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개론 조계종 신도전문교육 필수교재 1
대한불교조계종 포교원 엮음 / 조계종출판사 / 2012년 2월
평점 :
절판


붓다와 불교 사상에 관한 대략의 윤곽을 잡을 수 있는 개설서이다.
초기불교와 부파불교에 이어서 대승불교와 선불교에 이르는 불교의 역사와 주요 경전들이 소개되고 있다. 각각의 불교 경전들이 어떤 시대적 배경에서 저술되었고 그 내용들은 어떠한지 개관할 수 있었다.
수많은 경전의 단편적인 인상들이 계통 없이 떠도는 상황에서 정리가 필요한 시점이었는데 마침 적당한 책이었다.

3장 초기불교부터 6장 선의 세계까지 특히 정리가 잘 되어있어 도움이 많이 되었다. 수행하는 마음으로 초록을 작성해 두자.

 

조계종 종단에서 교재로 출판한 것이어서 포교와 교단의 지향점을 염두에 둔 서술이 조금 있지만 거슬리지는 않는다. 아마도 그것은 불교가 맹목적 신앙을 강조하는 신학이 아닌 ˝인간에서 출발하여 인간을 문제 삼다가 결국 인간의 문제로 회귀하는˝(272-273) 인간학이기 때문일 것이다.

 

 

남들이 보기엔 밉상이지만 사랑하는 연인에게 그 사람은 세상에서 가장 멋진 남자요 여자이다. 아무리 먹기 좋은 음식도 배부른 사람이나 아주 심한 고통에 빠져 있는 사람에게는 쓰레기나 진배없다. 이와 관련한 `일수사견(一水四見)`의 비유가 있다. 똑같은 물이 아귀에게는 피고름의 더러운 물로, 물고기에게는 자신들이 사는 집으로, 사람에게는 마시는 물로, 하늘에 사는 신들에게는 보석으로 가득 찬 연못, 즉 보엄지(寶嚴池)로 보인다는 것이다. (1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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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피북 2015-03-29 10: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돌궐님은 불교에 관심이 많으신거 같아요 그래서 말인데요 혹시 저 처럼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읽어볼 수 있는 불교 서적이 있을까요 예를 들어 아주 쉬운 금강경? 과 같은 책을 읽어보고 싶은데 어떤 책을 봐야할지 잘모르겠어요^~^

돌궐 2015-03-29 12:35   좋아요 0 | URL
불교 개론서에서는 이 책도 괜찮겠고, 조계종출판사의 <부처님의 생애>가 감동도 있고 좋았습니다.
경전 중에서는 <숫타니파타> 같은 초기 경전류를 읽어보시면 어떨까요.
사찰 문화재에 관해 궁금하시면 명법스님 <미술관에 간 붓다>나 자현스님 <사찰의 비밀>이 좋겠습니다. 불교 건축 쪽으로는 김봉렬 <가보고 싶은 곳 머물고 싶은 곳>1,2권을 추천합니다.
금강경 관련 쉬운 책은 제가 과문하여 잘 모르겠습니다.^^;; 각묵스님의 <금강경 역해>가 가장 좋다고 들어서 저도 그걸 읽어보려고 합니다.
 

남한산성에 가보려고 채비까지 했다가 문득 열어본 날씨앱에 미세먼지가 매우 나쁘다고 하여 포기했다.

그래서 예전부터 염두에 두고 있었던 블라디미르 쿠쉬(Vladimir Kush) 특별전을 보러 갔다. 그나마 실내에서 할 수 있는 여가 생활이라곤 전시나 영화를 보는 것 정도니까.

항간에 유명한 영화 <위플래쉬>도 보고 싶었지만 얘기를 해도 반응이 시큰둥하여 일단 다음으로 미루었다.

 

전시관에 들어서서 그림을 보고 있는데, 몇몇 작품 옆에 어떤 시인이 그림을 재해석하여 쓴 시들을 함께 전시하고 있었다.

'김경주'라는 이름이 낯익어서 찾아 봤더니 시집 <나는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와 <고래와 수증기>를 쓰고, 만화 <골리앗>을 번역한 작가였다.

그는 난해한 시를 쓴다고 알고 있었는데, 이곳에 그림과 함께 전시된 시들은 그렇게까지 어렵지는 않았다.

