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대를 사서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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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6시 ㅣ 창비시선 282
이재무 지음 / 창비 / 2007년 12월
평점 :
퇴근길에 도서관에 들러 시집 두 권을 빌려왔다. 그 중 하나가 <저녁 6시>다.
예전부터 읽고 싶었던 시집인데, 이제서야 겨우 읽었다.
몇 년 전에 신문(아마 한겨레였을 듯)에서 '갈퀴'를 읽고 나서부터 한 번 찾아봐야겠다고 생각했었다.
저녁 밥을 먹고 자려고 누운 자리에서 읽기 시작하여 내처 해설까지 다 읽었으니, 이건 시집 한 권 읽으려면 한참이 걸리는 나로선 전례가 없는 일이다.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다. 그냥 다 읽어야겠다는 생각으로 마음을 먹으니 이리 됐을 뿐이다.
무슨 숙제를 마친 것도 같고, 빚을 갚은 것 같은 심정도 든다.
얼마 전에 올린 페이퍼에 '식물성 곱창'이 <슬픔에게 무릎을 꿇다>에 실려있다고 썼었는데, 사실 이 책에 나오는 시다.
이재무의 시집 두 권을 나란히 서점에서 뽑아서 읽다가 '식물성 곱창'이 좋아서 촬영한 뒤 옮겨적었는데, <슬픔에게..>에 실린 걸로 착각을 한 것이었다.
그런데 오늘 이 책을 읽다가 갑자기 '식물성 곱창'이 튀어나와서 깜짝 놀랐다.
아마 이 어처구니 없는 오류에 대한 인식이 나의 무의식 속에 도사리고 있었나 보다. 그래서 그 잘못을 바로잡으려 애써 끝까지 읽은 것이고.
아무튼 마음에 울림을 주는 시들이 많이 있었다.
사회와 시대풍조에 대한 비판도 있었고, 능청스러운 낭만과, 삶에 대한 회한, 그리고 문학에 관한 성찰이 여러 시편들 속에 담겨 있더라. 아래에 시 다섯 편만 옮겨 본다.
갈퀴
흙도 가려울 때가 있다
씨앗이 썩어 싹이 되어 솟고
여린 뿌리 칭얼대며 품속 파고들 때
흙은 못 견디게 가려워 실실 웃으며
떡고물 같은 먼지 피워올리는 것이다
눈밝은 농부라면 그걸 금세 알아차리고
헛청에서 낮잠이나 퍼질러 가는 갈퀴 깨워
흙의 등이고 겨드랑이고 아랫도리고 장딴지고
슬슬 제 살처럼 긁어주고 있을 것이다
또 그걸 알고 으쓱으쓱 우쭐우쭐 맨머리 새싹은
갓 입학한 어린애들처럼 재잘대며 자랄 것이다
가려울 때를 알아 긁어주는 마음처럼
애틋한 사랑 어디 있을까
갈퀴를 만나 진저리치는 저 살들의 환희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은
사는 동안 가려워 갈퀴를 부른다
(11)
넘어진 의자
누가 저 의자를 넘어뜨렸나
한 평 반 벌방 속 젖어 축축한 자들에게
달콤한 휴식을 주던 의자
고시원 옥상에 버려져 있다
한쪽 다리가 꺾일 때까지
비닐가죽 깔판 속 근육 뭉친 솜들이
터진 틈으로 질질 샐 때까지
묵묵히 무게를 견뎌온
저 순결한 이타,
누가 있어 기억이나 해줄 것인가
비명도 없이 쏟아지는 비
흠뻑 젖는 제 영혼 추슬러
스스로의 무릎에 앉히고 있는,
버려진 의자
(64)
울음이 없는 개
몸속에 꿈틀대던 늑대의 유전인자,
세상과 불화하며 광목 찢듯 부우욱
하늘 찢으며 서슬 푸른 울음 울고 싶었다
곧게 꼬리 세우고 송곳니 번뜩이며
울타리 침범하는 무리 기함하게 하고 싶었다
하늘이 내린 본성대로 통 크게 울며
생의 벌판 거침없이 내달리고 싶었다
배고파 달이나 뜯는 밤이 올지라도
출처 불분명한 밥은 먹지 않으려 했다
그러나 불온하고 궁핍한 시간을
나는 끝내 이기지 못하였다
목에는 제도의 줄이 채워져 있고
줄이 허락하는 생활의 마당 안에서
정해진 일과의 트랙 돌고 있었다
체제의 수술대에 눕혀져 수술당한 성대로
저 홀로 고아를 살며 자주 꼬리
흔들고 있었다 머리 조아리는 날 늘어갈수록
컥, 컥, 컥 나오지 않는 억지울음
스스로를 향해 짖고 있었다
(80-81)
팽이
오늘 나는 한 방향만을 고집하는
저 낯익은 사내에 대해 다시 노래하련다
회초리가 와서 자신의 몸을
때리면 때려댈수록 더욱
돌고 돌면서 미쳐 날뛰면서 그는
회초리가 빨리 더 빨리
다녀가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
맹렬한 속도로 돌고 도는 관성은
바라보고 있으면 바닥에 뿌리를 내린 것처럼
직립의 회전을 보이기도 하나
주기적인 매질이 없으면
언제라도 바닥에 내팽개쳐질 가련한 신세
그러기에 팽이는 돌면서 매를 부르고
회초리는 팽이의 몸에 척척 감기며
가학의 쾌감에 전율한다
저 현기 속에 오늘의 우리가 있다
오, 저것은 얼마나 지독한
자본의 마조히즘과 사디즘이란 말인가
(96-97)
관상용 대나무
도회지 공원이나 술집 한구석
장식품으로 살아가는 저 홀로 대나무
제 뜻과 상관없이 이주되어
실향을 사는,
거주 이전의 자유가 없는 저 나무에게서
옛소련 시절 강제분할 이주를 겪은
사할린 동포의 얼굴을 본다
아메리카 원주민 인디오의 눈물을,
죽어 상품이 된 체 게바라의 혁명을 본다
한 시대 양심의 본이었으나
자본의 데릴사위가 되어 웃음 파는
쓸쓸한 선비의 초상을
(98)
「그 여자」 중
그녀를 사랑하는 일 수만평 진흙밭
새구두를 신고 걷는 일처럼 벅찬 일이었네
(57)
「말과 권력」 중에서
탕진만이 욕망을 쉬게 하리라 사는 동안, 살기 위하여 나 말에 멱살 잡혀 실감과는 상관없는 생 살아왔는지 모른다 (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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