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꾸는 소리 하고 자빠졌네 창비시선 475
송경동 지음 / 창비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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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은 시를 쓰고 독자는 시를 읽으며 꿈을 꾼다. 현실 밖을 꿈꾸는 무수한 사람들의 그루터기 쉼터여야 할 시는 때때로 찬물을 끼얹는다. 비현실적인 공상이 현실을 견디는 힘을 주지만 두 발은 언제나 현실을 딛고 있다. 문학의 역할과 기능에 대한 각자의 생각과 판단이 어떻든 세상에는 다양한 시와 소설이 독자를 기다린다. 망설이다 다시, 송경동을 읽는다. 가장 치열하게 현실의 한복판에 서 있는 시인의 모습은 애처롭고 위태하다. 시가 혁명의 도구로 기능할 수 있다는 순진한 생각 때문에 참여시가 소비되는 건 아니다. 


감옥이 따로 없어

법정최저임금 정도나 받는 강제 노역에 시달린 후

저물 무렵 반지하나 옥탑방으로 자진해 입방하는

당신이 양심수

-「당신이 양심수」중에서, 20쪽


누군가는 소리를 내야 한다. 소리는 소리를 부른다. 외면하고 싶은 현실이지만 부정할 수는 없지 않은가. 지난여름 물에 잠긴 반지하, 뜨거운 옥탑방에 사는 사람들을 송경동은 현대판 ‘양심수’라고 부른다. 청소용역노동자들의 선언을 시작으로 아직도 강철이 어떻게 단련되는지 묻는 시인에게 대한민국은 누구나 원하는 걸 얻을 수 있는 행복한 나라가 아니다. 누가 대통령이 되든, 정부의 정책이 어떻게 달라지든 돈 없고 힘없는 사람들의 자리는 변함이 없다. 현실의 최전선에서 하루를 견디고 삶을 지탱하는 이웃들을 바라보는 시선과 태도가 세상을 살아가는 바로 우리들의 삶의 자세다. 타인을 바라보는 기준과 공동체를 향한 목소리가 지금, 여기에 선 내 삶의 무게다. 무엇을 할 것인가.


나중에는 나도 무장하고 다녔다

상처받고 싶지 않아 먼저 공격했다

짓밟히고 난 뒤의 모멸과 분노를 견딜 수 없어

목청을 먼저 높이 올렸다

「목소리에 대한 명상」중에서, 48쪽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 감동적인 자연과 두근거리는 순간 보다 피 흘려 싸우는 현장과 땀으로 범벅이 된 노동의 순간들이 모여 거대한 삶의 뿌리를 이룬다. 기막힌 묘사와 감각적 언어보다 때때로 목청 높여 외치는 송경동의 목소리를 아프게 읽어야 한다. 시는 슬픔의 미학이다. 삶은 고통의 연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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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천의 공부 - 어떻게 배우며 살 것인가
최재천.안희경 지음 / 김영사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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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감고 귀 닫고 살기도 쉽지 않다.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라는 정도는 안다. 한 사람이 잘 못 들을 수도 있다. 그러나 눈 뜨고 코 베일 수 있다는 걸 증명이라도 하듯 수많은 사람이 보고 들은 걸 부정하고 ‘진상을 조사’해야 한다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다는 사실이 놀랍다. 무오류성의 덫에 걸린 종교의 역사만큼 특정 집단과 리더의 자기 부정은 그것이 통용될 수 있었던 과거와 조직 문화, 여전히 굳건한 그들만의 리그가 존재한다는 의미다. 나는 옳고 너는 틀렸다는 본능적 자기방어 기제를 넘어선 왜곡은 단순한 이기적 처세술을 넘어 공동체 전체를 위험에 빠트릴 수 있다. 


