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은, 빨리 집에 가서 자라고 징징대듯이 뻑뻑해지기 시작하고 -
등은, 빨리 눕고 싶다고 뗑강부리며 근육들을 수축하기 시작하고 -
어깨는, '나는 이제 돌덩이야. 불만이면 어서 뜨거운 물로 샤워하던가'하고 농성을 부리고 -
머리는, '내가 지금 깨어있는 것 같니?'라며 협박질하기 시작하는 이 피곤한 시간에도
인간의 정의는 살아 있음을
꿈틀거릴 감동의 여유분이 남아 있음을 알려주는 일화가 있었다. 몇 주 전에...
(그러니까 그런 멋진 광경을 보고 이제서야 글을 쓰는 게으름을 포장하는 중이렸다.;;)
일하는 도중에, 불과 몇 초 전까지 하던 일이 뭐였는지 기억을 못하던가
말하는 도중에, 내가 방금 무슨 말을 했더라, 하고 정신머리 못찾고 지내는 일중독자이다
보니 출퇴근 시 자가 운전은 꿈도 못 꾼다.
해서, 외근이 잦기도 하고(시간 엄수에 대중교통만큼 속 편한 것은 없다) 피곤하다는
핑계로 지하철이나 버스를 주로 이용하게 되는데.
<첫 번째 일화>
그러니까 그 몇 주 전, 퇴근길에 버스를 타고 귀가하던 중(기절수면 들어가기 일보직전에)
술 먹은 취객이 버스 기사에게 시비를 거는 장면을 보았다. (입에서는 쌍욕이 넘쳐나면서)
계속 시끄럽게 구니까 승객 중 1,2명이 '자리에 앉으라'고 언성을 높였고 취객은 옳다구나~
싶었는지 가장 많이 뭐라고 한 승객에게 손으로 때리며 '막 나가자' 모드로 돌입했다.
그랬더니 주변에 앉아있던 승객들이 그를 뜯어 말리며 정의를 외치기 시작했다.
'다른 사람들에게 왜 피해를 주느냐'는 내용이 요지.
나는 이제, 더 이상 대도시에는 '옳지 못한 것에 불끈하는' 사람들이 없다고 생각했었다.
특히나 모두 피곤에 절어 기절할 그 시간에는 더욱 더.
다른 사람과 시비가 붙어 일이 커지는 것에는 철저하게 몸을 사리는 것이 요즘 사람 아니던가.
그들은 분명 용기를 내어 '옳지 못한 것을 제지하는 일'을 했을 것이다.
화를 낼법도 한데, 승객들이 자신 편을 들어줘서인지, 버스 기사는 침착하고도 점잖게
취객을 타일렀고, 일을 정리하기 위해 경찰서로 향했다.
막상 경찰서 앞에 오니 취객은 얌전해졌고, 버스 기사는 그런 그를 용서하고 다시 운전했다.
막차 버스인데 그런 곳에 취객을 버리고 가면 마음이 안 좋기도 할테고.
그리고 맞은 사람도 쿨하게 그 사람을 용서했다.
홧김에 술주정을 부린 취객도, 정의를 표현하고자 했던 승객들도, 가만히 앉아 눈으로 취객을
계속 노려봤을 남은 승객들도 - 모두 '먹고 살기에 바빠 모래속에 파묻었던 감정'이 조용히
일렁였던 밤이 아니었을까 싶다.
이 차가운 시멘트 도시에 아직은 펄떡펄떡 뛰는 가슴들이 있다는 것에 나는 감동하고야 말았다.
<두 번째 일화>
이건 그로부터 1,2주 후의 일. 역시나 버스를 타고 귀가하던 중.
이번엔 어떤 취객이 도로 한가운데 서서 버스를 막고 서서 주정을 부렸다. 태워 달라고.
아무래도 탑승하면 문제를 일으킬 것 같이 보였는지 버스 기사는 절대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그는 버스가 못 가게 앞에서 왔다갔다하며 익살맞은 표정으로 노려 보았는데.
그가 버스 옆으로 왔을 때 '얼르 출발하지'라고 생각했던 나와는 달리 버스 기사는 그가 다칠까봐
길 한가운데 우두커니 버스를 세워놓고 기다릴 뿐이었다.
버스 기사는 짜증을 낼지언정 절대로 버스를 움직이지 않았다.
시간 엄수가 버스의 생명임에도 불구하고 오로지 취객이 다칠 것을 염두해 출발하지 않은 버스.
결국 버스 기사 뒷자리에 앉아 있던 남자 승객이 핸드폰을 꺼내 경찰에 신고했다.
잠시 뒤 경찰이 오는 것을 눈치챘는지 취객은 반대편 도로로 걸어가기 시작했고 반대편 도로의
버스들도 경적을 울리는 일 없이 취객 앞에 조용히 섰다.
놀라운 것은 10분 가량 길에 버스가 정차해 있는데도 불구하고 승객들 중 누구도 짜증을 내지 않았다.
첫 번째 일화의 취객은 사람들로 하여금 '따끔한 관심'을 받으며 행동이 교정 되었고,
두 번째 일화의 취객은 인내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다치지 않게 보호를 받았다.
누구나 실수할 수 있다.
살다가 힘들면 술을 마실 수 있고, 타인에게 투정부릴 수도 있다.
그럴 때 그들에게 사람들이 준 것은 '무시'와 '냉대'가 아니라 '훈계'와 '보호'였다.
이 차가운 도시에 아직도 '사람'은 남아 있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