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 죽이지 말라고 말해줘! - 스페인·라틴아메리카 창비세계문학 단편선
후안 룰포 외 지음, 김현균 엮고 옮김 / 창비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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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이나 유럽이나 아니라 내겐 라틴 아메리카에 대한 동경이 있다. 콜럼버스의 침략부터 신산스런 역사의 아픔을 겪은 대륙. 어느 지역보다 수준 높은 문명과 자연 조건을 갖췄으나 인류 역사의 흐름은 라틴 아메리카에게 폭력을 선물했다.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각축장이 되어 오랜 시간 식민지로 살았을 원주민의 삶은 우리 역사와도 무관하지 않다. 김영하의 검은꽃에서 다뤘던 애니깽들의 이야기가 대표적인 사례다. 근현대 세계역사는 침략과 폭력으로 점철된 야만의 역사다. 그 이전보다 더욱 정교하고 가공할 대량 살상 무기로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을 죽이고 또 죽였다.

 

이렇게 생존 자체가 시급한 상황에서 예술이 들어설 자리는 많지 않다. 라틴 아메리카의 소설의 역사는 19세기 초반에야 시작되었다고 본다. 1960년대 boom’ 소설 이후 라탄아메리카 문학은 눈부신 성취를 보인다. 국가의 개념과 구별보다 라틴 아메리카 전체의 특성을 이해하는 일이 그들의 소설을 이해하는 방법이다. 지역주의와 세계주의를 함께 욕망했던 라틴 문학은 보르헤스의 책이 1년에 37권 팔리던 시절을 극복했다.

 

마술적 리얼리즘으로 대표되는 백 년 동안의 고독만이 우리에게 친숙하다. 후안 룰포의 날 죽이지 말라고 말해줘!를 표제작으로 내세운 창비세계문학 스페인, 라틴아메리카편은 19편의 독특한 단편을 담고 있다. 익숙하지 않지만 색다른 즐거움과 재미를 느낄 수 있는 책이다. 우리가 배우고 익힌 소설의 문법과 다르지만 그들의 소설은 신선하다. 관점의 새로움과 표현의 자유로움이 그러하다.

 

하지만 소설이 담고 있는 서민들의 삶은 여기나 저기나 거기나 마찬가지다. 기차와 철도로 상징되는 근대화는 라틴 아메리카도 다르지 않다. 삐닌과 로사가 키우던 늙은 소 꼬르데라가 팔려가고 오빠 삐닌 마저 전쟁터로 떠나는 내용의 단편 안녕, 꼬르데라!우리 농촌 근대 소설과 유사하다. 이밖에도 이그나시오 알데꼬아의 영 산체스, 아우구스또 몬떼로소의 일식,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께스의 거대한 날개가 달린 상늙은이, 이사벨 아옌데의 두 마디 말이 인상적이다. 현실과 환상을 넘나들고 삶과 죽음의 경계를 오가는 이야기의 힘은 거대한 대륙 라틴 아메리카를 대표하는 단 하나의 특징이 될 수 없지만 익숙한 영미문학에서 느낄 수 없는 그들의 욕망과 상상력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다.

 

그는 가난한 여자에게 예쁘다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해 생각했다. 좋은 직업은 물론 심지어 성공적인 결혼에 이르기까지 여자의 삶을 향상시킬 모든 가능성은 미모에 달려 있었다. 못생기고 가난한 여자는 가난하고 힘없는 남자에 비견되었다. - 이그나시오 알데꼬아, 영 산체스중에서, 47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생의 부조리를 짚어내는 말과 글은 아프다. 시류에 영합해서 손가락질을 하거나 티 나지 않게 군중 속에 묻어가는 일은 삶의 지혜일까. 문학은 현실을 분석하는 대신 그 뒤에 숨은 욕망을 들춰낸다. 집단 무의식이 아니라 개별적 인간을 들여다본다. 그 인물이 한 시대 특정 사회의 욕망을 구현하든 보편적 인간의 일반적 속성을 드러내든!

 

책읽기는 대부분의 경우, 돌아가며 한 문장씩 낭독하는 집단적 행위가 아니라면 지독하게 이기적인 행위다. 자신과의 대면을 언제나 두려운 일이 아닐까. 타인을 의식하지 않고 이야기에 반영된, 등장인물을 통해, 현실적 자아를 확인하는 과정은 고통스럽다. 그곳이 21세기 대한민국이든 19세기 라틴 아메리카든!

 

단편소설로 세계 여행 중이다. 시간과 공간을 넘나드는 여행은 물리적 이동과 다르다. 이제 유럽으로 건너가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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