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체성 밀란 쿤데라 전집 9
밀란 쿤데라 지음, 이재룡 옮김 / 민음사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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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관심이 우리 시대의 유일한 집단적 열정인 셈이지. - 91쪽

노르망디 해변가 작은 도시에도 사람이 살고 있다. 구글어스의 최초 아이디어는 젊은 예술가와 해커에서 출발했다. 세상을 바라보는 새로운 방식, 온 세상을 날아다니는 상상력은 독일의 아트+ 컴에서 실현됐다. 상상이 현실이 되지만, 천문학적 액수가 걸린 구글과의 소송에서 진다. 사실과 진실 사이, 법과 현실 사이에서 좌절하는 건 인간의 숙명인지 모른다. 노르망디 해변의 작은 도시로 날아가 거리를 살펴보고 주변을 둘러볼 수 있는 현실에서 소설은 여전히 우리에게 보이지 않는 세계로 안내한다.

어느 날 남자들이 더 이상 그녀를 돌아보지 않는다는 그녀의 말 한마디 때문이었다. 샹탈은 시간의 흐름을 거스를 수 없다. 아이를 잃은 엄마가 아닌 여자로서의 삶도 끝나간다는 슬픔의 그림자. 장마르크의 가상한 노력은 역효과를 불러오고 이별의 빌미를 제공한다. 사랑을 시작할 땐 이유가 없지만 사랑이 끝날 때는 헤아릴 수 없는 이유가 생긴다.

며칠 동안 잠을 자지 못하고 불면증에 시달리면 시야가 좁아지고 생각이 멈춘다. 꿈과 현실 사이를 헤매고 두세 시간 이상을 자기도 어렵다. C. D. B가 시라노 드 베르주라크의 이니셜이 아니면 어떤가. 어차피 멍한 눈길로 바라보는 푸른 하늘 너머에 존재하지도 않는 꿈을 좇는 게 인간의 숙명이다. 상상의 질서를 만들어 경계를 만드는 위대한 면도 있지만 인간은 그 벽을 넘다 지치기 마련이다. 시지프스의 신화처럼 이카루스의 꿈처럼 뫼비우스의 띠처럼 무한반복의 굴레를 벗어날 수 없기 때문에 소설을 읽는 게 아닐까.

밀란 쿤데라는 샹탈의 입을 통해 “당신이 내가 상상하는 사람이 아닌 다른 어떤 사람이라는 생각을 했어. 당신의 정체성에 대해 내가 착각을 했다는 생각.”이라고 선언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타인의 정체성은 무엇인지 묻는다. 일관성과 동일성을 유지한 어떤 본질적 특성이라는 정의는 그 자체로 모순이다. 인간은 일관성과 동일성을 유지할 수 없는 유기체다. 변하지 않는 존재의 본질이라니.

인간에게 그런 게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정체성의 혼란은 불가피하다. 확고한 믿음과 뚜렷한 신념이 무너지는 경험을 한 사람은 안다. 고집스런 자기 확신만큼 타인에 대한 신뢰는 불안하게 흔들린다. 발 딛고 선 현실은 생각보다 복잡하고 어림짐작하기 어렵다. 지구 반대편에 사는 사람들, 우리가 잠든 사이 깨어 있는 불빛, 내가 굳게 믿었던 연인과 친구에 대해 함부로 말하지 않는 편이 낫다. 밀란 쿤데라는 ‘참을 수 없을 존재의 가벼움’을 느낄 때마다 ‘농담’을 던지는 대신 자기 ‘정체성’이 아닌 타자에 대한 오해를 점검하라고 조언하는 듯하다. 나는 누구인가, 만큼 중요한 ‘누구냐 넌?’

“밤새도록 스탠드를 켜 놓을 거야. 매일 밤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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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호실로 가다 - 도리스 레싱 단편선
도리스 레싱 지음, 김승욱 옮김 / 문예출판사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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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이었다. 소설을 읽고 표지 그림을 찾아봤다. 화가 우지현은 그림에 관한 에세이를 쓴 작가이기기도 하다. <그리운 것들은 당신 뒤에 있다>라는 제목으로 전시회가 열렸었다는 사실도 뒤늦게 확인했다. 영화 「셜레 관한 모든 것」 포스터처럼 현대인의 고독에 침잠했던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 「Morning, 1952」이 언뜻 떠오른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우지현의 「어느 밤」은 로리스 레싱이 표현하고 싶은 단편의 이미지를 시각화하는데 성공했는지 알 수 없다. 주인공 수전의 내면을 드러내고 싶었을까. 소설에 묘사된 호텔을 시각화하는데 몰입했다는 이 그림은 의미가 퇴색했을 터. 창밖에 지는 석양은 집으로 돌아가야 하는 매슈의 아쉬움이 짙게 배어 있다. 혼자만의 공간에 머물러 자신의 현재와 미래를 응시하는 뒷모습이 쓸쓸하지만 무기력해 보이지는 않는다.

