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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의 아토포스
진은영 지음 / 그린비 / 2014년 8월
평점 :
“지나가는 소나기에 자책하는 시인의 『문학의 아토포스』
진은영 지음, 그린비, 2014. 8.
시가 아름답기만 한 날들이다. 시는 아름다워야만 했다. 서향으로 빨리 사라지는 오후 햇빛 탓이고, 일찍 세상 밖으로 얼굴을 내미는 달빛 때문이다. 사념에 젖는 시간을 충분히 누릴 수 있는 만추가 다가오고 있다. 10월 가을, 볕은 더 없이 따뜻하고 숲 그늘은 머리를 맑게 할 만큼 서늘하다. 시인의 자작시평, 시의 배경이 된 에피소드를 읽는 소소한 일상이 가미된 에세이를 기대했던가? 이 책은 기대를 배반한다. 『문학의 아토포스』는 묵직했다. 10편의 소논문에는 시인 진은영이 바라본 지난 수년 동안의 한국의 현실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갈 수 없고, 말할 수 없는 존재를 전제한 현실을 전면으로 부정하고, “어디로든 가고, 무엇이든 되고, 무언가를 말함으로써 우리가 가고 존재하고 말할 수 있는 존재임을 계시”(6쪽)한다.
지난 주 일요일, 토론대회 심사에 참여했다. 고등학생의 “9시 등교 찬반 토론”은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상식’을 넘어서지 못했다. 9시 등교가 등장하기 전후의 한국 사회 상황, 그것을 제기한 집단과 문제를 제기하는 집단이 내세우는 논거를 충분히 살리지 못한 채, 중언부언 답변하는 모습이 안타까웠다. 입론, 교차조사, 반박의 토론 절차도 무시한 채, 자기가 준비한 자료를 과시하려는 태도를 보이는 십대 아이들을 보면서, 우리가 같은 언어를 사용하면서도 제대로 된 의사전달에 어려움이 자주 발견되는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토론은 절대 상대를 굴복시키기 위한 수단이 될 수 없음을 우리는 경험으로 안다. 토론으로 상대를 승복하게 할 수 있다는 것은 과도한 욕심이다. 토론의 과정에서 내 주장의 논거를 좀 더 튼튼히 세우는 것이 토론에서 얻을 수 있는 가장 큰 성과일 것이다. 또한 상대의 이야기를 경청하는 태도를 기를 수 있다는 점 또한 간과할 수 없다. 사람은 말(또는 글)을 통해서 배우는 것이 아니다. 괴테의 말처럼 오직 사랑하는 사람을 통해서만 우리는 배울 수 있다. 그런 면에서 진은영의 글은 힘이 있다. 책상에서 펜으로 완성된 관념의 글이 아니고, 사랑을 품은 글이기 때문이다. 한 시인의 진지한 고민과 고뇌가 정치, 예술, 삶을 하나로 아우르게 만든다.
감성의 분할, 감성적 분배
이 책을 읽는 내내 ‘고귀한’ 시인, 진은영은 독자로 하여금 열패감을 느끼게 한다. 시인, 철학자, 실천가가 이루어내는 트라이앵글의 한 중심에 그녀가 있다. 문학과 정치를 어떻게 관계 지을 것인가에 대한 시인의 고민의 성과가 한권에 오롯이 담겼다. 참여시를 쓰는 것과 사회 참여 사이에서 시인이 취할 수 있는 행동은 무엇일까? 『문학의 아토포스』는 - 그녀가 발견한 보물 쪽지 - 자크 랑시에르의 『감성의 분할』을 어떻게 읽어나갈 것인지에 대한 출발점이 되었다. 정치적인 것은 감각적인 것을 분배하는 활동, 감성적 혁명을 가져오는 활동이라는 랑시에르의 정의에 따르면, 낡은 분배를 바꾸려고 노력하는 예술은 정치가 된다. 시인에게 정치는 ‘감성적 혁명’(311쪽)이다. 이러한 정의와 분석에서 예술과 정치는 이분법으로 나눠지지 않는다.
