공동체의 기본 단위로 인식하고 있기 때문에 개인의 상황을 가족의 일로 생각하는 경향이 크며, 단지 개인의 일로만 보는 경우가 적다. 유럽의 한 청년 지원 단체 활동가에게 질문한 적이 있는데 그곳에선 청년이 어려운 상황에 처하면 그 부모가 아무리 부유하더라도 부모의 경제적 조건과는 상관없이 처한 상황에 따라 누구나 필요한 지원을 받을 수 있다고 한다. 가정이 소득이나 부모 자식 간의 관계에 좌우되지 않는 지원 시스템이 잘 정비되어 있는 것이다(106).”

 

 

이 책은 청년 무업자에게 어떤 지원을 해야 하는 것에 대하여 특별한 해법을 제시하지는 못한다. (어쩌면 당연한 결과이지만 말이다. 그 해법을 한권의 책으로 진단할 수 있다면, 그 많은 무업자들을 자살로 내모는 사회가 지속될 이유가 없을 테니 말이다.) 몇 가지 매뉴얼로 무업 사회에서 빠져나갈 수 없기 때문에 심각한 사회 문제다.

 

청년 무업자를 지원하는 바람직한 사회 시스템(175)이 필요하다. 무업자 지원 기간을 통한 자신감을 확대해야 한다. 지원의 핵심 기조는 포섭성, 연속성, 재도전의 지원(176)이다. 작은 성공 사례를 만들고 데이터를 축적해야 한다. 그리고 에코시스템을 만들어(190)야 한다. 청년 무업자의 문제가 남의 일이 아니라 자신의 일이라는 의미를 전달하며 각자의 입장에서 어떤 관계를 맺고 어떤 가치를 통해 협조할 수 있는지를 제안(191)해야 한다.

 

청년 무업자가 가장 경계해야 하는 것은 정신적으로 세상 밖으로 내몰리지 않는 것이다. 본인의 의지박약이 문제라고 한다면, 그것은 100% 본인 탓이 된다. 하지만 우리는 마음 뒤집는 것이 태산을 옮기는 것처럼 어려울 때가 있다는 것을 삶의 경험으로 안다. 계속되는 좌절로 낮아진 자존감은 우울증이라는 질병으로 이어진다.

 

일할 수 없는 청년들의 미래에 대한 책무성으로 책을 읽는 내내 힘이 들었다. ‘무업인(無業人)’이 아니라, 무업사회(無業社會)‘라는 점에서 이는 우리 공동체 전체의 문제다. 청년이 무업 상태인 것에 일정한 경향성이 있는지를 파악하는 것이 우선한다. 이는 사회 문제가 개인 혼자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란 얘기다. 이들을 지원하는 것은 이해와 포용을 바탕으로 한 사회시스템이어야 한다. 무업 사회는 결코 취업하지 못한 사람들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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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적 불감증 - 유동적 세계에서 우리가 잃어버린 너무나도 소중한 감수성에 관하여
지그문트 바우만.레오니다스 돈스키스 지음, 최호영 옮김 / 책읽는수요일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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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리적 거울 앞에 비친 자화상

도덕적 불감증, 지그문트 바우만·레오니다스 돈스키스, 책읽는수요일, 2015. 12.

 

도덕적 불감증에 앞서 사족 하나를 달고 시작하련다. 나 스스로 자주 묻는 질문이 있다.

 

숱한 책을 읽고, 영화를 보고, 공부를 하면서 무엇을 얻었는가?”

 

