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체성 밀란 쿤데라 전집 9
밀란 쿤데라 지음, 이재룡 옮김 / 민음사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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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관심이 우리 시대의 유일한 집단적 열정인 셈이지. - 91쪽

노르망디 해변가 작은 도시에도 사람이 살고 있다. 구글어스의 최초 아이디어는 젊은 예술가와 해커에서 출발했다. 세상을 바라보는 새로운 방식, 온 세상을 날아다니는 상상력은 독일의 아트+ 컴에서 실현됐다. 상상이 현실이 되지만, 천문학적 액수가 걸린 구글과의 소송에서 진다. 사실과 진실 사이, 법과 현실 사이에서 좌절하는 건 인간의 숙명인지 모른다. 노르망디 해변의 작은 도시로 날아가 거리를 살펴보고 주변을 둘러볼 수 있는 현실에서 소설은 여전히 우리에게 보이지 않는 세계로 안내한다.

어느 날 남자들이 더 이상 그녀를 돌아보지 않는다는 그녀의 말 한마디 때문이었다. 샹탈은 시간의 흐름을 거스를 수 없다. 아이를 잃은 엄마가 아닌 여자로서의 삶도 끝나간다는 슬픔의 그림자. 장마르크의 가상한 노력은 역효과를 불러오고 이별의 빌미를 제공한다. 사랑을 시작할 땐 이유가 없지만 사랑이 끝날 때는 헤아릴 수 없는 이유가 생긴다.

며칠 동안 잠을 자지 못하고 불면증에 시달리면 시야가 좁아지고 생각이 멈춘다. 꿈과 현실 사이를 헤매고 두세 시간 이상을 자기도 어렵다. C. D. B가 시라노 드 베르주라크의 이니셜이 아니면 어떤가. 어차피 멍한 눈길로 바라보는 푸른 하늘 너머에 존재하지도 않는 꿈을 좇는 게 인간의 숙명이다. 상상의 질서를 만들어 경계를 만드는 위대한 면도 있지만 인간은 그 벽을 넘다 지치기 마련이다. 시지프스의 신화처럼 이카루스의 꿈처럼 뫼비우스의 띠처럼 무한반복의 굴레를 벗어날 수 없기 때문에 소설을 읽는 게 아닐까.

밀란 쿤데라는 샹탈의 입을 통해 “당신이 내가 상상하는 사람이 아닌 다른 어떤 사람이라는 생각을 했어. 당신의 정체성에 대해 내가 착각을 했다는 생각.”이라고 선언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타인의 정체성은 무엇인지 묻는다. 일관성과 동일성을 유지한 어떤 본질적 특성이라는 정의는 그 자체로 모순이다. 인간은 일관성과 동일성을 유지할 수 없는 유기체다. 변하지 않는 존재의 본질이라니.

인간에게 그런 게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정체성의 혼란은 불가피하다. 확고한 믿음과 뚜렷한 신념이 무너지는 경험을 한 사람은 안다. 고집스런 자기 확신만큼 타인에 대한 신뢰는 불안하게 흔들린다. 발 딛고 선 현실은 생각보다 복잡하고 어림짐작하기 어렵다. 지구 반대편에 사는 사람들, 우리가 잠든 사이 깨어 있는 불빛, 내가 굳게 믿었던 연인과 친구에 대해 함부로 말하지 않는 편이 낫다. 밀란 쿤데라는 ‘참을 수 없을 존재의 가벼움’을 느낄 때마다 ‘농담’을 던지는 대신 자기 ‘정체성’이 아닌 타자에 대한 오해를 점검하라고 조언하는 듯하다. 나는 누구인가, 만큼 중요한 ‘누구냐 넌?’

“밤새도록 스탠드를 켜 놓을 거야. 매일 밤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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