혐오의 과학 - 혐오 범죄를 일으키는 인간 행동의 어두운 비밀
매슈 윌리엄스 지음, 노태복 옮김 / 반니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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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학과 사회학에 관한 대다수 연구가 ‘평균적인’ 백인 중산층 소년, 또는 더 일반적으로 서양의Western, 교육을 받은 Educated, 산업화된Industrialized, 부유하고Rich, 민주적인Democratic 사회―WEIRD 사회―의 구성원들이 인간 행동에 관한 과학 연구의 주된 피실험자들이다. 그래서 인간 행동에 관한 지식의 대부분은 세계의 모든 사람들에게 일반적으로 적용할 수 없고 WEIRD 사회의 구성원들만을 대변한다는 주장이 나왔다.(J. Heinrich er al., ‘The Weirdest People in the World?’, Behavioral and Brain Sciences 33(2010), 61-83.) 실험심리학의 아버지 분트부터 프로이트를 거쳐 최근의 다양한 심리실험에 이르기까지 대상은 주로 WEIRD가 아닐까. 단순한 의심을 넘어 대체로 우리 사회의 주류(술 좋아하는 아재들?)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한국 사회의 기준이 될 수는 없지 않을까. 586으로 과대 상징되는 50대가 그렇다.(신진욱은 『그런 세대는 없다』에서 이 문제를 적확하게 짚어낸다. 1~2%에 해당하는 80년대 대졸 엘리트 5060세대와 2030 세대와의 갈등의 본질일 수 없다는 지적이 그것이다.) 혐오, 불평등, 공정과 정의에 대한 숱한 논쟁과 주관적이고 감정적 해석들이 대체로 그러하다. 우리 사회의 갈등 구조가 단순히 성별과 세대로 표현될 수는 없다. 경제적 세습을 넘어 문화, 상징자본의 격차, 세대 내 교육 환경, 비정규직, 노인 빈곤, 에너지와 환경 문제 등 심각한 사회 문제에 대한 인식과 태도가 ‘혐오’의 바탕을 이루고 있는 게 아닐까. 

범죄학 교수 매슈 윌리엄스는 대학 졸업 즈음에 게이 바 앞에서 혐오 폭행을 당한 경험으로 이 책을 시작한다. 사람의 정체성에 대한 공격은 깊고 고통스런 상처를 남긴다. 선택할 수 없는 모든 생래적 조건에 대한 비난과 폭력은 자기검열과 자기부정으로 이어질 만큼 위험하다. 여자, 아재, 노인, 성 소수자, 인종, 장애, 지역 등 거의 모든 차이가 차별로 이어지고 혐오로 표현되는 과정은 ‘왜?’라는 본질적 의문을 남긴다. 인간이 그런 존재로 태어나는지, 사회화 과정에 의한 편견일 뿐인지 그 논쟁은 여전히 결론을 내지 못하고 있는 상태다. 우리가 가진 혐오 능력은 모든 인간에게 공통되는 특질이다. 진화를 통해 얻은 신체적, 심리적 구조가 그러하다. 다만 이 속성이 촉진되는 요소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게 저자의 관심사다. 어느 사회, 어느 시기에 혐오에 노출되어 편견이 혐오 범죄로 이어지는지 살피는 과정은 내 안의 나와 또 다른 나를 이해하는 일과 다름없다. 

혐오에 대한 범죄학 지식의 상당수는 편견에 관한 연구에서 나온다. 편견은 고정관념, 즉 조잡한 일반화와 범주 나누기를 바탕으로 한 개인 또는 사람들의 집단에 부여된 특징을 먹고 자란다. 편견은 어떤 이를 대하는 우리의 태도와 감정이 그 사람이 속한 집단을 바탕으로 결정될 때 생겨난다. 그러므로 편견은 심리학 용어로 외집단(‘그들’)과 내집단(‘우리’)에 초점을 맞춘다. - 29쪽