공부하지 않는 사람의 생각과 태도는 가릴 수 없다. 학력과 직업, 시험과 자격증이 공부의 전부라는 착각이 우리 사회의 민낯을 잘 드러낸다. ‘최재천의 공부’는 특별한 분야에 한정돼 있지 않고, 숨은 비법을 공개하려는 목적도 아니다. 지금, 자기 삶에 만족하는 사람에겐 독서가 취미고, 공부의 필요성도 느끼지 않는다. 무엇을 더 바라지 않고, 문제의식이 없는 상태에서 책은 철 지난 지식과 정보 수단의 매개체로 보일 뿐이기 때문이다. 


지나친 자기 경험의 일반화와 자기 삶의 이력이 곧 근거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잊은 최재천의 말은 논거는 부족하다. 인터뷰가 아니라 단행본 글쓰기였다면 다른 방식으로 표현되었겠으나 유튜브 시대의 인터뷰는 사람들의 흥미를 끌고 인상적인 메시지를 전하는데 익숙해진 독자를 설득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으니 이해할 만하다. 어쨌든 책이라기보다 텍스트 유튜브를 본 느낌이라는 게 중론이었다. 대체로 익숙한 독자인 모임 참석자들에게 난이도를 떠나 투자(시간과 노력) 대비 효과(지적 충격, 정서적 감동, 새로운 지식과 정보, 낯선 생각과 태도 등)가 별로 없을 수밖에 없다. 형식은 내용을 지배한다. 바쁜 시간을 쪼개 굳이 책을 낼 필요는 없다. 글을 쓰는 일보다 바쁜 일이 있으면 그 일을 하는 편이 낫다. 지금 쓰는 글이 가장 중요한 일일 때 독자들은 그에 걸맞는 반응을 보인다. 


사회생물학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한국에서는 최재천을 피해갈 수 없다. 진화론이나 과학의 경이로움을 대중에게 전파한 공도 빼놓을 수 없다. 다만, 인지도는 양날의 검이다. 스스로 베일 수 있는 위험에 대한 콘트롤은 자기 몫이다. 그러나, 그 인지도가 사람들에게 선한 영향을 미치고 대중의 타성적 사고에 균열을 일으켜 변화를 끌어낼 수 있다면 충분한 매력이다. 더 많이 팔리고 더 많이 읽혀 대한민국 공부에 어떤 문제가 있는지, 진짜 공부란 무엇인지, 왜 계속 공부해야 하는지, 인간에게 공부란 어떤 의미인지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된다면 충분해 보인다.


공부는 자기 성장이다. 공동체의 발전과 사회에 대한 기여는 자기 성장의 결과일 뿐이다. 스스로 깨닫는 즐거움, 부족한 자신의 모습을 확인하는 괴로움, 견고한 현실의 벽과 마주하는 슬픔, 타인과 세상을 향한 관심 등 공부는 쉼 없이 자신의 변화를 이끄는 원동력이다. 독서 모임도 마찬가지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성인이 된 이후의 자기 공부의 방향과 성장에 관심을 잃은 사람들이 많아지는 세상은 탐욕과 이기적 본능으로 가득할 수밖에 없다. 권력과 자본이라는 토르의 망치 앞에 자유로운 사람은 많지 않다. 공부는 자존감을 높여주고 두려움을 없애주며 당당함을 선물한다. 