 

초현실주의 그림에서 많이 사용되는 데페이즈망이 현대시에서 차용되는 경우가 많을 것이고, 짐작컨대 김경주의 시에도 그럴 것 같다. 나중에 기회가 되면 직접 확인해 봐야겠다.  

 

 

 

 

 

 

 

 

 

 

 

 

 

 

 

 

 

아무튼 전시회에 그림과 함께 걸린 그의 시들이 도록에도 함께 실려 있어서 거금 이만오천 원을 주고 샀다.

서점에서는 못 산다고 하니 어쩔 수 없었다. 이건 전혀 예상 못한 지출이었는데, 시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이 전시를 보면 눈물을 머금고 도록을 살 수밖에 없을 것이다.

관객들이 좀 부담 없이 살 수 있게 시편을 붙인 작품들만 모은 도록을 좀 저렴하게 시집처럼 제작해서 판매하면 어떨까 싶기도 하다.

아래에 도록에 실린 작품 몇 점 옮겨 본다. 인용한 시는 해당 작품에 부친 시편들이다.  

 

 

 

<바람(Wind)>, painting on canvas, 104×81.3cm

 

 

바람

 

사랑하는 당신이 나를 자정에 불러주어서

셔츠만 입고 날아왔어요

미안해요 너무 큰 셔츠를 입고 왔네요

정말이지 이 셔츠만 벗을 수 있다면

당장 당신 옆에 누울 수 있을 텐데

나의 헐렁한 셔츠만큼이나

당신의 집은 너무 춥네요

(118)

 

 

아래 사진은 전시회 도록 표지 부분이다.

여기에 사용된 그림은 <플라워선박의 입항>이란 작품인데, 19세기 영국에서 카리브 해안의 타히티로 향하는 '바운티 선박(Bounty)'을 모티브로 한 것이라고 한다. 도록의 설명을 옮겨 보면 이렇다.

 

회화 역사상 가장 오래된 보태니컬 회화의 '보태니컬'의 모험에서 착안하여 표현한 작품으로 그림 속의 '플라워 선박'은 19세기 영국에서 카리브 해안의 타히티로 향하는 '바운티 선박(Bounty)'을 모티브로 하였다. 독재적인 함장에 반란한 선원들은 타히티 섬에 상륙하여 영주하게 되었다. 노역으로 피폐해져 있던 타히티 섬의 원주민들은 빵과 과일들이 가득했던 바운티호와 그 선원들을 환영하였다. 플라워 선박은 그들이 염원하던 "파라다이스"이자 그곳으로의 항해를 의미한다. 섬의 원주민들은 종려나무 가지로 인사하는 모습으로 묘사되었다. (114)

 

 

 

 

플라워선박의 입항

 

스페인 여왕과 군대는 남미로 향했다

그곳에 황금의 땅 엘도라도가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곳엔 황금의 땅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은 원주민을 살해하고

마을에 불을 지르고 돌아왔다.

아이들은 노예로 쓰기위해 배에 태웠다.

바다위에서 굶주림과 항해에 지친 아이들이

하나둘 죽어나가기 시작했다.

아이들은 피를 토하고 배위에서 하나씩 쓰러졌다.

그리고 그 피 위에서 식물 같은 꽃이 자라기 시작했다.

스페인에 돌아왔을 때 그 꽃은 엄청나게 커져 있었다.

스페인 여왕은 황금대신

이 꽃을 따왔다고 백성들에게 알렸다.

(114)

 

위 그림이 이른바 '바운티호의 반란'을 일으킨 선원들이 타히티에 상륙하는 모습을 그린 게 사실이라면 김경주의 시에서는 왜 스페인 군함이 남미에 원정 갔다가 원주민을 싣고 들어오는 장면으로 묘사한 것일까?

어찌 보면 둘은 전혀 다른 맥락의 이야기인데, 이것을 그림에 대한 해석의 차이로 보아야 할지 아니면 누군가의 곡해로 보아야 할지 조금 아리송하다.  

 

 

 

<해돋이 해변(Sunrise by the Ocean)>, painting on canvas, 63.5×53.4cm

 

 

해돋이 해

 

해는 매일 아침 자신의 나이테를 땅에 숨기죠

사람들은 매일 아침 해를 숨길 수 없어서

나이를 먹어가는 거래요.

 

갈매기는 매일 아침

수평선을 물고 가서

해에게 떨어뜨리고 있어요

(117)

 

 

수위가 높지는 않았지만 어른들이 볼만한 그림도 조금 있긴 했다.

