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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목꾼
토마스 베른하르트 지음 / 현대미학사 / 1993년 9월
평점 :
품절
『 우리는 적절한 순간에 한 인간을 만나고 이 인간에게서 우리에게 중요한 모든 것을 취한다고 생각했으며 또 적절한 순간에 다시 이 인간을 떠난다고 나는 생각했다. 나는 아주 적절한 시기에 자니 빌로트를 만났고 또한 적절한 시기에 다시 그녀를 떠났다고 생각했다. 마치 아주 적절한 시기에 모든 사람들을 떠났듯이 떠났다고 나는 이제 생각했다. 우리는 자니와 같은 인간의 정신 상태, 그녀의 감정 상태와 정신 상태를 따르고 한동안 이 정신 상태와 감정 상태만을 받아들이다가는 거기서 충분히 받아들였다고 믿어지면 이 인간과의 관계를 끊는다. 마치 내가 자니와의 관계를 미련 없이 끊어버린 것처럼 말이다. 우리는 그런 인간에게서 수년 동안 모든 것을 빨아먹고는 갑자기 우리가 거의 전부를 먹어버린 이 인간이 우리를 빨아먹었다고 말한다. 그리고서 우리는 평생 이 비열함을 감내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나는 이제 생각했다.』
ㅡ 토마스 베른하르트 <벌목꾼> 中 (현대미학사, 1993, 절판, 재출간 미지수)
■ 장은수 씨가 쓴 ‘베른하르트의 작품 세계‘ 편집 발췌
‘과장의 대가‘, 세계 종말의 희구자‘, ‘알프스의 베케트‘,‘ 自家모독자‘ 등의 별명이 붙어 있는
오스트리아 출신의 토마스 베른하르트(Thomas Bernhard, 1931~1989)
그의 작품의 주 경향이기도 한 ‘인간 사회의 치부를 폭로하기 위해 극단적인 욕설과 대담한 조소‘를 서슴지 않았던 그런 정력적 비판가의 이면에, 청년 시절부터 갖가지 폐 질환과 합병증으로 시달려온 병약하고 외로운 삶의 주인공이 존재하고 있었다. 어울리지 않게 그가 글을 쓰기 시작한 것도 죽음의 고통과 요양원 생활의 무료함을 잊으려는 의도에서였다고 한다.
시인으로서는 별로 빛을 보지 못했던 그가 첫 소설 작품인 <서리>(1963)와 그에 뒤따른 <혼란>(1967)의 발표로 주목된 이래 독어권에서 선풍적 인기를 모으며 읽혔고, 60여 권에 이르는 그의 작품 중 상당수가 프랑스, 이태리 서구 각지에도 번역되어 널리 소개되었다. 베른하르트 사망 전후 그의 인기가 절정에 달했을 때는 그의 작품이 일 년 365일 공연되지 않고 지나는 날이 하루도 없다는 말이 돌 정도였다.
그의 수상 경력도 화려한데, 독일의 권위 있는 문학상인 [뷔히너상]을 비롯해 프랑스의 [세귀에 문학상], 이탈리아의 [세계문학상] 등 다수의 상을 받는 한편, 수상기관이나 상의 성격이 맘에 들지 않을 경우는 이를 거절하는 것은 물론 공개서한으로 비판적 공박을 가하곤 했다.
토마스 베른하르트가 1968 그의 소설 <혼란>으로 오스트리아 문학대상을 받게 되었을 때에도 감격 어린 어조의 수상소감을 기대하고 앉아있던 문화계 인사들은 수줍은 청년작가가 내뱉는 어처구니없는 독설에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세상엔 찬양할 아무것도 없고, 저주할 것도, 고소(告訴)할 것도 없습니다. 다만 우수꽝스러운 것이 많이 있을 따름입니다. 죽음을 생각하면 모든 것이 우스꽝스럽기만 합니다˝라는 말로 베른하트트는 수상소감을 대신했다.
이런 세계관의 기본 명제로 시작된 베른하르트의 연설은 곧 오스트리아에 대한 자성적 비판으로 이어졌고, 그의 신랄한 비난을 더 이상 참고 들을 수 없게 된 문화성 장관이 격분해서, ˝그래도 우리는 자랑스러운 오스트리아인이오! ˝라고 소리치며 식장을 나가는 바람에 시상식장은 아수라장이 되었고, 덕분에 당시까지만 해도 무명이었던 베른하르트는 급기야 도전적 신예로 부상하는 화제의 인물이 되었다.
제임스 조이스의 작품 등 현대 유럽 소설에서 종종 볼 수 있는 것처럼, 베른하르트의 작품에도 딱히 줄거리라 할 만한 것이 없고, 있어도 단 몇 마디로 요약될 수 있을 정도로 지극히 단순하다.
