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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와 하녀 -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마이너리티의 철학
고병권 지음 / 메디치미디어 / 2014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지식이 아닌 실천을 위한 (별을 바라보는) 하녀의 철학,
『철학자와 하녀』 고병권 지음, 메디치미디어, 2014.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마이너리티의 철학”
포스트모더니즘이 뜨거웠던 1990년대 후반, 현란한 언어로 포장된 경구로만 읽히던 니체를 제대로 읽기 위한 공부를 시작했다. 교수님을 중심으로 모인 여섯 명의 스터디 멤버에게 니체는 탈근대를 이해하기 위해 넘어야 하는 거대한 산이었다. 『도덕의 계보학』,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즐거운 학문』,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을 읽으면서도 니체 철학의 근간을 세우는 것이 우리에게 쉽지 않았다. 끊임없이 해석을 요구하는 니체 철학은 오독의 오독을 반복하는 과정의 연속이었다. 그렇게 보내던 시간이 꽤 흐른 후, 어둠에서 발견한 한줄기 빛이 고병권 선생님이 번역한 『한권으로 읽는 니체』였다. 그 이후 『 니체의 위험한 책,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니체, 천개의 눈 천개의 길』은 니체 원전을 읽을 때 옆에 두고 참조해야 하는 귀중한 책이었다.
‘수유 너머’에서 잠시 뵈었던 고병권은 시간을 넘나들고, 공간을 변형하는 트랜스포머였다. 호모쿵푸스로 살아가고자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수유 너머는 공동체 운영의 방식을 벤치마킹할 수 있는 실험적인 공간이었다. 좀 더 나은 삶을 꿈꾸는 사람들의 윤리적인 실천을 가능하게 하는 연구실이었다. 그곳에서 (거의 훔쳐보는 것에 가까웠던 시선으로 바라보기에) 고병권 선생님은 젊은 철학자였으나, 생물학적 나이와 무관하게 무겁고 깊고 강직했다. 선생님의 역서와 저서를 통해서 니체를 이해하는데 큰 도움을 받았다는 이야기만 겨우 전했을 뿐, 대화를 나누지 못했으나, 젊은 철학자에 대한 고마움으로 그의 책이 출판되면 빼놓지 않고 구해 읽고 있다. 동시대를 살아가는 이토록 멋진 철학자가 있다는 것에 위로 받으며 『철학자와 하녀』를 아주 천천히 읽었다. 때마침 만난 복음서와 같은 다소 격앙된 마음으로, 심장이 밑줄 긋게 하는 글들 행간에서 아주 오래 머무르며 이 책을 읽었다. 고병권의 글은 죽비가 되어 독자의 등을 내려친다.
별을 보는 철학자, 생계를 위해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하녀, 그 둘이 바라보는 세계는 형이상학과 형이하학의 넘나들 수 없는 경계를 이룬다. 저자는 하녀가 별을 바라보기를 바란다. 땅에 발을 딛고, 하늘을 바라보기를 바란다. 이 땅의 최소수혜자에게 철학이 세상을 살아가는 무기가 되어주기를 바란다. 사회의 부품으로 순종하기를 강요하는 명령들에 고개를 꼿꼿하게 쳐들 수 있는 힘이 철학에서 나올 것으로 믿는다.
인생은 누구에게나 예외 없이 언제 뒤통수를 칠지 모른다. 인생을 전후로 가르는 큰 일을 치룬 지인의 여전한 모습을 보면서 그 힘이 어디에서 나왔는지 궁금했다. 지인께서는 십수년 동안 철학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으셨다. 특별한 목적을 두지 않았던 무사무욕적인 공부는 선생님을 자유롭게 만들었다. 나 또한 힘든 시기의 초조함을 극복하기 위한 바탕을 만들어준 것이 니체와 함께 한 세월의 힘이었다. 내가 그들의 말을 들을 수 있는 귀만 갖게 된다면 벗은 시공을 초월해서 어디에서든 구할 수 있다. 나와 같이 비혼(非婚)을 선택한 사람들이 모이면 공통으로 이야기하는 것이 있다. 사소한 사건 하나도 그냥 넘기지 못하는 예민함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우주적인 차원의 고민을 하는 것이 싱글의 삶이라고. 내 아이와 가족에 갇혀서 세상을 보지 않으므로 사해동포주의를 발휘하게 될 때가 참으로 많으면서도 성찰의 성찰을 반복하며 살아가는 몽상가들이 많다.
“철학은 지옥에서 하는 것, 배움 이전에 배움이 일어난다.”
천국에서는 고민할 게 별로 없다. 선택하는 순간과 문제를 해결해야 할 때 우리는 머리를 싸매고 고민을 시작한다. “머리에 타는 불을 끄듯 공부”는 박학다식해 지는 것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 애초에 답이 따로 잊지 않기 때문에 깨닫는 과정의 연속이다. 타자의 가치와 기준에 자신을 맞추어 살아가면 항상 초조하다. 초조한 사람은 현재를 충분히 즐길 수 없다. 사다리는 오르고 올라도 정상이 없으니, 상승만을 향해 질주해야 한다.