나는 지식을 쌓지도 않았고, 지적인 사람이 되지도 않았다. 대신 타고난 감수성에 후천적 감수성까지 개발되었다. 내 주변인들은 나의 감수성이 타고난 것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단언컨대, 나의 감수성의 상당량은 후천적으로 개발된 것이다. 감수성은 달리 말하면 공감 능력이다. 타인의 고통을 온전히 내 것으로 느끼는 능력이다. 이는 노력 없이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런 나의 태도가 다정이 병()”인 듯 받아들여져 타인의 냉소를 불러일으키기도 하지만, 나는 가급적 남은 세월도 이 능력을 개발하는데 사용할 것이다. 나는 상대의 이야기에 몰입하기 때문에 한 사람을 만나도 에너지가 많이 소비된다. 여럿을, 여러 번 만나는 일이 쉽지 않다. 드문 만남이 각별한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지그문트 바우만의 책은 통찰의 열쇠다. 평범하다 못해 이제는 진부하기까지 한 악의 모습을 들춘다. 윤리적 거울에 우리 자신을 비추어 우리 자신의 본질에 직면하게 한다. 바우만은 이론 중심의 강단 사회학과 차별화된 일상, 상상, 감정의 사회학자다. 일상 안에서 이루어지는 권력의 포섭 속에서 어떻게 주체로 살아갈 것인지에 대해 고민하게 한다. 그것은 결국 시선의 교란이다. 나의 시선에서 벗어나 바라보는 자의 시선이 되는 일이다. 바우만은 보는 자를 보고 생각하는 자를 생각하며 말하는 자를 말한다(14).

 

기술은 당신을 방관자로 머물게 두지 않는다.(14)”

    

원치 않아도 페북을, 블로그를, 밴드를, 카톡을 한다. 지인들이 수시로 올리거나 링크한 글들을 눈팅하면서, 그들의 일상을 짐작한다. 보여주고 싶은 선택된 모습으로 존재를 구성한다. 서로 염탐하고, 누설하고, 댓글을 단다. 이 모든 행위는 자발적이다. 보여주기에 선택된 모습으로 각자의 정체성을 확보한다. 광장에 확성기가 내걸린 고백사회(confessional society)’(54)은 현대사회를 적절하게 표현하고 있다.

 

반면, 거리와 카페 같은 공공장소에서 시선을 나누거나, 서로의 이야기를 듣는 일은 매우 드물어졌다. 폰에 고정된 시선으로 타자의 시선과 마주칠 일이 적어졌고, 우연히 마주쳐도 동시에 무심히 흘려보낸다. 이어폰까지 꽂으면, 소리까지 완벽하게 차단한다. 자신의 성 안에 들어가 있는다. 이런 태도는 누구와도 접촉하지 않겠다는 갑옷처럼 보인다. 이제 낯선 사람과 마주치는 우연의 필연을 경험할 기회는 매우 희박해졌다.

 

인간은 사이의 존재다. 선과 악의 경계 또한 모호하다. 우리가 경험하는 것은 극적인 도덕 선택의 상황이기 보다도, 우리가 자발적으로 선택하는 일상의 상황이다. 내가 소비하는 물건이 나를 표상하고, 내가 링크한 사진이 곧 나의 가치관이 된다. 시민은 사라지고, 소비자만 존재한다. 이러한 미시적인 일상에 현미경을 들이대는 일이 사회학이다. ‘우린 서로 다를 뿐이라고 말하면서, 가치 개입 자체를 거부한다면, 성찰과 통찰을 얻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것이 내가 생각하는 도덕 불감증 상태다.

 

다섯 장으로 구성된 이 책은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과 철학자 레오니다스 도스키스의 대담을 담고 있다. 두 사람은 ‘1. 우리의 모습을 닮은 평범한 악에 관하여, 2. 정치의 위기, 감수성의 언어를 찾아서, 3. 감수성의 상실, 공포와 무관심 사이에서, 4. 소비하는 대학, 새로운 무의미와 기준의 상실, 5. <서구의 몰락>을 다시 생각하며를 주제로 깊이 있는 대화를 펼친다.

 

1. 우리의 모습을 닮은 평범한 악에 관하여

 

악은 늘 어디에나 존재한다. 단 시대마다 다른 형태와 모습으로, 새롭게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대체되는 것(61)이다. 현대 사회의 악은 눈에 띄지 않는 평범함에 있다. 이제 악마는 오래되고 우리에게 익숙한 괴테의 메피스토나 그것의 갱신된 형태인 이스트반 자보의 메피스토가 아니라 일종의 DIY, 즉 우리가 손수 만든 악마(51). “우리의 악마는 이케아, 페이스북의 모습을 한 DIY(52).” 거대한 사건에서 발생하는 악은 공통의 분노를 유발하지만, 악이 일상성은 우리의 감수성을 무감각하게 만든다. ’헬조선을 만든 것은 권력자이기 이전에, “도살장에 끌려 가는 소와 같은시민의 자발적 복종에서 기인한다.