저자 스스로 경험한 혐오에 대한 물리적 폭력만큼 보편적인 혐오의 형태는 외면과 냉소와 침묵이다. 구별 짓기가 생존을 위한 유전적 본능과 무관하지 않다는 사실은 이 책에서도 여러 차례 언급하며 실험결과를 통해 입증된 태도를 설명한다. 그러나 그것이 맹목적 내집단에 대한 충성과 우월감으로 자리 잡는 순간 편견과 혐오가 무럭무럭 자란다. 성별, 세대, 지역, 종교, 인종 등 그 분화 과정과 미묘한 차이에 따른 심리적 거리는 분류나 증명이 불가능하다. 지극히 개별적인 데다 미묘하고 복잡한 요소가 복합적으로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차이와 다름의 다른 표현인 편견과 혐오는 어쩌면 인간의 본능에 영역에 속한다는 한계를 벗어나기 위한 몸부림이라고 설명할 수 있다. “옥시토신은 혐오 범죄 발생에 관여할지 모르는데, 특히 가해자가 그걸 생성해낼 가능성이 높을 때(가령, 어린 아이를 돌보는 부모일 때) 그리고 이질적 외집단(가령, 다른 인종)한테서 위협을 느낄 때 그렇다.”(181쪽)라는 지적이 이를 증명한다. 호르몬에 내재된 생존 본능에서 촉발된 혐오가 정당화될 수 있을까. 태어난 그대로, 본능적 자연인으로 세상을 사는 사람은 없다. 혐오의 과학은 사실 부단한 노력으로 이룰 수 있는 문명사회에 대한 희망의 메시지다. 

야만의 시대를 지나 인간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환경의 토대가 마련된 민주주의는 차별을 넘어 자유와 평등, 정의와 진리, 공정과 상식을 추구하려 애쓴다. 저마다의 옳고 그름이 분노와 증오와 차별과 폭력을 정당화할 수는 없다. 혐오가 벌어지는 실세 상황을 통해 뇌에서 벌어지는 현상뿐 아니라 개인과 집단의 혐오를 면밀하게 들여다본다. 그런 다음 ‘촉진제’에 집중한다. 무엇이 혐오 폭력을 일으키는 촉진제 역할을 하는가. 왜 일부만 그 폭력을 실행에 옮기는가. 이는 물리적 혐오와 폭력에서 더 나아가 대한민국의 댓글로 빚어지는 키보드 워리어들의 혐오문화를 성찰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나는 맞고 너는 틀릴까. 

저자가 제시하는 혐오를 멈추게 할 해결책 일곱 가지가 추상적으로 들린다. 핵심은 ‘관심’이다 의식적 노력 없이 변화는 불가능하다. 혐오는 고정관념과 편견에서 싹튼다. 관습적 사고 습관적 행동이 무의식적 혐오에 동조하는 방법이 아닌가. 생각하지 않고 사는 삶은 얼마나 편안하고 안전한가. 물이 흐르는 대로 따라갈 줄 몰라서 매슈 윌리엄스가 평생 혐오 범죄에 매달렸을까. 불편과 불안은 타인이 아니라 내 안의 무엇이 만든다는 사실을 우리는 너무 자주 잊고 산다. 

혐오를 멈추게 할 일곱단계

1. 가짜 경보를 알아차려야 한다.

2. 우리와 다른 이들에 대한 섣부른 판단에 의문을 던져야 한다.

3. 우리와 다른 사람들이 접촉하는 것을 꺼려서는 안 된다. 

4. 시간을 내서 ‘다른 사람’의 처지가 되어보아야 한다. 

5. 분열을 조장하는 사건이 우리를 노리지 못하게 해야 한다. 

6. 필터 버블을 터뜨려야 한다.

7. 우리 모두는 혐오 사건에 가장 먼저 반응을 보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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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레라 시대의 사랑 1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97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지음, 송병선 옮김 / 민음사 / 200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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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루스트의 마들렌처럼 마르케스의 소설에선 아몬드 향이 진하게 배어 있다. 