모든 사람이 자기만의 공부 방법을 가졌으면 좋겠다. 변치 않는 건 아무것도 없다. 가만히 있어도 달라진다. 수많은 독학자들이 세상을 바꾼다. 모든 공부는 자신을 향한다. 앎이 곧 삶이 되는 건 불가능에 가깝지만, 공부는 적어도 무엇이 부족한 지 정도는 깨닫게 한다. 모임에 참석하신 분들은 각자의 방법과 스타일로 꾸준히 공부하는 사람들이다. 분야와 상관없이, 넓이와 깊이도 무관하게 자기만의 철학, 자기만의 공부가 따로 또 같이 뒤섞이는 자리가 이어지고 언제 어느 곳에서든 계속된다면 네가 잘못 본 거라고, 네가 잘못 들은 거라고 끝까지 우기는 대신 인정할 수 있는 용기와 겸손을 배우게 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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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만세 매일과 영원 6
정용준 지음 / 민음사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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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로 현대소설(살아있는 작가들의 작품)이 안 읽히기 시작한 지 오래다. 사적 영역에 머물러 감정 과잉으로 심리 묘사와 미문에 집착하거나, 인물 간의 관계를 통해 인간 존재에 대한 탐구에 이르지 못하거나, 구조적 모순과 시대정신에 천착한 작품을 찾지 못했거나, 특정 직업과 상황에 몰입해 보편성을 획득하기 어려운 소설들이 많아서라고 위로해 보지만 전적으로 ‘나’라는 독자 개인의 문제일 수도 있겠다고 진단한 지 오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편도 읽지 않은 소설가의 에세이 『소설 만세』에 도전했다.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픽션을 다루는 작가의 산문집을 멀리한다. 사적인 영역에 대한 무관심과 작품으로만 만나고 싶은 생각 때문이다. 이 책은 에세이의 형식을 빌린 ‘소설론’이다. 소설 작법 혹은 소설에 관한 명상이라고 해도 좋고 소설의 기능과 역할 혹은 개성과 특징이라고 해도 좋다. 이는 『근대문학의 종언』을 선언한 가리타니 고진을 새삼스레 떠올릴 필요도 없다. (참고 : 우리시대 지식논쟁_'근대 문학은 종언을 고했나' 1. 이제 '그들만의 문학'...근대문학은 끝났다, 조영일 2. 근대문학 종언론은 상상 혹은 소통일 뿐, 최원식 3. 종언 '위기'를 근대문학의 '기회'로, 권성우)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리얼리즘이 사라진 자리에 무엇이 자리를 잡았나 살펴보라. 근본적으로 체제와 시스템을 뒤흔들만한 비판적 문학이 사라진 자리에 놓인 ‘공감’은 이기적 욕망과 숱한 ‘사랑’으로 채워졌다. 비평의 종말은 자연스러웠으며 한국의 문예비평은 그들만의 리그로 축소됐다.


정용준은 소설을 쓰며 소설을 가르친다. 소설의 성격과 특징을 설명하기 위해 개인적 경험을 살피고 자신의 소설 작법을 소개한다. 창작수업과 일반적 글쓰기에도 도움이 될만한 에피소드가 나열된다. 가끔, 독서와 글쓰기를 가르칠 수 있을까, 싶은 회의적 생각이 든다. 기초적인 방법론과 첫발을 내딛는 사람들을 위한 안내는 필요하겠으나 결국엔 각자의 길을 찾아 떠나야 하는 유목적 책읽기와 비판적 글쓰기로 귀결돼야 하지 않을까. 


자연과학을 제외하고 문학과 사회과학 혹은 예술 영역은 학문적 체계와 이론을 배우고 익히는 단 하나의 길이 정해져 있지 않다. 인지주의 학습 곡선을 따라가며 성실하게 차곡차곡 실력을 쌓아가는 방법도 있고, 쾰러의 통찰설에 걸맞게 계단식으로 단번에 쑥쑥 자라는 사람도 있다. 축적된 내공과 경험과 사유의 깊이는 지극히 개별성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이며 관점에 따라 열정의 온도가 다르기 때문이다. 소설은, 아니 문학은 점점 위태롭다. 어쩌면 텍스트의 위기일지도 모른다. 인간은 시각적 동물이며 본능은 입체적이다. 추상적 기호, 2차원의 세계에서 펼쳐지는 텍스트의 모호함은 지난하고 힘겨운 자기와의 싸움이다.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일, 소설을 쓰고 읽는 일은 작가와 독자 모두 무언가 다른 세계에 대한 열망과 꿈이 있어야 가능하다. 