유명 화가의 그림을 표지로 활용하는 민음사 세계문학 전집들과 달리 소설에 맞는 그림을 의뢰해서 책을 만든 출판사의 노고에도 박수를 보낸다. 그리운 것들을 모두 뒤에 남겨진 시간 안에서만 머문다는 우지현의 그림 주제도 좋다. 물론 수전은 지난 세월을 추억하거나 그리움 때문에 눈물짓는 여성은 아니다. 어쩌면 여전히 해결되지 않는, 해결할 수 없는 평범한 여성의 경력단절, 육아와 자아의 충돌, 평온한 삶이 주는 권태, 무료한 인생의 지루함을 프레드 호텔 19호실에서 달랜 건 아니었을까.

버지니아 울프가 여성에겐 자기만의 방과 돈이 필요하다고 선언한 건 근대적 여성의 조건을 세상에 알리는 신호탄이 됐다. 물질적 토대와 자기 정체성을 확인할 수 있는 주체적 삶의 태도는 현대인에게도 삶의 필수 조건이다. 매슈와 결혼, 출산과 육아로 행복의 외적 조건은 갖추었으나 교외의 저택과 경제적 풍요가 수전에게 삶의 전부일 수는 없었다. 사랑이 식어버린 관계를 탓할 수만도 없다. 도리스 레싱이 단편 「19호실에 가다」를 통해 보여주려던 여성의 모습은 인간 일반으로 확대할 수 있다. 물론 수전이 처한 삶의 조건이 아니라면 19호실이 필요 없었을 지도 모른다. 남편 매슈는 다른 방식으로 자기만의 19호실을 만들었을 것이다. 다만 누구든 19호실은 필요하다. 존재론적 의미를 탐구하는 시간, 삶의 이유를 묻고 자기를 들여다보는 공간, 자기만의 방, 자기만의 동굴.

사랑하는 사람과 모든 걸 공유하고 사랑하는 사람의 모든 걸 알고 싶은 욕망이 불러올 부작용과 비극은 경험을 통해서만 배우게 된다는 아이러니. 누구에게나 비밀이 있다는 건, 양심과 죄의식의 문제가 아니다. 내밀하고 사적인 영역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면 오해와 불신이 쌓인다. 매슈와 수전이 공유하는 삶, 사랑하는 방식은 어쩌면 19호실과 무관하다. 작가의 의도와 상관없이 우리에게 19호실이 필요한 이유는 너무 많다. 빈둥지 증후군을 겪는 여성의 일탈이 아니라 “이것은 지성의 실패에 관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라는 첫 문장처럼 감상적 태도로 이해할 수 없는 삶의 부조리에 관한 이야기다.

소설 중간에 같은 문장이 세 번 반복된다. “그녀는 혼자였다. 그녀는 혼자였다. 그녀는 혼자였다.”(304쪽)가 그것이다. 남편과 세 아이의 엄마도 혼자다. 그녀는 혼자였고 여전히 혼자다. 그래서 “사실 그 방이 없으면, 나는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야.”(328쪽)라는 고백이 가능하다. 어쩔 수 없다는 핑계와 외면이 한 인간의 삶을 피폐하게 한다. 개인적인 성향과 용기의 문제로 치부할 수도 없다. 세상에 수많은 책들은 우리에게 묻는다. 지금 괜찮으냐고, 그렇게 살아도 행복하냐고 그리고 당신만의 19호실은 어디 있느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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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슴도치와 여우 - 톨스토이의 역사관에 대하여
이사야 벌린 지음, 강주헌 옮김 / 비전비엔피(비전코리아,애플북스)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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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이야기 본능은 강력해서 웬만해선 막을 수 없다. 상대방의 관심과 무관하게 쏟아내는 자기 고백은 감정의 배설에 가깝다. 뜨거워진 휴대폰을 귀에 대고 들어야 하는 친구의 연애사 혹은 친정 어머니의 하소연을 듣는 사람의 마음을 헤아리기 어렵다. 내가 말하고 싶은 만큼 상대방이 듣고 싶지 않은 욕망이 비례할 수도 있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관계 양상과 성향에 따라 이야기는 폭력이 될 수도 있다. 주변에 잘 들어주는 사람이 있다는 건, 주변에 원하지 않아도 이야기를 들어줘야 하는 사람이 있다는 의미다. 이것은 인간의 본능과 욕망에 관한 이야기다. 아니, 일상에서 매일 벌어지는 개인차의 비극이다. 4가지 유형의 혈액형으로 80억 명을 분류하는 오류보다 조금 나은 방법이 16가지 유형으로 나눈 MBTI 테스트다. 조금씩 다른 사람들이 모여 사는 세상에서 관계의 기본은 타인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태도다. 그래서 가장 중요한 신체 기관은 눈이 아니라 귀다. 듣지 못하는 사람이 아니라 듣지 않는 사람과는 대화를 할 수도 없고 관계를 유지할 수도 없다.