그는 플로렌티노 아리사를 통해 사랑의 유효기간이 53년 7개월 11일이라는 사실을 증명한다. “사랑(혹은 사람)이 어떻게 변하니?” 남자의 외침이 허공에 흩어지는 어느 영화의 한 장면이 공허하게 흩어진다. 심수봉의 말대로 사랑밖에 난 모른다고 고백하듯 『콜레라 시대』의 사랑은 낭만적 사랑과 연애의 결정판을 보여준다. 근대 이전 인류의 최고 발명품이 종이, 화약, 나침반이라면 근대 이후 최고의 발명품은 자유연애와 낭만적 사랑이다. 개인의 삶에 주어진 자유와 인간 평등사상은 누구든 자기 욕망과 의지에 따라 짝짓기를 시도할 수 있는 원시시대로의 회귀로 해석하는 것은 지나칠까. 상대가 누구든 내가 어떤 사람이든 우리에겐 사랑할 자유가 권리가 있다. 물론 그 사랑을 거절하고 이별할 수 있는 티켓을 손에 쥐고 있다는 사실도 잊지 않는다. 페르미나 다사의 특별함이 서사의 중심을 이룰 수 없다. 이 소설은 후베날 우르비노와 플로렌티노 아리사 그리고 페르미나 다사의 삼각 관계와 거리가 멀다. 각자가 맺은 관계양상은 전혀 다른 형태와 의미를 지니며 삶의 시기에 따라 독립적 형태로 나타난다. 만약 후베날 우르비노가 아니어도 플로렌티노 아리사와 페르미나 다사의 사랑과 이별 그리고 노년의 재회에는 큰 영향이 없었을 것이다. 그렇게 모든 사람은 자기 삶의 과정과 결과를 운명으로 받아들인다. 그것은 절반의 필연과 절반의 우연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스페인 식민지였던 콜롬비아는 남아메리카 대륙에서 가장 북쪽에 위치해 있다. 1819년 독립한 후에도 금과 은 같은 보물을 스페인으로 보내고 아프리카 노예시장으로 번성했던 선명을 기억을 항구도시 카르타헤나에 새겨져 있다. 아마도 마르케스는 카리브해의 뜨거운 태양과 조국의 역사와 문화가 짙게 드리운 공간을 배경으로 전근대 사회의 모순과 식민지 시절의 고통, 낭만적 사랑과 열정을 에로스적 욕망으로 풀어내고 싶었던 게 아닐까. 인간의 본능과 배치되는 모든 규범과 질서에 대한 저항은 근대와 현대를 가르는 분명한 기준이다. 집단과 전체주의적 삶에서 벗어난다는 건 가부장적 질서와 여성의 질곡으로부터 자유를 의미한다. 스페인 정복자들이 첫발을 내디딘 남아메리카의 관문에서 ‘늙음’을 거부하고 예순이 되기 전에 자살한 제레미아 드 생타무르의 이야기로 시작되는 소설은 아이러니하게도 칠순이 넘은 다음에야 비로소 사랑에 눈을 뜨는 플로렌티노 아리사와 페르미나 다사의 이야기로 끝을 맺는다. 소설의 첫 문장과 마지막 문장을 뒤집으면, 사랑은 “우리 목숨이 다할 때까지.”(마지막 문장)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첫 문장)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영화 『세렌디피티』에서 케이트 베켄세일이 자신의 이름과 연락처를 적어 헌책방에 판 책이 바로 이 소설이다. 존 쿠삭의 ‘지폐’와 ‘콜레라 시대의 사랑’은 운명적 사랑과 낭만적 연애로 포장된다. 우연을 가장한 음험한 욕망은 반드시 현실을 능가한다. 인간은 그런 존재다. 세기말(19세기말)과 새로운 시대(20세기)를 시대의 사랑은 콜레라만큼 치명적이고 사회적 질병으로 다뤄져야 할만큼 혼란스럽다. 전통과 문화는 단단한 보수적 이데올로기와 관습적 사고에 불과한 고정 관념이다. 선악의 판단이 불가능한 선택적 기호와 취향의 결과물이다. 우르비노의 계급과 계층, 종교적 태도가 만든 사랑과 결혼은 육체적 욕망과 부딪쳐 혼란스런 결과를 초래한다. 겉으로 페르미나 다사와 쇼윈도 부부로 원만하고 평온한 삶을 유지하지만 페르미나의 개인적 태도와 아버지의 욕망이 투영된 결혼은 결코 ‘행복’과 거리가 멀다. 플로렌티노 아리사에게 622라는 숫자에 아로새겨진 여인들은 어떤 의미일까. 페르미나 다사에 대한 사랑은 광기와 집착을 넘어 진정한 사랑이라고 명명하고픈 낭만주의자들의 바람은 이루어진 걸까. 

