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모두 조금은 이상한 것을 믿는다 - 누구나 한 번쯤은 믿어봤을 재밌거나 이상하거나 위험한 생각들, 스켑틱 특별 합본호
니콜라 고브리트 외 지음, 스켑틱 협회 편집부 엮음 / 바다출판사 / 2022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인간의 무지가 빚어낸 상상력은 아름답다. 그러나 쥘 베른의 『지구 속 여행』(1864)이 무지의 산물은 아니다. 우리는 모두 조금은 이상한 것을 믿지만 인류의 집단지성은 그것이 개연성 있는 허구의 세계인지, 이성적으로 가능한 과학적 현실인지 구별할 정도의 이성은 갖추게 됐다. 지구공동설에 기반한 이 기막힌 상상의 세계는 이제 SF 소설로 분류됐지만 당대에는 북극 탐험의 기폭제된 어느 사내의 미친 열정에 빚지고 있다. 지구 내부가 비었다는 공동설을 주장한 존 클리브스 시머스는 북극을 통해 속이 빈 지구 내부로 들어가려는 꿈을 꾸며 현실과 상상의 세계 양쪽에 모두 영향을 미쳤다. 탐험대가 마침내 북극에 도착하기 불과 수십 년 전인 1829년에 49세로 사망했으나 그의 아이디어는 다른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이상한 것을 믿는 게 꼭 삶에 부정적 영향만 미치는 건 아니다. 동전의 양면처럼 유토피아를 꿈꾸고 지구의 내부에 또 다른 구체가 존재한다는 상상력은 환상적이지 않은가. 그러나 대체로 지나치면 독이 된다. 현실 부정의 논리로 작용하거나 극단적 맹신주의로 흐를 때는 자신의 삶을 망가뜨린다. 종교, 과학, 신념 등 그것이 어떤 명목이든. 


스켑틱 협회는 1992년 마이클 셔머가 설립한 비영리 과학 교육기관이다. 한국 스켑틱이 계간지 형태로 3, 6, 9, 12월에 발간된다. 이 책은 인간의 멍청함에 대한 보고서다. 전혀 이성적이지 않은데 생각하는 동물이라는 착각 속에 사는 인간의 무모함에 대한 비판적 시선은 불편하다. 과학적이고 이성적인 학문인 과학 분야조차 이상한 믿음은 계속된다. 일상에서 부딪치는 문제는 너무 익숙해서 과학이라는 말이 남발된다. 인상은 과학이고, 침대도 과학이고, MBTI도 과학이고, 혈액형과 별자리도 과학이다. 물은 답을 알고 있고 휴대폰은 암을 유발하고 음식으로 뇌를 고치며 음이온이 건강을 관리하는게 가능할까. 회의적인 회의주의의 시선은 리처드 도킨스, 스티븐 핑거, 샘 해리스 등 55,000명 이상의 회원을 거느린 협회의 명성만큼 세상을 구원하지 못하고 있다. 지속적인 해명 혹은 문제제기에도 불구하고 왜 우리는, 아니 세상 사람들은 이상한 것을 믿는 걸까. 


특허청이 “음이온과 원적외선을 방출하는 토르말린, 모나자이트, 옥, 황토가 체온상승, 혈액순환 및 신진 대사 촉진, 성인병 예방 등에 효과가 있다”라는 발명가의 엉터리 주장을 한 치의 의심도 없이 인정해준 셈이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그런 특허 중 상당수가 과거 미래창조부가 관리하는 구각연구개발 사업으로 개발되었다는 것이다. 정부가 세금으로 소비자의 건강을 위협하는 엉터리 기술을 개발하고, 특허까지 내주었다는 뜻이다. - 108쪽


인지 부조화, UFO, 예지몽, 유체이탈, 심령사진 등 이 책에는 성격과 운명, 일상 속 과학, 저세상에 관한 이상한 믿음 등 조금씩 한번은 그럴 수도 있는 게 아닌가 싶은 이야기가 담겨 있다. 여전히 지구가 평평하다고 믿는 사람들, 파란색 냄새를 맡는 소녀, 천국을 보았던 임사 체험자 등 우리 주변에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이야기’들이 확대 재생산된다. 인간의 본성 중 하나인 이야기에 대한 호감이 만들어낸 재미로만 치부할 수 없는 이야기들이 어느새 진실이 되고 운명을 좌우하기도 한다. 종말론을 믿는 사람들부터, 점을 보는 사람들, 징크스를 믿는 운동선수까지 우리 곁에는 다양한 형태의 이상한 것들이 널려 있다. 이것은 단순히 믿음의 문제가 아니다. 사고 방식과 태도의 문제다. 


