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 곳 창비시선 343
문태준 지음 / 창비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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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는 마음의 갈피를 접어둔다. 소리를 내지 않는 생각은 산꼭대기에 올라 바다를 굽어본다. 사람의 마음 밭에 살고 있는 천사 혹은 악마들은 오늘도 식탁에 마주 앉아 거짓 웃음을 흘리고 있다. 서로 다른 생각들 -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않는 욕망, 타인에 대한 뒷담화, 들키고 싶지 않은 불안 그리고 버리지 못하는 습관 때문에 빈집에 갇혀 울고 있다. 시는 그 모든 내면의 어린아이를 호출한다. 눈물은 이내 증오로 불타오르기도 하지만 나그네로 살아가는 우리 생의 이면을 맑게 투영하기도 한다.

 

문태준의 시는 명징하게 사물의 본질을 드러낸다. 에둘러 표현하지 않고 구차하게 변명하지도 않는다. 언어의 이면은 생각보다 때묻지 않은 맑은 얼굴로 빛난다. 의미를 덧칠하고 생각을 왜곡하는 것은 오로지 인간의 세치 혀에 불과하다. 순교적인 자세로 언어를 숭배하자는 말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간파하지 못하는 인간의 한계에 대한 반성적 태도가 시를 시답게 한다.

 

세상에 대한 깊이, 정서에 대한 호들갑스럽지 않은 반응, 사물에 대한 진지한 자세가 읽을 만한 시를 낳고 그 시는 늘 먼 곳을 응시한다. 그 먼 곳에는 늘 죽음의 그림자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모든 소멸하는 것은 아름답다. 일회적인 삶의 아름다움을 노래할 줄 아는 시인의 시를 우리는 여전히 경건하게 읽을 필요가 있다.

 

빈 집

 

주인도

내객(內客)도 없다

겨울 아침

오늘의 첫 햇살이

흘러오는

찬 마루

쪽창 낸 듯

볕 드는 한쪽

몸을 둥글게 말아

웅크린

들고양이

여객(旅客)처럼

지나가고

지나가는

 

망인에 대한 두려움보다 살아남은 자의 슬픔이 우리를 더욱 애닯게 한다. 기억 속에 사라지는 인간은 진짜 죽음을 맞이한다는 낭만적인 잠언은 우리를 슬프게 할 뿐이다.

 

망인(亡人)

 

관을 들어 그를 산속으로 옮긴 후 돌아와 집에 가만히 있었다

 

또 하나의 객지(客地)가 저문다

 

흰 종이에 떨구고 간 눈물자국 같은 흐릿한 빛이 사그라진다

 

인생이든 여행이든 한 번 떠나면 돌아올 수 없는 길이다. 사람들은 이내 자신의 삶을 긍정하고 낭만적으로 전망하지만 이별의 말은 오늘도 공중을 떠돈다. 그것은 굳이 말로 하지 않아도 그리고 글로 쓰지 않아도 시간이 빚어내는 바람의 물결 같은 것이다. 보이지 않아 다행인 것도 있지만 볼 수 없어 안타까운 것들이 더 많을 때도 있다. 있는 그대로만 볼 수 있는 것도 때로는 아무나 가질 수 없는 힘이 된다.

 

먼 곳

 

오늘은 이별의 말이 공중에 꽉 차 있다

나는 이별의 말을 한움큼, 한움큼, 호흡한다

먼 곳이 생겨난다

나를 조금조금 밀어내면 먼 곳이 생겨난다

새로 돋은 첫 잎과 그 입술과 부끄러워하는 붉은 뺨과 눈웃음을 가져가겠다고 했다

대기는 살얼음판 같은 가슴을 세워들고 내 앞을 지나간다

나목은 다 벗고 다 벗고 바위는 돌 그림자의 먹빛을 거느리고

갈 데 없는 벤치는 종일 누구도 앉힌 적이 없는 몸으로 한곳에 앉아 있다

손은 떨리고 눈언저리는 젖고 말문은 막혔다

모두가 이별을 말할 때

먼 곳은 생겨난다

헤아려 내다볼 수 없는 곳

 

그래서 많은 시인들은 을 노래한다. 절대 고독의 경지에 오른 섬은 그 고독조차 사치라고 말한다. 사랑할수록 외로워지는 사람들의 아이러니는 오늘도 건재한 신화다. 그 섬에 가고 싶다.

 

 

조용하여라

저 가슴

꽃 그림자는 물속에 내렸다

누구도 캐내지 않는 바위처럼

누구든

외로워라

매양

사랑이라 불리는

저 섬은

 

사물보다 사람 냄새나는 시를 쓰는 시인도 있다. 박성우 시인은 인간의 향기를 맡을 줄 알고 그것을 보여주는 재주가 있다. 모든 빛깔과 향기를 표현할 수 있는 능력이 시인에게는 얼마나 중요한가. 게다가 우리들의 삶에서 가장 감동적인 순간들을 모아 놓은 시집이 아니라 일상적이고 편안한 순간들을 마치 풍경화처럼 떼어내고 정물화처럼 시간을 멈추게 하는 힘이 박성우의 시에서는 느껴진다.