1927년생 마르케스가 58세가 되던 1985년에 출간된 이 소설은 알베르 카뮈의 『페스트』와 전혀 다른 성격의 소설이다. 팬데믹을 진지하게 다루며 인간의 실존적 의미를 묻는 카뮈와 달리 마르케스는 수인성 전염병인 콜레라 6차 대유행의 끝물을 경험한 세대에게 과연 사랑의 본질은 무엇이며 에로티즘은 사랑의 어떤 표정에 해당하는지 묻고 있는 듯하다. 100년 쯤 지난 이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코로나 시대의 사랑’을 묻는다면 무어라 답할 수 있을까. 환멸, 연민, 추억, 후회로 점철된 소설 속 주인공들의 사랑과 체스, 사진관, 앵무새, 망고나무, 가지, 테레빈유, 돈 산초 호텔의 거울에 투사된 마르케스의 열망은 어떻게 읽어내야 할까. 낭만적 사랑의 개막 혹은 종말은 플로렌티노 아리사의 변비처럼 꽉 막힌 채 해결의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소설의 알레고리가 마르케스가 경험한 시대에 대한 향수이든 현대 사회의 사랑에 대한 비판적 분석이든 상관없다. 뜨거운 태양과 마그달레나 강의 축축하고 끈적한 분위기가 시원한 배설이 불가능한 변비의 고통을 생생하게 전한다. 

“난 절대로 노인이 되지 않을 거야.”라는 제레미아 드 생타무르의 절규와 “당신을 사랑해요. 당신은 나를 창녀로 만들어주었거든요.”라는 나사렛 과부의 고백보다 “공적인 생활의 과제는 두려움을 지배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고, 부부 생활의 과제는 지겨움을 극복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라는 페르미나 다사의 깨달음과 “훌륭한 결혼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행복이 아니라 안정이오.”라는 플로렌티노 아리사의 조언보다 나이브하게 들린다. 우리는 각자 자기 삶의 주인공이다. 무엇이 어떠하든 자기 몫의 사랑, 욕망, 환멸, 추억, 후회, 연민, 환희, 절망을 남긴다. 

에바 일루즈는 『사랑은 왜 끝나나』에서 “19세기 구애의 대부분은 처음부터 사랑을 선포하고 이루어진 것이지, 남녀가 서로 사귀며 키운 감정이 아니었다. 구애를 시작하면서 사랑을 선포하는 것은 결과적으로 감정의 불확실성을 덜어주었다. 아니, 더 나아가 사랑한다는 고백을 처음부터 듣고 시작하는 감정적 확실성은 여성이 남성을 만날 조건”이었으며, “20세기의 흐름과 더불어 우아함과 매력과 물질적 풍요와 애정 생활을 가꾸는 책임은 전적으로 개인의 몫이 되었다. 이런 프로젝트를 위한 중요한 문화적 자원은 소비문화가 제공한다. 그 제공 방식은 다양하다.”고 분석했다. 우르비노와 플로렌티노의 사랑은 19세기식 연애 방식이 종말을 고하지 않은 상태에서 20세기식 사랑법을 시도했기 때문에 페르미나 다사는 극도의 혼란을 느꼈을 법하다. 그리하여, “전근대의 구애는 감정으로 시작해 섹스로 끝났다. 그리고 전근대의 섹스는 죄책감과 불안감으로 불러일으킬 정도로 조심스러웠다. 그러나 현재의 관계는 (쾌락적) 섹스로 시작해 어디서부터 어떻게 감정을 가꿔야 할지 몰라 전전긍긍하며 관계를 두렵게만 여기는 불확실성과 씨름한다. 몸은 감정을 표현하는 무대로 기능해왔다(“좋은 관계는 좋은 섹스로 표현된다”는 상투적 표현을 보라). 그러나 감정은 성적 상호작용과는 관계없는 것이 되었다.”라는 말에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낭만적 사랑과 에로티즘 사이의 혼란과 갈등은 콜레라 시대를 지나서는 좀체 찾아보기 힘든 선택의 영역이 되어버린 게 아닐까. 지금 이 시대를 사는 우리의 관점으로 플로렌티노 아리사, 후베날 우르비노, 페르미나 다사의 사랑법을 평가할 수는 없다. 그들은 전근대적 전통과 종교적 신념, 자본주의가 형성한 신흥 부르주와 계급 그리고 낭만주의에 대한 향수를 자극하는 ‘영원한 사랑’에 대한 꿈을 간직하고 있다. 