2부 '욕망' 파트에서 그런 작품들을 보았다.

그 가운데 아래 그림이 기억에 남는데, 특히 오른쪽에 쌓인 책들의 모서리 부분을 주목하자.

 

 

<에로틱 동화(Contes Erotique)>, painting on canvas, 20×25cm

 

 

에로틱 동화

 

학은 학의 하늘이 있고

 

물고기는 물고기의 하늘이 있고

 

수 천년간 살아온 늑대에게는

수 천년간 살아온 바람이 있어요

 

내게는 도저히 떠나지 못하는 시가 있고

우리가 만든 우주의 비밀이 하나 있어요

 

눈을 기다리는 악어처럼

그건 악어만의 비밀

 

물범처럼

밤에 해변으로 몰래 올라와

가만히 나는 당신 옆에 누웠죠

(78)

 

 

 

 

<잠자리에서 읽는 책(Pillow Book)>, painting on canvas, 51×51cm

 

나는 이 그림을 보자마자 딸내미가 좋아할 거라는 예상을 했다.

나중에 들어보니 과연 그랬다고, "근데 왜 벌거벗고 자냐"고 했다더라.

 

 

 

 

<달빛 소나타(Moonlight Sonata)>, painting on canvas, 51×40.7cm

 

딸내미는 이 작품을 보고 엄마한테

"연주를 듣고 있는 사람들이 왜 다 돌돌 말려있는줄 알아?" 하더란다.

왜 그러는 거냐고 묻자 딸내미는

"애벌레(번데기겠지)라서 그래. 나비 피아노 소리를 듣고 이제 나비가 될 거야." 라고 했단다.

옆에서 듣던 관객들이 모두 놀라며, 고개를 끄덕였다고 한다. 내가 다시 봐도 과연 그런 거 같다.

김경주 씨가 시편을 붙인 다른 작품들도 그렇지만, 나는 이 작품의 메타포도 꽤 뛰어나다고 생각한다.

 

 

 

 

<태양의 비상(Flight of the sun)>, painting on canvas, 28×38cm

 

재미 있는 그림이다. 아이들은 이 그림과 앞에 나온 <해돋이 해변>을 보고 계란이라고 하더라.

쿠쉬는 하와이에 정착하여 작품 활동을 했다고 한다. 하와이가 포함된 폴리네시안 문화에서 태양은 삶의 시작을 상징한다고 하며, 그래서인지 이렇게 태양을 계란 노른자로 비유한 모티프가 그림 중에 자주 나온다.

도록 해설에서는 우주 창조와 관계된 난생 신화와 연결하고 있는데, 사실 그림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관람자는 저마다 갖춘 경험과 언어와 논리로 그림의 뜻을 해석할 뿐이다. 아이들은 아이들의 수준에서, 어른들은 어른들의 수준에서.

해석에 반대한다고, 스타일이 전부라고 하는 견해도 있지만 이런 그림 앞에서도 그렇게 주장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라만차의 동물상(Fauna in la mancha)>(부분), painting on canvas

 

위 그림은 돈키호테를 읽은 사람에게는 재미 있는 그림이겠지만, 아이들은 몰랐을 것이다.

같이 보던 큰애한테 옛날에 풍차를 괴물이라고 착각해서 그것을 향해 창 들고 돌진한 미친 기사가 한 명 있었다고 해줬다.

 

 

#

전시작품 명제표에서 이상했던 건 'painting(oil)' on canvas를 'printing' on canvas라고 써 놓았다는 사실이다(전부 다 그렇게 표기되었는지는 다 확인하지 않아서 모르겠다).

눈여겨 보는 사람이야 많지 않겠지만, 유화가 분명한 작품에 'printing on canvas' 라고 명시해 놓으면 오해가 있을 수 있다. - 진품이 아니라 '찍어낸' 작품이 아닌가, 그러면 지금 보고 있는 이 그림이 복제품이 아닌가 하고 말이다.

도록에는 분명히 'painting on canvas'라고 나온 걸 보면 실수인 것 같은데 왜 그대로 둔 채 전시하는지 모르겠다.

인력도 부족하고 입장료도 안 받는 화랑 전시라면 뭐 대수롭지 않게 넘어가겠는데, 꽤 비싼 돈을 내고 들어간 전시회에서 이런 허술함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편치만은 않았다.

