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시가 하필
가만히 좋아하는 창비시선 262
김사인 지음 / 창비 / 200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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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은 아주 평범한 일상이나 사물도 다르게 보는 사람들이다.

심지어는 자기 자신조차도 관조하는 자들이다. 그리고 그것을 정제된 글로 표현한다.

 

 

 

노숙

 

 

헌 신문지 같은 옷가지들 벗기고

눅눅한 요 위에 너를 날것으로 뉘고 내려다본다

생기 잃고 옹이진 손과 발이며

가는 팔다리 갈비뼈 자리들이 지쳐 보이는구나

미안하다

너를 부려 먹이를 얻고

여자를 안아 집을 이루었으나

남은 것은 진땀과 악몽의 길뿐이다

또다시 낯선 땅 후미진 구석에

순한 너를 뉘였으니

어찌하랴

좋던 날도 아주 없지는 않았다만

네 노고의 헐한 삯마저 치를 길 아득하다

차라리 이대로 너를 재워둔 채

가만히 떠날까도 싶어 묻는다

어떤가 몸이여

(12)

 

이 시로 김사인 시인은 2005년 현대문학상을 받은 걸로 알고 있다.

그리고 이 한편만으로도 시집은 별3개 깔고 들어간다.

나는 시를 많이 모르지만 시집 한 권에서 다섯 편 이상 뽑을 수 있다면 별 다섯 개를 줘도 무방하다고 생각한다.

 

 

 

깊이 묻다

 

 

사람들 가슴에

텅텅 빈 바다 하나씩 있다

 

사람들 가슴에

길게 사무치는 노래 하나씩 있다

늙은 돌배나무 뒤틀어진 그림자 있다

 

사람들 가슴에

겁에 질린 얼굴 있다

충혈된 눈들 있다

 

사람들 가슴에

막다른 골목 날선 조선낫 하나씩 숨어 있다

파란 불꽃 하나씩 있다

 

사람들 가슴에

후두둑 가을비 뿌리는 대숲 하나씩 있다

(81)

 

 

 

옛 일

 

 

그 여름 밤길

수풀 헤치며 듣던

어질머리 풀냄새 벌레소리

발목에 와 석거이던 이슬방울 그리워요

우리는 두 마리 철없는 노루새끼처럼

몸 달아, 하아 몸은 달아

비에 씻긴 산길만 헤저어 다니고요

단숨만 들여마시고요

안 그런 척 팔만 한번씩 닿아보고요

안 그런 척 몸 가까이 냄새만 설핏 맡아보고요

캄캄 어둠 속에 올려 묶은 머리채 아래로

그대 목덜미 맨살은 투명하게 빛났어요

생채기투성이 내 손도 아름다웠지요

 

고개 넘고 넘어

그대네 동네 뒷산길

애가 타 기다리던 그대 오빠는 눈 부라렸지만

우리는 숫기없이 꿈 덜 깬 두 산짐승

손도 한번 못 잡아본걸요

되짚어오는 길엔

고래고래 소리질러 노래만 불렀던걸요

(86-87)

 

 

 

인절미

 

 

외할머니 떡함지 이고

이 동네 저 동네로 팔러 가시면

나는 잿간 뒤 헌 바자 양지 쪽에 숨겨둔

유릿조각 병뚜껑 부러진 주머니칼 쌍화탕병 손잡이 빠진 과도 터진 오자미 꺼내놓고

쪼물거렷다

한나절이 지나면 그도 심심해

뒷집 암탉이나 애꿎게 쫓다가

신발을 직직 끈다고

막내 이모한테 그예 날벼락을 맞고

김치가 더 많은 수제비 한 사발

눈물 콧물 섞어서 후후 먹었다

스피커에서 따라 배운 '노란 샤쓰' 한 구절을 혼자 흥얼거리다

아랫목에 엎어져 고양이잠을 자고 나면

아침인지 저녁인지 문만 부예

빨개진 한쪽 볼로 무서워 소리치면

군불 때던 이모는 아침이라고 놀리곤 했다

저물어 할머니 돌아오시면

잘 팔린 날은 어찌나 서운턴지

함지에 묻어 남은 고운 콩고물

손가락 끝 쪽글토록

침을 발라 찍어먹고 또 찍어먹고

 

아아 엄마가 보고 싶어 비어지는 내 입에

쓴 듯 단 듯 물려주던

외할머니 그 인절미

용산시장 지나다가 초라한 좌판 위에서 만나네

웅크려 졸고 있는 외할머니 만나네

(88-89)

 

 

 

조용한 일

 

 

이도 저도 마땅치 않은 저녁

철이른 낙엽 하나 슬며시 곁에 내린다

 

그냥 있어볼 길밖에 없는 내 곁에

저도 말없이 그냥 있는다

 

고맙다

실은 이런 것이 고마운 일이다

(38)

 

 

#

누가 시를 삶에 대한 부드러운 복수라고 했다던데, 나는 그저 시는 허세라고만 생각했다.

근데 복수면 어떻고 허세면 어떤가. 어차피 인생은 허세로 가득한 일장춘몽 아니던가.

허세고 복수고 간에 이런 시를 읽을 수 있었다는 건 참 고마운 일이다.

 

"실은 이런 것이 고마운 일이다."

옆에 떨어진 나뭇잎조차도 달리 보게 해주어서 고맙고,

내 안에 숨겨진 '날선 조선낫' 한 자루가 무언가 생각해 본 것도 고맙고,

"손도 한번 못잡아"보고 떠났던 아이가 생각나서 고마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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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병통치약 2015-03-21 20: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화려하지 않고 멋 부리지 않아 더 와닿네요

돌궐 2015-03-21 23:05   좋아요 0 | URL
시집 속에는 조금 어려운 시도 있긴 한데, 아직 제가 다 소화를 못했습니다.^^;

해피북 2015-03-21 21: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두...시에 대해 잘 모르지만 이렇게 날것 처럼 생생하게 다가올때 크게 와닿는거 같아요 ^~^

돌궐 2015-03-21 23:07   좋아요 0 | URL
김사인 시의 장점이 말씀하신 바로 그런 것이 아닐까 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