마이클 셔머의 『스켑틱』을 인상 깊게 본 터라 이 책은 정기구독 잡지의 특별판이라고 생각하면 좋을 듯하다. 국내외 저자들이 들려주는 유사 과학에서 음모론까지 다양한 ‘이상한 것’들이 소개되고 그 믿음의 근거와 사람들의 관심을 보여준다. 물론 각 주제를 맡은 회의주의자들은 그 실체를 파헤쳐 분명한 증거 혹은 논리적 근거로 이상한 건 그냥 이상한 것일 뿐이라는 사실을 드러낸다. 


의심하고 질문하고 성찰하는 게 귀찮으면 이상한 것을 믿으며 살면 된다. 우리는 자기 삶의 방식을 선택하고 목적과 방법에 따라 나름대로 재미와 행복을 추구하며 산다. 다른 걸 틀렸다고 하지 않는다면 삶은 각자의 영역에 속한다. 그것이 타인에게 주는 영향, 공적인 영역에서의 태도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면. 그러나 대개의 경우 사회적 관계, 정치적 표현, 종교적 태도, 일상적 습관에 드러나는 다양한 ‘이상한 것’들을 우리는 어떻게 처리해야 할까. 어떤 호소의 말도 들리지 않고, 진실의 조건 따위는 생각하지 않고 살 수는 없지 않는가. 


확신을 가진 사람은 마음을 바꾸기 어렵다. 그에게 동의하지 않는다고 말하면, 그는 당신을 외면할 것이다. 사실이나 수치를 보여주면, 그는 출처를 물을 것이다. 논리에 호소해도 그는 논점을 피해갈 것이다. - 레온 페스팅거, 143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트로츠키와 야생란
이장욱 지음 / 창비 / 2022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리액션reaction은 즉각적인 반응에 불과하지만 리스판스response는 생각을 한 후의 응답이라는 어느 ‘미드’의 문장 하나가 하루를 가득 채우는 날이 있었다. 관습적 사고, 습관적 행동은 반응이다. 그것이 본능적 욕망에 기인한 것이든, 후천적 반복 훈련에 의한 것이든, 조건 반사든, 무조건 반사든 상관없다. 리액션은 결국 관성의 법칙을 따른 결과물이다. 힘들이지 않고 귀찮지 않으며 편하다. 리스판스는 ‘생각’이라는 거름 장치를 통과해야 한다. 질문이고 호기심이며 문제 제기다. 라틴어 “Nullius in verda”는 어느 것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지 말라는 의미다. 리스판스가 여기에 해당하는 게 아닐까. 


이장욱의 소설집 『트로츠키와 야생란』이 그렇다. 어떤 소설가는 리액션의 결과를 추적하고, 리액션에 대한 우리의 자세를 가담으며, 리액션의 근본적 이유를 묻는다. 생각없이 쓴다는 말이 아니다. 보이지 않는 세계의 촘촘한 그물망을 짜는 일이 시인의 천형이라면 보이는 세계의 이야기를 깁는 일이 소설가의 임무다. 이장욱은 노골적인 것과 솔직한 것 사이의 간극을 보여준다. 때로는 경계를 허무는 일은 산을 옮기는 일보다 힘겹다. 틀을 깨고 나와 또 다른 세계로 나아가려는 ‘노오력’은 누구에게나 주어진 의무가 아니다. 스스로 아프락사스의 품에 안기려는 자들의 땀방울이 세계를 조금씩 변혁시켜 온 게 아닌가. 


