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리버 여행기 - 개정판
조나단 스위프트 지음, 신현철 옮김 / 문학수첩 / 199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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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쯤이었을까. 바닷가에 누운 걸리버를 소인국 사람들이 머리카락까지 묶어둔 장면을 본 때는. 책마다 읽어야할 적절한 시기가 있다고 생각한다. 고전도 마찬가지다. 풍자소설 걸리버 여행기는 왜 고전이 아닌 재밌는동화로 소개되었을까.

 

신현철이 번역한 걸리버 여행기(1726)391페이지 분량이다. 작은 사람들의 나라 릴리퍼트, 큰 사람들의 나라 브롭닝낵, 하늘을 나는 섬의 나라 라퓨타, 발니바르비, 럭낵, 글럽덥드립, 일본, 말들의 나라 휴이넘까지 4부로 구성된 여행기의 형식이다. 소설의 배경은 169954일부터 17151124일까지 167개월 동안이다. 실제 집필 시기는 1721~1725년으로 추정된다. 지금부터 300여 년 전 이야기다. 로빈슨 크루소(1719)과 비슷한 시기에 탄생한 걸리버는 아일랜드 태생의 정치 사상가 스위프트의 작품이다.

 

표정이 없는 얼굴, 진중한 목소리는 타인이 가볍게 대할 수 없도록 하는 좋은 방법이다. ‘진지충이라는 욕을 먹을 수도 있고 지루한 사람이라는 평가도 감수해야 한다. 반대로 웃는 얼굴 가볍게 던지는 아재 개그는 부담 없이 친해질 수 있는 방법이지만 우습게 보거나 무례하게 대하는 부작용이 있다. 풍자정신은 다큐를 예능으로 바꾸는 태도다. 우리 문학의 전통 중 하나가 해학이다. 풍자는 해학과 조금 다르다. 스위프트는 돈키호테보다 진지하지만 풍자에 관해선 날선 칼날이다. 소설이 아니라 뛰어난 상상력이 가미된 시평時評이며 인간과 세계에 대한 철학적 반성이다. 원작의 훼손과 개작 과정이 이를 증명한다.

 

앤 여왕 시대 영국의 변방 아일랜드에서 정치적 소양이 다져진 스위프트에게 왕과 귀족, 정치와 사회는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상황이었다. “지난 1세기 동안 영국에서 일어난 역사적 사건들을 이야기하자, 국왕은 아주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 역사라는 것이 단지 음모, 반란, 살인, 학살, 추방들의 모임에 지나지 않느냐는 것이다. 그것들은 탐욕, 편파, 위선, 불신, 잔인, 격분, 광기, 증오, 시기, 욕망, 악의, 야망이 만들 수 있는 가장 나쁜 결과라는 것이다.”(26, 166)는 큰 사람들의 나라를 여행할 때의 고백이다.

 

뿐만 아니라 인간에 대한 혐오는 4부에서 절정을 이룬다. ‘휴이넘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걸리버는 인간을 닮은 야만족 야후를 보며 인간이 사는 세상을 재인식한다. 인간은 이성적 존재가 아니라 이성적일 수 있는 존재일 뿐이다. ‘습관과 편견으로 가질 수 있는 힘을 매일매일 보여주는 우리의 모습은 걸리버의 여행으로 신랄하게 드러난다.

 

마그리트의 그림에서 미야자키 하야오의 애니메이션 천공의 섬 라퓨타까지 스위프트의 상상력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다. 인간은 보잘 것 없이 작은 존재이면서 만물의 영장으로 불릴 만큼 대단한 능력을 갖춘 존재이기도 하다. 동화적 상상력과 환상이 안내하는 스토리 자체의 즐거움은 물론 곳곳에 숨어있는 당대 사회와 인간에 대한 비판 정신은 걸리버를 특별한 존재로 만든다. 기득권에 대한 도전, 구체제에 대한 비판, 인간의 탐욕과 성정에 대한 반성은 영원한 소설의 주제다. 그것이 어떤 맥락에서 어떻게 표현되느냐의 문제가 작가들의 고민이다. 시와 소설과 희곡이라는 전통적인 갈래 뿐 아니라 논픽션 분야의 작가와 학자들에게도 마찬가지다.

 

미룰 만큼(?) 미룬 책들이 많다. 어차피 죽을 때까지 미루다가 못 읽을 책이 더 많을 예정이다. 망설이지 말고 손을 뻗을 때다. 생각보다 남은 시간이 많지 않다. bon voy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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