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무사도 - 개정판 우리가 아직 몰랐던 세계의 교양 8
니토베 이나조 지음, 양경미.권만규 옮김 / 생각의나무 / 200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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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벌써 10년이 흘러버렸다. 처음 일본땅에 여행을 가고 나름대로 소중한 경험들을 들고 왔지만, 더 자세히 일본을 들여다 보려해도 마땅한 서적들이 없었던 기억이 난다. 기껏 서점에서 구할 수 있었던 책이라야 베네딕트의 '국화와 칼', 이어령의 '축소지향의 일본인', 영화감독 이규형의 일본문화 소개책자 정도랄까. 이제는 일본문화의 개방으로 영화에서부터 음악, 서적까지 넘쳐나지만 불과 얼마전까지는 상당히 피상적이었다 싶다. 가깝고도 멀다는 말이 실감난다.

이 책은 출간한지 100년이 넘은 책이다. 작가인 니토베 이나조는 그 옛날에 존스 홉킨스에서 공부했고, 귀국해서는 교육자로서 그리고 국제연맹 사무차장까지 역임했으니 꽤 유명한 사람임에 틀림없다. 우연찮게도 얼마전에 읽은 책 '후쿠자와 유키치 자서전'의 저자는 1만엔 일본지폐, 이 책은 5천엔 일본지폐의 주인공이니 일본은 이미 과거 봉건시대를 접고 근대화 이후 시대에서 그들의 미래를 보고 싶은 것임에 틀림없다.

우리가 피상적으로 국사책에서 보아오던 일본(왜)은 설사 36년간 한반도를 침탈했던 과거를 애써 부인하지 않아도, 백제에게 문화를 전수받고, 조선시대 통신사절을 받아들이던 왠지 왜소해 보이던 국가가 아니었던가 싶다. (나만 그런지는 모르겠으나) 우리가 그런 관념적 과거형 속에 묻혀있을 때, 그들도 놀라듯 그들의 근대화는 말그대로 일사천리였다. 우리에게 일본의 근대화는 무서운 일이었고, 불행한 역사로의 귀결이었다.

이 책은 100여년 전 니토베 이나조가 미국에서 출간한 책으로 물론 영어로 먼저 발간된 책이다. 일본에 대한 외국인의 관심에, 일본의 근원이라고 작가가 판단한 '무사도'의 연원, 덕목, 정신, 의무를 비롯해 무사도의 현재, 미래를 서양인이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한 책이다. 서문에도 나와 있듯이 '왜 일본에는 종교교육을 시키지 않느냐?'는 외국인 교수의 질문에 말문이 막혀 고심한 끝에 그 종교적인 영향력을 행사해왔고 일본정신의 근원이라 할 만한 '무사도'에 대한 글을 쓰기로 한 것이다. 책의 처음부터 끝까지 관통하는 기본적인 정신은 동양에서 살고있는 우리들에게는 그렇게 낯선 것들이 아닌 유교적 가치의 발견이다. 다만 전통적인 유교적 가치인 인(仁), 예(禮), 용(勇), 충(忠)등의 덕목에 일본 봉건주의의 특수한 계급, 바로 사무라이에게 요구되던 사회적, 역사적 책무와 그들의 의식에 관한 접목들을 시도한다. 어쩌면 오랜 세월 가마쿠라, 무로마치, 전국시대를 거쳐 에도막부에 이르기까지 군사정권으로 유지되어온 일본의 봉건역사에서 사무라이와 무사도 정신은 특수계급의 정신적 지향점을 넘어 일본전역에 뿌리내려 온, 작가의 생각대로 하나의 종교적 의식으로 받아들여졌는지도 모를 일이다. 더욱이 이 책을 텍스트로만 접한다면 따분하기 그지없는 책일 수도 있는데, 거의 책의 1/3을 사무라이와 전쟁에 관한 옛 그림 및 도판으로 가득 채우고 있어 내용의 이해도를 높이는데 상당한 도움을 준다.

