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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의 시대 - 뉴스에 대해 우리가 알아야 할 모든 것
알랭 드 보통 지음, 최민우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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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어준의 팟캐스트를 들으며, 알랭 드 보통의 책을 읽다.

뉴스의 시대-뉴스에 대해 우리가 알아야 할 모든 것』알랭 드 보통, 2014. 7.


 

바야흐로 뉴스의 시대다. 직접적인 관계를 맺고 상호작용하는 관계도 아니지만, 뉴스의 중심에 있는 셀리브리티는 더 이상 우리 삶과 무관한 외부자가 아니다. 나의 주변에서 일상을 주고받는 지인처럼, 때론 지인보다 더한 심정적 근접 지점에서 우리와 함께한다.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은 뉴스가 되어 우리에게 살아있는 'real'이 된다. 하루에도 무수한 사건이 일어나지만, 뉴스에 세팅된 아젠다만이 실제가 될 수 있다.

 

 

손석희 앵커가 진행하는 방송을 들으며 세계에서 일어나는 현상들을 알게 되고, 그 지식을 바탕으로 쟁점을 분석한다. 그가 보여주는 세계가 내 시선의 프레임을 형성한지 십 수 년이다. MBC 시선집중을 13년 듣는 동안, 그는 몇 번의 휴가도 떠나지 않았던 ‘성실한’ 앵커였다. 그가 며칠 휴가를 떠났을 때 방송을 들으며 느꼈던 어마어마한 존재감이라니. 나의 삶과 무관한 ‘샐리브리티’인 그의 부재가 미치는 영향이 상당했다. 그가 종편을 선택했던 시기는 공중파 3사의 문제점이 정점을 찍을 즈음이었다. 어떤 상황에서든, 누가 나오든 혹시 실수로라도 종편 채널이 열리면 화들짝 놀라며 다른 채널로 zapping하던 나는 한동안 방황의 나날을 보냈다. 그러던 어느 날 헤어진 연인을 찾아가듯 슬그머니 JTBC를 시청하기 시작했다. 자본이 빚어낸 종편에 승선하는 내 모습이 부끄러웠다. 수치심을 감내해야 했을 만큼 세상을 보고 들을 수 있는 채널이 없다는 것은 견디기 힘들었다. 혹 손석희씨가 ‘시선집중’을 떠나면서 말했듯, 그의 선택은 ‘훗날’ 평가될 것인지도 모르겠다. JTBC 만큼 세월 호 보도에 시간과 노력을 기울인 종편과 언론 매체가 없었다는 사실을 생각해보면, 그가 하는 말이 허투루 내뱉은 말은 아닐 것이다.

 

 

직업 특성 상 나는 뉴스를 보지 않을 수 없는 위치다. 만일 ‘뉴스’를 알지 않아도 되는 업을 가지고 살아간다고 해서, 뉴스를 멀리할 수 있을지는 여전히 의문이다. 스마트 월드의 스마트 기기는 시공간의 제약 없이 뉴스를 수집할 수 있게 만들었다. 십 년 전만 해도 한 달 내외의 배낭여행을 마치고, 비행기에 오를 때 접하던 신문 냄새를 잊을 수 없다. 모국어로 쓰인, 내 나라의 기사를 읽다 보면, 그제서야 안도감이 찾아왔다. 보통의 표현에 따르자면, 어느새 나에게 ‘뉴스’가 종교 자리를 차지한 것일까? 아침과 저녁 기도가 이루어질 시간, 나는 뉴스를 읽는다.

 

 

영국 사람은 외출할 때 세 가지를 챙겨가지고 나간다고 한다. 아파트 키, 지갑, 책 한권. 그렇게 간단한 소지품을 가지고 노팅힐의 어느 카페에서 마주칠 것 같은 잉글리쉬맨이 알랭 드 보통이다. 스위스에서 태어나 영국에서 수학(修學)했다고 하더라도, 나에겐 모두 유럽인일 뿐이다. (그 안에서 이루어지는 인종적 분류에 어려움이 있는 아시안이기 때문에.) 나도 주 이상을 보통의 책을 손에 들고 다녔다. 처음부터 끝까지 탐독해야 할 이유가 없다. 어디를 펼쳐도 첫 페이지가 되고, 새로운 이야기가 시작된다. 보통은 자신과 뉴스와 마주치는 순간(17쪽)을 모았다. 소소한 사적 경험에 따른 단상이 모여서 한권의 책을 이루고, 하나의 철학을 완성한다. 일상에 대한 성찰이 이룩한 산물, 그것인 보통의 책이다. 뉴스에 대한 단상을 모아보는 것도 의미 있을 듯하다. 뉴스는 독자에 의해서 다시 한번 가공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리는 지점이다.

 

 

뉴스는 ‘정상성’을 가정하고, 중립적인 ‘사실’ 보도를 강조한다. 뉴스가 다루고 있는 것은 정상성 좌우에 있는 비정상을 다루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우리의 삶과 이질적인 것일수록 메인 뉴스가 될 수 있다. 정상성이 하나의 가정에 불과하듯, 객관적인 보도 또한 하나의 허구에 불과하다. 편향에 대해서 좀 더 관대해져야 한다는 보통의 주장은 하워드 진의 “달리는 기차에서 중립은 없다.”는 은유와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다.