모임에 참석한 사람들 또한 이 소설을 읽으면서 ‘사랑’의 의미에 대해 깊이 고민했다고 토로한다. 기혼과 미혼이 바라보는 ‘결혼’이 달랐고 후베날 우르비노와 페르미나 다사의 ‘거의 사랑’에 대한 의견도 제각각이었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이유, 결혼을 결심한 순간, 이별의 아픔과 그리움이 교차했을 터. 사람이 산다는 건 끊임없이 누군가를 만나고 헤어지는 과정의 반복에 불과한 건 아닐까. 플로렌티노 아리사의 사랑을 광기 혹은 집착이라고 부르든 영원하고 순수한 사랑의 표본이라 생각하든 우리는 단 한 번 뿐인 인생에서 각자의 사랑에 대해 깊이 고민할 권리와 의무가 있다. 어떤 사랑도 틀린 게 아니라 다를 뿐이다. 남의 사랑을 저울질하고 평가하고 판단하지만 않는다면, 조금 더 다양한 방식의 사랑에 대해 관대할 수 있다면 나사렛의 과부처럼, 사라 노리에가처럼, 아메리카 비쿠냐처럼 각자의 방식을 인정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플로렌티노 아리사는 ‘한 여자가 없었던 까닭에, 그는 모든 여자들과 동시에 함께 있기를 원했다.’ 하지만 페르미나 다사가 아닌 여자들 입장에서는 아리사를 사랑할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모든 작가와 독자에게 아직도 사랑에 대해 할 이야기가 남아 있어 다행이다. 지극히 주관적이고 개인적인 사랑에 대해 아직도 할 이야기가 남아 있는 이유가 사랑은 목적이 아니라 과정이며 결과가 아니라 원인이기 때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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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세대는 없다 - 불평등 시대의 세대와 정치 이야기
신진욱 지음 / 개마고원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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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우리 사회의 불평등 현실을 ‘기득권 기성세대’와 ‘희생자 청년세대’ 간의 대립으로 해석하는 세대 불평등 담론과 비판적으로 대화하면서 각 세대의 계층격차 현실과 더불어 한국사회 불평등 구조의 세대 구성을 조명했다. - 10쪽

세대차generation gab는 분명히 존재하지만 그것은 개인과 집단에 따라 전혀 다른 양상으로 나타난다. 성급한 일반화는 문제의 근본적인 원인을 뭉개고 정치적 수사로 활용되어 특정 집단, 정당에 대한 비난으로 활용된다. ‘청년세대’와 ‘기성세대’의 갈등을 부추기는 언론과 선거에 활용하는 정치인의 발언을 객관적으로 들여다 볼 수는 없을까. 사회학자 신진욱은 『그런 세대는 없다』고 단언한다. 지시어 ‘그런’은 대중문화, 교육환경, 시대 배경 등 통상적으로 느끼는 세대가 아니라 ‘청년 담론’이 본격 적으로 시작된 세대 간 갈등 양상을 의미한다. 신진욱은 1990년부터 2020년까지 30년간 국내 모든 중앙지와 경제지에서 ‘청년’이라는 단어가 등장한 모든 텍스트의 빈도 추이를 주간과 일간 단위로 분석했다. 2011년 8월, 2015년 8~9월, 2019년 9~10월이 지난 30년 동안 가장 의미있는 청년담론의 폭발기였음을 확인한 신진욱의 분석은 짐작되지 않는가.