그러나 누차 일본인들이 직접 쓴 책들, 특히 근대화 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의 글을 읽으면서 느끼는 바이지만 인류보편의 가치를 이해하고 설명하는 글은 실종되고, 대부분이 일본적 가치의 절대화, 이를 통한 편협한 일본주의의 실상을 드러내는 듯해서 안타까움을 더한다. 앞서도 말했지만 책의 전반부, 무사도의 기본 정신을 설명하면서 동양사상에서 아주 익숙한 유교적 가치를 비롯한 거의 대부분의 유사한 내용을 끌어들여 이를 전부 일본화하는데, 동양사상에서 말하는 인류보편의 가치를 마치 일본고유의 것으로 둔갑시키고 이를 찬미한다. 심지어는 서양의 유사 내용도 일본화하는데 여념이 없다.

"일본 속담에 "길 잃은 새가 품속으로 날아들면 사냥꾼이라도 새를 죽이지 않는다"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기독교적인 적십자운동의 정신이 이미 일본에 그 뿌리가 있었음을 말해 주고 있는 듯하다. 일본 국민들은 제네바의 만국적십자조약보다 몇 십 년 앞서, 일본 최고의 소설가 타키자와 바킨의 작품을 통하여 적군의 부상병을 치료해 주는 이야기에 친숙해져 있다." (72p)

이는 어찌보면 편협한 일본주의의 서양인의 전통적 동양무시-오리엔탈리즘-에 대한 항변으로 밖에 느껴지지 않는다. 근대화를 이룬 일본이 다른 아시아 국가를 무시하고 제국주의 침탈로 달려간 역사적 사실을 볼 때 결국 이러한 무사도 정신은 일본의 가치이지 인류보편의 가치는 아님이 명징하다.

작가는 칼로 대변되는 무사도 정신에 전통적 유교적 가치로 덧칠을 하고, 절대 등 뒤에서 칼을 꽂지않는, 온화하고 평정심을 가진, 주군을 위해 목숨을 바치고, 할복함으로써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는 무사들을 그려내나, 칼에 그 마음을 덧씌운다고 칼이 붓이 되지는 않는다. 그저 칼의 가치는 힘(무력)의 가치일 뿐이라는 생각이 갈수록 오히려 강하게 든다. 세계 어디에서도 칼을 쓰던 무인이 지닌 덕목에 충성과 명예를 빼고, 인명살상만 강조하는 민족은 없다. 무사도정신이 일본의 종교적 가치를 능가하는 일본정신의 뿌리라 함은, 결국 힘의 가치를 절대화한다는 편협한 일본을 일본인 스스로 시인한 것에 다름아니다. 100년이 넘게 지난 지금, 다시 우경화되는 일본의 상황에 곱지않은 시선이 가는 것도 이 때문인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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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쿠자와 유키치 자서전 이산의 책 42
후쿠자와 유키치 지음, 허호 옮김 / 이산 /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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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을 맞추어야 할 급한 약속이 아닐때는 주로 버스를 이용하지만, 한때 서울시내에서 지하철이 나의 주된 이동수단이었던 적이 있었다. 그 당시 지하철을 이용하면서 아주 이상한 점을 발견했는데 다름아니라 1호선과 2호선 이후의 노선방향이 거꾸로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1호선은 지하철이 왼쪽방향으로 출발하는 반면에 2호선부터는 차량이 오른쪽 방향으로 나아가고, 더 놀라운 사실은 멀쩡이 오른쪽으로 달리던 지하철도 시경계를 넘어서는 지역부터는 갑자기 방향이 또 뒤집어진다. 가만 생각해보면 지하철이 아닌 우리나라 기차선로가 모두 우리의 일상에 부자연스러운 좌측통행이다. 이유는 모두 알다시피 우리가 철도를 놓지 않았기 때문이다. 서울의 지하철 1호선도 마찬가지일 터이다.