 

 

뉴스는 두려움과 공포를 양산한다. 재난, 질병, 저출산 고령화 사회에 관한 보도는 나의 미래를 두려움과 공포로 만들어 버린다. 끔직하고 잔인할수록 뉴스의 가치는 높아진다. 강력 범죄에 내성이 생기기 때문에, 보도는 더욱 자극적이 될 수밖에 없다. 정치적 사건을 무마하기 위해서 잔혹한 범죄가 이루어진 과정을 여과 없이 보도하는 것을 보면, 뉴스가 추구하는 본질이 무엇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을 때가 많다.

 

 

보통이 예견한대로 대중의 수만큼 다양한 뉴스 채널의 세계(278쪽)를 기대해도 되는지는 여전히 모르겠다. 자신의 취향이 고려된 맞춤형 방송이 세팅될 수 있는 시스템이 갖추어질 수 있을 것이라는 주장에는 동의한다. 나 또한 손석희의 방송을 통해서 정보를 얻고, 김어준의 파파이스, 뉴스타파 등의 팟캐스트를 통해서 깊이 있는 분석과 통찰을 제공받고 있다. 종편 JTBC는 이번 주부터 ‘뉴스룸’으로 개편하면서 8시부터 9시30분까지 30분 연장 방송을 시작했다. 하루에 1시간 30분 동안 보도할 뉴스거리가 있을지에 대한 염려는 첫 방송에서 해결되었다. 뉴스라고 하기엔 깊이 있는 정보 분석까지 곁들여졌다. 다만 보통의 말대로 각자가 필요한 뉴스,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의 조화를 이룰 수 있는 인격을 ‘대중’ 이 갖출 수 있을지에 대한 회의가 든다. 지난 수년 동안 나타난 언론의 행태와 대중의 정치적 선택을 보면, 공적 영역에서 제 역할을 할 수 있는 대중의 진화가 쉽지는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뉴스의 수명은 짧다. 많은 사람들은 매번 새로운 뉴스를 원한다. 세월호를 지겨워하는 사람들의 증가는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세월호에 대한 우리 각자의 책임은 시간이 지나면서 희석되었고, 사람들에게 세월호는 뉴스 이상의 의미가 아니었을지 모르겠다. 이 지점에서 방문 내내 세월호 유가족과 함께하며 세월호를 현재의 시점으로 호명한 프란체스코 교황께 감사할 뿐이다. 제도화된 기억상실증(288쪽)은 우리에게 도덕 불감증을 가져다준다. 보통의 주장처럼 뉴스 의존증에서 벗어나서, 상상 속에서만 연결되어 있는 타자와 실제 연결망을 형성하는 것이 우리 삶을 더욱 독창적으로 만들 것이다. 결국 자신의 윤리와 가치 속에서 각자의 삶을 구성하는 것이 훨씬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일상에 관한 단상이 모이면, 우리 역시 각자가 추구하는 각자의 가치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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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치킨전 - 백숙에서 치킨으로, 한국을 지배한 닭 이야기 따비 음식학 1
정은정 지음 / 따비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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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억을 호출하는 대한민국 치킨 정은정, 따비, 2014. 7.

 

지난 봄, 아는 지인이 키우던 닭을 조류독감으로 모두 매장했을 때도, 우리 집 닭장 속의 암탉들은 살아남았다. 아는 분에게 분양받은 오골계 병아리 열 댓 마리 중 몇 마리는 마당에서 개에게 잡혀 먹었지만, 나머지는 부모님의 보살핌에서 무럭무럭 잘 자라서 유정 란을 매일매일 생산했다. 그중 몇 마리는 지난여름 복날을 피해가지 못했다. 그리고 현재 다섯 마리가 닭장을 지키고 있다. 일 년 동안 우리 집 마당에 가축 냄새가 진동하고 있지만, 한울타리에 여러 생명체가 함께 지내면서, 농촌에서 산다는 것에 대해서 알게 모르게 배우는 바가 컸다.

 

 

대한민국 치킨 을 읽는 시간은 유쾌했다. 수준 높은 지식이 주는 무게와 앎의 통찰 때문에 마음 살을 앓기 보다는 맞아, 맞아의 공감을 던지며 함께 수다 떠는 기분으로 책에 붙어 읽었다. (사실 나이를 먹으면, 무지에 대한 통찰, 다름에 대한 각성 보다는 맞장구치며 공감하고 싶은 때가 훨씬 더 많기는 하다.) 번역체도 아니고, 낯선 이야기는 더더욱 아니며, ‘별에서 온 그대의 연인 천송이가 사랑한 치킨의 미시사였으니 몰입은 기본이었고, 간간히 웃을 수 있는 포인트도 가득했다. (가령 저자가 다루고 있는 것은 프라이드 치킨이 아니라, ‘후라이드 치킨이라는 것 등등) 한동안 거리의 치킨집이 눈에 들어왔고, 엘리베이터의 치킨 냄새가 예사롭지 않게 느껴졌다.

