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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의 탄생 - 사라진 암호에서 21세기의 도형문까지 처음 만나는 문자 이야기
탕누어 지음, 김태성 옮김 / 김영사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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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로, 더불어 고유한 이름을 갖게 된 아름다운 글자

 

한자의 탄생, 탕누어 지음, 김태성 옮김


 

한문에 해박한 중년의 수학 선생님이 계신다. 말씀도 많이 하지 않지만, 가끔 하시는 이야기도 한학자처럼 고전적이다. 이해하기 어려운 수학을 느리고 묵직한 목소리로 가르치는 선생님을 요즘 아이들이 견뎌낼 수 있을까? 졸음 쏟아지기 딱 좋은 조건이다. 예상외로 반전이 있다. 선생님은 꽤 인기 있는 수학 선생이다. 수학 원리를 한자로 풀어가며 설명하는 선생님을 아이들은 참 좋아한다. 요란하지 않은 웃음소리가 교실에 번진다. 다양한 멀티미디어가 없어도 아이들 눈빛이 맑아진다. 한자가 품고 있는 이야기가 수학을 향한 아이들의 호기심을 자극하고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어주는 모양이다.

 

글자마다 고유성(개별성)을 지닌 갑골 문자는 각자의 형상에 알맞는 특별한 의미를 함의하고 있다. 글자마다 조형이 될 수 있었던 기원이 있다. 유사할 수 있어도 동일한 글자는 없다. 시간에 따라 글자의 쓰임이 바뀌고, 쓰임은 글자의 외양을 다르게 만들며 분화했다. 글자에 쌓인 의미는 (보르헤스의 말처럼) 문자와 문자가 서로 다치지 않으며 의미의 호환을 이룰 수 있었다. 거북 뼈에 새겨진 글자는 의사소통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그 시대 사람들의 사유 방식과 생활양식을 담고 있다. 글자를 도구가 아닌, 철학으로 바라보게 하는 까닭이다. 시간을 분절하여 사용할 필요가 없었던 시대에는 시간을 구체적으로 표현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소용되지 않는 단어는 자연스럽게 사멸하거나 정체된다. 태양이 중요한 농경사회에서는 태양에 관한 글자가 많을 수밖에 없다. 태양은 생존과 생산에 없어서는 안되는 존재였다.

 

문자는 시간을 붙들려는 인간의 노력이다. 갑골 문자는 상형, 전주, 가차를 거쳐 왔다. 소멸하는 시간은 글자로 물화(物化)되어 새겨지면서 축적되었다. 인간의 사유 과정이 주체적 위치를 상실(22)하게 만들었을지라도, 문자는 인간을 소멸하지 않는 존재로 만들었다. 인간은 죽음과 함께 사라지지 않는다. 인류 유산은 문자를 통해 켜켜이 쌓여왔다.

 

이 책의 미덕은 갑골 문자의 아름다움을 이야기하는데 그치지 않고, 한자를 근현대의 문학·철학·미학과 연결하는데 있다. 사상가의 주장을 갑골문자 해석에 차용하는 방식이 놀랍고 재미있다. 꼬리 미()를 보고 마르케스의 백 년 동안의 고독과 자신의 아내이자 작가인 주텐신의 나는 법을 배우는 멍멍을 떠올리며 꼬리 가 아름답고 선명하게 다가오는 사적인 감수성을 풀어낸다. 과도한 주관, 헤밍웨이와 보르헤스까지 들어가면 꼬리 를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글자로 표현한다.

 

저자는 야만인의 신화 형성 과정을 연구한 레비스트로스를 차용한다. 레비스트로스의 수선공이야기를 가지고 언어의 변천사를 설명한다. 수선공의 수선 과정은 이미 형성된 문자를 새로운 요구에 맞게 고쳐 쓰는 것을 의미한다. 제한된 공구를 가지고 원래 있던 사물을 다시 쓸 수 있게 수선하는 과정, 처음의 것으로 되돌리는 것이 아니라, 필요에 맞게 고쳐내는 것, 제대로 갖추어 있지 않지만, 용도에 적합하게 만들어 내기 위해서는 내 손에 어떤 도구(글자)가 있는지의 한계 상황이 지배한다. 글자는 완제품의 형태가 될 수 없는, 어딘지 부족한 상태로 계속 만들어지고, 그렇게 쓰일 수밖에 없는 숙명에 처해 있다.

