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니엘 디네와의 대담에서는 죽음을 둘러싼 우리의 인식 여건들을 살펴보았고, 이어지는 조르주 반 우트와의 대담에서는 죽음과 신앙의 관계가 주요 쟁점이다. 신앙의 내세관 속에서 실존적 가치를 얻으려는 인간의 갈망, 죽음과 내세의 지복을 동일시하는 순진한 믿음.
파스칼 뒤퐁과의 대담에서는 안락사가 주요 주제였다. ˝삶에 대한 인간의 바람은 인간의 능력에 따라 자연스럽게 증가했˝다고 장켈레비치는 말했다. 즉 생명연장이든 안락사든 그것은 우리가 죽음을 더 주체적으로 다룰 수 있는 영역에 들어왔다는 걸 시사한다. 변함없는 건 ˝죽는다는 사실의 확실함과 죽는 날짜의 불확실함 사이에서 불명확한 희망˝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 장켈레비치는 현재의 안락사에 대한 논의가 너무 추상적이거나 너무 단순하다고 말하며 세심한 조건들을 거론했다. 치료 가능성을 따져볼 특정한 시기의 의학, 의사의 선택, 질병의 문제, 환자의 역사적 상황 등.
『어떤 육체?』에 실린 대담에서는 다음 문장이 핵심이었다.
˝시체를 다루는 다양한 방식들은 아마도 문명과 종교에 따라 육체가 다른 방식으로 이해된다는 점을 의미할 겁니다.˝
우리는 죽음을 안심할 수 있는 방식으로 가시화하려고 애써왔다. 잘 처리되지 못하면 금기로 닫아버린다. 오귀스트 콩트가 만든 실증주의력이나 그리스도교에서 죽은 자의 얼굴을 본떠 데스마스크를 만드는 관습, 축제와 같은 장례 풍습 등은 산 자의 유희에 가깝다.
(*실증주의력: 오귀스트 콩트가 1849년에 만든 달력. 1월부터 13월에 각각 역사적 인물인 모세, 호머, 아리스토텔레스, 아르키메데스, 카이사르, 성 바울, 샤를마뉴, 단테, 구텐베르크, 셰익스피어, 데카르트, 프레데릭, 비샤가 지정되었다)
소크라테스의 죽음을 묘사한 플라톤 《파이돈》을 홀로 맞는 죽음의 두려움을 철학적 수다로 푼 죽음이라 말하는 장켈레비치의 표현은 위트가 넘쳤다.
고령의 자연사도 우리의 편의적인 표현일 수 있다. ˝죽음에는 항상 추가적인 원인이 존재하는데 때로 그 원인이 눈에 잘 보이지 않을 뿐입니다. ˝
육체의 긍정성을 강조하는 스포츠. 평소 내가 불만스럽게 생각하던 스포츠의 폭력성도 아주 적절하게 잘 지적해 주었다. 정치적 이용에 대해서도.
˝텔레비전 뉴스에서 볼 수 있듯이 조금이라도 난처한 상황에 맞닥뜨리게 되면 ˝ 그럼, 스포츠 소식으로 넘어가겠습니다. ˝라고 합니다."
심각한 현안들이 가득한데 갑자기 스포츠 소식으로 바뀔 때 나는 얼마나 분노했던가! 생각해보니 JTBC 뉴스는 그런 게 덜하다.
삶의 희망이 죽음의 불안과 거리를 둘 수 있다 말하는 실존주의 철학자 장켈레비치(1903~1985)의 사상은 종교적 믿음을 철저히 배제하면서 ‘신비‘에 대해 끝없이 사유하는 모습이 독특하다.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신비 중에는 죽음이 으뜸일 것이다. 대담들을 엮은 이 책을 통해 접할 수 있는 블라디미르 장켈레비치 《죽음》 (1966) 저서는 ‘비체계적인 사상을 금언으로 풀어내는‘ 아포리즘으로 가득하다.
˝죽음이 필연적이라고 믿을 만한 근거들은 충분하지만, 결코 모습을 보이지 않는 신이 존재한다고 단정할 근거는 전혀 없다....... 구조자는 조난자와 전혀 다른 차원에 존재한다˝(《죽음》, p 394)
그의 이러한 경향은 반유대 철학자들(칸트, 피히테, 헤겔, 하이데거)과 독일 철학 체계를 교조적으로 따르던 당시 프랑스 철학을 거부하고 베르그송 등의 비주류 철학에 몰두함과 동시에 러시아 작가에게 많은 영향을 받은 데 기인하는 것 같다, 그는 "나는 환생한 체호프였다!"라고 말할 정도였다.
국내에 아직 도착하지 않은 그의 《죽음》 저서를 언제 접하게 될지 모르지만, 죽음에 대한 수많은 철학적 · 종교적 기만들을 걷어내고 이성적으로 현실화해 보려고 한 장켈레비치의 사유는 두려움 속에 죽음을 대비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에 대한 충실과 행동을 생각하게 하는 좋은 표지(標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