 

 

나는 6학년이 될 때까지 면단위 시골에서 살았다. 이후 부모님의 교육열 덕분에 도청소재지인 전주로 전학을 갔다. 자녀 셋을 자취방(집이 아니라, 방이라고 밖에 달리 표현할 수가 없다.)에 두고, 시골로 내려가시는 부모님은 가장 큰 서점인 홍지서림에서 책을 사주셨다. (‘이 귀한 물건이던 그 시절에는 서점 자체도 하나의 브랜드인지라, 서점 마크가 곳곳에 찍혀있는 포장지로 책표지를 싸주는 것이 서점의 기본적인 서비스였다. 책을 다 읽고 나서 낡아버린 포장지를 버릴 때, 책은 온전히 나의 것이 될 수 있었다. 이런 기억을 공유하고 있다면, 이제 당신은 중년이다.) 정신의 일용할 양식 옆 가게는 몸을 살찌우는 영양 식당, ‘영진 통닭꼬꾜 통닭이 있었다. 전기 그릴에서 회전하며 기름을 뚝뚝 떨어뜨리는 닭에서 풍기는 고소한 냄새는 촌년이 지금까지 맡아보지 못한 냄새였다. 미끄러운 촉감이 싫어 벗겨먹던 껍질조차 바삭거렸던 그 맛을 잊을 수가 없다. 부모님은 둘 중 더 유명한 꼬꾜 통닭에서 닭을 사주시려고 했으나, 나는 끝까지 영진 통닭을 고집했다. (촌년의 눈에는 꼬꾜도꾜로 읽혔던 게다. 일본인이 하거나, 일본을 좋아하는 가게라고 추측했으니, 민족주의의 강한 신념을 가진 열 세 살의 선택은 확고했다.) 이후에 서점을 드나들며 내가 상호를 잘못 읽었다는 것을 깨닫고는 수년 동안 꼬꾜 통닭은 우리 가족의 만남의 장소였다. 엄마는 아빠가 어디에서 월 30만원만 벌어 와도 너희랑 살고 싶다고 했다. (지나고 보니, 그 당시 30만원은 제조업 노동자의 한 달 월급이었다.^^) 한 달 동안 만나지 못한 엄마와 치킨과 칼국수를 먹고 난 후, 터미널에서 헤어지는 시간은, 지금 떠올려 봐도 명치끝이 저릿하다.

 

 

이 책은 이렇게 나의 치킨에 얽힌 무수한 추억을 끝없이 호명한다. 또한 먹기가 함축하는 의미와 문화에 대해서도 성찰하게 한다. “음식을 먹는 것은 문화를 소비하는 일이다.-45) 살아서 무엇을 입에 넣어야 하는 것이 치욕이라고 느꼈던 경험도 떠올리게 한다. (대구 지하철 폭발로 고등학교 아들을 잃었던 어느 엄마가 인터뷰한 기사를 읽었던 적이 있다. 아들이 죽은 것도 슬펐지만, 자식이 죽었는데도 밥을 먹는 자신이 더 견딜 수 없었다고 한다. 시장에서 반찬거리를 사면, 뒤에서 누군가 수군거리는 것만 같았다고 한다. 그래도 살겠다고 밥을 먹는 자신이 벌레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그러니 김영오씨를 비롯한 세월 호 가족의 단식은 (단식이 정치인들 때문에 많이 퇴색되었긴 하지만) 억울함을 호소하는 최후의 순수한 수단일 것이다.

 

 

OECD 국가 중에서 자영업 비율이 지나치게 높은 나라, 미국 자영업자 한 사람이 버는 영역에서 네 명이 치열하게 돈을 벌어야 하는 나라, 군인 수만큼의 미용사 자격증을 가진 사람이 살고 있는 나라가 한국이다. 적은 퇴직금으로 몸뚱이 하나로 돈을 벌겠다는 사람들의 생존 장이 치킨가게다. 대한민국 치킨 은 치킨의 성분, 역사, 한국인의 취향, 산업 구조까지 전방위적으로 다루고 있기 때문에 이 리뷰에서 그것을 언급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치킨과 연관한 콩기름, 콘기름, 맥주까지 분석의 대상이다. 저자의 이야기를 천천히 따라가다 보면 왜 소비를 이념으로 해야하는지를 깨닫게 된다.

 

 

그렇다고 이 책에 아쉬움이 없는 것은 아니다. 차기 연구와 연구자를 위한 참조로써 훌륭한 자료집이라는 생각과 함께, 조금 더 일관된 문제의식이 필요했다고 본다. 뒷장으로 넘어갈수록 동어 반복의 느낌이 읽기의 맥을 떨어뜨린다. 치맥이 떡볶이와 튀김, 라면과 단무지처럼 환상적인 음식 궁합 속에 숨겨져 있는 자본의 논리에 집중했어도 기막한 이야기가 구성되었을 것이다. 완전 독점의 맥주와 완전 경쟁의 치킨이 만난 절묘한 결합 속에서 드러나는 자본주의의 생리를 부록으로 처리하기엔 할 이야기가 많은 듯하다.

  

사족 하나. 김수영의 시와 비평서를 읽었음에도, 그가 양계를 통해 생계를 꾸렸다는 사실은 미처 알지 못했다. 글밭 일구어 글로 밥 만드는 삶을 꿈꾸는 대부분의 예비 문학가들에게 글쓰기의 권력에서 자유롭기 위해서 다른 생계수단을 찾았다는 사실에서 여러 생각들이 오간다. 어쩌면 서평과 영화평을 쓰는 우리의 유희가 그에 기인하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읽고, 쓰고, 그것이 삶과 결합하는 과정에서 호모쿵푸스가 되는 것, 이 책은 덤으로 그것까지 재고(再考)하게 한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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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파 마피아
토마스 키스트너 지음, 김희상 옮김 / 돌베개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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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프 블라터의 철권 통치, 『피파 마피아』,

토마스 키스트너 지음, 김희상 옮김, 돌베개, 2014.7.