이런 사실을 알고나면 초등학교 시절 복도를 걸을 때 좌측통행을 강요받던 것만큼 마음이 불편해진다. 더구나 완전히 변혁된 것도 아니고 현재와 과거의 우리가 뒤섞여 있음을 알아차릴 때는 불편함을 넘어 혼동스럽고 귀찮아진다.

후쿠자와 유키치는 그런 혼동스러움이 일상이었던 시절을 살았다. 에도시대를 연 도쿠가와 막부의 막바지에 태어나 왕정유신(메이지유신)을 겪었고, 쇄국이냐 개방이냐를 놓고 일본전역이 들끓던 시대를 넘어, 유신시대가 안정화 되고 일본제국주의가 움터 탐욕의 눈을 희번득거릴 때 이 글을 썼을 것이다. 그의 신념대로, 그리고 그의 예견대로 일본이 과거 봉건주의의 탈을 벗어던지고 서양 문명국가와 어깨를 견줄 근대화가 이루어지는 것을 목도하면서 그는 느긋하게 과거를 회상했을 것이다. 부럽다는 생각보다 그저 불편했다.

일본에 있어 데지마(出島)는 서양문명의 흡입구와 같은 곳이라 알고있다. 과거 300년 동안이나 일본과 우호통상관계를 유지해 온 네덜란드는 자국인을 데지마라는 한정된 공간의 섬에 거주시켰고, 여기서 흘러들어온 문물은 일본에서 난학(蘭學)을 번창하게 했지만, 전통적으로 중국과 조선과의 관계에서 형성된 유학과 유교는 일본사회를 지배하는 주된 시류였다. 그러하기에 후쿠자와가 태어나고 성장하던 시기에 유학과 난학 등 서양학문과의 대립은 쇄국과 개방의 정치이념으로 대변된다. 후쿠자와 역시 하급무사의 자제로 굴레처럼 덫씌워진 봉건적 문벌제도와 관습, 위계질서에 대한 거부감으로 난학을 배우게 되지만 개항된 요코하마에서 받은 충격으로 난학을 넘어 영학(英學)에 몰두하는데 이 때가 1850년대 후반이니 그 당시 조선의 상황과 비교하면 상당히 빠른 외부에 의한 근대화가 이루어진 셈이다.

후쿠자와 본인의 서술대로 그는 정치적 인물은 아니었으며, 오히려 정치에 대해서는 제3자의 입장을 취했는데 이는 어떤 정치세력도 그의 서양학문에 대한 경외와 열정을 뒷받침해 줄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는 그저 책을 읽는 서생이라 여겼으며 오히려 혼돈의 세기에 그의 미국, 유럽에 대한 외유경험을 다양한 저술과 번역 그리고 교육에 헌신했을 뿐이었다. 무(無)의 상태에서 고학할 수 밖에 없었던 경험이 뼈에 사무쳤기에 미국에서 최초로 Webster 사전을 가져왔을 것이며, 여비를 다 털어 런던에서는 원서만을 가득 사왔을 것이다. 현재의 게이오대학인 게이오주쿠를 설립하고, 수 많은 번역과 저작활동을 했으며, 신문을 만들어내고, 많은 서생들을 길러내어 일본 전역에서 활동할 기틀을 만들었으니 그는 계몽사상가임에 틀림없다. 스스로 일본은 미개한 봉건국가라 생각했고 이를 깨쳐야 진정한 자주독립이 있다고 생각했으니 말이다.

후쿠자와에 대한 나의 유감은 여기에서 비롯된다. 서양문명에 필적하는 부국강병의 대일본을 만들어야 한다는 당위성에 왜, 무엇을 위한 개화인가에 대한 논의는 지극히 찾아보기 힘들다. 흔히들 20세기초 근대화와 민족주의의 떼어낼 수 없는 관계로 설정하듯 후쿠자와 역시 이를 벗어나지는 못한다. '왜?'에 대한 대답없는 개화는 결국 제국주의 포함외교로 흐른 역사적 사실을 낳았을 뿐이다.

