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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틀러의 철학자들 - 철학은 어떻게 정치의 도구로 변질되는가?
이본 셰라트 지음, 김민수 옮김 / 여름언덕 / 2014년 5월
평점 :
품절
세상에 당연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히틀러의 철학자들』이본 셰라트 지음, 김민수 옮김, 여름언덕, 2014. 5.
철학은 어떻게 정치의 도구로 변질되는가?
아주 사적인 단상 1.
폴란드 크라코프(Krakow)에 가본 적이 있다. “하루에 24계절이 있다.”는 유럽의 속담처럼 그해 여름, 오슈비엥침은 가을처럼 서늘했다. 원주민들이 크라코프는 항상 잿빛 하늘, 서늘한 기운이 감돈다고 얘기했다. 오슈비엥침까지 남은 시간 동안 이른 점심을 먹지 않았다면, 그날 나는 하루 종일 아무것도 먹지 못했을 것이다. 오슈비엥침을 다녀와서는 물 한 모금 넘길 수가 없었다. 때마침 여름방학이었던 유대인 아이들이 곳곳에서 기도하고 통곡 섞인 추모곡을 불렀다. 우리가 성장하면서 중국 하얼빈의 731부대를 한 번도 가보지 않고, 제주도로 현장 체험을 떠나는 동안, 유대 아이들 대부분은 국가가 제공하는 비용으로 2주 이상 오슈비엥침에 머물면서 보고서를 제출해야 하는 의무 교육과정이 있다고 한다. 문제는 제주도 조차 4.3 항쟁의 역사적 장소가 아닌 관광으로만 소비하고 있다는 점이다. 오슈비엥침은 유럽의 중심으로 유대인, 부랑아, 장애인을 모아오기 가장 최적의 장소였다. 히틀러라는 미치광이 한 사람이 이루어낸 참사가 아니라, 유럽인, 세계인의 노골적 지지와 암묵적 동의를 통해서 이루어진 인류의 씻을 수 없는 죄악이었다.
아주 사적인 단상 2.
대학원에서 한 학기 동안 하이데거의 실존주의를 공부했다. 『존재와 시간』을 밑줄 그어 읽어가면서 탐독했던 시간은 지적으로 성장하는 기쁨으로 충만했다. 섬세하게 그의 철학을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철학으로 들어가는 관문 하나를 통과하는 기분이었다. 자기 존재에 대해 물음을 던지는 존재자(dasein)로서 - ‘세계-내-존재(In-der-Welt-sein)'인 - 인간은 늘 새로운 상황 속에 존재한다. 하이데거의 언어에 대한 철학에 대한 이해 없이 푸코, 메를로 퐁티의 철학적 기반을 이해하는데 한계가 있다. 생태주의 철학을 이해하기 위해서도 하이데거를 읽어야 한다. 하이데거는 기술의 탈은폐성과 지배적 기술을 통해서 자연과 세계에 대한 존재를 해명한다. 탈은폐의 방식을 하이데거는 부품(Bestand)라고 이름하는데, 왜냐하면 "어디에서나 즉시 가까이 지정된 자리에 놓여 있어야 할 것이 요청되고 있으며, 그것도 그 자신 또 다른 어떤 요청에 의해 대비 상태에 있기 위해서 그렇기 때문이다. 현대기술이라는 새로운 계기는 용재성과 전재성과 나란히 부품성이라는 새로운 드러냄을 보인다. 자연을 부품으로 드러나게 하는 것은 인간이다. 인간이 세계를 이처럼 부품으로 드러나도록 도발적으로 닦아세우는 담당자이다. 그러나 인간이 그 일을 하긴 하지만 어떤 의미에선 동시에 자신도 마찬가지로 도발적으로 닦아세워지는 자이다. "인간이 그 편에서 이미 자연 에너지를 채굴해 내라는 도발적 요청을 받고 있는 한에서만 이러한 주문 청탁하는 탈은폐의 사건이 일어날 수 있다." 하이데거 공부를 시작하기 전에 지도교수님은 나치의 정치적 도구로써 철학을 제공한 그의 과오를 모르는 바 아니지만, 그렇다고 하이데거를 공부하지 않고 실존주의를 이해할 수는 없다고 말씀하셨다. 그 말씀에 특별한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다. 이미 우리는 그런 방식으로 이광수, 이효석, 서정주의 글을 읽어왔기 때문이다.
아주 사적인 단상 3.