밀란 쿤데라는 소설을 “아무도 진실을 소유하지 않지만 모두가 이해받을 권리가 있는, 매혹적인 상상력의 영토”라고 정의했다. 이장욱의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면면을 들여다보면 한 칸에 분류하기 어렵다. 다양한 인상 군상에 대한 관심이 모든 소설가의 눈에 비치지 않을 리 없다. 다만 그들을 통해 무엇을 말하려 하는지에 궁금할 따름이다. 누군가는 작가의 눈치를 보며 그가 주제와 핵심을 파악하려 노력하나 또 누군가는 자기 삶을 투영하는 거울로, 또 하나의 벽을 넘어서는 담쟁이 넝쿨로 소설을 읽기도 한다. 자기 세계관을 들어올리는 지렛대의 역할로 책을 활용하는 사람들의 태도는 오히려 안일하다. 작가에게 귀책 사유를 돌리거나 이미 만들어진 세계로 진입하려는 태도 때문이다. 


“어쩌다보니 그렇게 된 일들이 인생을 이룬다고 생각하면 허망한가.” 단편 「잠수종과 독」에서 공이 현우에게 물었다면 다른 대답이 돌아왔을까. 독자는 자신을 향해 끊임없이 작가의 질문에 응답한다. 그러한가, 아닌가. 공은 ‘부작용을 최소화하고 작용을 최대화하는 것이 의사의 능력’이라고 생각한다. “생각이 많고 양면성을 강조하고 상태의 복합적 측면들을 고려하며 아우르려는 사람들이야말로 무기력하다는 것을 공은 알고 있었다.” 아니, 무기력한 사람들은 자기 점검을 위해 오히려 다양성과 열린 태도를 살피라는 충고가 아닐까. 소설의 문장, 책장의 갈피마다 독자가 머무는 시간은 제각각이다. 


어떤 소설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건 결국, 자기 삶에 대한 고백이며 타인과 세상을 향한 독백이다. 유명한 정희가 그렇고, 혹자가 그러하다. “저들은 무엇에도 속하지 않고 무엇에도 의지하지 않고 자기 자신이 되도록 해주기 때문에.” 외롭다. 쓸쓸한 고독 너머에 자기 존재 의미를 발견하려는 자들의 몸부림은 오늘도 계속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관념과 세계사와 사후세계를 버리기. 성별과 이름과 가족계획을 망각하기. 우리가 함께 머물렀던 도시를 홀로 찾아와 헤매는 미래의 어느 날을 상상하지 않기.” 트로츠키는 멕시코에서 프리다 칼로를 만났다. 그의 마지막 연인이 되어 암살당했으나 세상에 남은 사람들은 그를 여전히 기억한다. 왜?


예의란 교양 있는 중산층 소시민들의 애티튜드에 불과하며, 예술이란 바로 그런 태도를 조롱하고 비판하고 전복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라고 나는 배웠다. - 「노보 아모르」, 267쪽


예의 없는 것들의 세상이다. 그렇다고 그들이 모두 예술을 향유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건 어불성설이 아닌가. 노보 아모르의 음악을 들으며 이장욱의 마지막 단편을 읽는 동안 오랜만에 소설다운(?) 소설을 읽은 여운을 놓치기 싫었다. 아무리 많은 이야기가 쏟아져도 이야기는 계속된다. 그것은 지극히 생의 이편과 저편을 가르는 도구가 아니라 세상을 이해하고 견디는 최음제의 역할만으로도 충분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1984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77
조지 오웰 지음, 정회성 옮김 / 민음사 / 2003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정치적 글쓰기의 전범

조지 오웰은 1인 미디어다. 현장 르포에 능한 기자처럼 온몸으로 자신의 글을 밀고 나갔다. 버마, 파리, 카탈로니아의 현실을 묘사했고 20세기 초 그가 살던 시대정신을 충실하게 전달했다. “우리 시대에는 ‘정치와 거리를 두는 일’ 같은 건 있을 수 없다. 모든 문제가 정치 문제이며 정치란 본래 거짓과 얼버무리기, 어리석음, 반목, 정신분열증의 집합체인 것이다.”(『나는 왜 쓰는가』, 271쪽)라는 말에 잘 나타나 있듯 글쓰기를 정치적 행위의 도구로 삼았다. 피를 토하며 생애 마지막 역작으로 남긴 『1984』는 소설이라기보다 ‘과두 정치적 집산주의의 이론과 실제’에 관한 보고서다. 