"나라 전체의 대세는 오로지 개진과 진보로 기울어 차츰 그 결실을 맺게 되고, 수년 후에는 그 성과가 청일전쟁에서 관민일치의 승리로 나타났으니, 유쾌하고 고맙기 그지없다. '살아있다보니 이렇게 좋은 구경도 하는구나. 먼저 죽은 친구들은 불행하다. 아, 보여주고 싶구나'하며 나는 몇 번이고 눈물을 흘렸다. 사실 청일전쟁은 아무것도 아니다. 단지 그것은 일본외교의 시작에 불과할 뿐이니 그렇게 기뻐할 것도 못 되지만, 그 당시의 상황을 떠올리면 흥분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일들의 원인이 어디에 있겠는가. 신일본의 문명부강은 모두 선인유전의 공덕에서 유래하며, 우리는 마침 좋은 시절에 태어나 조상님 덕분에 뜻을 이루게 된 것이니, 나에게는 두 번째 큰 소원성취라 할 수 있겠다."(364p)

애국적 민족주의 때로는 서양우월주의가 바탕이 된 그의 근대화는 일본제국주의로 흐르는 기틀이 되었을 법하다. 그러나 이 자서전은 무려 100여년 전인 1898년에 탈고된 내용인 점을 고려하면, 그의 탁견과 서양문물에 대한 적극적 의지, 학문과 교육에 대한 집념은 대단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일본의 20세기를 이끌어 낸 계몽사상가로서의 일생이 잘 표현되었고 - 오히려 그의 자화자찬식의 업적보다는 신념과 생활에 대한 논의가 더 많다 - 대담식이라 읽기도 수월하며, 오래된 문헌임에도 번역이 매끄럽다. 근대 일본을 이해하기 위한 사람들에게 추천할만한 문헌이다.

왜 일본 최고액 화폐인 1만엔 지폐에 '후쿠자와 유키치'의 얼굴이 있는지를 생각해 보았다. 한반도만큼 오래된 역사를 가진 일본에서, 1만원 지폐의 세종대왕만큼 일본인에게 그는 위대한 사람이었는지? 아니면 일본인은 철저히 봉건 과거와 단절하고 여기서부터 시작이라 생각하는 것인지? 책장을 덮으며 가만가만 생각에 빠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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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 개의 공감 - 김형경 심리 치유 에세이
김형경 지음 / 한겨레출판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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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는 정신분석이라는 것이 사랑 앞에서 좌절하는 사람들을 위한 학문이라고 정의한다. 의학의 한 과목이라는 딱딱하기만 한 나의 생각에 이처럼 곱고 아름다운 말로 풀이를 해 준 것만해도 이 책을 읽은 보람은 대단하기만 하다. 누구나 좌절하고, 누구나 상처받고, 누구나 우울해 하지만, 이는 사람이 사는 세상만사의 하나일뿐이라는 나의 긍정적인 자조에 작가는 '사랑'이라는 인간이 누리는 최고의 덕목을 덧붙여 친절하기만 한 누나처럼, 선생님처럼 얘기를 풀어주었다.

원체 살아 온 날들이 거대 담론과 체계나 관계 속에서의 인간들을 정의하고, 보편적 인간윤리라는 것이 어릴 때 몸에 베인 가정교육과 학교 다니던 시절 도덕수업으로 마감지었다고 생각하고 있었는지 내가 보기에도 나의 삶이라는 것이 한마디로 재미없음 그 자체가 아니었겠나 싶다. 그러하기에 심리학이나 정신분석과 관련해서는 이 책이 거의 처음이라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이고 사람이 사람을 들여다 보는 일에 대해서는 참으로 소흘했다는 생각이 책을 읽는 내내 머리 주변에서 맴돌았다.