 

EBS 지식채널e '축구공 경제‘를 보면 축구공의 경제 속에 감추어져 있는 불법 아동 노동에 대하여 알 수 있다. 최첨단 과학으로 진화하고 있는 축구공은 100% 수공업 결정체다. 그라운드를 누비는 축구공의 70% 이상을 인도와 파키스탄의 값싼 노동력으로 생산하고 있다. FIFA는 축구공 생산 노동이 강요적이거나 구속적이지 않을 것을 표명하지만, 거대스포츠 기업 아디다스의 천문학적 수익, 황금발의 스타들 뒤에는 10만원 넘는 공을 만들기 위해서 하루 150원을 받는 아동 노동이 존재한다. 축구공을 한번도 가져본 적이 없는 아이들이 하루 8시간씩 축구공을 바느질한다. 이 정도가 내가 『피파 마피아』를 읽기 전에 축구에 대하여 알고 있는 일면이다.

 

나는 운동에 유난히 관심 없는 십대를 보냈다. 선생님이 공을 가져오라고 하셨는데, 배구공과 농구공도 구분을 못해서 한참 망설였던 부끄러운 기억도 새삼 떠오른다. 양궁을 한번 해보겠느냐는 체육 선생님 말씀에 정중히 거절한 적도 있었다. 그래도 ‘공부’를 잘하는 것이 최고라는 세상의 기준을 내 가치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니 운동은 다른 세계 이야기였을 뿐, 나의 운동에 대한 무지함은 장애가 되지도 않았다.

 

2002년 한·일 월드컵에 대한 방송과 사람들의 흥분에도 축구에 관심이 없었다. 한국과 폴란드전, 미국전은 보지도 않았다. 그러다가 직장에서 포르투갈 전을 볼 수 있도록 일찍 퇴근하는 상황이 벌어졌고, TV로 포르투갈전을 보면서 완전히 축구에 빠져들었다. 축구는 그냥 경기가 아니라, 일상의 따분함을 한 순간 사라지게 만들었다. “축구공 하나로 세계가 하나가 된다.”는 말을 실감했다. 이전 경기를 다시 찾아보았고, 실시간으로 보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스페인전은 길거리 응원까지 나갔다. 그때는 4강전을 보러 일본에 가겠다는 사람들의 심정이 이해되기도 했다. 축구는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라는 말처럼 한동안 경기를 보면서 해석하기 위한 노력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현욱의 소설 『아내가 결혼했다』에서 익힌 유럽 축구의 구도가 여전히 내가 아는 축구 상식의 전부다.

 

『피파 마피아』는 이전과 전혀 다른 의미에서 월드컵과 축구를 바라볼 수 있는 객관적 사실을 담고 있다. 스포츠 정치 분야의 탐사 전문 기자인 토마스 키스트너가 20년 동안 파고들었던 피파의 역사를 고스란히 담겨 있다. 피파의 역사라기 보다는 범죄의 역사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축구는 오락이 아니라 거대 산업으로, 제프 블라터를 중심으로 하는 피파 수뇌부는 개최국이 마지막 4강에 들어갈 수 있도록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스포츠의 자율성은 국가의 사법권이 미치지 못하는 방패막이가 되어 준다(48쪽). 토마스 키스트너가 파헤치는 국제스포츠계의 행태는 완전히 범죄 그 자체다. 피파는 “모든 것을 지배하지만 어떤 것도 책임지지 않는 단 한명의 보스가 지배하는” 마피아 조직이다. 저자는 이 험난한 탐사 취재를 지속할 수 있었던 것은 축구가 스포츠의 본질로 돌아가기를 바라는 간절한 바람 때문이다. 수조 원이 공익이라는 미명아래 제프 블라터 패밀리의 주머니에 들어가고 있다.

   

수많은 경기 중에서 왜 유독 축구가 전 세계를 하나로 응집하고 있는지에 대한 의문을 느낄때가 많다. 축구를 보도하는 기자조차도 객관적인 스탠스를 유지하지 못하고, 축구 팬으로서 경기를 바라보고, 촬영 기술은 엄청나게 발전하여 그들이 흘리는 땀방울 하나하나까지도 슬로우 모션으로 담아내면서 시청자의 심장을 딱딱하게 만들었다가 뜨겁게 달구기를 반복한다. 그 과정에 축구가 생산하는 경제적 이익이 유통되는 방식에 문제의식을 느끼는 사람은 드물다. 사실 월드컵 대진표를 보다 보면 축구는 실력이 아니라 ‘대진 운’이라는 생각이 들때도 많다. 개최국은 대진에서도 항상 유리한 입장을 취해 왔고, 심판 역시 홈그라운드에 노골적으로 유리한 판단을 할 때가 많이 있었다.

 

저자가 한국어판 서문에서 하고 있는 이야기는 2014브라질 월드컵을 보면서 나 역시 공감하는 바다. 축구가 브라질 경기(經紀)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는 모르겠으나, 실제의 삶이 더 소중하다고 이야기한다.

 

“가난한 브라질 대중은 그 어마어마한 세금이 다른 곳에 쓰이기를 간절히 원했습니다. 학교, 병원, 대중교통에! 축구가 끝나고 진짜 인생이 펼쳐지는 곳이면 어디나 그 돈이 필요했습니다. 진짜 인생, 정작 소중히 지켜야 할 가치, 이는 우리 모두의 문제입니다.”