모름지기 글쓰기는 현실에서 공중 부양한 채 대증요법으로 실현된 자기만족이나 달콤한 현실 도피와 거리가 멀다. 우리는 낭만적 사랑과 원초적 고독에 대한 글들이 넘치는, 자기 삶이 당면한 현실에 대한 외면과 회피에 급급한 시대를 살고 있지 않은가. 조지 오웰은 고개를 돌리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지금-여기를 정면으로 바라본다. 그리고 현실 너머에 숨은 인간의 욕망, 세계의 본질에 천착한다. 그것은 물론 정치 체제에 대한 비판적 관점에서 비롯된다. 대안이 없다고 해서 아쉬울 일이 아니다. 작가는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이니 대안과 정답을 요구하는 건 무리데쓰.

사랑과 이별조차 그 원인은 지극히 정치적이다. 정치 아닌 것이 없다는 정치 만능주의에 거부감을 느끼더라도 할 수 없다. 광의의 개념으로서 정치는 인간의 삶에 투영되지 않는 곳이 없다. 인간의 말과 행동, 생각과 사유 자체가 정치 행위이기 때문이다. 결국 지극히 사적인 글쓰기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는 일기조차 사실은 이 세상에 살아가는 또 다른 윈스턴과 줄리아처럼 체제가 반영된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전체주의에 대한 비명

한나 아렌트는 『전체주의의 기원』에서 ‘반유대주의’와 ‘제국주의’가 전체주의의 발원지라고 지적한다. 20세기 ‘나치즘’, ‘파시즘’, ‘스탈린주의’는 현대 사회의 가공할 폭력 장치를 작동하는 기원이 되었다. 히틀러, 무솔리니, 스탈린은 사라졌으나 그들의 그림자와 망령은 세상을 떠돌고 있다. 학습된 무기력과 이중사고doublethink는 자기 삶을 합리화하는 도구로 활용된다. 개인과 집단의 갈등은 사라지지 않는다. 자기 이익을 배반하는 집단의 이익을 위해 헌신하는 사람이 없다는 착각이 오히려 새로운 형태의 집단적 무의식과 맹목적 팬덤 현상으로 나타나는 건 아닐까. 전체주의에 대한 유혹은 오히려 85% 프롤에게 더 큰 추억으로 남은 게 아닐까. 

오세아니아의 내부자와 외부자는 누구일까. 빅브라더보다 임마누엘 골드스타인을 따라가 보자. 미셸 푸코가 날카롭게 분석한 『감시와 처벌』을 이 소설에 적용하면 그 대상은 프롤이 아니다. 애정부의 오브라이언 말대로 사상은 통제, 감시, 조정이 얼마든지 가능하다. 전체주의는 내면으로부터 우러나오는 굴종과 예속, 복종과 열망으로부터 시작된다. 마동석에게 수없이 데려갔을 ‘진실의 방’은 ‘101호’와 전혀 다른 공간이다. 폭력 앞에 굴복한 범죄자들의 자백은 빅브라더를 사랑하게 된 윈스턴의 고백과 질적으로 차이가 난다. 자신을 잊고 완전히 동화되어 지난 40년간의 투쟁이 부질없었음을 자인하는 윈스턴 스미스의 눈물이야말로 전체주의의 기원을 날것 그대로 드러낸다. 