이 책은 자기알기, 가족관계, 성과 사랑, 관계맺기라는 네 가지 큰 주제를 중심으로 다루고는 있으나 궁금적으로는 그 네 가지를 이해함에 있어 좌절하고 고통스러워하는 사람의 정신세계에 맞추어져 있다. 프로이트 학파나 융 학파에서 말하고 있는 다양한 정신분석의 기법을 비롯해 원본능, 자아, 초자아라든지 전이, 역전이, 투사적 동일시, 전이 행동화 등 아주 전문적인 용어들도 자주 등장한다. 그러나 절대 어려운 전문서적이 아니며, 짧은 상담 문구를 제시하고 작가가 나름대로 분석하고 해법을 제시해 주는 친절한 상담서이다.

사람들이 올린 짧은 상담 문구를 들여다 보면, 이건 나의 얘기다 싶은 것들이 어디 한두가지겠는가 싶다. 내가 왜 이러는지? 나의 행동에 상대방은 왜 이러는지? 어쩌면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일이고, 또 실제로 벌어지고 있는 일일수도 있다. 다만, 그것을 받아들이는 개개인이 느끼는 정도의 차이일 수 있으며, 그것을 고민하는 사람들의 수위의 차이로밖에 나는 여겨지지 않는다. 그러하기에 이 책은 병든 사람들만의 특수한 얘기가 아니라,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공감을 가질 수 밖에 없는 바로 우리들의 얘기이다.

이 즈음에 나는 내게 던졌던 단순한 두 가지 의문들을 다시 되짚어 보았다. '나는 사람을 상대적으로 대한다'라는 말과 '나는 육체적 사랑을 믿는다'는 말의 거북함과 가벼움을 느꼈던 것에 숨겨진 나의 이면을 어렴풋이나마 이해하고 솔직하게 마주 대할 수 있을 것 같다. 누구든 절대적으로 대하고, 정신적 사랑을 믿는다고 스스로 암시하던 이면과의 양가적 통합이 가능할 지도 모르겠다는 느낌이 든다.

스스로 마주할 수 없었던 내 마음 속의 아픈 생채기를, 이제는 어르고 달래 눈 앞에 마주하고 치유하고 사랑할 수 있는, 이 책은 읽기만 해도 치유되는 듯한 묘한 탕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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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삼관 매혈기
위화 지음, 최용만 옮김 / 푸른숲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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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로부터 이 책을 선물받았을 때 기쁜 마음에 비해 어쩐지 제목이 쉽게 익숙해지지 않았다. 한자에 그리 익숙하지 않은 세대이기도 하거니와, 중국소설은 아직까지 많이 접하지 않은 탓인가 했다. 가만가만 생각해보니 삼국지, 손자병법과 같은 한국작가의 중국소설을 접한 이후로 중국작가의 소설을 첫번째로 읽어 본 것이 이번이 처음이란 사실도 이제야 알았다.

그런저런 생소한 느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이젠 친근해지고 읽는 내내 함께 호흡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작가가 보여주고자 했던 한 인간의 삶이 그리 낯선 것이 아니며, 역사를 통틀어 사람이 가족을 이룬 이후 비록 문화는 틀릴지 몰라도 살아가는 인생역정은 현재의 나, 혹은 읽는 누구나의 얘기도 될 수 있는 개연성에 있지 않나 싶다. 허삼관(許三觀)은 주인공의 이름이며, 매혈기(賣血記)는 말그대로 피를 팔러다닌 인생역정의 기록이다. 왜 피를 팔았는지, 그리고 그가 팔았던 피는 그의 인생에서 무엇이었는지 우리는 이미 알고있다. 다만 작가처럼 엮어내지 못했을 뿐, 혹은 기억 속에서 끄집어내지 않았을 뿐이다.