 

이 책을 읽다보면 이렇게 마피아가 움직이고, 영상을 연출하는 탁월한 전문가들이 작정하고 덤빈다면 축구뿐 아니라 어떤 경기도 정치적으로 움직일수 있으리라는 확신이 든다. 어디 FIFA만이 마피아들의 온상이겠는가. 돈과 권력을 얻을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에서라도 가능한 일이라는 점이 두려운 것이다. 마피아를 연상하게 하는 조직범죄의 진행과정을 우리도 현재 목도하고 있다. ‘인간이 만들어낸 세계의 허약함’(433쪽)은 늘 사건이 터진 이후에야 우리 시야 안으로 들어온다. 우리가 실제 봐야할 세계는 프레임에 갇힌 사각의 경기장이 아닐지도 모른다. 공 하나에 얽혀있는 무수한 권력 비리를 눈감는다면 축구는 우리의 도덕과 가치를 잠재우는 아편이 될 것이다.

 

내가 자주 가는 미술관 앞에는 푸른 잔디가 깔린 축구장이 있다. 토요일 오후 유소년 축구단의 연습이 한창이다. 축구 꿈나무들이 땀을 뻘뻘 흘리며 축구 연습 하는 것을 보니, 피파 마피아의 얼굴들이 오버랩되어 마음이 복잡해진다. 부디 이 아이들이 축구 선수가 되든, 축구 팬으로 남든 - 스포츠 본질인 경기 과정을 즐길 수 있을 만큼 - 조금이라도 정직한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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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신의 오후]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독신의 오후 - 남자, 나이듦에 대하여
우에노 지즈코 지음, 오경순 옮김 / 현실문화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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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생활 밀착형 사회학 보고서 『독신의 오후』, 부제 : 남자, 나이듦에 대하여

우에노 지즈코 지음, 오경순 옮김,

 

우리는 누구나 독신으로 세상에 왔고, 단독자로 세상을 떠나야 한다. 한때 누구나 독신이었고, 원하든 부정하든 언젠가는 누구나 독신이 될 수 있는 운명에 처해있다. 과정이 무엇으로 채워지든 본질적인 인간 존재 조건의 평등함을 생각하면 인생을 메타적으로 바라볼 힘이 생긴다. 외국 영화에서나 흔히 볼 수 있었던 싱글 라이프가 흔한 삶이 되었다. 90년대 초반 방송국 PD들이 대가족으로 드라마를 만들면 배우 출연료가 너무 많이 나가서, 주인공 혼자 사는 드라마를 만든다고 농담처럼 얘기했던 기억이 난다. 그때 이미 1인 가구의 증가는 하나의 사회 현상의 전조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아이러니하게도 독신 이야기는 ‘관계’에 관한 이야기가 된다. 어떻게 관계 맺고 정리하고 새로운 관계로 나아갈 것인지가 독신의 오후를 결정한다. 신간『독신의 오후』를 읽으면서 무수한 영화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나 또한 살아온 세월만큼, 많은 탄생과 죽음을 목도한다. 생각하지 못한 이유로 많은 지인들이 세상을 등졌고, 그들은 내게 인생교과서로 남아 있다. 종교, 성격, (정치적, 경제적) 조건에 따라서 불가피한 독신을 견뎌내는 힘과 방법에서 현격한 개인차가 존재한다.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초기 작인 영화 ‘환상의 빛’(1995)은 남편이 자살한 원인을 모르는 채 남은 생을 살아가야 하는 여성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감독은 소소한 일상에 포커스를 맞추고, 사사로운 개인적 경험이 차원 높은 세계와 마주할 수 있도록 여백을 만들어 간다. 혼자되었으나 또 다른 삶과 관계가 기다리고 있다. 단 과거 남편에 대한 기억과 상처는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마음 한켠에 평생 머무르면서 환상의 빛이 된다.

 

허안화의 ‘심플 라이프’(2012)는 4대에 걸쳐 남의 집 일을 해주다가 요양원으로 옮겨가는 한 여성의 이야기를 심플하게 다루고 있다. 정결한 한 여성이 요양원이라는 낯선 공간과 그곳 사람들에게 적응해가는 과정 또한 하나의 삶으로 자리한다. 가족은 ‘피’가 아니라, ‘추억의 공유’라는 것을 재확인할 수 있는 영화다.

 

        

                            

          

『독신의 오후』는 그저 그런 자기계발서나 저자의 사적 경험을 주관적으로 늘어놓은 책이 아니다. 적어도 ‘생활밀착형 사회학 보고서’라는 것이 내 개인적인 평가다. 양적 자료와 데이터를 명확하게 밝히고 있지 않지만, 독신 남성이 증가하는 원인, 세태, 향후 진행 방향과 대안 제시에 대한 저자의 혜안에서 평생 사회학자로 살아온 내공을 여실히 느낄 수 있다. “초고령화가 진행 중인 동아시아”라는 공통점을 가졌다는 점에서 우리에게 결코 낯선 이야기가 아니다. 세계 경제의 호황이 끝났다는 점에서, 국가에 기대할 것이 별로 없는 신자유주의에서 개인의 ‘노후’는 각자의 책임으로 남는다.