나치즘과 파시즘, 스탈린주의로 이어지는 당대 현실에 대한 환멸을 조지오웰은 이 한 권의 거대한 성인용 우화를 통해 냉정하게 곱씹는다. 애초에 희망 따위를 기대할 수 없으나, 노동자로 대표되는 프롤에게 미래를 엿보는 건 ‘자유’가 주어져 있기 때문이 아니라 건강한(?) 사상, 아니 순수한 자연 상태의 동물적 욕망 때문이 아닌가. 거추장스러운 제약과 상황 혹은 주어진 여건, 타인에 대한 배려가 아니라 자기 욕망에 충실한 삶이 타인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다면 주저할 이유가 없다. 각자의 삶이 모여 전체를 이룬다. 같은 조지 오웰이 다르게 읽히는 건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네 언어의 한계가 세계의 한계다


구어와 신어의 대비가 보여주는 언어의 세계는 다소 혼란스럽다. 조지 오웰은 언어 분석철학자가 아니다. 허나, 세계 인식의 도구는 ‘언어’일 수밖에 없고 그것을 해명한 순간 철학의 제문제는 모두 해결했다고 선언하며 철학계를 떠난 비트겐슈타인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신어newspeak는 오세아니아의 공용어다. 마치 영어가 이제 만국 공통어가 되듯이. 인간은 언어로 사유한다. 영어의 어순, 단어, 표현은 한국어와 다르다. 사물에 대한 인식, 관계 양상에 영향을 미치는 건 개인적 성향과 태도가 아니라 언어일 때가 많다. 사상죄thought-crime, 2분 증오Two Minutes Hate, 표정죄facecrime, 독생ownlife, 선사적goodthinkful, 선사자goodthinker, 범죄 중지cirmestop 등 신어는 시대 정신을 반영하며 집단적 무의식을 형성하고 암묵적 질서와 자기검열을 실행한다. 

몸은 본능을 번역하고 말은 세계를 인식하며 글은 미래에 대한 기대와 희망의 끈이다. 조지 오웰에게 언어는 세계를 인식하는 도구에 불과한 게 아니라 세계 변혁을 위한 무기다. 언어의 한계가 세계의 한계로 나타나는 개인의 울타리를 과감하게 허물 수 있는 방법 또한 타인의 글을 통해 세계를 확장하고 좋은 책을 골라 인식의 힘을 기르는 일이다. ‘과거를 지배하는 자는 미래를 지배한다. 현재를 지배하는 자는 과거를 지배한다.’라는 주장을 우리는 매일 확인한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한 글자에 기대 시스템을 바꾸고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린 일들을 찾아낸다. 누군가는 박수를, 또 누군가는 비난의 화살을 쏜다. 


전쟁은 평화

자유는 예속

무지는 힘


아이러니 하지만 부정할 수 없는 선언 앞에 독자들은 침묵한다. 자신이 이중사고라고 생각하는 순간 그것은 이중사고가 아니다. 너무나 자연스럽게 자기 신념으로 굳은 생각, 바뀌지 않는 태도가 이중사고다. 인지부조화를 극복한 확증편향과 내로남불의 확장판이 이중사고다. 언어가 담은 모순과 그 의미를 포작하는 데 관심을 기울이지 말고 내 안의 불편함을 제거하고 완전한 행복에 이르는 최음제가 바로 이중사고다. 

자유와 행복, 그 모순된 양가 감정

이 소설에는 ‘행복’이라는 단어가 스물네 번 등장한다. 디스토피아에 대한 우울한 자화상을 보여주는 이야기로 가독성이 떨어지는 이 노잼 소설에서도 행복은 여전한 키워드다. 빅브라더가 지켜보는 행복과 원시상태의 자유라는 선택지 앞에서 인간은 어느 쪽을 택할까. 감시와 통제가 일상화되고 자유에 제한을 가하더라도 안전과 평화를 제공받는다면 다수의 사람들은 자유를 포기하고 행복을 선택할 거라는 생각은 착각일까. 혼란과 불안이 계속되는 불행을 감수하더라도 한없는 자유를 보장받고 싶은 사람이 더 많을까. 