"오늘에서야 피땀 흘려 번 돈이 어떤 거라는 것을 안 셈이지요. 제가 공장에서 일해 번 돈은 땀으로 번 돈이고, 오늘 번 돈은 피 흘려 번 돈이잖아요. 이 피 흘려 번 돈을 함부로 써 버릴 수는 없지요. 반드시 큰일에 쓰도록 해야지요."(31p) 주인공 허삼관은 우연한 기회에 첫번째 매혈을 하고 난 뒤 이렇게 말했다. 그런 마음으로 그 돈으로 그는 '허옥란'과 결혼을 하여 아들 셋을 낳고 가정을 이루지만, 그의 매혈은 인생의 질곡마다 그의 머리 속에 떠오를 수 밖에 없는, 그리하여 글 읽는 우리를 마음 조리게 하는 이 소설의 가장 큰 긴장요소이다. '허옥란'의 부정한 사실을 알고 아내의 짐을 다 들어낸 후, 그 살림살이를 찾아오기 위해서 피를 팔았고, 가뭄으로 못 먹은 가족에게 국수 한 그릇을 먹이기 위해 피를 팔았고, 죽어가는 아들을 위해 위험천만한 매혈여정을 감행한다.

"아니, 먼저는 힘을 싹 팔았고, 그 다음엔 온기를 싹 팔았다더니, 그럼 이제는 목숨만 겨우 남았을텐데, 또 피를 팔면 그건 목숨을 팔아 넘기는 거 아니요?"(285p) 그런 걱정스런 만류에도 피를 팔았던 허삼관이지만, 정작 매번 피를 팔고나서 먹던 돼지간볶음과 황주 맛이 그리워, 정말로 자신을 위해 유일하게 피를 팔고 싶었을 때 그에게 돌아온 것은 매정한 거절과 힘없이 늙어빠진 자신에 대한 슬픈 자각이었다. 매혈하고 후둘거리는 다리에 한기에 오돌거리는 그의 모습은 낯익은 우리들 아버지의 모습이며, 슬픈 우리들의 자화상이다.

인생여로를 다룬 많은 소설처럼 이 글에서도 순탄치 않은 가족사의 단면을 자주 보여준다. 애지중지 키우던 첫 아들 '일락'이 자신의 아들이 아니라는 사실에서 오는 그의 배신감과 역설적 행동은 오히려 허삼관의 순박함을 보여주는 듯 하다. 친아비(하소용)의 죽음을 막고자 지붕 위에서 영혼이 떠나지 않게 이름을 불러대라고 아들을 타이르고는 직접 지붕에서 '일락'을 데리고 내려와 구경하는 사람들 앞에서 더 이상 '일락'이 죽어가는 '하소용'의 아들이 아니라 내 친아들임을 선언하는 장면은 영화였으면 눈물 한번 흥건하게 쏟아내었을 장면이다. 문화혁명 시절 인민재판을 받은 아내의 수난과 농촌 생산대에 끌려간 아들들의 모습, 첫 아들 '일락'으로 인한 많은 얘기들 속에서 갈등과 붕괴, 봉합과 치유의 가족사를 접하게 된다. 어쩌면 우리네 인생이라는 것이 모두 이 단어들 사이를 오가는 시소놀이인지도 모른다.

어릴 때 읽었던 펄벅의 "大地"가 생각났다. 중국 농촌의 음울한 분위기가 아직도 가슴 속에서 스믈대는 듯 한데, 위화의 "허삼관 매혈기"는 또 다른 느낌이다. 복잡한 인생사를 다루나 간결하고, 역설적이나 오히려 직설적이다. 일생동안 허삼관이 피를 파는 이야기를 통해 변해가는 자신의 많은 것들 속에서 변하지 않는 가치를 보여 준, 슬프나 즐거운 소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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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쪽으로 튀어! 1 오늘의 일본문학 3
오쿠다 히데오 지음, 양윤옥 옮김 / 은행나무 / 200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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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젠 머리를 쓰지않아 멍해질 때가 많음을 느끼는데, 히데오의 이 소설을 읽으면서 내내 이름을 떠올리려 했지만 결국 내가 알고있는 세 명 중 한 명의 이름만 그것도 자신감 없이 머리 속에서 되뇌일 수 있었다. 어디보자...하고 책장에 꽂힌 책들을 들춰서 찾아낸 이름들. 아! 여기있군. 생시몽, 푸리에, 오웬.