 

김경주의 시집은 읽어본 적이 없는데, 꽤 알려진 시인인가 보다.

최근 그가 번역한 <골리앗>은 조만간 구입하려고 장바구니에 넣어 두긴 했다. 하지만 번역자가 '김경주'란 건 오늘에서야 그 이름을 검색해 보고 알았다.

 

큰애한테 물어보니 아직 다윗과 골리앗의 이야기를 모르던데, 그런 애한테 골리앗 이야기를 던져준다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지는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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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피북 2015-03-23 07: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어떤 해설보다도 아이의 번데기 해설이 가장 인상적이였어요 가끔 생각지도 못하는 부분을 관찰하고 들려줄땐 어른들의 상상력보다 아이들이 더 뛰어난다는 생각을 합니다

저두 전시회 갈일있을땐 조카들과 함께 가고 싶네요 멋진 그림과 시 잘보고 갑니다 덕분에 눈이 호강했어요^~^

돌궐 2015-03-23 09:27   좋아요 1 | URL
저희도 깜짝 놀랐어요. 가끔은 그런 아이들의 직관력이 부럽기도 합니다.^^
아이들과 즐거운 시간 되시면 좋겠네요. 작품들은 정말 재미있었어요.

곰곰생각하는발 2015-03-23 11:3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애벌레 해석 정말 탁월하네요. 읽다가 놀랐습니다.

돌궐 2015-03-23 12:35   좋아요 1 | URL
늘 재미난 글로 놀라게 해주시는 곰곰생각 님마저 놀라셨다니 저희가 놀랄만한 일이 맞았네요.^^

곰곰생각하는발 2015-03-23 13:0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에로틱 동화`라는 유화`를 보면 왜 종이를 접어서 돌출된 그림 있잖습니까.
자꾸 보면 이 그림에서 나오는 책 이미지`가 여성 성기`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니까 종이를 접어 툭 튀어나온 부분은 마치 클리토리스 같다고나 할까요..ㅎㅎ
왼쪽 그림 하단에 보면 꼬마 조개가 보이는데 딱 보면 여성 성기`입니다.

글구. 오른쪽 책 모서리를 가만 보면 사람 얼굴 형상이에요. 그림이 재미있네요...

돌궐 2015-03-23 14:04   좋아요 1 | URL
과연 그렇군요. 게다가 그 책 저자는 무려 사드로군요.
오른쪽 그 사람들은 죄다 남자가 맞는 거겠죠? 음흉한 표정에다... ㅎㅎㅎ

oren 2015-03-23 20:5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주 흥미로운 그림들이 많네요. 돌궐 님 덕분에 블라디미르 쿠쉬의 그림을 다른 데까지 날아가서 찾아보게 되는군요.. 거기엔 그림마다 자세한 설명글까지 달려 있더라구요.
그림이든 영문 설명이든 `해석`이 문제네요.. ㅎㅎ
(☞ http://vladimirkush.com/Editions/Page-3)

* * *

Contes Erotique

The Marquise de Sade wrote volumes about his daring study of the sphere where sensual pleasures, sex, and uncontrolled desire reign. However, de Sade invented nothing; he just showed us ourselves. This is, as they say, the naked truth. For the artist there are no unsolvable mysteries, he is occupied not with moralizing, but with the quest for beauty. In nature there is no dirty spot, only we have introduced it in her. We have treated this ˝dirt˝ too superficially. Friedrich Nietzsche The image in some way reproduces the biblical theme Susanna and the Old Men, to which artists from different epochs showed interest – such as Rembrandt, Goya, etc. The old men – here are, obviously, the books, that display a keen interest in the ˝woman˝ who reveals to them her beauty secrets.

돌궐 2015-03-23 22:49   좋아요 1 | URL
oren 님 알려주신 사이트에 가봤습니다. 전시에서 봤던 작품들이 많이 있네요.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옮겨주신 <에로틱 동화> 영문 해설은 `천천히` 읽어보겠습니다.^^

[그장소] 2015-03-23 23:3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즐거운 나들이였네요^^

돌궐 2015-03-24 00:06   좋아요 1 | URL
네 다행입니다.^^

yamoo 2015-03-24 17: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블라디미르 쿠쉬...제가 정말 좋아하는 화가 중 하나입니다..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저도 오렌님이 알려주신 사이트로 고고~^^

돌궐 2015-03-24 21:29   좋아요 0 | URL
쿠쉬 그림은 달리 같기도 하고 마그리트 같기도 하고 그러네요.^^

껌정드레스 2015-03-25 01: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로틱 동화 그림과 그 아랫 그림, 책갈피에 깃털이 꽂혀 있네요. 의미심장합니다. <레다와 백조> 가 생각나네요.