 

 “남자의 ‘불편’과 여자의 ‘불안’의 결합” - 결혼의 변화

 

나의 전공은 ‘사회학’이고, 현재 독신이다. 다행히 경제적인 ‘불안’을 해결하는 수준의 업(業)이 있고, 결혼을 통해서 인간 존재의 근원적 외로움이 해결될 수 있다고 기대하지도 않는다. 미래학을 공부하면 할수록 적어도 향후 수십년의 삶이 ‘인간적’일 것이라는 희망도 없다. 삶을 최소화하고, 세상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수 있는 수준에서 민폐가 되지 않기 위해 노력하며 산다. 페미니스트 작가 산드라 시스네로스의 『망고 스트리트』(2008.7)를 읽으면서 내가 왜 독신을 선택했는지 공감했다. 망고 스트리트의 나의 집은 한 여성이 오직 자신만을 위한 (심적, 물리적 공간으로서) ‘나의 집’을 꿈꾸게 한 유년의 공간이다. 우리에게 나만을 위한 실내화와 내가 어질러 놓은 상태 그대로 나를 기다리는 집이 필요하다. 엄마의 자궁과 같은 집이 필요했던 작가의 어린 시절이 내게도 고스란히 전해졌다. 부부가 함께 살아가는데 필요한 노력과 수양을 감히 짐작해보지만, 혼자 산다는 것 역시 끝없는 자기 수양과 성장을 요구한다. 독신은 “자기만의 시간”을 적절하게 활용하지 않으면 타인들의 일을 대신해주고 고민을 처리해주는 쓰레기통으로 전락할 수도 있다. 직장, 가족의 시간이 아닌 나의 시간으로 부자라는 저자의 이야기에 동의한다. 싱글은 적절하게 시간 활용을 분산하는 것이 중요하다.

 

 

‘독신’에 대한 편견은 내 주변 곳곳에서 나타난다. 같은 학문을 공부해도, 살아온 이력은 학문의 영역에 그대로 반영된다.

 

사례 1.회식

 

모두 무난한 결혼으로 중산층에 진입한 대학원생들(모두 여성이었음), 나만 독신.

 

그녀들 중 한 분이 말씀하셨다.

   그녀 : “나는 노처녀들이 영양제 챙겨 먹는 걸 보면, 자기 밖에 모르는 이기심이 느껴진다. 아이를 낳아보지 않은 노처녀는

             좋은 선생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해.”

그 이야기를 그냥 흘려들을 수 없는 독신녀 (나)

    나 : “좋은 교사가 될 수 있는 독립변인이 어디 ‘결혼’ 하나인가요? 신념, 성격, 교육제도, 교육과정, 사회적 조건 등등

           많은 것들이 영향을 미치죠. 저는 가족주의가 이타심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다시 그분들의 공격

  그녀 : “저거 봐. 별거 아닌 걸로 예민하게 반응하는 걸 보면... 노처녀는 어쩔 수 없어.”

 

물론 나는 알고 있다. 예민하고 까다로운 독신녀들에게 정 떨어졌던 각자의 경험을 일반화했을 뿐, 그녀들에게 악의는 없었다.

 

사례2. 신입생 환영회

 

겸양지덕을 겸비한 듯한 외양을 갖춘 중년의 대학원 신입생. 서로 알아가자는 의미의 Q&A 시간, 내 차례가 되었다.

    나 : “결혼 안하셨죠?”

    신입 : “어머. 제가 그렇게 능력 없어 보이세요? 저 꽤 괜찮은 남자랑 살아요.”

    나 : “네에. 저는 능력 있어 보이셔서 결혼 안하셨냐고 물었어요. 제가 결혼 안했거든요.”

 

이렇게 적고 보니 나도 만만찮게 따지기 좋아하고, 지기주장 굽히지 않는 ‘독신’임에 틀림없다.

 

사례3. 나의 지인(知人)들

 

    지인 : “뭐하나 부족한 게 없는데, 왜 결혼을 못하냐? 결혼만 하면 딱 좋을텐데.”

    나 : 나의 삶은 결혼하는 순간 180도 달라져. 이건 결혼을 안했기 때문에 가능한 삶이야.

   

이 사례들을 나열한 까닭은 결혼 유무 보다 자신의 가치관에 따른 자기 배려의 윤리를 실현하는 삶을 사는 것, 조건을 해석하고 대응하는 ‘태도’가 중요함을 이야기하고 싶어서다. 조건을 통제할 수 없는 상황에서 우리의 선택지는 ‘어떻게 반응’ 할 것인지를 결정하는 것이다.

 

이 책은 다양한 사례를 통해서 남성 독신이 어떻게 살아야 하고, 죽음을 준비해야 하는지에 대한 최선의 매뉴얼을 제공한다. 다소 저자의 주관이 개입되어 있으나, 저자의 진정성은 후기에 적힌 다음 이야기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여성은 결코 냉담하지도 매몰차지도 않다. 먼저 세상을 떠나는 아내에게서는 “자, 당신 홀로 남겨두고 가지만 안심하고 떠나요.”라는 말을 들었으면 좋겠고, 이혼한 전처에게서도 “당신 낯짝 따위 두 번 다시 보고 싶지도 않아.” 같은 미움 대신에 “아이들 아버지로서 좋은 관계를 이어나갔으면 좋겠다.”는 말을 들었으면 싶다. ‘노처녀들’ 앞에도 매력 있는 남성들이 많이 나타나주었으면 좋겠다,“(295쪽)

 

‘독신 삶’의 질에는 철저히 남녀 차이가 존재한다. 결혼 이주여성의 증가가 그 예가 될 것이다. 여성 중에는 선택적 독신이 제법 존재하지만, 남성중에는 불가피한 독신이 훨씬 많다. 불가피한 독신이라 할지라도 행복을 유보할 수는 없다. 주어진 조건에서 최선의 선택을 하기 위한 노력과 태도가 필요할 것이다. 『독신의 오후』는 그러한 고민을 풀어가기에 적절한 교재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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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와 하녀 -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마이너리티의 철학
고병권 지음 / 메디치미디어 / 2014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지식이 아닌 실천을 위한 (별을 바라보는) 하녀의 철학,