 

옛일

 

한때 나는, 내가 살던 강마을 언덕에

별정우체국을 내고 싶은 마음 간절했으나

 

개살구 익는 강가의 아침 안개와

미루나무와 쓸어내린 초저녁 풋별 냄새와

싸락눈이 싸락싸락 치는 차고 긴 밤,

 

넣을 봉투를 구할 재간이 없어 그만둔 적이 있다

 

고즈넉한 산사의 풍경을 들여다보자.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한가.

 

산사

 

배롱나무 그늘 늘어진 절간

요사 마루엔 노스님이 낮잠에 빠져 있다

 

흙벽에 삐딱하게 기댄 호미와 괭이는

흙범벅이 된 몸을 건성건성 말리고 있다

 

코빼기도 없는 고무신이 삐죽

흙 묻은 코빼기를 내미는 절간,

 

연잎에 엎드린 청개구리만

목탁을 두 개나 들고 예불을 드리고 있다

 

노스님 몫까지 하느라고

울음주머니 목탁을 울퉁불퉁 두드리고 있다

 

이제 숨을 고르고 사물과 자연에서 눈을 들어 내면의 상처를 들여다보자. 밤을 새워 고열에 시달리고 멈추지 않는 발작성 기침 때문에 갈비뼈까지 울리는 날도 있는 법이다. 혼자 아프면 서럽다는 일반적인 사실 때문에 사람을 그리워하고 괴롭지는 않아야 한다.

 

허연은 보이지 않는 부분을 드러내려고 언어의 속살을 뒤집고 생각의 발길을 쫓는다. 우리가 시를 통해 확인하고 싶은 것은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감정이 아니라 어떤 구체적인 맥락이다. 상황을 들여다보고 말과 글이 전하는 맥락을 이해하는 것은 어쩌면 시를 읽고 시인의 마음을 짐작하는 것만큼이나 헛되고 헛되다.

 

후회에 대해 적다

 

혼자 아프니까 서럽다는 낡은 문자를 받고, 남은 술을 벌컥이다가 덜 자란 개들의 주검이 널려 있는 추적추적한 거리를 걸었다. 위성도시 5일장은 비릿했다.

 

떠올려보면 세월은 더디게 갔다. 지금은 사라진 하숙촌에서 나비 떼 같은 사랑을 했었고, 누군가의 얼굴이 자동차 앞 유리창에 가득할 때도 그게 끝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어느 것 하나 아득해지지 않았으니 세월은 너무 더디다.

 

이제 어떡해야 하는 거지

 

아득해지지 않을 거라는 걸 알면서 스스로 가해자가 되어 문자로 답을 보냈다. 지금에 와서 나를 울린 건 사랑이 아니라 누군가의 삶이었을 뿐. 그 이상은 생각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비를 피해 은하열차처럼 환한 전철 속으로 뛰어들었고. 나는 불행했다고 생각하며 바짓단이 다 젖도록 거리에 서 있었다.

 

그래서 지독한 슬픔이 지나간 시간을 위로하고,

 

지독한 슬픔

 

초코바를 빨며 지나가는 비만의 세월을 나는 안다. 그 지독한 슬픔을

 

버섯구름의 완벽한 구도를. 기울어진 채 녹이 슬어가는 버려진 철선의 고혹적인 빛깔을. 죽어가는 쿠르드 전사들이 불렀던 사랑 노래를. 전소된 집터에서 발견된 깨어진 변기를. 신장개업 할인 마트 앞 미친 풍선 인형을. 전나무 숲에 널려 있는 치골이 튀어나온 흰 시신들에서 느껴지던 성욕을.

 

! 이미 아무것도 아니어서 쪼갤 수 없는 것들. 지독해서 측정할 수 없는 것들을.

 

 

고개를 들어 편지를 쓴다. 부치지 못한 편지는 여전히 낡은 서랍장에서 뒹굴고 있지만 그 세월의 두께만큼 자신의 삶에는 켜켜이 쌓인 먼지만 나풀거린다. 적지 마라, 외로우니까 쓰는 편지는 견딜 수 없을만큼 자신만 초라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편지

 

적어 놓은 건

반드시 벌로 돌아온다

 

밤새 쓴 편지를

감히 다시 볼 수 있는 자는 많지 않다

세상에 모든 편지에는 죄가 많아

인간은 밤새 적은 편지에

초라해진다

 

편지를 받은 모두는 십자가에 매달린다

 

적어놓은 것이니

세상에 남는 법

적은 자들은 늘 외롭고

벌을 받는다

적어놓은 죄, 기록한 죄

편지는 오늘도 십자가에 내걸린다.

 

적은 자의 하루는 슬프고

내걸린 편지는 세상의 어느

호리병 속으로 들어가

영원히 남겨진다

편지를 쓴 죄

그리움 같은 것을 적은 죄

 

그리움 같은 것을 적은 죄를 짓지는 말자. 그것은 얼음의 온도를 재고 싶은 욕망 같은 것이다. 불의 온도, 얼음의 온도가 아니라 우리들 마음의 온도를 걱정할 일이다. 수치로 표현된 사물의 본질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아니아니 보이고 싶지 않은 그 마음의 갈피들이다.

 

얼음의 온도

 

얼음을 나르는 사람들은 얼음의 온도를 잘 잊고, 대장장이는 불의 온도를 잘 잊는다. 누군가에게 몰입하는 일. 천년을 거듭해도 온도를 잊는 일. 그런 일.

 

 

120530-053~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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