돌궐 2015-03-25 12:12   좋아요 0 | URL
저도 그것 참... 하면서 뭐라고 말하기도 그렇고 해서 가만히 있었습니다.ㅎㅎ
말씀대로 레다와 백조와 연결하면 더 의미심장하군요. 그것 참 뭐라고 표현할 방법이 없네요.^^;
 
이런 시가 하필
가만히 좋아하는 창비시선 262
김사인 지음 / 창비 / 200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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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은 아주 평범한 일상이나 사물도 다르게 보는 사람들이다.

심지어는 자기 자신조차도 관조하는 자들이다. 그리고 그것을 정제된 글로 표현한다.

 

 

 

노숙

 

 

헌 신문지 같은 옷가지들 벗기고

눅눅한 요 위에 너를 날것으로 뉘고 내려다본다

생기 잃고 옹이진 손과 발이며

가는 팔다리 갈비뼈 자리들이 지쳐 보이는구나

미안하다

너를 부려 먹이를 얻고

여자를 안아 집을 이루었으나

남은 것은 진땀과 악몽의 길뿐이다

또다시 낯선 땅 후미진 구석에

순한 너를 뉘였으니

어찌하랴

좋던 날도 아주 없지는 않았다만

네 노고의 헐한 삯마저 치를 길 아득하다

차라리 이대로 너를 재워둔 채

가만히 떠날까도 싶어 묻는다

어떤가 몸이여

(12)

 

이 시로 김사인 시인은 2005년 현대문학상을 받은 걸로 알고 있다.

그리고 이 한편만으로도 시집은 별3개 깔고 들어간다.

나는 시를 많이 모르지만 시집 한 권에서 다섯 편 이상 뽑을 수 있다면 별 다섯 개를 줘도 무방하다고 생각한다.

 

 

 

깊이 묻다

 

 

사람들 가슴에

텅텅 빈 바다 하나씩 있다

 

사람들 가슴에

길게 사무치는 노래 하나씩 있다

늙은 돌배나무 뒤틀어진 그림자 있다

 

사람들 가슴에

겁에 질린 얼굴 있다

충혈된 눈들 있다

 

사람들 가슴에

막다른 골목 날선 조선낫 하나씩 숨어 있다

파란 불꽃 하나씩 있다

 

사람들 가슴에

후두둑 가을비 뿌리는 대숲 하나씩 있다

(81)

 

 

 

옛 일

 

 

그 여름 밤길

수풀 헤치며 듣던

어질머리 풀냄새 벌레소리

발목에 와 석거이던 이슬방울 그리워요

우리는 두 마리 철없는 노루새끼처럼

몸 달아, 하아 몸은 달아

비에 씻긴 산길만 헤저어 다니고요

단숨만 들여마시고요

안 그런 척 팔만 한번씩 닿아보고요

안 그런 척 몸 가까이 냄새만 설핏 맡아보고요

캄캄 어둠 속에 올려 묶은 머리채 아래로

그대 목덜미 맨살은 투명하게 빛났어요

생채기투성이 내 손도 아름다웠지요

 

고개 넘고 넘어

그대네 동네 뒷산길

애가 타 기다리던 그대 오빠는 눈 부라렸지만

우리는 숫기없이 꿈 덜 깬 두 산짐승

손도 한번 못 잡아본걸요

되짚어오는 길엔

고래고래 소리질러 노래만 불렀던걸요

(86-87)

 

 

 

인절미

 

 

외할머니 떡함지 이고

이 동네 저 동네로 팔러 가시면

나는 잿간 뒤 헌 바자 양지 쪽에 숨겨둔

유릿조각 병뚜껑 부러진 주머니칼 쌍화탕병 손잡이 빠진 과도 터진 오자미 꺼내놓고

쪼물거렷다

한나절이 지나면 그도 심심해

뒷집 암탉이나 애꿎게 쫓다가

신발을 직직 끈다고

막내 이모한테 그예 날벼락을 맞고

김치가 더 많은 수제비 한 사발

눈물 콧물 섞어서 후후 먹었다

스피커에서 따라 배운 '노란 샤쓰' 한 구절을 혼자 흥얼거리다

아랫목에 엎어져 고양이잠을 자고 나면

아침인지 저녁인지 문만 부예

빨개진 한쪽 볼로 무서워 소리치면

군불 때던 이모는 아침이라고 놀리곤 했다

저물어 할머니 돌아오시면

잘 팔린 날은 어찌나 서운턴지

함지에 묻어 남은 고운 콩고물

손가락 끝 쪽글토록

침을 발라 찍어먹고 또 찍어먹고

 

