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로그 digilog - 선언편
이어령 지음 / 생각의나무 / 2006년 4월
평점 :
절판


  2000년대의 신새벽의 여명이 밝아온 것은 정보화물결과 함께였다. 정보기술의 발달과 사회의 변화는 아날로그적인 방식에서 디지털적인 방식으로의 삶의 변화를 가져왔고, 우리는 이미 그 1세대의 끝에서 정보혁명의 다음세대의 길 앞에 서있다. 비로소 그간에 진행되어 왔던 정보혁명과 정보화시대의 급속한 변화로 인한 문제점들을 둘러보게 되었고, 그런 반성의 바탕하에서 새롭게 밝아오는 정보 2세대로 난 길 앞에서 이어령 선생님은 희망의 격려사를 보내고 있다. 우리가 앞으로 가야할 길에 뭔지 모르는 밝은 느낌이 드는 것도 이 책 속의 선생님의 메세지때문이 아닐까 하고 생각하게 된다.

  한국은 세계가 인정하는 정보화강국이다. 90년대 후반부터 시작된 국가주도의 초고속 인터넷망의 구축과 인터넷 시장의 급속한 팽창은 IT와 정보 분야에서의 국민적 마인드를 새롭게 형성시키고 있고, 이것은 세계적인 추세를 만들어가고 있다. 그러나 맹목적으로 앞만 보고 달려가는 질주의 뒷모습에 너무나도 많이 초토화된 인간 군상이 그려진다. 더욱 외로워지고, 더욱 가상적이고 피상적인 인간관계에만 의존하게 되고, 수동적이고 능동적이지만 퇴폐, 향락, 즉흥적으로 흐르고, 너무 조급해지고, 정보의 수신자를 배려하기보다는 발신자의 상업주의만이 득실댄다. 정보의 바다는 정보의 폐수로 오염되고 우리는 그 속에서 사는 고기마냥 숨쉬기가 버거워 배를 드러내고 둥둥 뜨기조차 한다.

  세계 시장에 편입되어 뒤를 보지 못하고 달려왔던 급속한 경제성장의 시절, 질풍노도와도 같았던 그 성장기 속에 우리 가슴엔 치유되지 못하고 상처받은 어린 아이가 웅크리고 앉아 있다. 이제 그 상처받은 마음을 치유하기 위해서 우리는 질주하며 바람을 무더기로 맞고 있는 찡그린 얼굴 뒤로 땀을 쏟으며 가뿐 숨을 몰아쉬며 바람에 나부끼는 머리카락을 보아야 한다. 들썩이는 어깨를 보아야 한다. 잔뜩 긴장된 허리와 등을 보아야 한다. 후들거리는 다리도 보아야 하리라.

  그 뒷모습은 우리들의 오랜 전통과 문화이다. 디지털의 영역에 의해 하나둘씩 사라져가는 아날로그적 방식이다. 속도의 삶에 빼앗겨버린 우리들의 정신이자 영혼이다. 돈과 물질만을 위해 달려왔던 시간 속에 떠나버린 정겨운 사람들이다. 패스트푸드를 먹으며 잊어버렸던 시골집 독 속의 된장과 김치이다. 편리한 전기압력밥솥에 의해 잊혀져버린 눈과 코를 맵게 하는 아궁이이다. 나이프와 포크에 의해 휘둘리는 거친 음식이 아니라, 만들어내는 사람의 편의에 의해 만들어진 음식이 아니라 먹는 사람의 마음을 배려하는 음식이요, 그것이 바로 젓가락을 사용하는 음식이다. 손님이 오면 나이프와 포크와 함께 음식이 새로 나와야 하는 문화가 아니라, 수저만 달랑 얹어서 손님을 맞는 우리의 문화이다.

  디지털의 세상은 우리의 아날로그적인 삶을 더욱 풍요롭고 아름답게 만드는 면이 있다. 하지만 디지털이 자신의 영역을 넘어 맹목적으로 아날로그의 영역을 파괴할 때 우리의 삶도 파괴된다. 21세기의 인류가 다시 되돌아보아야 할 과거는 성장이라는 환상 속에 속도라는 우상 속에 우리가 버렸던 자연과 인간과 정신이다. 삶의 느림 속에 인생의 의미와 지혜를 묻는 물음이다. 한끼 식사에 5000여번을 씹던 우리의 어금니가 이젠 700-900번만 씹는 문화로 바뀌자 우리들의 뇌도 삶도 대충대충이 되고 빨리빨리가 되어버렸다.

  급속하게 몰아닥치는 외부의 흐름을 수용하면서도 그 핵심적 문제를 가장 단순하면서도 우리에게 가장 익숙했던 바로 그 전통과 문화에서 찾으려는 선생님의 대안이 '디지로그''라는 신조어를 만들었다. 세상을 보려면 이 정도의 눈은 있어야 하고 글을 쓰려면 이 정도의 자기 말은 만들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덤으로 꼬여버리고 복잡한 세상의 해법을 그의 시원스러운 입담과 물흐르는 듯한 그의 글에서도 찾을 수 있다. 새로운 시대를 위한 격려사가 이렇게 푸근하고 구수한 글로써도 앞으로의 희망을 그리게 할 수 있다니...

  너무 희망적이어서 작은 걱정이 이는 것은 또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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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샘 2006-08-29 08: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눈뜨면 휴대폰을 챙기고 컴퓨터 전원을 넣고 메신저에 접속하는 모습을 보면... 디지털이 점령한 삶의 건조함이 푸석댑니다. 전통과 문화를 새롭게 조망하는 것은 <상업주의>나 <교환가치>에 의한 것들 뿐이라 더 서걱대는 시대를 사는 일도 신산하기만 합니다.

달팽이 2006-08-29 09: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업이 오히려 자연과 유기농, 전통과 문화를 더욱 앞장서서 상업화하는 것을 부정할 수 없군요.
그런 면에서 이어령 선생님도 일면 비판할 점도 있겠지요.
그렇지만 이 세상 안에서 또 다른 꿈을 늘 꾸고 살아야하는 우리 처지를 생각해보면
때로는 이러한 생각들도 건전한 대안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드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