“노파나 노인에게서 원숙미 같은 것을 보고, 아이들의 매력을 순결한 눈으로 본다.”(45쪽) 『무지한 스승』의 인용 글을 통해 저자는 선생은 가르칠 수 없어도 학생은 배울 수 있음을 언급한다. 학교는 가르치는 곳이 아니라, 배우는 곳이다. 세상은 배움의 수련장이고, 스승이 따로 없이 배움은 누구를 통해서도 이루어질 수 있다. 능력이 불평등의 증거가 될 수 없다는 이야기 또한 새겨볼만하다.
“사소한 것은 사소하지 않다.”
3장에서는 “사물과 사람이 맺는 각별한 관계”에 대해서 생각할 수 있었다. 얼마 전 십삼 년 동안 탔던 자동차와 이별했다. 오래 탄만큼 잔고장이 많아서 경제적으로 손해가 커지면서 어쩔 수 없이 보낼 수밖에 없었다. 폐차 값도 안나온다는 반협박으로 차 값도 거의 받지 않고 팔았다. 그 이별의 마음은 인간의 이별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힘든 주인 만나서 고생 많았을텐데, 이후에라도 다른 곳으로 팔려가 고생하지 않았으면 하는 맘이 들었다. 자동차는 혼자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낸 곳이기도 했다. 십여 년 동안 내가 겪었던 무수한 일에서 발생했던 나의 만 가지 감정을 다 알고 있는 사물이었다. 그러니 애완견과 가족이 되는 것인들 이해 못할 이유가 되겠는가? 그 이후에는 서로가 서로를 길들이게 될 터이므로, 물건을 집에 들이는 일에도 여러 번 고민하고 결정했다. 사랑하는 것에 대체물은 없다. 사랑을 잃고 나면 그 슬픔은 내 안 어딘가에 자리를 잡고 있다가 불쑥 불쑥 밖으로 뛰쳐나온다. 누구도 대체할 수 없는 각자의 자리가 있는 법이다.
“함부로 무릎을 꿇어서는 안 된다.”
“멋대로 원망하도록 하라. 나 역시 한 사람도 용서하지 않겠다.”는 루쉰의 글에서 힘을 얻었을 수 있었다. 좀 더 선한 인간이 되어야 하는 무수한 이유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팔랑귀처럼 타인의 평판에 마음이 흔들릴 때가 더러 있다. 나를 싫어하는 사람을 견뎌내지 못할 때마다 스스로에게 최면을 건다. 사람이 사람을 싫어하는데 무수한 이유가 있다고. 손익을 따져야하는 관계 때문일 수도 있고, 무엇을 유능하게 해내거나, 무능하기 때문일 때도 있다. 하다못해 과거에 불쾌한 경험을 하게 한 사람과 닮았다는 이유로 싫어지기도 한다. 그 모든 것에 예민하게 굴다보면 옳은 소리를 낼 수 없을 때가 많아진다. 상당히(?) 많은 적을 인정하는 것, 그리고 견뎌낼 때만 좀 더 윤리적인 인간이 될 수 있다. 삶에서 무언가를 배우고자 한다면 자신이 동의하지 않는 것에 쉽게 고개를 끄덕이거나 무릎을 꿇는 짓을 해서는 안된다(149쪽).
얼마 전 직장에서 함께 해결해야 할 숙제가 주어졌다. 직원들이 한동안 숙직과 야근을 책임져야하는 상황이었는데, 결정권은 남자 직원들에게 달려 있는 분위기였다. 대부분의 남자 직원들은 남녀평등 차원에서 함께 숙직을 해야한다고 주장했고, 몇몇 남자 직원은 남자 직원이 숙직을, 아이들이 있는 여직원이 야근을 맡아서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것은 남성의 배려 차원이었고, 여직원은 구차하게 그들의 결정을 기다려야 하는 상황이었다. 회의 분위기는 살벌했고, 고성이 오가기도 했다. 중요한 것은 이 회의 바로 직전에 우리 모두 다문화연수 30시간을 함께 받았다는 것이다. 그 연수를 통해서 각 지역과 민족의 문화에 대하여 알게 되기는 했으나, 다름과 차이를 존중해야 한다는 각성의 단초를 마련한 연수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한동안 중동과 이슬람에 대한 대화가 오가기도 했는데, 그것은 단지 지식과 정보 수준이었다. 이해타산으로 굳어진 철옹성의 이기심에는 바늘 하나 뚫고 들어갈 구멍이 없었다. 앎과 삶이 정확히 분리되는 지점이었다. 그때 나는 『철학자와 하녀』를 읽고 있었다. 부조리한 세상, 모순된 인간들, 그 세상 안의 하녀인 나는 문득 하늘의 별이 보고 싶어졌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