아아 엄마가 보고 싶어 비어지는 내 입에

쓴 듯 단 듯 물려주던

외할머니 그 인절미

용산시장 지나다가 초라한 좌판 위에서 만나네

웅크려 졸고 있는 외할머니 만나네

(88-89)

 

 

 

조용한 일

 

 

이도 저도 마땅치 않은 저녁

철이른 낙엽 하나 슬며시 곁에 내린다

 

그냥 있어볼 길밖에 없는 내 곁에

저도 말없이 그냥 있는다

 

고맙다

실은 이런 것이 고마운 일이다

(38)

 

 

#

누가 시를 삶에 대한 부드러운 복수라고 했다던데, 나는 그저 시는 허세라고만 생각했다.

근데 복수면 어떻고 허세면 어떤가. 어차피 인생은 허세로 가득한 일장춘몽 아니던가.

허세고 복수고 간에 이런 시를 읽을 수 있었다는 건 참 고마운 일이다.

 

"실은 이런 것이 고마운 일이다."

옆에 떨어진 나뭇잎조차도 달리 보게 해주어서 고맙고,

내 안에 숨겨진 '날선 조선낫' 한 자루가 무언가 생각해 본 것도 고맙고,

"손도 한번 못잡아"보고 떠났던 아이가 생각나서 고마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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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병통치약 2015-03-21 20: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화려하지 않고 멋 부리지 않아 더 와닿네요

돌궐 2015-03-21 23:05   좋아요 0 | URL
시집 속에는 조금 어려운 시도 있긴 한데, 아직 제가 다 소화를 못했습니다.^^;

해피북 2015-03-21 21: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두...시에 대해 잘 모르지만 이렇게 날것 처럼 생생하게 다가올때 크게 와닿는거 같아요 ^~^

돌궐 2015-03-21 23:07   좋아요 0 | URL
김사인 시의 장점이 말씀하신 바로 그런 것이 아닐까 싶네요.
 

불경에서는 정말 탁월한 비유들을 많이 볼 수 있다.

<법화경>에 나오는 '三車火宅'의 비유는 정신 없이 노느라 집에 불난 줄도 모르고 안 나오는 어린 아이들을 장자가 대문 밖에서 장난감으로 가득 찬 수레로 유인하여 무사히 빠져나오게 만든다는 이야기이다. 

이는 부처님의 가르침 가운데 자기에게 맞는 것이 있으면 저절로 거기에 따르게 된다는 비유이다.

속세의 집착과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중생을 깨달음으로 인도하는 부처의 방편을 비유한 것이기도 하다.

 

 

 

<법화경 변상도> 부분 '삼차화택', 고려, 1340년, 일본 나베시마보효회 소장 

 

 

가만히 생각하면 나 역시 저 불타는 장자의 집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서까래 밑에서 집착과 욕망에 사로잡혀 아둥바둥 살아가는 중생일 뿐이다. 

아래 옮기는 인생에 대한 비유는 처음 들어본 것인데 이또한 적절함을 넘어서 섬뜩할 정도가 아닌가.

 

  

어떤 사람이 벌판을 걷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뒤에서 성난 코끼리가 달려왔다. 그는 코끼리를 피하기 위해 마구 달리기 시작했다. 한참 달리다 보니 몸을 피할 작은 우물이 있어 급한 나머지 그 안으로 들어갔다. 우물에는 마침 칡넝쿨이 있었다. 그는 그것을 타고 밑으로 내려갔다. 한참 내려가다가 정신을 차리고 아래를 보니 우물 바닥에는 무서운 독사가 혀를 널름거리고 있었다. 두려움에 위를 쳐다보았더니 코끼리가 아직도 우물 밖에서 성난 표정으로 지키고 있었다. 그는 할 수 없이 칡넝쿨에 매달려 목숨을 부지하고 있는데, 어디선가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주위를 살펴보니 위에서 흰 쥐와 검은 쥐가 번갈아가면서 칡넝쿨을 갉아먹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뿐만 아니라 우물 중간에서는 작은 뱀들이 왔다 갔다 하면서 그를 노리고 있었다. 온몸에 땀이 날 정도로 두려움에 떨면서 칡넝쿨을 잡고 매달려 있는데 마침 어디선가 벌 다섯 마리가 날아와 칡넝쿨에 집을 지었다. 그리고 꿀을 한 방울씩 아래로 떨어뜨리는 것이었다. 그는 꿀을 받아먹으면서 달콤한 꿀맛에 취해 위급한 상황을 잊은 채, 꿀이 왜 더 많이 떨어지지 않나 하는 생각에 빠졌다.