 

2. 정치의 위기, 감수성의 언어를 찾아서

 

소셜 네트워크가 사람들을 연결하고 있으나, 우리는 매체가 의도한 방향을 향해 흘러간다. 그 자체로 민주주의와 인권을 보장해주지 않는다. 대중매체에 의한 시뮬라시옹(모사)이 진품을 대신한다. 실제는 사라지고, 환영이 진실을 대신한다. 정치인은 이제 연예인, 스타의 자리를 탐한다. 탈정치화는 신자유주의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국가와 이데올로기를 자본과 세계화가 대신하며 민영화의 길을 걷는다. 바우만은 정당이 고전적 운영 방식을 탈피하고, 진정한 의미의 대의제 민주주의를 통해서 정당성을 확보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더불어 정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비판적 집단 지성의 참여가 필연적일 것이다.

 

3. 감수성의 상실, 공포와 무관심 사이에서

 

위험 사회에 대한 공포, 노후에 대한 두려움은 현재의 삶을 살기 못하게 하는 신자유주의 기본 지침이다. 바우만은 공포의 이유가 무지, 무기력, 굴욕감이라고 말한다. 불안에서 유발하는 공포는 자발적 복종을 불러 온다. 이 지점에서 바우만은 대중매체를 비판적으로 분석한다. 타인과 자신에게 모멸적인 발언을 퍼붓는 것은 하나의 짝패를 이룬다. 이는 건강한 비판과 무관하다. 자신과 타인을 비하하며 느끼는 대중매체의 즐거움이 어디에서 왔는지를 추적하는 것이 해법이 될 것이다. 바우만은 대중매체를 이렇게 만든 것이 권위주의라고 생각한다.

 

4. 소비하는 대학, 새로운 무의미와 기준의 상실

 

대학의 위기가 한국 사회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 “헬싱키에서의 삶은 늘 일요일 오후 같은데 반해 리가(라트비아의 수도)에서의 삶은 언제나 월요일 아침이다.”라는 라트비아 출신 대학원생의 말에서 - 동유럽을 비롯해서 한국과 같이 2차 세계 대전 이후 성장한 - 개발도상국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현실적인 삶을 인지할 수 있다.

미국에 살고 있는 나의 동생에게 어떻게 지내는지 물었더니, 정말 심심하다고 한다. 겨우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집 앞의 눈 치우기, 그리고 집안 꾸미기가 전부라고 한다. 그래서, ....고 하는데, 그 말에 저절로 공감했다. 저녁이 있는 삶은 그런 것이리라. 부서질 것 같은 노동시장 유연화 정책에서 살아나기 위하여 쌓고 또 쌓아야 하는 스펙 이외에는 선택지가 별게 없다. 능력주의 신화가 계속되는 한, 대학은 학문을 하는 곳이 아니라, 산업인력 양성소의 역할을 벗어나기 어렵다.

 

5. <서구의 몰락>을 다시 생각하며

 

근대 국가 개념은 사라지고 있다. 바우만은 미셸 우엘벡의 어느 섬의 가능성, 예브게니 자먀찐의 우리들21세기의 경고서로 본다. 이 책들은 근대 초기의 우정과 사랑, 달리 말하면 감수성이 사라졌을 때, 인류가 직면할 사회가 어떠할지에 대하여 경고한다. 우엘벡은 니체와 다른 방식으로 신의 죽음을 폭로한다. 신은 사회적이고 인간적인 유대가 완전히 파괴됨과 동시에 죽는다(338). 돈스키스는 이 지점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인간관계의 생로병사 주기를 벗어나는 연인 또는 친구라고 말한다. 우리의 존재함은 사랑하는 사람의 눈으로 존재하는 것(밀란 쿤테라)이다.

 

대담에 기초한 책이기 때문에 목차에 맞춰 촘촘하게 쓰인 글을 기대해서는 안된다. 하지만 전 방위로 사상을 펼쳐가는 두 사람의 대등한 담화는 고전문학에서 현대 일상생활까지 거침이 없다.