줄거리를 대신하는 것은 주인공이 넋두리하듯 주워 섬기는 독백이며 대부분의 작품들에서는 소설의 화자가 이 독백을 듣고 보고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
소설 <벌목꾼>에서도 관찰하고 보고하는 화자인 ‘나‘가 동시에 주인공이며, 재미있는 것은 화자의 관찰대상이 자신을 비롯해 저녁식사에 초대된 모든 예술가 동료들로 확대되어 있다는 점이다. ‘나‘는 마치 극장의 관객처럼 객석에 앉아 ‘예술적 만찬‘에 초대된 그들이 우아하게 등장하는 것에 대비시켜, 껍데기 속에 가려진 그들의 기회주의적인 태도, 진실을 외면하는 허영과 허위를 시종일관 비판적인 눈으로 관찰하고 고발한다. 그는 그들의 위선적인 행위에 분노하며 초대를 받아들여 그가 증오하는 무리의 일원이 된 것을 후회하지만, 한편으론 그들의 파티에서 벌이고 있는 희극을 호기심 있는 관객의 눈으로 감상하는 재미도 부인하지 못한다.
이 작품은 발표 직후 한동안 오스트리아 전 국민의 토론 주제로 부상했다. 이는 우선 소설의 인물을 통해 명예훼손 당했다고 주장한 작곡가 람페르스베르크의 고소를 필두로 이 소설을 실화소설로 본 비평가와 매스컴이 ‘Who‘s Who?‘ 놀이에 발동을 걸면서 세인의 관심을 집중시켰고, 이로 인해 베른하르트는 이제까지의 정치적 성격의 스캔들과는 또 다른 형태의 물의를 일으키는 주인공이 되었다.
베른하르트의 작품을 잘 이해하고 오랫동안 손에 놓지 못하는 이들은 그러나 그의 매력을 또 다른 곳에서 찾고 있다. 그의 모든 희곡의 초연을 거의 도맡다시피한 연출가 클라우스 파이만도 그중 한 사람으로, 베른하르트를 읽는 즐거움을 그의 개성적인 문체에서 찾는다며 ˝모차르트의 음악이 세 박자만 들으면 알아챌 수 있듯이, 베른하르트의 작품도 세 문장만 읽으면 금방 알아챌 수 있지요˝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파이만이 베른하르트 문체의 개성을 강조하기 위해 음악에 비교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무엇을 어떻게 쓰느냐에 앞서 어떻게 쓰느냐에 비중을 둔 문학관을 강조한 베른하르트의 작품은 정선된 언어와 반복을 통해 리듬감을 살린 음악적 구조물이라 볼 수 있다. 그의 희곡들을 전문적으로 공연해 온 연출가와 배우들은 바로 이 점에서 그의 작품의 예술적 강점과 현실적 난점을 동시에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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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뉘엘 영화 <부르주아의 은밀한 매력>(1972), <욕망의 모호한 대상>(1977)이 떠올려지기도 하는 토마스 베른하르트 《벌목꾼》.
토마스 베른하르트 책을 읽은 지 한참 지나서도 종종 ˝지금의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로 끝맺는 그의 문체를 은연중 쓰고 있는 나를 만나곤 한다. 좋아하는 음악의 후렴구를 따라 부르듯.
새해가 되었고 우리는 또 만나고 헤어질 것이다. 적절한 관계란 어떤 것일까. 그것은 누구에게나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영역이다. 인간과 관계에 대한 끝없는 회의감은 토마스 베른하르트 전 작품에 나타나는 기조이다.
넋 놓고 살 수 없게 만드는, 끊임없이 항체를 만들어야 하는 관계들 속에서 나는 그의 글에 매번 깊이 공감했다.(이 책을 빌려 줬다가 못 받은 것도 내 회의감에 +1 더해짐) 니체, 카프카, 카뮈의 책을 읽으며 그랬듯이.(이들 책도 빌려 줬다가 못 받은 게 있다...) 그들의 책을 꺼낼 때면 내 시선은 병든 개모냥 헤집고 다니고 싶어 했지만 긴장감과 무게를 오래 짊어지지 못 했다. 정신은 쉬이 피로해지고 어느 날 필라멘트가 끊기듯 툭 놓아버리고 애써 삶에 임했다.
누구나 자신의 인간으로서의 나약함과 부족함을 부끄럽게 말하지만 글로 적나라하게 말하진 않는다. 더 정확히 말하면 보다 나은 사람처럼 보이게 꾸미면서 들키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 점에서 토마스 베른하르트는 누구보다 당당한 작가였고 사람이었다.
하루키를 좋아하는 이유는 나는 그렇게 글을 쓸 수 없기 때문이다. 하루키를 얕잡아 보는 사람들은 하루키 글만의 당당함을 모르는 사람들이다.
내가 환상 속에 사는 것은 당신들 영역의 경쟁자가 되고 싶지 않다는 배려이자 무능이며, 내가 이 생에서 꾸리고 선택할 수 있는 최소한의 삶의 모습이다. 그러나 나 또한 누군가의 피해 의식 대상일지 모를 일, 그럴 때면 정말이지 세상의 모든 불을 끄고 싶다.
삶에 대한 무한한 긍정을 요구하는 시기에 나는 이런 생각을 자주 한다. 밤낮으로. 그리고 이런 생각과 느낌을 소설로 표현해 준 토마스 베른하르트에게 감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