 

아인슈타인이 추구한 대리석 무늬 속의 세계는 부호 세 개로 구성된 투명하고 확고한 세계다. 이와 반하여 나무 무늬 속의 세계는 짐작하겠지만, 수선공이 머무는 세계로 우연을 통해서 끝없이 변주되는 세계다. 글자의 세계는 부서지고 못이 박히고, 박힌 못이 빠지고, 빠진 흔적에 나무 조각이 덧이어지는 과정이 반복된다. 매끄럽고 완벽한 빛의 세계가 아니라, 부서지고 고쳐 쓰는 불안한 어둠의 세계다.

 

보르헤스는 인간 세계에 완벽한 사전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했다. 현실 세계의 사물에 일일이 대응하는 언어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럴 가능성도 없다. 우리의 모든 감정과 우리가 끊임없이 새로 만들어내는 개념과 창조물,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져버리는 생각들을 재빨리 찾아서 신나게 표현할 수 있는 사전은 존재하지 않는다.(122) 나의 생각이 타인에 전달되는 과정에서 의미가 미끄러질 때마다 언어로 형용할 수 없는 갑갑함이 내면을 채운다. 결국 우리는 차선책으로 언어를 존재 표현의 수단으로 사용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모든 분야를 넘나들었던 한가로운 구경꾼, 진정한 문인, 발터 벤야민은 탕누어가 꿈꾸는 진정한 학자인 듯하다. 암울했던 삶과 비운의 죽음 속에 밀봉되어 있는 벤야민의 글은 반세기 이후에야 사람들의 주목을 받는다. 고대의 중국 글자를 대했을 때 벤야민이 어떻게 반응했을지에 대한 저자의 상상은 유쾌한 농담처럼 받아들여진다. 벤야민에 대한 저자의 연모는 나 또한 공감하는 내용이어서 여기에 직접 인용한다.

 

벤야민은 내가 개인적으로 가장 가슴 아파하는 사람, 가장 애석한 영혼이기도 하다. (그 다음으로 애석한 인물은 폐병으로 마흔넷의 나이에 세상을 떠난 러시아의 위대한 소설가 체호프이고 그 다음이 반 고흐다. 고흐는 자신을 완전히 불태이고 나서총으로 자진했다.) 그는 좌익 유태인이라는 신분 때문에 제2차 세계대전 동안 내내 게슈타포의 추적과 박해에 시달려야 했고, 생의 마지막에는 가난과 병이 한꺼번에 닥치면서 1940년 프랑스와 스페인의 국경에서 절망적인 자살을 선택하게 됐다. 마흔여덟의 나이, 당연히 그의 사상도 가장 성숙했을 시기였다.”(160~161)

 

 

저자 탕누어는 과거로의 회귀를 주장하고 있는가?

 

빠르게 쓰기 위한 목적의 간편화가 진행되면서 표음&표의 문자. 과연 표음 문자는 부호화에 투항한 것일까? “어떤 세속의 권력도 문자를 통제할 수 없다.”(286)는 그의 주장에 동의하지만, “질량이 가볍고 부호가 투명하며 운동 저항력도 적은 완벽한 언어 기록 도구”(50)가 되면서, 언어가 자주성을 상실했다고 보는 저자의 주장에 동의하기는 어렵다. 6천종의 서로 다른 말들이 매달 두 종씩 사라진다는 데이비드 크리스털(언어의 죽음)이 맞다 하더라도 언어 역시 생로병사의 과정을 거치며 사멸해가는 유기체라는 생각이 든다. 인간의 사유방식이 변화하듯, 언어 역시 인간과 함께 변화의 과정을 겪기 마련이다. 언어의 출발이 타인과의 의사소통, 과거·현재·미래를 연결하기 위한 기록에서 시작되었다면, 세계인으로 살아가는 21세기 인류에게 공통의 언어는 연대의 힘이기도 하다. 그것이 모국어의 사멸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탕누어의 말대로 보호해야 할 것은 문자가 아니라 우리 자신(331)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영화 <어바웃 타임, About time>을 떠올린다. 집안의 특수한 유전자로 인해 시간을 되돌리는 능력을 가진 주인공은 그의 아버지에게 되돌린 많은 시간 동안 무엇을 했는지 묻는다. 아버지는 명랑한 표정으로, 세익스피어와 같은 고전을 여러 번 다시 읽었다고 답한다. 그 아버지가 탕누어의 메타포처럼 느껴진다. 탕누어는 시간을 회귀하여 고전을 읽고 또 읽는 사람이지 않을까 싶다. 고대 문자와 현대를 접합하는 놀라운 힘을 가지고 있다. 읽고 또 읽어도 새로운 의미를 가져오는 고전만 보기에도 인간의 시간은 매우 짧다. 한번 밖에 주어지지 않은 삶, 저자 탕누어의 책과 삶의 태도는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을 어떤 일로 채워나가야 할지를 고민하게 한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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