꿈 없는 잠이 이어진다. 목적 없이 걷고 방향을 가늠하기 어려운 일상이 지나간다. 타인과 세계에 대한 호기심과 자기 삶에 대한 고민이 없다면 오히려 ‘행복한 삶’에 가까운 게 아닐까. 아는 게 병이고 모르는 게 약인 경험을 우리는 자주 하지 않는가. 안다는 건, 알고 싶다는 열망과 너무 차이가 크다. 질문과 성찰이 불행을 자초하기도 하고, 관계를 망치기도 한다. 문학은, 아니 소설은 단순한 허구의 세계가 아니다. 또 다른 현실이며 다양한 삶의 스펙트럼이다. 특별한 사건을 중심으로 서사가 펼쳐지더라도 공감할 수 있는 인물과 개연성과 거리가 멀어지는 순간 게임은 끝난다. 많이 팔리는 책이 아니어도 좋고, 모두 공감하지 않아도 좋다. 소설은 언제나 그 자리에 머물러 사람들을 위로하고 쉬어갈 수 있는 벤치가 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때때로 고독한 독서가 주는 효용을 생각하면 소설가의 역할도 저마다 다를 테다. 소설이 ‘만세’라고 외쳐도 좋다. 아니, 소설가는 그럴 수 없다면 쓸 수 없으리라. 독자는 그 소설가들에게 진심으로 박수를 보낼 수 있을지 오늘도 고민하며 책장을 넘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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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언스 픽션 - 과학은 어떻게 추락하는가
스튜어트 리치 지음, 김종명 옮김 / 더난출판사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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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은 어떻게 추락하는가. 도발적인 질문이 계속되지 않으면 오류와 무지는 뉴스와 상식으로 둔갑한다. 지치지 않는 문제 제기는 건강한 사회의 척도다. 계속되는 질문과 비판적 시선 앞에 실체적 진실이 잠시나마 드러날 뿐이다. 사이언스도 픽션이 될 수 있다. 과학자도 소설을 쓴다. 스튜어트 리치가 말하는 ‘사이언스 픽션science fiction’은 그 자체로 모순이다. 이성과 합리, 논리와 근거가 통계 조작과 무수한 인간의 의지에 따라 어떻게 일그러질까.


과학에서 가장 중요한 두 가지 척도는 재현성과 투명성이다. 어떤 실험 결과, 유력한 과학 잡지에 실린 논문이 재현 불가능하다면 어떨까. 그 실험과 통계 분석 과정이 투명하게 공개되지 않아도 괜찮을까. 경제와 정치, 사회와 문화 분야에서 엇갈리는 서로 다른 주장은 하물며 ‘내가 옳다’는 주장 자체가 무의미하지 않은가. 서로 다른 관점, 엇갈리는 주장 속에서 우리의 태도는 어떤가. 과학적 태도가 우리 일상에서 절실한 이유는 무엇일까.


영국의 코미디 프르그램 <브래스 아이Brass Eye>에서 인용한 “그것이 과학적 팩트다. 증거는 없다. 하지만 과학적 팩트다.”라는 문장이 ‘과학은 사회적 활동이자 인간의 실수를 드러내는 도구’라는 서문 앞에 붙어 있다. 무지는 학교를 다닌 기간이나 학위의 문제가 아니다. 직업과 나이, 종교와 인종과 성별과는 더더욱 거리가 멀다. 가장 객관적이고 논란의 여지가 없어 보이는 과학의 ‘픽션들’을 살피는 동안 참담해진다. 인간은 얼마나 미성숙하고 한없이 부족한 존재인가. 그래서 누군가는 종교를 찾고 오직 모를 뿐인 세계에 대한 이해를 포기하거나 가슴 뛰는 삶을 살라고 충고하는 건 아닐까. 


누구나 깊이 고민하고 생각하며 산다고 착각하지만 대개 ‘생각’의 방법과 태도가 한없이 부족하다. 안다는 믿음이 편견과 오해를 만들고 집단 최면에 사로잡힌다. 각종 건강식품부터 생활용품에 이르기까지 과학적 실험과 검증을 거쳤다는 주장에 우리는 얼마나 많은 시간과 돈과 노력을 허비하며 사는지 모른다. 그 구체적인 사례를 짚어내기 위해 이 책을 읽을 필요는 없다. 그러나 각자의 상식, 모두의 팩트, 변함없는 진실은 언제나 안녕하지 못하다. 