좀처럼 일본작가의 소설은 잘 읽지않는 편인데, 표지가 원체 쌩뚱맞게 생겨 골라본 책. 요즘 한창 잘 나가는 오쿠다 히데오의 "남쪽으로 튀어"(은행나무)였다. 불가피한 억지 상황에 보게 된 "킹콩" 리메이크 버젼 영화. 킹콩 잡으러 가는 화물선 선상의 이야기, 섬에서 킹콩 잡는 이야기, 뉴욕으로 돌아와 킹콩이 바보된 이야기, 참으로 무지막지한 삼단구도의 영화에 이쁜 여배우라도 봤으니 다행이라며 씁쓸히 입맛을 다셨던 적이 있지만, 히데오의 이 소설도 구도로 따지면야 그에 비할바가 아니다. 도쿄에서의 생활, 오키나와보다 더 밑에 있는 이리오모테 섬에서의 생활. 딱 두가지로 요약되나 그 안의 내용으로 따지자면 비교라는 것이 작가에 대한 모독이라싶다.

예전 과격운동권 출신의 아버지 우에하라 이치로, 계파는 틀리나 역시 운동권 출신의 어머니 사쿠라, 화자는 주인공이라 할 아들 지로, 지로만큼 주연급 조연인 여동생 모모코, 그리고 누나인 요코. 다섯 식구의 일탈기로 주제의 의미심장함에 있어서는 어떤 사회과학 원론서적보다 덜하지 않겠지만, 읽는동안 그 무거운 얘기를 가볍게 풀어헤치는 작가의 글솜씨가 부럽기만 하다. 성장소설의 특징이겠지만, 화자가 초등학생 지로이다보니 그 심각한 얘기들이 모두 그저 일탈로 치부될 수 있는 것 같다. 연체된 국민연금 걷으러 온 구청직원에게 돈을 내느니 국민임을 포기하겠다고 우겨대고, 수학여행비가 비싸다고 아들 학교로 찾아가 리베이트 받은 교장 나오라고 행패부리고, 하루종일 집에서 빈둥대다 아들보면 프로레슬링 한 판 하자고 달려드는 아버지가 아들 눈에 제대로 보일리가 있겠는가? 절대 무겁지않게 참으로 유쾌하게 글을 쓴다.

과격파 운동권 출신, "혁공동(혁명공산주의동맹인가..)"의 공동의장을 지낸 아버지가 생시몽, 푸리에, 오웬을 모를 리가 있겠나. 자본주의의 불평등과 부도덕을 비판하고 자급자족적 공동체로 이상사회를 구현하겠다던 실패한 사회주의자를. 일명 공상적 사회주의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우에하라 가족은 기쁜 마음으로 자급자족적 공동체를 꿈꾸며 남쪽행 비행기에 몸을 싣는다. 도쿄에서 엄청난 사고를 치고서.

작가는 더 가벼워지고 싶어한다. 이데올로그의 참과 거짓을 떠나, 마치 기계가 번성하면 사람들 설 자리가 없어진다고 기계를 부수던 "러다이트"와 같이 실패한 그 역사적 사실을 뻔히 알면서도 그저 행복한 마음으로 쟁기질을 하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그려낸다. 그럼에도 누군가 싸우지 않으면 세상에 변하는 것은 없다고, 그렇게 싸울 수 밖에 없는 아버지는 바보라고 스스로 아들에게 말하지만, 꼭 나처럼 살 필요는 없다고 방점을 찍어 얘기한다. 이치로씨의 행동은 모든 것이 계획된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하기에 그는 초연하고 여유롭다. 심지어 공권력 앞에서도. 그 여유로움이 참으로 부럽지만, 그것은 내면에 깊이 숨겨진 자신의 "정의"에서 나온다고 믿기에 부러움이 더해만진다.

음침하게 퇴폐적 향수를 그리워하는 글도 아니지만, 무지막지한 만화같은 소설도 아니기에 작가가 보여주는 흥겨움에 몸을 맡겨 쑤욱 빠져드는 것이 오히려 유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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