 

도덕적 불감증을 읽으면서, 연말, 나에게 또 다른 응답시리즈였던 <스타워즈 7>가 떠올랐다. 가면은 아주 중요한 장치다. 주인공 핀(존 보예가)이 저항군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휴머니즘을 느끼게 되는 순간, 저항군의 피와 고통은 더 이상 대상으로 머물지 못한다. 그 순간 핀은 가면 안에 숨겨왔던 자신의 표정을 드러낸다. 또한 카일로(아담 드라이버) 역시 아버지 루크를 만나는 순간, 가면을 벗고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낸다. 가면을 하나의 메타포로 읽는다면, 우리는 표정을 드러내면 안 되는 도덕적 불감증 사회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 책을 읽으며 가장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참조한 문학들이다. 두 사람이 활용하고 있는 문학서를 알고 있다면, 더 없이 좋은 길잡이가 될 것이다. 저자들이 최고의 책이라고 지칭한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와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 조지 오웰의 1984는 오래 전 읽었으니, 우리들, 아서 퀘슬러의 한낮의 어둠와 같은 디스토피아 문학을 구해 읽어야겠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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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불안과 함께 살아간다 - 희망과 회복력을 되찾기 위한 어느 불안증 환자의 지적 여정
스콧 스토셀 지음, 홍한별 옮김 / 반비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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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점 셋에서 시작해서 별 다섯이 된 책

나는 불안과 함께 살아간다, 스콧 스토셀 지음, 홍한별 옮김, 반비, 2015. 9.

 

이 책을 읽음으로 하루를 득템한 기분이다. 책날개를 젖히면 서문과 목차에 앞서 책에 대한 깨알 같은 찬사가 가득하다. 이 책은 독자 개개인의 불안증에 대해 알아차릴 수 있도록 쓰여 있다. 전문 영역을 다루고 있지만, 쉽게 기술되어 있어서 페이지가 잘 넘어간다. 번역자조차 자신의 삶의 경험으로 역자 후기를 채우고 있다. 리뷰를 쓰는 나 역시 나의 불안증에 집중해 있다.

 

이 책을 읽고 나면 우리는 스콧 스토셀 대신 우리 각자의 이야기를 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 내가 이 책의 평가를 별점 셋에서 시작해서 마지막에 별 다섯을 준 이유다. 있는 그대로, 지금의 자신을 바라보기 위해서는 각자의 사적 역사를 들춰보아야 한다.

    

불안은 타인의 반응에 대한 과도한 의식일까?

 

내 불안증의 출발은 죽은 쥐를 만진 경험에서 출발한다. 초등학교(당시는 국민학교) 1학년, 학교 봉사 활동으로 지역 정화 사업에 전교생이 참여했다. 새마을 운동을 하던 시절이었으니, 학교 앞 하수구 같은 하천에 들어가 젖은 쓰레기를 줍는 것도 이상할 게 없었다. 나름 모범생이었던 나는 대충 청소하는 꼴을 보지 못하는 담임선생님의 체면을 세워주느라 꽤 열심히 쓰레기를 주웠다. 집게도 없었다. 오로지 손으로 오물을 집어 봉투에 담아야 했다. 질척거리는 흙속에서 뭔가가 잡혔다. 죽은 생쥐였다.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그걸 쓰레기봉투에 버리고 나서 하루 종일 밥을 먹지 못했다. 그때부터 내가 세상에서 가장 혐오하는 대상은 가 되었다. 결벽증도 심해졌다. 친구의 도시락 반찬도 먹지 못하고, 아무 곳에서나 화장실을 가는 것도 정신적으로 힘이 들었다.

 

쉬는 시간마다 화장실에 가야 하는 아이

 

한 번의 사건으로 불안증이 자리 잡은 것은 아니다. 역시 초등학교 1학년, 수업 시간이었다. 참기 어려울 정도로 소변이 마려웠다. 백번쯤 망설이다가 담임선생님께 화장실에 가고 싶다고 말씀 드렸다. 선생님은 곧 수업이 끝날 테니 조금만 참으라고 하셨다. 그때 나는 사실 소변을 참느라 현기증이 일어날 정도였다. 시계 초침 소리가 심장에 새겨지는 기분이었다. 쉬는 시간이 시작되었으나, 이미 일어나기가 힘들 정도였다. 겨우 일어나려는 순간, 바지에 소변을 보고 말았다. 오줌싸개로 낙인찍히는 순간이었다. 담임선생님께서 집에 전화하고, 엄마 가 와서 조퇴를 했다. 한 낮의 밝은 햇빛이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그 이후 나는 수년 동안 쉬는 시간마다 화장실에 가지 않으면 불안해서 다음 수업을 받을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한약도 꽤 오래 먹었으나, 효과는 없었다.

