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눈을 위한 송가 문학과지성 시인선 406
이이체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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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마약이다. 계속 살면 피폐해진다. 사랑은 이별한다고 잊거나 잊히는 것이 아니다. 사랑하지 않게 되는 것이 아니다. 그저 덮어두고 떠나는 것이다. 나는 그 안에 중독되어 독신의 처방을 얻었다. 누군가 우는 것을 보면 울게 된다. 세상에는 더 이상 반전(反轉)이 없다. 아무도 기다리지 않는 동안 모든 걸 그리워하게 되었다. 서로 죽이지 않고 어떻게 사랑할 수 있었을까, 반려의 몸이여. 뒤돌아서면 등지고 온 무덤들이 많았다. 진짜 생각이란 없다. 생각을 떠나면 누구나 사랑할 수 있다. 나는 그곳을 떠나지 못한다. 잔류하는 이형(異形)의 삶이어도 삶이기에 죽지는 않는다. 이 색을 간직하겠다. 서로를 닮은 황홀경들이 착종하는, 인간의 미로. 그 주저흔의 골목길에서 우리는 재회하여 서로의 피를 확인할 수 있을까. 다시 한 번 헤어질 수 있을까. 어떤 참담은 아직도 종종 나를 죽인다. 아무도 나를 갖지 못해서 나는 나를 부둥켜안았다. 이번 삶을 유폐시켜서 모두 유감이다. 기필코 돌아올 것이다. 반드시 돌아오겠다. 아니다. 멀리 떠나서 돌아오지 말아라, 돌아오지 말아라.

 

여전히 시집이 팔리는 나라에서 산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문지의 시집은 뒤표지에 시인의 목소리가 담겨 있다. 시집을 다 읽고 나서 해설까지 훑은 후에 마지막으로 시인의 육성을 듣는 것 같아 표지 뒷면을 읽는 눈길은 탐욕스럽다. 질리지 않는 디자인과 판형을 유지하며 전통을 이어가는 문지의 시집을 쓰다듬다가 문득 88년생 시인의 시집이라는 사실 때문에 세월을 절감한다. 이 시인이 태어날 무렵 나는 처음 시에 눈을 뜨기 시작했었으니까. 그렇게 시간이 가고 있다. 모든 것이 지나가고 있다. 이미 당도해버린 줄도 모르고 애타리게 기다리던 봄의 뒷모습만 하염없이 바라보는 것처럼 아쉬움만 남긴 채.

 

이이체라는 이체로운 이름의 시인은 올해 스물다섯이다. 벌써 그럴 나이는 아니지만 시집을 읽는 내내 이십대를 더듬었다. 나이가 사고를 가두지는 않지만 살아보지 않은 시간에 대해 말할 수는 없는 법이다. 죽은 눈을 위한 송가는 삶에 대한 불확실성과 규정 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한 냉소적인 시선으로 가득하다. 그 시니컬한 눈빛과 사물에 대한 차가운 시선이 아름답다. 그것은 젊음과 자신감에 대한 반증이므로.

 

불은 무엇을 태우기 위해 타오르는 것이 아니라 타오르기에 무엇을 태우지 타올라서 흘러버리는 물이었지”(‘배신놀이- 김승일에게중에서)라고 말하는 것은 본질과 현상에 대한 이분법적 사고에 대한 도전이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 아니라 우리는 늘상 무언가 목적을 향해 달려간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삶이 어디 그러한가. 무엇을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니라 삶, 그 자체가 무언가를 만들어가는 것은 아닌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만나는 인연 혹은 연인을 시인은 우리는 서로의 몽타주다 나는 세계를 지우는 일을 했고 너는 세계를 구성하는 구멍에 빠졌던 가난”(‘연인중에서)이라고 말한다. 이제 겨우 걸음마를 배운 것 같은데, 인간이 무엇인지 어렴풋하게 보일 것 같은데 뒤돌아보면 시간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죽는 것들을 표정 없이 떠나보내는 법을 터득하는 중이다. 사라지는 것과 죽는 것을 분별하기로 한다. 나는 모래 알갱이들을 하나하나 헤아릴 만큼 지루해져간다. 바다는 소금의 타향. 결말의 출신에 대해 깨닫고는 운다. 나는 나의 삶보다 오래된 내가 밉다. - ‘날짜변경선중에서

 

그래서 시인도 죽는 것 혹은 사라지는 것들에 대해 미리 염려하는 지도 모른다. 시인이라는 천형을 받아 를 토해내는 행위를 하는 동안 스물다섯 시인에게도 세월의 파도는 몰아치겠지. 그리고 내 죽음으로 평생을 슬퍼해야 할 사람을 만나겠지.

 

 

몸에 당신의 일기를 베끼고 바다로 와서 지운다. 내 죽음으로 평생을 슬퍼해야 할 사람이 한 명 필요하다. 당신은 말해진 적 없는 말. 모든 걸 씻고. 이렇게 당신이 바다에서 눈물을 흘린 게, 눈물을. 바다의 푸른 계단이 차례로 무너져 내리고, 절벽에서 하얀 고통들이 비명을 지르며 부서진다. 거품들이 분말처럼 흩어지면 당신이 흘려둔 해식애로 세워지던 안개 도시. 파도는 내 몸에 맞다. 나쁜 말들뿐이다. 나는 아직 당신에게 내 얼굴의 절반을 보여주지 않았는데. 당신은 몇 개의 얼굴을 갖고 있는가. 나는 쓴다. 쓴다고 생각하지 않으면서 쓴다. 쓴다고 생각하기 위해 쓴다. 쓴다. 지운다.

 

때로는 그것이 간절한 거짓일지라도 말이다.

 

나는 누군가의 간절한 거짓이었다 당신, 정말 날 사랑하는 거야? 아니, 난 당신을 믿어. - 이이체, - ‘거짓말의 목소리중에서

 

떨어지고, 흔들리고 멀어지면서 상처가 없는데도 아픈 경험을 하게 된다. 너무 멀리 와버렸다고 말할 땐 이미 비가 내리고 눈 내리는 풍경이 펼쳐질 것이다. 모든 인간의 삶은 언젠가 무너진다. 폐허에서 눈 감고 꼭 안을 수 있는 사람 하나 없는 것이 생의 종착역이다. 부정할 수 없는 죽음 앞에서 모든 사람은 겸손해지거나 혹은 그것을 인정하지 못하고 몸부림치거나. 넉넉하게 오늘 하루를 온전히 살아낼 수 있었다면 시는 그저 작은 위로에 불과할 뿐이다.

 

너는 내게 손 내미는 대신 말을 내건다. 떨어지려는 것처럼 흔들리는 도토리들. 칡넝쿨이 더 세게 너를 옥죄고. 나는 너를 풀지 못한다. 아련해져 가는 너를 잡아보려고 손을 뻗으면, 선은 손에서 멀어져가고 손은 선에 닿지 않고. 바람을 지나쳐 보내며 신기루를 믿고 싶다고 말한다. 너무 멀리 와버렸어. 상처가 없는데 아프다. 눈 감은 내 눈앞에 눈 내리는 풍경이 펼쳐지고. 모든 것이 무너진 폐허에서 너를 안고 눈을 감는다. - ‘사라지는 포옹중에서

비가 내리고, 참으로 울상이다. 하늘을 가릴 우산 따윈 필요 없다. 내가 썼던 일기들로 나는 나를 지워갈 예정이다. , 암송하지 않는 일기를 보아라. - ‘친절한 세상중에서

 

120408-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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