학회에서 가끔 보았던 사회학 전공 교수님. 미국 유학 이후 대학을 자리를 잡은 젊은 교수는 학회의 중심에 있었다. 사회학에서 진보는 부르디외식으로 보면 크나큰 상징자본이 될 수도 있고, 그 학문을 선택하는 것은 개인 삶의 궤적이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앎과 삶을 일치시키는 것이 쉽지 않지만, 사회학은 법학, 의학, 경제학과는 다르다. 학문과 실천이 불일치하는 순간, 그의 연구 성과 모두 거짓이 될 수 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명박 정권이 들어섦과 동시에 인수위원회에 들어가서 이전에 그가 연구한 것과 다른 행보를 걷기 시작했다. 그런 사람들이 기득권을 누리고 사는 세태를 모르는 바 아니지만, 내가 옆에서 지켜보던 분의 변절을 보는 것은 학문한다는 것에 대해서 전면적으로 새롭게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다.
공부의 힘은 당연한 것을 당연하지 않게 보는 것에서 시작한다. 신간 『히틀러의 철학자』는 그동안 당연하게 공부한 철학이 히틀러의 정치적 도구로써 어떻게 복무했는지 철저하게 규명하고 있다. “나치 입문서는 권위적이다. … 어느 한 개인의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많은 사람들의 머리에서 나온 결과물이다(131쪽).” 그가 명명하고 있는 ‘히틀러의 철학자’는 홀로코스트 시기 히틀러 주변의 철학자를 통칭한다. 칸트에서 니체, 알프레드 보임러에서 마르틴 하이데거, 한나 아렌트에서 발터 벤야민에 이르는 철학자들은 모두 똑같은 주제를 가지고 고민했으며 이들의 삶은 서로 연관성이 많았다. 즉 그들은 학생이었고, 교사였고 동료였고 친구였으며 심지어 연인이기도 했다(7쪽).
성실한 사람일수록 나치 복무 역시 더욱 성실했다. 한나 아렌트가 나치의 전범 아돌프 아히히만의 재판을 다루고 있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말하고 있듯이 악의 평범성은 모든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면서 악을 수용하기 때문이다.
니체주의자의 변명
니체를 공부하다 보면, 니체철학의 어떤 부분이 히틀러를 매료시켰을지 짐작할 수 있다. 자기 의지를 실현하는 위버멘쉬(초인), 끝없이 새롭게 변주되는 영원회귀, 연민과 약함에 대한 부정은 히틀러의 게르만민족주의를 실현하기 위한 논리로 악용되었다. 인간을 벌주고 시험에 들게 하는 신(神)을 부정한 니체의 당시 기독교에 대한 혐오에 히틀러는 매료되었다. 사실 종교는 믿음이기도 하지만, 태도라고 했을 때, 니체가 부정한 신은 인간을 나약하게 만드는 신이었다. 니체는 예수에 대해서 최고의 찬사를 보내기도 했다. “천재라는 술을 만들어내는 사람이라기보다는 천재라는 술을 섞는 바텐더에 가까웠다.(57쪽).”는 에른스트 한프슈탱글의 말처럼 니체철학은 히틀러에 의해서 오인된 희생양이다.
『히틀러의 철학자』은 우리가 모르는 새로운 이야기를 하고 있지 않다. 철학을 조금이라도 읽었던 사람이라면 한번쯤 접했을 만한 하이데거, 아렌트, 벤야민, 아도르노 등이 책의 핵심에 등장한다. 역사적 기록을 중심으로 한 이야기 중심의 구성은 소설을 읽는 듯한 편안함을 준다. 그러나 편안한 자세에서도 편안하게 읽을 수 없는 것은 이것이 곧 우리의 현실이기 때문이다. 전범(戰犯) 처벌에서도 하이데거 사상은 살아남았다. 전쟁 이후 패전국인 일본과 독일의 축적된 의학은 미국으로 넘어 갔고, 전쟁은 마취학을 비롯해 20세기 지식의 새로운 역사를 써나갔다.
‘철학이 윤리적 기준을 세우지 못하면 어떤 학문이 그러한 기준을 세우겠는가?’
저자 이본 셰라트의 문제의식을 우리의 현재로 가져와야 한다. 윤리적 인간으로 진화하기를 거부한다면 인류가 만들어 놓은 문명과 종교가 소용될 일은 악을 평범하게 만드는 일 밖에는 없다. 2014년, 대한민국 국민은 세월 호 사건을 통해서 국가의 부재를 경험했다. 진상 규명을 요구하는 희생자 가족들과 시민의 요구를 의사자 대우나 세월 호 대학 특례 입학으로 물타기를 하는 현실 또한 답답하기만 하다. 『히틀러의 철학자』을 통해서 삶의 방향을 설정하는 지침인 지식과 철학의 진정한 역할에 대하여 고민할 수 있는 시간을 갖게 될 것이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