저자는 과학의 작동 방식을 설명하고 그 반복 재현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우리에게 익숙한 짐바르도와 밀그램의 심리실험으로 포문을 연다. 과학의 위기를 자초한 과학자들의 대표적 사례에 당당하게 이름을 올린 한국의 황우석을 우리는 잘 기억하고 있다. ‘조작, 편향, 부주의, 과장’이라는 네 가지 문제점을 통해 실수와 오류를 은폐하려는 학자들의 속내를 들여다본 후에 잃어버린 과학의 정신을 되찾는 길을 제시하며 책은 마무리된다. 삐뚤어진 현실은 현상에 불과하다 본질적인 문제는 대개 공명심, 권력, 이해관계와 결탁한 자본주의 논리가 숨어 있다. 넓은 의미의 정치적 요소가 발견되는 과학계의 허구는 특히 위험해 보인다. 우리는 과학이 다른 어떤 분야보다도 인류 문명의 발달과 미래를 책임지고 있는 최소한의 객관적 지식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찰스 다윈의 말처럼 과학자는 “바라는 것도, 애착도 없어야 한다. 단지 돌과 같은 심장을 가져야 한다.” 어렵고도 어려운 일이다. 인간의 심장은 돌이 아니고 감정을 담당하는 변연계가 본능에 가깝기 때문이다. 주관적 판단과 편견, 감정이 뒤섞인 인간의 과학은 그래서 더욱 위험하다. 각종 실험과 통계로 입증된 이론, 권위 있는 잡지에 교차 검증이 끝난 논문이 위험하다는 사실을 우리는 받아들일 수 있을까.


보편주의에 입각해서 사심없이 공동체를 위해 조직적인 회의주의를 채택하자는 머튼 규범이 현실에서 가능할까. 어떤 조직에서 일이 진행되고, 정부에서 정책이 시행되고, 국회에서 입법활동이 이뤄지는 과정을 생각해 보면 현실은 더욱 심각해 보인다. 과학적 엄밀함까지는 아니어도 머튼 규범의 필요성 정도는 공감해야 하지 않을까. 각자의 진실, 각자의 상식, 각자의 공정, 각자의 정의, 각자의 논리가 오늘도 상대방을 겨누고 공동체를 지옥으로 이끈다. 과학은 우리가 지켜야 하는 최소한 객관성을 확보해야 하지 않을까. 한발 나아가기 위한 시작은 어디서부터인지 몰라서 모두 숨죽여 엎드려 있는 건 아닐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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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 가보겠습니다 - 내부 고발 검사, 10년의 기록과 다짐
임은정 지음 / 메디치미디어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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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은 한여름 김밥과 같다. 상하기 쉬운 음식처럼 부패는 권력의 본질적 속성이다. 감시와 견제 없이 건전한 긴장감을 유지한다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인간의 욕망과 이기심은 본능에 가깝고 제어 장치 없는 권한과 통제력을 개인의 선의에 도덕적 책임감에 의지하는 조직은 거대한 침묵의 카르텔을 형성한다. 대한민국에서 유일무이한 영속적 합법적 권력 조직인 검찰은 정권의 부침, 경제 상황과 무관하게 상명하복, 검사동일체의 원칙이라는 전근대적이고 몰상식한 문화를 자랑처럼 외치면서도 무엇이 잘못이냐고 반문하는 조직이다. 