공간의 트랜스포머
“어떤 방식으로든 정치는 자신의 미학이 있고 미학은 자신의 정치가 있다.”(29쪽)
삶을 미학적으로 가꾸는 것에 대한 고민은 그리스 이후 오래된 철학적 고민이다. 모든 사람의 삶의 목적이 자신과 인생을 미학적으로 가꾸는 일이라고 한다면, 감수성 남다른 시인의 삶은 어떠하겠는가? 시인은 서정시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시대에 서정시를 쓸 줄 알아야 한다. “시인은 지나가는 소나기를 바라보며 자책한다.”(32쪽) 진은영은 “시를 쓰는 지게꾼”의 전범인 박노해, 백무산, 김수영과 다른 방식의 혁명의 방식을 발견한다. 이 책의 제목이 언급하듯 문학의 아토포스(비장소성)은 문학이 특정한 공간에 해당하지 않음을 그대로 보여준다.
문학적 기투는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가 ‘아토포스’라고 불렀던 것을 닮아 있다. 아토포스(atopos)는 장소를 의미하는 그리스어 토포스에서 유래한 단어이다. 여기에 ‘a'는 부정과 결여의 접두사로서, 아토포스는 비장소성으로 번역될 수 있다. 이 단어는 어떤 장소에도 고정될 수 없어서 그 정체를 알 수 없다는 의미로 소크라테스의 대화자들이 그에게 붙여준 것이라고 한다.
문학은 문학이 이루어지는 특정한 공간이 따로 없다고 했을 때, 시인은 거리에서, 토론장에서, 시위에 참여하여 시를 쓴다. 공간이 변하면서 시는 온전히 시인 혼자서 쓰는 작업이 아닐 수 있다. 함께 쓰고, 단어를 선물하여 쓰고, 지인의 시로 트랜스하면서 변형할 수 있다. 주어진 공간의 경계에 틈을 만들고, 허무는 과정에서 미학은 예술의 영역을 벗어나 정치 그 자신이 될 수 있다. 때문에 문학은 시간에 고정되지도 않는다. 비공간성은 비시간성과 연결된다. 공간가 시간이 허물어지면서 일과 놀이의 구분이 사라진다면 사회적 지위와 역할의 경계 또한 서서히 사라질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사회적인 연대를 통해서만 이루어낼 수 있다.
오래 전, 대학 1학년, ○○ 전자 파업 노동자들의 투쟁에 참여했었다. 오랜 시간 체납된 월급으로 고생하고 있을 내 또래 여공들을 응원하는 시간은 쁘띠적 성향을 가진 나에겐 여러 가지로 힘든 시간이었다. 목숨을 걸고 싸울 것을 기대했지만, 여공들은 멋진(??) 대학생 오빠들과 유사 연애에 빠져 있었다. 당장 먹을 라면이 없다던 그녀들은 항상 꽃단장에 여념이 없었다. 그녀들의 모습이 천박하다고 느꼈다. 아주 오래전 이 기억이 이 책을 읽는 동안 내내 떠올랐다. 투쟁에서는 투쟁만 해야 아름다운가에 대한 성찰이 일었다. 투쟁의 장소에서 연애도 하고, 공부도 하고, 청춘을 가꾸는 일이 부끄러운 일이라고 생각한 나의 왜곡된 결벽증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예술은 천상의 것인가? 지상에 울려 퍼지는 노래인가? 진은영 시인을 통해서 다시 한번 ‘가능성’이라는 아름다운 말을 최선을 다해서 음미하는 일(321쪽)을 경험한다. 손 안에 있음에서 눈 앞에 있음으로, 도구적 존재에서 현전하는 존재로 관계 맺는 것은 관념에서만 가능한 추상적인 일은 아니다.
다시한번 건드려지는 사족 같은 질문 하나.
‘가난’은 왜 과거가 될 때 아름다운가? 가난은 왜 ‘선택’이 될 때 아름다운가? 가난하지 않아도 되는 ‘시인’의 가난은 아름답다. 가난하고 가벼운 시인의 글을 펼쳐 보니, 내 삶은 더욱 더 비곤해지고, 무거워진다. 할 수 있고, 가질 수 있으나 선택하지 않는 고고함을 원하는 나의 허영이다. 가난할 수밖에 없어 가난한 내 영혼을 꼭 안아주고 싶은 열패감이다.
그렇게 냉소하고 돌아설 예측이나 한 것처럼 신형철의 발문은 다시 발등을 꾹꾹 찌르는 압정이 된다. 그의 글은 핀으로 내 발등을 꾹꾹 누르며 원점으로 선회하게 한다. 세상을 다 삼켜버린 것 같은 검은 바다에서 남파선에 깜박깜박 신호를 보내는 그들의 등대를 발견하기 때문이다. 다시한번 나에게 묻는다. (반복되는 가방끈 긴 사람들의) 랑시에르 참조였다고 생각하는지, 나의 무의식에 묻고 또 묻는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