 

이 이야기는 『불설비유경(佛說譬喩經)「안수정등도(岸樹井藤圖)에 나오는 인생의 비유이다. 여기서 코끼리는 무상하게 흘러가는 세월을 의미하고, 칡넝쿨은 생명줄을, 검은 쥐와 흰 쥐는 밤과 낮을 의미한다. 작은 뱀들은 가끔씩 몸이 아픈 것이고, 독사는 죽음이며, 벌 다섯 마리는 인간의 五慾樂을 말한다. 이와 같이 자신의 처지도 잊은 채 탐욕의 꿀맛에 취해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어리석은 인생이다. (2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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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5-03-20 21: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이야기 정말 오래만에 읽어요. 지금은 활동을 하지 않은 서재 이웃님도 법화경에 나오는 이야기를 소개한 적이 있었어요. 아마도 그 때가 지금으로부터 4, 5년 전이었을 거예요. 그 분의 글 덕분에 법화경의 가치를 처음으로 알게 되었어요.

돌궐 2015-03-20 22:45   좋아요 0 | URL
아 그런 선배님이 계셨었군요. 경전 중에 게송들이 너무 길거나 지루하게 반복되어 나오는 경우에는 좀 건너뛰면서 읽으니까 그나마 쉽게 읽을 수 있었어요. 아, 물론 한글경전이요.ㅎㅎ
 
순대를 사서 먹었다
저녁 6시 창비시선 282
이재무 지음 / 창비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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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근길에 도서관에 들러 시집 두 권을 빌려왔다. 그 중 하나가 <저녁 6시>다.

예전부터 읽고 싶었던 시집인데, 이제서야 겨우 읽었다.

몇 년 전에 신문(아마 한겨레였을 듯)에서 '갈퀴'를 읽고 나서부터 한 번 찾아봐야겠다고 생각했었다.

 

저녁 밥을 먹고 자려고 누운 자리에서 읽기 시작하여 내처 해설까지 다 읽었으니, 이건 시집 한 권 읽으려면 한참이 걸리는 나로선 전례가 없는 일이다.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다. 그냥 다 읽어야겠다는 생각으로 마음을 먹으니 이리 됐을 뿐이다.

무슨 숙제를 마친 것도 같고, 빚을 갚은 것 같은 심정도 든다.

얼마 전에 올린 페이퍼에 '식물성 곱창'이 <슬픔에게 무릎을 꿇다>에 실려있다고 썼었는데, 사실 이 책에 나오는 시다.

이재무의 시집 두 권을 나란히 서점에서 뽑아서 읽다가 '식물성 곱창'이 좋아서 촬영한 뒤 옮겨적었는데, <슬픔에게..>에 실린 걸로 착각을 한 것이었다.

그런데 오늘 이 책을 읽다가 갑자기 '식물성 곱창'이 튀어나와서 깜짝 놀랐다.

아마 이 어처구니 없는 오류에 대한 인식이 나의 무의식 속에 도사리고 있었나 보다. 그래서 그 잘못을 바로잡으려 애써 끝까지 읽은 것이고.

 

아무튼 마음에 울림을 주는 시들이 많이 있었다.

사회와 시대풍조에 대한 비판도 있었고, 능청스러운 낭만과, 삶에 대한 회한, 그리고 문학에 관한 성찰이 여러 시편들 속에 담겨 있더라. 아래에 시 다섯 편만 옮겨 본다.