현대판 빅브라더를 떠올릴 필요는 없다. 구글 창은 모든 걸 알고 있다. 네이버 검색창은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유일한 도구다. 인터넷 쇼핑, 교통 카드, 위치 정보, 쿠키 정보 …… 일일이 나열할 필요도 없이 현대인은 모두 빅브라더의 흐믓한 미소 앞에서 말할 수 없는 행복과 편안한 일상을 즐긴다. 20세기 중반 조지 오웰이 바라본 현실과 오늘이 크게 다르지 않다면, 아니 오히려 빅브라더가 더 막강한 힘을 발휘하는 시대, 개인의 취향과 일상이 알고리즘을 통해 낱낱이 까발려져 자신의 욕망조차 통제받고 조정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자유의지 따위는 잊은 지 오래다. 오늘도 우리는 행복하고 자유롭다는 이중사고로 무장한 채, 긴 장마와 폭풍 뒤의 고요함과 밝은 햇살을 즐기면 그만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우리가 세상을 이해하길 멈출 때
벵하민 라바투트 지음, 노승영 옮김 / 문학동네 / 2022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슈뢰딩거 방정식의 물리적 측면을 곱씹을수록 혐오감이 커진다네. …… 슈뢰딩거의 글은 도통 이치에 맞지 않아. 개소리라는 생각이 든단 말일세.” 

_베르너 하이젠베르크가 볼프강 파울리에게 보낸 편지


생각은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한다고 착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보다 이성적 사고의 결여가 감정적 대응보다 문제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문제다. 나는 어떤 부류에 속할까. 타인을 ‘이해’한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사물과 사건, 즉 세상은 이해 가능한 영역이다. 아니 어쩌면 모두 주관적 해석에 불과할 수도 있다. 지극히 일시적 잠재태에 불과한 현상들을 우리는 세계 이해의 토대로 삼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현실은 초월적 세계를 반영하지 못하고, 미지의 영역은 늘 불안을 잉태한다. 그래서 대개 사람들은 가시적인 범주에 머문다. 확정적 사실을 지지하고 가능성을 신뢰하지 않는다. 우리가 세상을 이해하길 멈출 때, 아니 그 노력마저 포기할 때 인간은 비루한 존재로 전락한다. 


그것이 수학과 과학으로 이루어진 진리의 영역이어도 별반 다르지 않다. 경험적 추론으로 세상을 판단하는 사람들도 나름의 근거를 제시하고 자신의 ‘감’이 휴리스틱에 기반한 블링크의 법칙이 적용된다고 믿는다. 문제는 이에 대한 반론 가능성을 차단하며 합리적 판단과 논리적 근거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태도다. 타인의 생각과 감정을 가르치려 들거나 삶의 목적과 가치, 윤리적 판단에 정답을 제시하는 사람들이 흔하다. 항상 고민하고 끊임없이 사유한다는 착각이 불러오는 편견과 오류가 작동하는 방식은 대개 그러하다.


심지어 수학이나 과학의 세계도 별반 다르지 않다면 사회, 정치, 종교, 문화, 예술 등 인간의 주관적 해석과 가치 판단의 영역은 더 말할 필요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분법적 사고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는 종류의 인간과의 거리두기는 자기 삶의 질적 향상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과정이다. 거르고 잘라내야 하는 게 암세포만이 아닐 터. 벵하민 라바투트는 독특한 방식으로 세상, 아니 인간에 한발 다가서기를 시도한다. 모두가 거리두기의 시대가 도래했다고 목소리를 높이지만 문학을 통해 인간과 세상을 이해하려는 자들의 수고는 애처롭게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그들을 통해 우리는 세상을 아주 조금 이해할 가능성이 커진다. 그들이 활용하는 도구와 그들의 관점을 잠시 빌릴 수 있는 기회는 오로지 몰입의 독서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책을 읽을 수 있는 권리, 아니 좋은 책을 골라 읽어야 하는 능력은 자기 삶의 유한성에 기반한다. 시간이 많지 않다. 애써 노력하고 훌륭한 텍스트를 선별하고 깊이 사유하며 인간과 세계의 본질을 깨닫는 과정이 자길 삶의 등급을 결정한다고 믿는다. 