놀랍게도 이사야 벌린은 인류를 단 2가지 유형으로 분류한 그리스 시인 아르킬로코스를 소환한다. “여우는 많은 것을 알고 있지만 고슴도치는 하나의 큰 것을 알고 있다”라는 말은 흑백 논리의 전형이다. 당신은 여우인가, 고슴도치인가. 마치 이청준의 소설 「소문의 벽」에서 전짓불의 공포에 짓눌린 박준과 같은 질문이다. 질문자의 실체를 알 수 없는 상태에서 어느 편인지에 대한 말 한마디가 생사를 가르는 절체절명의 순간. 질문을 가장한 억압과 강제는 박준에게 트라우마로 남는다. 물론 이사야 벌린이 톨스토이를 둘 중 하나로 분류하고 이를 논증하기 위해 쓴 글이 아님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고슴도치 혹은 여우로 나눌 수 없다. 마치 붉게 물든 석양의 하늘처럼 모든 인간은 농도의 차이만 확인할 수 있는 그라데이션으로 물들어 있다.

일원론자인 고슴도치형은 지식인과 예술가 성향으로 도스토예프스키가 대표적인 인물이다. 모든 것을 하나의 핵심적인 비전, 즉 명료하고 일관된 하나의 시스템에 관련시키는 사람을 고슴도치형이라 한다. 여우형은 다원론자로 푸슈킨 같은 사람이 여기에 해당한다. 서로 모순되더라도 다양한 목표를 추구하는 사람이다.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에 대한 거대한 서평을 이렇게 다채로운 해석과 분석으로 채울 수 있을 정도로 이사야 벌린은 작가의 내면과 삶의 궤적을 꼼꼼하게 살핀다. 그래서 결론은? 톨스토이는 고슴도치인가, 여우인가. 그게 중요한가?

소설은 개연성 있는 허구로 삶의 진실을 드러내야 한다는 데 동의한다고 해서 핍진성이 부족한 소설이 주는 재미와 장르 소설이 가진 허구와 상상의 즐거움을 포기한다는 뜻은 아니다. 그러나 여전히 고전으로 남아 인간과 생의 이면을 성찰할 수 있는 작품에 대한 이해는 다양한 비평과 해석의 필요하기도 하다. 가벼운 분량이지만 결코 만만찮은 톨스토이의 무게를 생각한다면 톨스토이의 작품뿐만 아니라 우리가 읽는 모든 글에 대한 깊이와 넓이를 다시 생각하게 한다.

읽고 쓰는 행위는 저마다 다른 의미다. 치유하는 글쓰기를 통해 자신을 위로하는 사람, 독서를 통해 새로운 세상에 눈뜬 사람 등 헤아릴 수 없는 다양한 경험을 통해 사람들은 독서와 글쓰기를 자기 삶을 위한 방편으로 활용한다. 모든 읽기는 쓰기를 위한 전제이고, 모든 쓰기는 읽기가 바탕이 된 자기표현이다. 그러나 자신을 향해 열려 있지 않다면, 타인과 세상의 소리를 경청할 수 없고 자신의 망막에 투영된 세계가 전부라고 믿을 수도 있다. 쉼 없는 의심과 질문이 자기 성찰과 내일의 변화를 위한 성장을 이끈다. 그때는 옳고 지금은 틀리거나 나는 옳고 너는 틀렸다는 말의 무게는 때때로 감정에 휘둘린다. 논리적 근거보다 중요한 게 태도이며, 합리적 생각보다 감정이 앞서는 게 인간이 지닌 한계라는 사실 자체도 인정하지 않는다면, 나와 너 그리고 우리의 이야기는 계속될 수 없지 않은가. 결국 톨스토이는 고슴도치 같은 여우가 여우 같은 고슴도치와 공존하는 방법을 모색했던 게 아닐까.