 

 

갈퀴

 

 

흙도 가려울 때가 있다

씨앗이 썩어 싹이 되어 솟고

여린 뿌리 칭얼대며 품속 파고들 때

흙은 못 견디게 가려워 실실 웃으며

떡고물 같은 먼지 피워올리는 것이다

눈밝은 농부라면 그걸 금세 알아차리고

헛청에서 낮잠이나 퍼질러 가는 갈퀴 깨워

흙의 등이고 겨드랑이고 아랫도리고 장딴지고

슬슬 제 살처럼 긁어주고 있을 것이다

또 그걸 알고 으쓱으쓱 우쭐우쭐 맨머리 새싹은

갓 입학한 어린애들처럼 재잘대며 자랄 것이다

가려울 때를 알아 긁어주는 마음처럼

애틋한 사랑 어디 있을까

갈퀴를 만나 진저리치는 저 살들의 환희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은

사는 동안 가려워 갈퀴를 부른다 

(11)

 

 

넘어진 의자

 

 

누가 저 의자를 넘어뜨렸나

한 평 반 벌방 속 젖어 축축한 자들에게

달콤한 휴식을 주던 의자

고시원 옥상에 버려져 있다

한쪽 다리가 꺾일 때까지

비닐가죽 깔판 속 근육 뭉친 솜들이

터진 틈으로 질질 샐 때까지

묵묵히 무게를 견뎌온

저 순결한 이타,

누가 있어 기억이나 해줄 것인가

비명도 없이 쏟아지는 비

흠뻑 젖는 제 영혼 추슬러

스스로의 무릎에 앉히고 있는,

버려진 의자

(64)

 

 

 

울음이 없는 개

 

 

몸속에 꿈틀대던 늑대의 유전인자,

세상과 불화하며 광목 찢듯 부우욱

하늘 찢으며 서슬 푸른 울음 울고 싶었다

곧게 꼬리 세우고 송곳니 번뜩이며

울타리 침범하는 무리 기함하게 하고 싶었다

하늘이 내린 본성대로 통 크게 울며

생의 벌판 거침없이 내달리고 싶었다

배고파 달이나 뜯는 밤이 올지라도

출처 불분명한 밥은 먹지 않으려 했다

그러나 불온하고 궁핍한 시간을

나는 끝내 이기지 못하였다

목에는 제도의 줄이 채워져 있고

줄이 허락하는 생활의 마당 안에서

정해진 일과의 트랙 돌고 있었다

체제의 수술대에 눕혀져 수술당한 성대로

저 홀로 고아를 살며 자주 꼬리

흔들고 있었다 머리 조아리는 날 늘어갈수록

컥, 컥, 컥 나오지 않는 억지울음

스스로를 향해 짖고 있었다

(80-81)

 

 

 

팽이

 

 

 

오늘 나는 한 방향만을 고집하는

저 낯익은 사내에 대해 다시 노래하련다

회초리가 와서 자신의 몸을

때리면 때려댈수록 더욱

돌고 돌면서 미쳐 날뛰면서 그는

회초리가 빨리 더 빨리

다녀가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

맹렬한 속도로 돌고 도는 관성은

바라보고 있으면 바닥에 뿌리를 내린 것처럼

직립의 회전을 보이기도 하나

주기적인 매질이 없으면

언제라도 바닥에 내팽개쳐질 가련한 신세

그러기에 팽이는 돌면서 매를 부르고

회초리는 팽이의 몸에 척척 감기며

가학의 쾌감에 전율한다

저 현기 속에 오늘의 우리가 있다

오, 저것은 얼마나 지독한

자본의 마조히즘과 사디즘이란 말인가

(96-97)

 

 

 

 

관상용 대나무

 

 

 

도회지 공원이나 술집 한구석

장식품으로 살아가는 저 홀로 대나무

제 뜻과 상관없이 이주되어

실향을 사는,

거주 이전의 자유가 없는 저 나무에게서

옛소련 시절 강제분할 이주를 겪은

사할린 동포의 얼굴을 본다

아메리카 원주민 인디오의 눈물을,

죽어 상품이 된 체 게바라의 혁명을 본다

한 시대 양심의 본이었으나

자본의 데릴사위가 되어 웃음 파는

쓸쓸한 선비의 초상을

(98)

 

 

 

「그 여자」 중

그녀를 사랑하는 일 수만평 진흙밭

새구두를 신고 걷는 일처럼 벅찬 일이었네

(57)

「말과 권력」 중에서

탕진만이 욕망을 쉬게 하리라
사는 동안, 살기 위하여 나 말에 멱살 잡혀
실감과는 상관없는 생 살아왔는지 모른다 (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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