 

역시 또 같은 시기였다. 면 동네에 살던 나는 엄마와 자주 전주에 나갔다. 시장에서 한 눈 판 사이에 엄마를 놓치고 말았다. 보이지 않는 엄마를 찾아야하는데, 한참 어린 나는 발자국 한걸음을 뗄 수 없었다. 내가 발을 떼는 순간 엄마와 영영 이별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이 엄습해왔다.

 

그때 내 나이 여덟 살, 삼십 초반이었던 부모님은 거의 매일 싸웠다. 두 분의 성정의 문제라기보다는 그저 사는 일이 고단하고 강팍했기 때문이다. 부모님은 밤낮없이 일을 다니셨다. 하루걸러 하루씩 부모님이 싸우면, 나는 매일 밤 불안했다. 두 분이 헤어지면 누구를 따라가 살지 어린 나이에 고민이 많았다. (당장이라고 이혼할 것 같았던 두 분은 47년째 부부의 인연을 이어가고 있다.) 또 사춘기부터 나는 동생들과 전주에서 자취를 했는데, 먹고 사는 일로 바빴던 부모님은 밤늦게 잠시 들러 음식만 주고 지체 없이 시골집으로 가셨다. 나는 부모님이 다녀가신 밤에 잠을 잘 이루지 못했다. 혹시 사고라도 나서 두 분이 돌아가시면 어떻게 할까하는 두려웠기 때문이다.

 

불안으로 위로 받는 것은 무엇일까?

 

재미있는 것은 내가 자꾸 걱정을 하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느낌이었다. 성장하면서 나의 걱정과 불안은 점점 강화되었다. 걱정을 하면 할수록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보상 심리 같은 것이었다. 혹은 최악의 상황에 미리 적응하고 싶기도 했다. 지금도 나는 최악만은 막아야 한다는 자세로 일한다.

    

마지막 반전이라니. 불안의 긍정 효과

 

불안은 창의성의 토양이다. 불안 없이 예술, 운동, 창작, 성취는 불가능하다. 자신의 불행을 적절하게 활용하며 삶을 풍부하게 살아가야 한다. 일단 30년 전만해도 불안이라는 병명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놀라운 사실 앞에서 Freud에게 감사하다. (내가 가장 몰두하는 주요 환자는 나 자신일세. -지그문트 프로이드가 빌헬름 플리스에게(1897. 8. 43) 또한 자신의 삶 자체를 임상으로 제공한 저자에게 감사하다. 그는 기대 이상의 위로를 독자에게 제공했다. 불안에 대해 알면 알수록 자신을 아는 일에 한걸음 더 다가서게 될 것이다. 나 또한 느끼고, 깊어지기도 전에 정리되었던 몇몇 사랑에 대해서도 성찰하는 계기가 되었다. 우리의 특별한 경험이 때론 누구나 경험했거나, 경험할 수 있는 보편적 현상이라는 점이 놀랍지 않은가.

 

평생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내가 누구인지를 아는 것이지 싶다. 읽고 쓰고 생각하는 과정에서, 현란한 지적 삶을 사는 것이 유희나 목표가 아닐 것이다. 나를 알고, 세계를 좀 더 이해하는 것, 그것이 사는 일이지 않을까 싶다.

 

글을 쓰는 행위는 적당한 두려움과 떨림을 수반한다. 이를테면 불안 그 자체이지만, 꽤 근사한 흥분 상태이기도 하다. 지금 내가 글을 쓰고, 끊임없이 메모하고, 그때그때 문장과 사랑에 빠지는 이유다. 읽을거리가 없으면 불안해하던 과거의 나, 다시 그때의 내가 된 설렘이 있다. 요즘 도서관 책의 강점도 알게 되었다. 밑줄 긋는 즐거움을 포기했더니, 약속한 기일 안에 읽어내는 부지런함이 발휘된다. 누군가 나를 좋아하는 것도, 싫어하는 것도 큰 스트레스였다. 이제 내가 해야 할 일은 적당히 불안해하는 법을 배우는 것(53)”이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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