톨스토이의 현실 감각은 마지막 순간까지 너무나 통렬해서, 뛰어난 두뇌로 세상을 잘게 쪼개 얻어낸 단위들에서 재조립해낸 어떤 도덕적 이상과도 양립할 수 없었다. 따라서 그는 이런 사실을 부인하는 데 평생 동안 온 힘을 쏟아 부었다. 지독히 자존심이 강하면서도 자기 증오에 시달렸고, 박식하면서도 모든 것을 의심했으며, 냉정하면서도 넘치도록 열정적이었고, 남을 경멸하면서도 자기비하가 심했으며, 심한 고뇌에 시달리면서도 초연했고, 가족과 헌신적인 추종자들에서 사랑받고 온 문명 세계에서 찬사를 받았지만 거의 언제나 홀로였던 톨스토이는 위대한 작가 중에서 가장 애초로운 사람이었고, 콜로누스에서 눈을 가린 채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지만 누구에게도 도움을 청하지 못해 자포자기한 노인이었다. - 17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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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고독의 순간들 더 갤러리 101 2
이진숙 지음 / 돌베개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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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파엘전파부터 추상미술까지 정리한 이진숙의 101 두 번째 책 『위대한 고독의 순간들』에는 34명의 화가가 등장한다. 19세기 중반부터 20세기 초반에 해당하는 시기다. 산업혁명과 공화정이 자리를 잡는 혼돈의 카오스를 기억하는 일은 슬프고도 아름답다. 프랑스의 벨 에포크는 글자 그대로 아름다운 시절이 아니라 상처가 아무는 시간이었고 야만의 시대가 시작되기 전 폭풍 전야 같은 시대가 아니었을까. 예술은 언제나 대중들의 기호를 충족하기 위해 존재한 것은 아니다. 시대의 부름에 호응하기도 하고 부와 권력에 기생하기도 했으며 예술가 자신을 위한 행위이기도 했다. 그러나 결국 대중의 관심과 호응, 찬사와 인정이 없었다면 대개의 예술은 존재 가치를 의심해야 할 것이다. 특히, 근대 이후 개인의 발견과 ‘좋은 삶’에 대한 열망이 뜨거웠던 시대의 미술은 신분 사회가 무너지고 개인을 바라보는 안목과 태도 자체에 균열이 시작되었음을 예감했다. 그 징후는 곳곳에서 발견된다. 그림에 대한 서로 다른 논쟁, 이전 시대 예술에 대한 저항, 화가의 개성과 성취를 드러내려는 노력, 시대를 반영하려는 열망이 혼재되어 풍성하고 다양한 그림이 쏟아진다. 바르비종, 인상주의, 아르누보, 야수주의, 입체주의, 미래주의, 표현주의 등 형식 실험이 이어지고 정반합의 변증법적 발전 과정은 그 시기를 단축하며 무지개처럼 고유한 빛깔을 드러내는 화가들이 등장했다.

이 혼란의 시기에 ‘좋은 삶’은 과연 어떤 것이었을까. 프로이트와 마르크스로 인해 근대는 더욱 더 자기 삶에 대한 성찰하고 시대를 인식하는 개인이 탄생한다. 근대사회는 신분의 속박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개인individual의 시대였다. 시민혁명과 초기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반성은 개인의 고독과 불안을 증폭시킨다. 자유롭지만 고독한 존재의 탄생이 이 시대를 관통하는 불안이었다. 무엇이 되고 싶은지, 어떻게 살아야 할지 스스로 정해야 하는 막막한 개인들의 좌충우돌이 시작됐다. 모든 인간은 자유와 평등을 부여받았으나 도대체 어떻게 하라는 말인지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았다.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다. 인생의 목표와 삶의 방향을 찾는 대신 각자도생과 생존 전략에 급급하다. 누구의 잘못도 아니고 세상을 원망하기도 힘들다. 그대도 우리는 ‘좋은 삶’을 위해 고민하며 주변을 살피고(사회), 과거를 돌아보며(역사), 삶의 태도와 방법을(철학) 묻는다. 때로는 미술관에서 위로를 받고(예술), 밥벌이의 지겨움을 호소하며(경제), 현실 밖의 세상에서 머문다.(문학)

