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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과 농담 ㅣ 말들의 흐름 7
편혜영 외 지음 / 시간의흐름 / 2021년 4월
평점 :
“당구선수 김가영과 평론가 김나영은 자매일까?” 이런 말 같잖은 농담을 던져도 술자리라면 받아줄 마음의 여유가 생긴다. 물론 농담은 맥락이니 뜬금포를 쏘아 올려 시베리아 벌판이 되는 부작용도 감수해야 한다. 허용적 분위기에서 이완된 사람들은 주변에 실존 인물 다영이와 라영이를 호출하고 대한이와 민국이 형제를 등장시킨다. 믿기 어려운 이름에 얽힌 에피소드가 이어지기도 한다. 다음날 기억나지 않을 정도의 가벼운 농담 혹은 웃음들. 술과 농담은 아마 뗄 수 없는 친구가 아닐까 싶다. 잠시 슬픔과 고통을 웃음으로 위로하는게 민족의 특성이라는 말은 믿지 않지만 유쾌한 만남을 위해 농담은 생각보다 긴장을 이완시키고 관계를 진전시키기도 한다. 물론, 귀갓길의 허무와 숙취는 각자의 몫이다.
해 질 녘, 개와 늑대의 시간은 술과 농담의 시간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해서 사람들이 하루해가 저물 때만 술을 마시는 건 아니다. 이 책에도 숱한 낮술과 새벽의 혼술이 등장한다. 글을 쓰는 사람들의 특성을 감안해야겠지만 술과 농담 이야기에 옷깃을 여밀 필요는 없다. 에세이는 대체로 글을 쓴 사람에 대한 호기심과 글 자체의 여운이 관건이다. 편혜영과 조해진과 이장욱의 소설을 읽었으니 그들의 일상을 들여다보는 재미가 있고, 건조한 문체로 뛰어난 농담을 선보인 한유주의 소설을 읽어싶어졌다. ‘연애와 술’, ‘농담자 그림자’ 대신 말들의 흐름 시리즈 중 ‘술과 농담’을 집어 든 건 순전히 제목 때문이다. 가끔은 의미보다 재미를 찾는 독서가 위로를 건넨다. 술과 농담을 주제로 편혜영, 조해진, 김나영, 한유주, 이주란, 이장욱의 글을 모은 옴니버스 영화같은 에세이다. 유일한 평론가의 글이 재미없고 유일한 남자 소설가의 글이 너무 진지한 점을 제외하면 가볍게 읽을 수 있는 분량의 재밌는 에세이다. 술 좋아하는 분들이라면 『술취한 원숭이』, 『양주 이야기』, 『알코올과 작가들』, 『어느 애주가의 고백』도 권할 만하다.
위대한 조상이 있느냐는 한유주의 질문에 아버지가 “한니발”이라 답한다. 로마 한씨냐고 묻자 카르타고 한씨 아니겠냐고 답하는 부녀의 모습을 상상하며 부러웠다. 때로는 관계를 망치지만 대개 농담은 경계를 허물기도 한다. 개그 코드가 맞는 연인이나 부부는 성격 차를 극복할 수 있지 않을까. 웃음 코드가 맞는 부모 자식 사이에 갈등은 극단으로 치닫지 않을 듯싶다. 발베니 21년산을 단 한 번 단 한 잔 마신 적이 있는데 그대로 죽고 싶었다는 한유주는 모두 농담이고 거짓말이라고 눙친다. 한유주와 발베니 한 잔을 마시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동동주, 과일주, 인삼주도 아니고 한유주라니 이름부터 술을 부르지 않는가. 모두 농담이고 거짓말이다.
술 속에 진리가 있다In vino veritas는 이장욱의 마무리는 사람들에게 술이 주는 의미와 숱한 에피소드, 알콜 의존과 중독, 질병과 죽음에 이르기까지 삶의 희노애락을 들여다보게 한다. 술 한 잔 마시지 않는 사람과 모든 음식이 안주인 사람 모두에게 술과 농담은 생각보다 가깝고 어렵다. 술이 농담을 부르기도 하고 농담이 술로 이어지기도 한다. 술이 없으면 농담을 못하는 것도 아니고, 농담 없는 술자리도 많다. 둘 사이가 어찌됐든 각자의 삶에 술과 농담은 무엇인지 낄낄거리며 생각해 볼 수 있는 시간이다. 편혜영의 말대로 “술이 불어넣은 준 용기와 허세, 객기와 수줍음, 그대 발생한 우정”을 기억할 수 있다면 충분하다. 말 없는 술잔, 농담 없는 술자리에 오가는 훨씬 더 깊은 대화도 있다. 떡은 사람이 될 수 없어도 사람은 떡이 될 수 있다는 광고처럼 술에게 먹히지만 않는다면, 아니 때로는 떡이 된 순간이 찬란하게 빛나던 시절이었고, 그조차 망설여지는 무심함과 못난 마음이 더 커지는 시간도 흘러갈 뿐이다.
어떤 무심함은 세월이 흘러서, 라는 말로는 변명이 되지 않는다. 상대의 서운함이나 아픔에 눈멀게 하는, 늘 너무 비대한 못난 마음 때문에 결국 멀어지기도 하는 것이다. - 조해진, 4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