대체로 조직 문화가 병들고 수술이 불가능할 정도의 환부가 일상적 관행으로 여겨지는 집단에 속한 구성원은 내면 깊숙이 문제를 인식하지 못한다. 마치 조지오웰의 소설 『1984』에 등장하는 ‘101호’를 거친 사람들처럼 조직의 논리와 강점, 전통과 문화의 이로움에 대해 피를 토한다. 그렇게 내면화된 무소불위의 자기 무오류성은 언제나 ‘법과 원칙에 따라’를 붙여 선량한 시민을 간첩으로 조작해도 대통령을 보좌할 수 있다는 자신감과 오만함으로 무장한다. 선택적 정의와 지연된 정의로 단련된 법 기술자들이 사건 뭉개기와 집요한 표적 수사와 기소로 이어지는 일련의 과정을 거쳐 그들만의 리그와 권력의 사유화에도 그들에게 박수를 보내는 일부 국민들을 오히려 ‘개돼지’로 명명하며 자신들의 논리와 공정과 정의를 응원한다는 오만을 합리화한다. 박수부대로 동원되는 레거시 미디어와 언론인이라는 이름을 붙이기도 민망한 부나방들의 합작품이 양산하는 현실은 참담하다. 거대한 무지와 맹목적 지지가 사회를 병들게 한 역사적 사례를 일일이 나열할 필요도 없다. 비판적 사고가 없는 인류의 악행을 다시 거론할 이유도 없다. 


이것은 진영논리가 아니다. 박근혜 정부든 문재인 정부든 한결같은 목소리를 내던 임은정 검사에게 붙여진 별칭들이 황당했을 것이다. 우리 편 아니면 적이라는 이분법적 논리가 현실을 지옥으로 만들기 십상이다. 내부 고발자 임은정의 목소리가 다른 조직, 다른 집단에서 없었던 건 아니다. 이해관계에 얽힌 그들은 조용히 수많은 임은정들을 묻었다. 나름의 논리와 나름의 정당성을 내세우며 비판적 목소리를 내는 입을 막고 목을 비틀었다. 행정기관, 공공기관, 군대, 학교, 기업 어느 곳 하나 그렇지 않은 곳이 있을까. 상호 이익을 나누고 묵묵히 눈빛을 교환하며 때로는 적극적으로 가담해서 그들을 엿 먹이지 않았는가. 


왜 나서서 불편하게 하나, 너만 그렇게 불만이 많은 거야, 그냥 가만히 있으면 안 되느냐, 누군 몰라서 그러지 않는 줄 아느냐, 나도 젊었을 땐 그러지 않았다, 너도 나이 들어 보면 안다, 지금은 니가 뭘 몰라서 그렇다, 전체 조직을 생각해…… 우리는 그들 곁에서 침묵하지 않았는가. 알고도 외면하지 않았는지. 당신들은, 아니 우리는 모두 공범이다. 

임은정 검사는 “정권은 유한하나 검찰은 영원하고, 끈끈한 선후배로 이어진 검찰은 밖으로 칼을 겨눌 뿐 내부의 곪은 부위를 도려낼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188쪽)라고 단언한다. 그리고 “문이 열릴 때까지, 벽이 부서질 때까지 저는 두드릴 것이고, 결국 검찰은 바뀔 것”(227쪽)이라는 믿음을 버리지 않는다. 우리의 무지가 그들의 권력에 복무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비판과 견제 없는 권력을 ‘국민’에게 위임받을 수는 없다. 세금으로 월급 받는 자들의 오만함이 때때로 상상을 초월한다. 그들의 고용인이 누구인지 망각하는 걸까. 특히, 대한민국 건국 이래 단 한 번도 제대로 된 자기 혁신 없이 병든 환부를 도려내지 못하고 그들만의 고리를 끊지 못하는 현실은 정치, 경제, 사회를 오염시키고 더 나은 세상이라는 꿈을 버리게 한다. 그래도 검사 임은정은 외친다. 계속 가보겠다고. 고장난 저울은 고쳐 쓰는 게 상식과 공정과 정의가 아닌가?


검찰의 저울이 고장 나 있다는 것을 기억해 주십시오. 저울을 고치라고 계속 외쳐주십시오. 검찰이 고치는 시늉이라도 하고 있으면, 더는 고장 나지 않을 테고, 편향적이고 불공정한 검찰권 행사를 다소나마 주저하지 않겠습니까? - 28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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