19세기 말 예술가들은 인류가 경험해보지 못한 이 고독과 불안이라는 낯선 감정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태어나는 순간 삶의 길이 정해져 있던 시대는 행복했을까. 아니 자유에 매겨진 세금처럼 지불해야 하는 대가치고는 ‘개인’이 감당해야할 책임이 너무 크다. 사회적 계층 구조의 사다리를 오르는 것도 개인의 몫이고, 무엇이든 될 수 있는 세상이니 너의 선택일 뿐이라는 말도 무책임하고, 성공하지 못한 삶은 오직 너의 능력과 노력이 부족하기 때문이라는 시선도 억울하다. 불과 200여 년 동안 인류는 빛의 속도로 발전하는 과학기술 앞에서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매우 더딘 속도로 적응하거나 낙오하거나 과거로 회귀하며 파편화된 개인들의 시대가 펼쳐졌다.

벨 에포크 시대의 에곤 실레는 비극적 죽음으로 예술가로서의 삶을 완성했다. 그러나 영원한 아이가 어른의 세계로 진입하도록 에곤 실레를 떠나보내고 전쟁터로 떠나 스물 셋의 나이에 죽음을 맞은 발리의 극적인 삶이 더 예술을 닮았다. 현실 자체가 인간의 상상력을 뛰어넘기 시작한 것도 근대 이후가 아닐까 싶다. 일어나지 않을 수 있는 일은 없다. 유파와 시대를 넘나들며 예술을 주도했던 화가들과 나름의 빛깔과 향기로 빛나는 그림을 천천히 감상하는 동안 세기말의 우울, 격변기의 혼란 그리고 무엇보다도 경계가 사라진 시대의 막막함이 보이기 시작했다.

단테 바브리엘 로세티의 <페르세포네>, 에두아르 마네의 <폴리 베르제르의 바>, 일리야 레핀의 <1581년 11월 16일 이반 뇌제와 그의 아들>, 쇠라, 세잔, 뭉크, 고흐, 딕스, 말레비치, 몬드리안... 그림으로 살펴보는 인류의 역사는 빅히스토리처럼 문학과 사회는 물론 철학, 문화, 예술이 한데 어우러져 오늘을 만들었을 것이다. 이진숙은 그 씨줄과 날줄을 정교하게 직조하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림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고 인간과 세상에 대한 안목을 키우는 데는 단편적인 지식으로 해결되지 않는 지점들이 있다. 다양한 분야에 대한 끊임없는 공부와 연결고리를 발견하는 사유의 힘이야말로 예술을 제대로 감상하는 지름길이다. 저자의 노고와 성실함이 빚어낸 그림 이야기는 매우 훌륭한 책으로 오래 기억될 것이다.

‘개인’의 등장은 곧 고독하고 불안한 존재의 등장을 의미했다. 개인은 스스로 존재 의미를 찾아 욕망의 시험대 위에 오르고, 의미를 찾지 못한 채 세상에 부유하다 파멸한다. 그 과정에서 로댕식의 ‘욕망’, 뭉크식의 ‘불안’ 그리고 브루벨식의 ‘절망’을 주제로 한 예술이 탄생했다. - 45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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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과 농담 말들의 흐름 7
편혜영 외 지음 / 시간의흐름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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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구선수 김가영과 평론가 김나영은 자매일까?” 이런 말 같잖은 농담을 던져도 술자리라면 받아줄 마음의 여유가 생긴다. 물론 농담은 맥락이니 뜬금포를 쏘아 올려 시베리아 벌판이 되는 부작용도 감수해야 한다. 허용적 분위기에서 이완된 사람들은 주변에 실존 인물 다영이와 라영이를 호출하고 대한이와 민국이 형제를 등장시킨다. 믿기 어려운 이름에 얽힌 에피소드가 이어지기도 한다. 다음날 기억나지 않을 정도의 가벼운 농담 혹은 웃음들. 술과 농담은 아마 뗄 수 없는 친구가 아닐까 싶다. 잠시 슬픔과 고통을 웃음으로 위로하는게 민족의 특성이라는 말은 믿지 않지만 유쾌한 만남을 위해 농담은 생각보다 긴장을 이완시키고 관계를 진전시키기도 한다. 물론, 귀갓길의 허무와 숙취는 각자의 몫이다.