때때로 인간을 이해하기 위해 심리학과 생물학, 인류학과 사회학이 동원된다. 그래도 번번이 실패하는 건 인간은 이해할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 아닐까. 그에 비해 세상을 이해하는 데는 관찰과 실험이 필요하다. 지식과 관점이 세상을 이해하는 척도다. 수학과 과학은 물질계를 바라보는 프레임을 제공한다. 단편 「프라시안 블루」는 허구의 문장이 단 하나밖에 없다는 고백이 놀랍지 않다. 현실이 소설을 능가하는 놀라움을 매일매일 전하고 있지 않은가. 반지하에서 숨진 일가족의 뉴스를 능가하는 픽션이 가능한가. 20세기에 벌어진 인류의 참상과 21세기의 일상이 겹친다. 누군가의 절규는 여전히 누군가의 돈과 권력과 맞바뀐다. 이 책에 실린 다섯 편의 소설은 역사적 진실, 과학적 사실 사이와 사이의 공백을 메운다. 현실을 비틀어 소설을 만드는 대신, 과거를 뒤적여 빈틈을 이어붙이는 과정 또한 훌륭한 이야기가 아닌가. 


슈뢰딩거와 하이젠베르크, 슈바르츠실트와 모치즈키 등 세계사에 족적을 남긴 천재 수학자와 과학자를 기릴 목적의 소설들은 아니다. 인류가 살아온 과거를 돌이켜 보는 건 현재의 원인을 알고 싶어하는 호기심 때문이다. 어쩌면 그보다는 미래를 내다보고 싶은 욕망 때문일까. 드라마틱한 과학사가 소설로 읽히는 느낌은 나비가 꿈을 꾸는 현실을 보여주는 장자의 상상력이 재현되는 듯하다. 소설은 소설일 뿐 현실이 아니다. 현실은 현실일 뿐 소설이 아니듯. 그렇다면 현실같은 소설, 소설같은 현실은 어쩌란 말인가. 우리가 세상을 이해하길 멈출 때 비극은 비로소 시작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는 맞고 너는 틀리다" - ‘신이 죽은’ 시대의 내로남불
허경 지음 / 세창출판사(세창미디어) / 2022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인간은 옳은 것만큼이나 잘못된 것을 진실하게, 진심으로, 열렬히 믿을 수 있다. - 182쪽

객관적 ‘사실’에 대한 확신, 다른 건 몰라도 이것만은 ‘진실’이라고 믿음 앞에서 계속 흔들린다. 각자의 기준과 판단으로 선택하고 결론 짓는 일이 반복되지만 대체로 사람들은 다른 생각 앞에서 당황한다. 받아들일 수는 없지만 인정하겠다는 똘레랑스의 정신을 실제 삶에 적용할 생각은 별로 없다. 옳고 그름, 선과 악, 밝음과 어둠, 좋음과 나쁨의 경계선이 분명하게 보이는 사람은 얼마나 행복한가. 

진리는 없고, 관점만이 존재한다. 또는 진리는 없고, 해석만이 존재한다. 마찬가지로, 사실은 없고 관점만이 존재한다는 주장은 니체의 전매특허가 아니다. 복잡, 다변한 세상에서 사실과 진리는 순간에 머문다. 일시적 현상에 불과한 듯 세상은 혼란스럽고 목소리 큰 놈들의 아우성에 귀가 아프다. 허경이 말하고 싶은 이야기가 무엇인지 신경 쓸 것 없다. 왜 우리가 각자의 내로남불과 편향성을 수정하지 못하는지, 그것은 인간의 본성이니 어쩔 수 없다는 면죄부가 가능한지, 문명 발달과 이성의 힘으로 합리적인 토론과 공론의 장에서 합의가 불가능한 이유가 무엇인지 쉼없이 고민할 필요가 있다고 말하는 듯하다. 그럴 수 있을까. 승리가 선이고, 성적이 모범이며, 재산이 인격인 사람들의 태도는 바뀔 수 있을까. 사람들의 관점, 편견, 인식틀은 어떻게 형성됐을까.

마르크스의 말대로 ‘무지는 논증이 아니다.’ 논점을 이해하지 못한 채 자신의 믿음이 타당함을 주장하는 사람을 종종 만난다. 어떤 사건, 사태에 관한 누군가의 믿음이 얼마나 견실한가의 문제와 그 사람이 믿는 내용이 옳은가의 문제는 전혀 다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종종 근대 이후 과학과 철학 분야에서 사라진 ‘객관적 사실’ 운운하며 자신의 생각을 강력하게 주장하며, 심지어 타인을 설득하고 수용하지 않는 상대를 비난한다. 