『철학자와 하녀』 고병권 지음, 메디치미디어, 2014.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마이너리티의 철학”

 

포스트모더니즘이 뜨거웠던 1990년대 후반, 현란한 언어로 포장된 경구로만 읽히던 니체를 제대로 읽기 위한 공부를 시작했다. 교수님을 중심으로 모인 여섯 명의 스터디 멤버에게 니체는 탈근대를 이해하기 위해 넘어야 하는 거대한 산이었다. 『도덕의 계보학』,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즐거운 학문』,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을 읽으면서도 니체 철학의 근간을 세우는 것이 우리에게 쉽지 않았다. 끊임없이 해석을 요구하는 니체 철학은 오독의 오독을 반복하는 과정의 연속이었다. 그렇게 보내던 시간이 꽤 흐른 후, 어둠에서 발견한 한줄기 빛이 고병권 선생님이 번역한 『한권으로 읽는 니체』였다. 그 이후 『 니체의 위험한 책,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니체, 천개의 눈 천개의 길』은 니체 원전을 읽을 때 옆에 두고 참조해야 하는 귀중한 책이었다.

 

                  

 

 

 

‘수유 너머’에서 잠시 뵈었던 고병권은 시간을 넘나들고, 공간을 변형하는 트랜스포머였다. 호모쿵푸스로 살아가고자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수유 너머는 공동체 운영의 방식을 벤치마킹할 수 있는 실험적인 공간이었다. 좀 더 나은 삶을 꿈꾸는 사람들의 윤리적인 실천을 가능하게 하는 연구실이었다. 그곳에서 (거의 훔쳐보는 것에 가까웠던 시선으로 바라보기에) 고병권 선생님은 젊은 철학자였으나, 생물학적 나이와 무관하게 무겁고 깊고 강직했다. 선생님의 역서와 저서를 통해서 니체를 이해하는데 큰 도움을 받았다는 이야기만 겨우 전했을 뿐, 대화를 나누지 못했으나, 젊은 철학자에 대한 고마움으로 그의 책이 출판되면 빼놓지 않고 구해 읽고 있다. 동시대를 살아가는 이토록 멋진 철학자가 있다는 것에 위로 받으며 『철학자와 하녀』를 아주 천천히 읽었다. 때마침 만난 복음서와 같은 다소 격앙된 마음으로, 심장이 밑줄 긋게 하는 글들 행간에서 아주 오래 머무르며 이 책을 읽었다. 고병권의 글은 죽비가 되어 독자의 등을 내려친다.

 

 

별을 보는 철학자, 생계를 위해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하녀, 그 둘이 바라보는 세계는 형이상학과 형이하학의 넘나들 수 없는 경계를 이룬다. 저자는 하녀가 별을 바라보기를 바란다. 땅에 발을 딛고, 하늘을 바라보기를 바란다. 이 땅의 최소수혜자에게 철학이 세상을 살아가는 무기가 되어주기를 바란다. 사회의 부품으로 순종하기를 강요하는 명령들에 고개를 꼿꼿하게 쳐들 수 있는 힘이 철학에서 나올 것으로 믿는다.

 

인생은 누구에게나 예외 없이 언제 뒤통수를 칠지 모른다. 인생을 전후로 가르는 큰 일을 치룬 지인의 여전한 모습을 보면서 그 힘이 어디에서 나왔는지 궁금했다. 지인께서는 십수년 동안 철학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으셨다. 특별한 목적을 두지 않았던 무사무욕적인 공부는 선생님을 자유롭게 만들었다. 나 또한 힘든 시기의 초조함을 극복하기 위한 바탕을 만들어준 것이 니체와 함께 한 세월의 힘이었다. 내가 그들의 말을 들을 수 있는 귀만 갖게 된다면 벗은 시공을 초월해서 어디에서든 구할 수 있다. 나와 같이 비혼(非婚)을 선택한 사람들이 모이면 공통으로 이야기하는 것이 있다. 사소한 사건 하나도 그냥 넘기지 못하는 예민함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우주적인 차원의 고민을 하는 것이 싱글의 삶이라고. 내 아이와 가족에 갇혀서 세상을 보지 않으므로 사해동포주의를 발휘하게 될 때가 참으로 많으면서도 성찰의 성찰을 반복하며 살아가는 몽상가들이 많다.

 

“철학은 지옥에서 하는 것, 배움 이전에 배움이 일어난다.”

 

천국에서는 고민할 게 별로 없다. 선택하는 순간과 문제를 해결해야 할 때 우리는 머리를 싸매고 고민을 시작한다. “머리에 타는 불을 끄듯 공부”는 박학다식해 지는 것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 애초에 답이 따로 잊지 않기 때문에 깨닫는 과정의 연속이다. 타자의 가치와 기준에 자신을 맞추어 살아가면 항상 초조하다. 초조한 사람은 현재를 충분히 즐길 수 없다. 사다리는 오르고 올라도 정상이 없으니, 상승만을 향해 질주해야 한다.