해 질 녘, 개와 늑대의 시간은 술과 농담의 시간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해서 사람들이 하루해가 저물 때만 술을 마시는 건 아니다. 이 책에도 숱한 낮술과 새벽의 혼술이 등장한다. 글을 쓰는 사람들의 특성을 감안해야겠지만 술과 농담 이야기에 옷깃을 여밀 필요는 없다. 에세이는 대체로 글을 쓴 사람에 대한 호기심과 글 자체의 여운이 관건이다. 편혜영과 조해진과 이장욱의 소설을 읽었으니 그들의 일상을 들여다보는 재미가 있고, 건조한 문체로 뛰어난 농담을 선보인 한유주의 소설을 읽어싶어졌다. ‘연애와 술’, ‘농담자 그림자’ 대신 말들의 흐름 시리즈 중 ‘술과 농담’을 집어 든 건 순전히 제목 때문이다. 가끔은 의미보다 재미를 찾는 독서가 위로를 건넨다. 술과 농담을 주제로 편혜영, 조해진, 김나영, 한유주, 이주란, 이장욱의 글을 모은 옴니버스 영화같은 에세이다. 유일한 평론가의 글이 재미없고 유일한 남자 소설가의 글이 너무 진지한 점을 제외하면 가볍게 읽을 수 있는 분량의 재밌는 에세이다. 술 좋아하는 분들이라면 『술취한 원숭이』, 『양주 이야기』, 『알코올과 작가들』, 『어느 애주가의 고백』도 권할 만하다.

위대한 조상이 있느냐는 한유주의 질문에 아버지가 “한니발”이라 답한다. 로마 한씨냐고 묻자 카르타고 한씨 아니겠냐고 답하는 부녀의 모습을 상상하며 부러웠다. 때로는 관계를 망치지만 대개 농담은 경계를 허물기도 한다. 개그 코드가 맞는 연인이나 부부는 성격 차를 극복할 수 있지 않을까. 웃음 코드가 맞는 부모 자식 사이에 갈등은 극단으로 치닫지 않을 듯싶다. 발베니 21년산을 단 한 번 단 한 잔 마신 적이 있는데 그대로 죽고 싶었다는 한유주는 모두 농담이고 거짓말이라고 눙친다. 한유주와 발베니 한 잔을 마시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동동주, 과일주, 인삼주도 아니고 한유주라니 이름부터 술을 부르지 않는가. 모두 농담이고 거짓말이다.

술 속에 진리가 있다In vino veritas는 이장욱의 마무리는 사람들에게 술이 주는 의미와 숱한 에피소드, 알콜 의존과 중독, 질병과 죽음에 이르기까지 삶의 희노애락을 들여다보게 한다. 술 한 잔 마시지 않는 사람과 모든 음식이 안주인 사람 모두에게 술과 농담은 생각보다 가깝고 어렵다. 술이 농담을 부르기도 하고 농담이 술로 이어지기도 한다. 술이 없으면 농담을 못하는 것도 아니고, 농담 없는 술자리도 많다. 둘 사이가 어찌됐든 각자의 삶에 술과 농담은 무엇인지 낄낄거리며 생각해 볼 수 있는 시간이다. 편혜영의 말대로 “술이 불어넣은 준 용기와 허세, 객기와 수줍음, 그대 발생한 우정”을 기억할 수 있다면 충분하다. 말 없는 술잔, 농담 없는 술자리에 오가는 훨씬 더 깊은 대화도 있다. 떡은 사람이 될 수 없어도 사람은 떡이 될 수 있다는 광고처럼 술에게 먹히지만 않는다면, 아니 때로는 떡이 된 순간이 찬란하게 빛나던 시절이었고, 그조차 망설여지는 무심함과 못난 마음이 더 커지는 시간도 흘러갈 뿐이다.

어떤 무심함은 세월이 흘러서, 라는 말로는 변명이 되지 않는다. 상대의 서운함이나 아픔에 눈멀게 하는, 늘 너무 비대한 못난 마음 때문에 결국 멀어지기도 하는 것이다. - 조해진, 4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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