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질녘에 아픈 사람 민음의 시 120
신현림 지음 / 민음사 / 200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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겉표지를 열자, “21C 말에는 즐거운 블루스를 출 수 있을까? - 96年 가을에.”라는 파란색 볼펜의 글씨가 한 줄 선명하다. 신현림의 오래된 시집을 꺼내본다. 비닐 코팅된 표지는 괜찮지만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던 책 윗부분은 벌써 누렇게 변색되기 시작했다. 잊었던 그녀의 시편들이 살아 움직이는 옛날 시집을 뒤적이며 <세기말 블루스>를 통독한다. 첫시집 <지루한 세상에 불타는 구두를 던져라>고 외치던 그녀는 2년만에 <세기말 블루스>를 추자고 덤볐었다. 미술을 전공하려다 그녀의 표현대로 ‘4수끝에 편안하게(?)’ 국문과에 입학한 그녀는 여전사의 모습으로 나에게 다가왔었다. 나도 20대였고, ‘지루한 세상에 불타는 구두를 던’지고 싶은 정도가 아니라 세상을 끝장내고 싶었던 시절이었고, 세기말과 상관없이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 지독히 몸을 떨어야했던 시절이었다.

     자화상

  울음 끝에서 슬픔은 무너지고 길이 보인다

  울음은 사람이 만드는 아주 작은 창문인 것

  창문 밖에서
  한 여자가 삶의 극락을 꿈꾸며
  잊을 수 없는 저녁 바다를 닦는다 - <세기말 블루스, 1996>중에서

마지막 페이지를 끝으로 10년 가까이 시를 버렸던 그녀가 돌아왔다. 그녀는 짐짓 나이를 먹지 않은 듯 예전의 나를 기억해 달라는 듯,

  가난과 설움을 넘어
  흐느껴라, 노래하라, 타올라라
  허기진 생활의 멜로디여
  아슬아슬한 나날의 쌀자루여
  낡은 육신의 그물을 던지는 나와 너여 - ‘흐느껴라, 노래하라, 타올라라’ 중에서

  라고 <해질녘에 아픈 사람>을 시작한다. 그러나 “무섭게 흐르는 시간은 흐르지 않는 시간/ 달리는 바다는 달리지 않는 바다/ 시간이란 아예 없는 겁니다/ 최대의 재산인 꿈이 있을 뿐이죠”라는 신파가 시작된다. “슬퍼하지 마세요. 세상은 슬퍼하는 사람들로 가득하니까요”라거나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고 느낄 때/ 비로소 아무것도 아닌 것에서/ 무엇이든 다시 시작하리라”고 말하는 대목들을 읽다가 울컥 짜증이 밀려온다. 시를 읽는 행위는 정교한 언어에 대한 최고의 상찬이라고 믿는다. 시간이 남아돌거나 사춘기 소녀의 취향으로 겉멋을 내기 위한 현학취가 아니라면 누가 이 시대에 시를 읽는가. 신현림은 지독하게 고생을 했는지는 몰라도, 시에 대해 고민은 하지 않은 흔적이 역력하다. 긴 시간의 공백이 주는 안타까움이 느껴진다. 어차피 시가 개인의 내밀한 고백의 형식이라는 변명은 할 수가 없다. 그것이 보편성을 담보하지 못했을 때 감당해야할 무게는 만만치가 않다. 싱글 맘 시리즈의 시편들은 점입가경이다.

  “그는 밥 속에 헝그리 정신을 비벼 넣고 싱글 맘으로 희망의 폭동을 일으키고 있다. 여성의 슬픈 등에 꽃을 피운 이 시집을 우울한 육체 위에 한 땀 한 땀 새긴 영혼의 자서전”이라고 평한 천양희 시인의 생각에 절대 동의할 수 없다. 헝그리 정신을 비벼 넣으면 희망의 폭풍이 되는가? 배고픈 싱글 맘은 저절로 눈물과 페이소스가 뒤섞인 비극의 주인공이 되고 페미니스트가 되는가? 비극과 비장이 뒤섞여 춤을 추고 시의 형식을 빌어 신세 한탄에 가까운 일기가 되어 버렸다. 그녀의 시에 대한 관심과 애정만큼이나 매정하게 끝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퍼렇게 날선 감각과 세상에 대한 삐딱한 시선, 대담하고 솔직한 화법이 주는 신선함이 사라진 자리에 무엇이 남았나 다시 찬찬히 들여보지만 별로 건질게 없다. 실망이다.

  인간의 가장 응축된 언어 형식으로서 시가 가지는 미덕은 읽는 사람마다 미감이 다르겠지만 일단 애정을 가지고 시를 대하는 나같은 독자가 가끔씩 지독한 혐오를 내뱉는다는 것은 염려스러운 일이다. 10년전에 <지루한 세상에 불타는 구두를 던>지고 끝냈어야 했다. <세기말 블루스>가 10만부가 넘게 팔렸었다. 부담이 컸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시는 이제 그만 썼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지극히 내 개인적인 생각일 뿐이다. 또다시 그녀의 시집을 사는 일은 없겠다. 치열한 세상살이와 민감하고 도전적인 의식들로 사진을 찍고 에세이를 써내는 것이 훨씬 더 큰 울림과 감동이 될 것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20050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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