불평등, 공정, 기득권, 일자리, 청년실업 등 우리에게 익숙한 세대 간 갈등 요인이 사실은 세대 내 담론에 대한 비판적 기능이 상실되었음을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586으로 대표되는 50대를 조금 자세히 들여다면, “80년대에는 고교진학률부터가 지금보다 훨씬 낮았기 때문에, 전체 학령인구 중 대학 취학자의 비율은 대학진학률에 한참 못 미쳐서, 공식 교육통계에 따르면 1980년대에 학력인구 중에서 고등교육기관 취학률 평균은 20%였고, 4년제 대학 취학률은 13% 정도 된다.” 10명 중 8~9명은 대졸이 아니다. 지금보다 임금 격차가 극심했고 그들은 여전히 비정규직과 자영업자로 살아간다. 4년제 대학을 졸업한 소수의 50대가 청년세대의 일자리를 빼앗고 부동산소득을 독점했다는 착각은 2030세대의 정규직, 소득, 자산 규모에 대한 분석으로 자명하게 드러난다. 

결국 세대 간 갈등은 세대 내 불평등의 착시현상에 불과한 게 아닐까. 공정의 정의 그리고 불평등의 문제에 ‘세대’를 개입시킨 이유와 의도는 무엇일까. 객관적 지표가 가리키는 현실은 자본주의가 배태한 본질적 모순이며 해방 이후 근대화 산업화 과정에서 해결되지 않은 문제의 악순환에 불과한 게 아닐까. 87체제 이후 우리가 놓친 문제, 해결하지 못한 과제는 여전히 계급 배반 투표, 정치적 프로파간다 그리고 거시적인 사회구성체에 대한 의제 부족이다. 시대적 화두가 급변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근대사를 돌아보면 대개 사회를 보는 관점과 비논리적 경제 발전의 방향에 대한 이견이 모든 문제를 촉발한다. 그걸 확대 재생산하며 정치와 언론, 기업의 논리가 춤을 추며 혹세무민한 결과는 양극화의 심화, 비정규직 확대, 고용없는 성장, 자영업의 증가로 이어져 청년실업과 노인빈곤으로 나타난다. 

당대의 사회현상을 한두 가지 문제로 압축하거나 몇 가지 정책으로 해결하겠다는 거짓말에 속는 국민들의 고통은 참담하지만 성찰없는 시민은 유사한 실수를 반복할 뿐이다. 신진욱은 기성세대가 곧 기득권이라는 착각이 한국사회의 불평등 구조를 가린다고 주장한다. 누가 왜 ‘청년’을 말하는지, 정치 담론에 세대 담론이 희석되는 순간 우리의 현실이 어떻게 달라지는지 매일매일 목도하고 있다. 정치는 현실이며 내 삶의 뿌리다. 정치에 대한 외면과 무관심은 곧 자기 삶에 대한 외면이다. 사회학자의 눈으로 바라본 세대 담론이 지워버린 현실과 눈감아버린 삶은 생각보다 처참하다. 

성찰 없는 진보, 대안 없는 보수의 정치 게임에 자기 등이 터져도 감정적 대응과 인터넷 댓글놀이에 몰입하는 우리의 미래는 어떨까. 2030과 4050 같은 세대 분리가 가져오는 문제를 들여다보는 신진욱은 “흐르지 않는 물길에 고인물은 오래 되어서 고인물이 아니라 처음부터 고인물이다.”라고 일갈한다. 10대에 이미 고인물이 될 수도 있고 70대에도 흐르는 물이 있다. 숱한 세대론 사이에서 2022년의 현실을 냉정하게 분석한 신진욱의 노고와 관점을 높이 평가할 수밖에 없다. 뜨거운 가슴과 차가운 머리를 정치적 이념, 경제적 이해관계에 따라 고무줄처럼 늘어나는 이기적 잣대로 활용할 수는 없지 않은가. 

독일의 작가 페터 바이스는 그의 장편소설 『저항의 미학』에서 지배에 대한 저항은 연대를 통해 가능해지며, 연대는 타인에 대한 상상력을 토대로 한다고 썼다. 노년의 안도, 중년의 안도, 청년 안도가 서로의 삶과 역사를 상상할 수 있을 때 비로소 불평등으로 갈라진 시대를 함께 넘어설 세대 간 연대의 토대가 형성될 수 있을 것이다. - 35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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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디언의 굴레 - 지역과 계급이라는 이중차별, 누구나 알지만 아무도 모르는 호남의 이야기
조귀동 지음 / 생각의힘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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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메시지는 사실 간명하다. 호남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호남 사람들이 스스로를 직시하고, 이를 바탕으로 자립해야 한다는 것이다. - 27쪽