이렇게 심각한 상황을 연인, 가족, 친구, 동료, 이웃과의 대화에서 매일 마주하지만 웃으며 넘어가고 애써 외면하거나 그저 서로 다른 것 뿐이라며 위로한다. 과연 그런가. “나는 맞고 너는 틀리다”와 “너는 맞고 나는 틀리다”는 동어반복에 불과할까. 허경이 풀어내는 <2021년 대한민국 사회에서 작동하고 있(다고 내가 믿는)는 ‘일반적 인식론의 무의식적 대전제’를 비판적으로 검토하려는 의도>에 관한 이야기가 흥미로운 건 사람들은 왜 ‘확신’을 가지고 이야기하는지, ‘신념’에 가득한 채 세상을 살아가는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내로남불은 자신의 행위에 대한 판단과 남의 행위에 대한 판단에 일관성이 결여된 경우를, 곧 ‘자신의 행동과 타인의 행동을 재는 잣대가 다른 경우’를 도덕적으로 비판하는 담론이다. 내로남불 담론의 한복판에 선 정치권의 주류 세력인 보수와 진보, ‘국민의힘’과 ‘민주당’ 지지자들에게 날리는 펀치가 허공을 스칠 뿐일 수도 있다. 진영논리에 갇힌 사람들에게 의심하고 생각하고 고민하는 과정을 기대하기는 매우 어렵기 때문이다. 감정적 선동에 익숙한 사람들, 무비판적 뉴스 소비자들, 팬덤 정치의 수혜자들은 “나는 맞고 너는 틀리다”라는 생각이 아니라 자신들의 생각이 좀더 진실에 가깝고 그것을 위해 열심히 싸운다는 도덕적 정당성으로 무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 사회의 윤리적 기준ethical standards, 자유freedom의 평등equality, 공정fairness과 정의justice은 ‘누가, 어떤 기준으로, 어떻게 그 기준을 정할 수 있는지’ 살펴보자. 저자는 이 지점을 톺아보기 위해 칸트의 정언명령, 홉스의 리바이어던, 로크의 통치론, 존 롤스의 ‘무지의 베일’, J. S. 밀의 자유론을 들고 나왔다. 성인중심주의자, 19세기 백인 유럽중심주의자, 제국주의자, 오리엔탈리스트인 밀의 한계에도 불구하고(물론 다른 고전의 한계도 이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다는 점에서 아쉽지만 시대 상황과 사상가들의 환경을 고려해서 이 부분은 다루지 않는다) 현재 우리 사회의 갈등과 분열 양상을 고찰하는데 매우 중요한 시사점을 준다. 물론 이 이야기는 오히려 개인과 개인사이의 대화 국면, 삶의 목표과 가치에 대한 개인의 선택, 동일한 사건과 상황에 대한 서로 다른 반응을 보이는 장면에서 더욱 필요해 보인다. 우리는 우리가 알고 있는 우리가 맞을까. 아니, 나는 내가 알고 있는 나인가. 나는 왜 어떤 기준으로 그렇게 생각하며 판단하고 선택하며 살아갈까.

흔들림없는 편안함. 어느 침대 회사의 광고 카피다. 인간은 흔들리는 존재의 가지 끝에서 불안을 느낀다. 그 불안은 자유를 위해 마땅히 치러야 하는 세금 같은 것이다. 처음 바닥을 찍을 때 견디지 못하면 그 다음 바닥이 불안하다. 어차피 파도는 밀려온다. 아무리 발버둥 우아한 자유형으로만 헤엄칠 수 없다. 때로는 숨을 참고 수면 아래로 내려가 고요한 잠영을 해야 할 때가 있다. 바닥을 발을 딛고 힘차게 떠오르고 싶을 때까지 그대로 있는 순간은 즐길 수는 없을까. 소리가 없는 세상, 침묵과 정적이 주는 편안함이 수면 위의 소란한 세상과 맞닿는 지점의 경계는 분명한가. 너는 맞고 나는 틀릴까. 

나는 ‘철학이 건강한 불편함을 지향한다’고 믿는다. - 215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