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더보이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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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소원을 말하는 게 좋았다.

그 소원을 하나하나 이루다보면 어른이 되리라 생각했다.

아니면 그 반대로 어른이 되면 그 소원을 다 이룰 수 있게 되거나.

열다섯 살 무렵, 어른이 된다는 건 내게 그런 뜻이었다.

 

사람들은 세상을 살아가면서 몇 가지 방어기제를 갖게 된다. 마음이 여리고 상처받기 쉬운 사람들은 달팽이처럼 연한 속살을 단단한 껍질 속에 가둔다. 낯선 사람과 쉽게 친해지기 어렵고 타인과의 지나친 친밀감은 부담스럽다. 자기만의 세계가 단단해서 혼자가 편할 때가 많다. 그래서 냉정하고 정확해 보이지만 그건 내 영역 안에 누군가 발을 들이밀 때의 두려움을 줄이기 위해서다. 운전을 하다가 왼쪽 뺨을 물들이는 저녁노을 때문에 울컥하기도 하고 금요일 오후 창밖의 안개비를 내다보다가 가슴이 먼저 젖어버리기도 한다. 예민한 감수성 때문에 스스로 생채기를 내는 타입이어서 차라리 이어폰을 꽂고 혼자 걷는 데 익숙하다. 이런 종류의 사람에게는 완벽주의 콤플렉스가 생기기 쉽다.

 

어른이 되어서도 유년시절의 정서를 잃어버리지 않은 사람은 상반된 평가를 받는다. 어린왕자처럼 순수하고 때묻지 않은 영혼을 가졌기 때문에 세속적인 욕심이 없고 현실적인 것들을 하찮게 여긴다. 유치하게 행동하거나 주변 사람들을 힘들게 하기도 한다. 상황판단이 안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살고 싶지 않은 것이다. 세상에는 애늙은이도 있고 철없는 노인도 있는 법이다. 이도저도 아니라면 그저 시류에 휩쓸려 가는 평범한 생활인일 수도 있다. 어느 부류의 사람이든 세상을 바라보는 눈과 그것에 반응하며 살아가는 패턴은 제각각이며 나름의 이유를 만들고 그 안에서 괴로워하고 즐거운 일을 만들어가기도 한다.

 

그렇다면 작가에게는 어떤 덕목이 필요할까? 세상에 대한 예민한 촉수, 철들지 않는 여린 감수성, 대상에 대한 애정 어린 시선, 자신의 삶에 대한 성찰, 타인에 대한 관심과 배려……. 좋은 작가의 작품은 재밌는 이야기로 독자의 눈을 사로잡기보다 책장을 덮고 시간이 지나도 오래 여운이 남는 울림을 준다. 김연수의 소설 원더보이를 읽고나서 며칠이 지났고 그의 소설에 대한 생각을 떠올리다가 김연수라는 작가에 대해 문득 떠오른 생각들이다. 장난기 어린 표정과 예리한 눈빛, 시인의 감수성과 깊은 사색이 만들어낸 문장들은 독자들을 자신의 이야기 속으로 빨아들인다.

 

스토리 위주의 소설이 아니기 때문에 지나치게 요설적인 부분이 없지 않으나 그의 소설을 계속 읽게 만드는 힘은 여전히 김연수 특유의 감성과 그 감성이 빚어내는 발랄한 상상력이다. 세상에 대해 다소 시니컬한 표정으로 킬킬거리는듯한 사춘기 소년의 언어가 드러나기도 하고 인간의 삶에 대한 따뜻한 애정과 세계에 대한 진지한 호기심이 묻어나기도 하는 원더보이

김연수의 말대로 매순간 삶이 놀라움으로 가득 차기를.’(87) 바란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똑같은 하루하루를 견뎌낼 수 있을까. 이 지루한 세상을 버텨낼 수 있을까. 그래서 어쨌든 우리는 모두 한 번 죽을거야. 하지만, 여러 번 살아. 영원히 존재하기 위해서’(91) 같은 문장에 밑줄 그으며 삶의 허무에 대해 한번쯤 멍한 눈길을 들어 하늘을 바라보는 것인지도 모른다.

 

반공이 국시(國是)였던 시절을 기억하는가. 원더보이는 마친 윤대성의 <출세기>처럼 낯설지만은 않은 우리 주변의 이야기일 수 있다. 자신이 꿈꾸고 원하는 대로 살아가는 사람이 얼마나 되는지 궁금하다는 생각을 할 때가 있다. 우리는 주변 상황과 시선으로 인해 거추장스런 누더기를 걸칠 때도 있고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할 때도 있다. 원더보이는 어느 날 사고로 아버지를 잃고 새로운 삶이 펼쳐진다. 차라리 외면하고 싶은 현실과 마주하면서 제 힘으로는 한발짝도 움직이기 힘든 삶의 올가미를 경험해 본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원더보이에게 공감을 보낼 것이다. 이 소설은 단순히 지나간 시간에 대한 반성과 성찰을 요구하는 것도 아니고 삶의 불가해함에 대해 엄살을 떠는 것도 아니다. 읽는 사람이 걸어온 길과 켜켜이 쌓아온 시간의 결에 따라 다양한 층위를 드러낼 수 있는 소설이다.

 

많은 사람에게 폭넓은 사랑을 받는 소설과 특정한 매니아층을 거느린 소설, 어느 쪽이 더 행복한 작가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 같다. 모든 소설을 두 가지로 분류할 수도 없고 김연수가 어느 쪽이냐고 묻는 것도 무의미할 수도 있다. 다만 지금까지 읽어온 김연수의 소설과 원더보이가 특별히 구별되지는 않는다. 전작에서 보여준 문장과 패턴, 문제의식과 소설의 방법들이 다시 한 번 그의 색깔을 내는데 기여하고 있지만 또 다른 변화와 새로움을 간절히 소망하는 독자들에게는 조금 아쉬움을 남긴다.

 

삶은 오직 갈수록 쓸쓸하고 사랑은 한갓 외로울 뿐이라는 박두진의 <도봉>이 떠오른 것은 김연수 소설의 바탕이 아닌가 싶기 때문이다. 하루하루 즐겁고 행복한 삶을 꿈꾸는 것 또한 얼마나 허망한가.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한 열망, 이루어질 수 없는 꿈에 대한 도전, 알 수 없는 것들에 대한 상상력 그리고 내 삶에 대한 겸손함. 이 모든 것들이 보여주는 세계가 소설이라면 김연수는 여전히 이제 시작에 불과한 소설가가 아닌가. 그의 소설이 보여줄 수 있는 가능성은 여전히 무한하지 않은가. 그래서 그는 여전히 이렇게 쓰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이뤄질 가능성이 없는 몽상들, 두 눈을 뜨고 바라보는 꿈들, 문장으로 만들 수 있을 뿐 아무런 현실성도 없는 소망들. - 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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