그러나, 책의 메시지는 간단하지 않다. 조귀동의 전작 『세습 중산층 사회』에서 보여준 문제의식은 계층 간 불평등을 넘어 지역으로 옮겨간다. 대한민국의 가히 ‘인종차별’이라 할만한 전라도에 대한 편견과 해묵은 차별은 어디에서 기인했던 것을까. 단순히 정치인들의 투표전략으로만 바라볼 수 없는 이야기를 꺼낼 수 있는 건 저자가 광주 출신이기 때문일 것이다. 일베용어인 ‘전라디언’이라는 다소 자극적인 표현을 제목으로 내세운 건 출판사의 전략인지, 핵심을 비껴가지 않겠다는 저자의 의도인지 알 수 없으나 이 책은 전라도에 대한 심층적인 사회학적 보고서다. 

우리는 흔히 특정 지역, 특정 세대에 대한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에 무감각하다. 계층과 계급 문제를 세대 갈등으로 치환하며 불평등과 빈부격차의 문제를 비껴가듯 특정 지역과 세대, 성별 문제를 비틀어 범주화하는 언론과 정치권의 언어를 각별히 유념해야 한다. 저자는 거시적으로 전라디언의 탄생 배경을 살핀다. 핵심은 물론 정치다. 사회, 역사적 배경을 찬찬히 살피면서 전라도가 어떻게 소외되었고 어떤 방식으로 이용되었는지 분석한다. 대다수 국민이 아니라 일부 국민의 편견과 오해로 치부하기엔 전라도 출신이 겪은 불공정과 불이익의 객관적 수치가 너무 분명하다. 

조선일보 기자의 전작, 세습 중산층 사회에 대한 관심도 놀랍지만 보수의 반대편인 전라도에 대한 분석과 관심은 단순히 광주 출신이기 때문이라는 이유만으로 설명할 수 없다. 그의 분석대로 지역을 탈출해 중산층에 편입했거나 계층 사다리를 뛰어 넘은 전라디언의 정치, 사회적 이념 지형이 바뀌고 있기 때문이다. 반도의 흑인 또는 아일랜드 인이라는 자극적인 1장부터 매우 현실적이고 직설적인 어법으로 ‘지금-여기’ 우리가 대한민국을 톺아본다. 설국열차의 꼬리칸이 아니라 산업화 열차의 꼬리칸에 올라타기도 힘들었던 지역의 경제 상황, 민주당과 결부되기까지의 정치적 배경을 들여다보는 1~3장이 외부에 해당한다면 4장~6장까지는 부패와 무능의 도시가 되어버린 광주와 지방 토호세력의 문제를 분석하고 이중차별에서 벗어나기 위한 제언에 해당한다.

호남의 미래를 어떻게 만들것인지 고민하는 에필로그는 추상적 담론으로 읽힌다. 구체적인 현실 분석은 디테일하지만 거시적인 관점에서 현행 선거구제 개편, 지방 분권에 대한 논의, 균형 발전에 대한 실질적인 대안은 없다. 정책 제안을 위한 목적이 아니라 스스로 밝혔듯 자성의 목소리에 방점을 두고 있으나, 그건 전라도 출신 저자이기 때문에 가능한 태도일 터. 근본적인 문제는 저자의 지적대로 이중 차별과 지역내 계층과 계급에 따른 이해관계의 타파에 있을 것이다. 이는 전라도를 넘어 어느 지역에나 존재하는 문제라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특정 지역에 대한 자극적 문제의식을 외면하지 말고 논의의 출발로 삼았으면 좋겠다. 정면으로 응시하며 긴 안목으로 바라봐야 그나마 조금씩 해결책과 의미있는 노력이 이어지지 않을까. 대통령 선거에서 ‘국민의힘’을 지지한 전라디언, 복합쇼핑몰로 벌어진 세대와 계층간 견해차가 바로 문제의식의 바로미터가 될 것이다. 