 

“노파나 노인에게서 원숙미 같은 것을 보고, 아이들의 매력을 순결한 눈으로 본다.”(45쪽) 『무지한 스승』의 인용 글을 통해 저자는 선생은 가르칠 수 없어도 학생은 배울 수 있음을 언급한다. 학교는 가르치는 곳이 아니라, 배우는 곳이다. 세상은 배움의 수련장이고, 스승이 따로 없이 배움은 누구를 통해서도 이루어질 수 있다. 능력이 불평등의 증거가 될 수 없다는 이야기 또한 새겨볼만하다.

 

“사소한 것은 사소하지 않다.”

 

3장에서는 “사물과 사람이 맺는 각별한 관계”에 대해서 생각할 수 있었다. 얼마 전 십삼 년 동안 탔던 자동차와 이별했다. 오래 탄만큼 잔고장이 많아서 경제적으로 손해가 커지면서 어쩔 수 없이 보낼 수밖에 없었다. 폐차 값도 안나온다는 반협박으로 차 값도 거의 받지 않고 팔았다. 그 이별의 마음은 인간의 이별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힘든 주인 만나서 고생 많았을텐데, 이후에라도 다른 곳으로 팔려가 고생하지 않았으면 하는 맘이 들었다. 자동차는 혼자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낸 곳이기도 했다. 십여 년 동안 내가 겪었던 무수한 일에서 발생했던 나의 만 가지 감정을 다 알고 있는 사물이었다. 그러니 애완견과 가족이 되는 것인들 이해 못할 이유가 되겠는가? 그 이후에는 서로가 서로를 길들이게 될 터이므로, 물건을 집에 들이는 일에도 여러 번 고민하고 결정했다. 사랑하는 것에 대체물은 없다. 사랑을 잃고 나면 그 슬픔은 내 안 어딘가에 자리를 잡고 있다가 불쑥 불쑥 밖으로 뛰쳐나온다. 누구도 대체할 수 없는 각자의 자리가 있는 법이다.

 

“함부로 무릎을 꿇어서는 안 된다.”

 

“멋대로 원망하도록 하라. 나 역시 한 사람도 용서하지 않겠다.”는 루쉰의 글에서 힘을 얻었을 수 있었다. 좀 더 선한 인간이 되어야 하는 무수한 이유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팔랑귀처럼 타인의 평판에 마음이 흔들릴 때가 더러 있다. 나를 싫어하는 사람을 견뎌내지 못할 때마다 스스로에게 최면을 건다. 사람이 사람을 싫어하는데 무수한 이유가 있다고. 손익을 따져야하는 관계 때문일 수도 있고, 무엇을 유능하게 해내거나, 무능하기 때문일 때도 있다. 하다못해 과거에 불쾌한 경험을 하게 한 사람과 닮았다는 이유로 싫어지기도 한다. 그 모든 것에 예민하게 굴다보면 옳은 소리를 낼 수 없을 때가 많아진다. 상당히(?) 많은 적을 인정하는 것, 그리고 견뎌낼 때만 좀 더 윤리적인 인간이 될 수 있다. 삶에서 무언가를 배우고자 한다면 자신이 동의하지 않는 것에 쉽게 고개를 끄덕이거나 무릎을 꿇는 짓을 해서는 안된다(149쪽).

 

얼마 전 직장에서 함께 해결해야 할 숙제가 주어졌다. 직원들이 한동안 숙직과 야근을 책임져야하는 상황이었는데, 결정권은 남자 직원들에게 달려 있는 분위기였다. 대부분의 남자 직원들은 남녀평등 차원에서 함께 숙직을 해야한다고 주장했고, 몇몇 남자 직원은 남자 직원이 숙직을, 아이들이 있는 여직원이 야근을 맡아서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것은 남성의 배려 차원이었고, 여직원은 구차하게 그들의 결정을 기다려야 하는 상황이었다. 회의 분위기는 살벌했고, 고성이 오가기도 했다. 중요한 것은 이 회의 바로 직전에 우리 모두 다문화연수 30시간을 함께 받았다는 것이다. 그 연수를 통해서 각 지역과 민족의 문화에 대하여 알게 되기는 했으나, 다름과 차이를 존중해야 한다는 각성의 단초를 마련한 연수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한동안 중동과 이슬람에 대한 대화가 오가기도 했는데, 그것은 단지 지식과 정보 수준이었다. 이해타산으로 굳어진 철옹성의 이기심에는 바늘 하나 뚫고 들어갈 구멍이 없었다. 앎과 삶이 정확히 분리되는 지점이었다. 그때 나는 『철학자와 하녀』를 읽고 있었다. 부조리한 세상, 모순된 인간들, 그 세상 안의 하녀인 나는 문득 하늘의 별이 보고 싶어졌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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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도둑 2014-07-25 23: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숲님, 글을 찬찬히 읽으면서 아, 깊고도 울림이 있구나 감탄했어요.
그냥 서평단으로 쭉 달려오셨군요...
그동안 제가 너무 많은 무심을 저질렀어요....
알라딘에도 무심했고..(책도 거의 구입하지 않았고..) 숲님을 비롯한 몇 몇 분들께도 무심했어요..
다른 곳으로 방을 옮겨 간 것도 아니고 그냥 모든 게 시큰둥해지다보니.....
언제 돌아올지 모르겠지만 잊지는 않고 있어요..
다음에 또 만날 날이 오겠죠?
그동안 건필, 건강..^^

더불어숲 2014-08-06 12:40   좋아요 1 | URL
어서 돌아오세요...
서평단의 내 유일한 벗님!
그대 메인 대문의 글 때문에...마음 숨이 잠시 멈추었습니다.
이번 가을엔 꼭 함께 읽고, 감상을 나누시길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