불평등과 차별을 극복한 이상향을 실현한 시대도 국가도 없다. 다만, 그것이 왜 문제인지 고민하는 사람과 편견과 차별을 당연하게 여기거나 이용하는 사람이 있을 뿐이다. 독자가 어느 쪽이든 분명한 건, 이런 접근 방식과 태도가 계속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계급 이익에 충실한 투표, 이해관계에 따른 이념 지도가 우리 사회의 불공정과 불평등을 심화시킬 거라는 사실은 분명하다. 왜, 우리는 추상적 정치 선동과 언론에 대한 비판 의식이 부족한 걸까. 니콜라스 카의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은 바람이 불면 부는 대로 흘러가는 구름처럼 생각할 능력이 부족한 사람들이 아니라, 자기 생각이 옳다는 확신이 강한 사람들이다. 무지보다 무서운 편견과 확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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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랭 머랭 - 우리시대 언어 이야기
최혜원 지음 / 의미와재미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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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언어의 한계가 세계의 한계다.’라는 비트겐슈타인의 문장을 읽었을 때 충격이 생각난다. 인간은 언어를 통해 외부 세계를 인식하고 규정한다. 내가 너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비로소 내게 꽃이 되듯, 사물과 타자가 의미를 가지는 건 호명을 통해 존재를 규정할 때다. 그래서 동시대인, 같은 세상을 살아도 각자의 세계는 차이가 크다. 생각하고 느끼는 범주의 크기가 세계의 크기다. 직업, 재산, 성별, 학벌, 종교, 인종, 나이와 무관하게 인간은 각자 다른 언어를 통해 저마다의 크기에 맞는 세계에 산다. 

그 세계가 타인의 세계와 다르다는 사실조차 인식하지 못하면 낭패다. 삶의 목적과 가치, 방법과 태도의 차이는 각자 구축한 세계 안에서 벌어지는 각개전투가 아닐까. 언어학자 최혜원의 『휴랭 머랭』은 각자 구축한 세계가 아니라 우리 사회가 공유하는 세계를 점검한다. 공동체의 언어는 시대를 조망하고 욕망을 가늠하며 그 사회가 나아가는 방향을 짐작할 수 있는 바로미터다. 

제목 ‘휴랭human language’은 인간의 언어 줄임말이다. ‘머랭machine language’은 기계의 언어를 줄였으나 우리말 ‘뭐라는 거야?’라는 의미의 ‘뭐래?(머랭?)’이라는 의미도 있고, 억지스럽지만 ‘머랭meringue’의 동음이철어로 읽을 수도 있다. 책 내용은 제목처럼 약간의 아재(?) 개그―아재의 정체성이 있는가. 언제부터, 몇 살부터, 남성만의 전유물로서 아재 집단의 기준이 명확하지 않으나 아재의 대척점에 있는 아지매 개그는 왜 불가능한가. 아니, 처녀총각, 애기어른 개그는 가능하지 않은가. 유감이 많지만 일단 논점일탈이니 접어두자―를 섞은 유머 코드가 곳곳에 배치되어 있다.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 중 하나는 비속어, 은어, 유행어가 난무하기 때문이다. 

대체로 책을 읽기 전에 저자 혹은 작가에 대한 선입견과 편견은 내용의 전반을 지배하고 때때로 후광효과를 발휘한다. 유명 저자의 경우 특유의 아우라로 독자를 억압하고, 짓눌린 독자는 책의 내용이 아니라 독서 행위 자체에 감읍하기 일쑤다. 특정 직업, 학력, 성별, 인종, 종교, 나이도 같은 효과를 발휘할 수 있으니 각별히 유념해야 한다. 

아무튼 이 책은 ‘언어학자’라는 표피를 벗겨내면 언어학 일반 이론에 대한 대중적 재미와 우리시대 언어에 대한 반성과 성찰이라는 의미를 함유한다. ‘의미와재미’라는 출판사 이름은 그런 의미에서 충분히 의미심장하다. 언어는 시대정신을 반영하고 트렌드를 포착한다. 언어는 말과 글을 포괄하지만 말과 글은 전혀 다른 층위다. 언어학자인 저자는 그 차이를 설명하느라 애쓴다. 아무리 텍스트의 종말을 알리는 종소리가 세상에 울려퍼지고 있으나 이 책을 읽는 독자만큼이라도 말과 글의 힘을, 언어가 인간에게 주는 재미와 의미를 다시 한번 새겨봤으면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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