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도와 한국의 전통 차문화
김상현 외 지음, 노무라 미술관 엮음 / 아우라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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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문의 노무라 미술관 관장 타니 아키라의 인사말에서 알 수 있듯이 일본의 차문화는 한반도로부터 전해졌다. 그래서 우리보다 훨씬 보편적인 문화로 자리잡게 되었고 또 임진왜란 전후로 부흥한 일본의 차문화에서는 성이라고 할지라도 한 개의 조선 막사발과 바꾸지 않는다는 말이 있듯이 다기와 다례에 대해 많은 기호를 가지게 되었다. 특히 보이차를 비롯해서 발효차에 있어서는 세계제일의 중국의 관젠핑 교수의 참여로 한, 중, 일의 다문화는 세계 차문화라고 불리어도 흠이 되지 않을 정도의 위상도 부여받게 되었다.

 

  송나라 시대에 남쪽에서 유행한 차는 해상교통의 발달로 고려로 들어오게 된다. 고려시대는 차문화의 전성기로 왕실의 다례와 왕이 신하에게 내리는 상으로서의 다구, 귀족들의 다문화, 승려와 일반 서민들에 이르기까지 차의 음용과 생활은 아주 일상적인 것이었다. 송나라 때의 건요로 만들어진 토호잔이나 흑요잔 등 다양한 다완은 고려에 전해졌을 것이고 고려 또한 청자를 본격적으로 만들어내기 시작하면서 가장 많이 생산된 것이 다완와 다도구였을 것이다. 그러나 1000년의 세월동안 전세품으로 내려오는 것을 우리가 볼 수 없는 것이 당연하다. 국보 115호로 지정된 청자상감보상당초문다완이나 은구처리된 국보 253호인 청자 양인각연당초 상감모란문 은구대접 두 점과 그 외 몇 점이 존재할 뿐이다. 그러나 국내에는 없지만 다양한 형태의 다완이 제작되고 남아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조선시대로 오면서 쇠퇴하기 시작한 차문화를 살린 것은 다산 정약용 선생님이다. 평소 차를 즐겨하였으며 유배시절 강진 초당에서 주변의 차밭을 일구어 직접 차를 재배하면서 초의 스님에게 그 제다법과 다도를 전해준 것으로 유명하다. 1905년 백련사로 놀러갔다가 차밭을 발견하고 백련사 승려들에게 차만드는 법을 전수한다. 1818년 유배지를 떠날 때 썼던 '다신계절목'을 보면 제장들과 함께 차를 만들었던 내용이 서술된다. 다산이 차를 마신 것은 음용이 아니었고 자신의 체증을 내리는 약으로 썼던 것으로 보인다. 차에는 독성이 많기 때문에 제자에게는 많이 마시지 말라고 권한다. 이 독성을 감쇄시키기 위한 제다법으로 '구증구폭' 등 다양한 방법을 사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초의스님이 다산초당을 처음 방문한 것은 1809년이었고 그 해는 다산의 나이 48세, 초의 24세였다. 초의는 바른 스승을 찾아가며 열심히 구도했는데 사찰에 그리 훌륭한 스승을 만나지 못하고 다산을 만나 학문도 배우고 차도 배웠다. 이러한 초의 차가 세상에 나온 것은 20년도 더 뒤의 일이다. 우연히 벗을 통해 초의차를 맛본 박영보는 '남차병서'를 지어 만남을 청하고 그의 스승 신위가 다시 '남차시'를 지어 초의차는 유명해졌다. 중국의 연행길에 싼 차만 사다마시던 그 당시의 기호자들에게 초의차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1840년 전후 홍현주의 요청에 따라 [동다송]을 지으면서 조선의 차는 이론면에서도 깊어갔다. 이러한 초의차가 더욱 깊어진 것은 차에 대한 지식과 안목을 가진 추사를 만나면서부터이다. 이것이 바로 조선후기 차문화의 르네상스라 부를 만하다.

 

  추사와 신위는 청나라 문예의 종장인 옹방강과의 교유를 통해 차가 문인의 일상에 얼마나 중요한 물품인지를 깨닫게 되었다. 이로부터 북학파와 경화사족들이 차의 새로운 가치를 인식한 것은 조선시대 차문화 부흥의 배경이 되어주었다. 추사는 자신의 글과 그림을 선물로 초의는 자신의 차를 선물로서 오래도록 사귀었다. 이러한 까다롭고 안목있는 경화사족으로 인해 초의차는 더욱 발전한다. 초의가 만든 보림백모란 차에 대한 평가는 이 사실을 알려준다.

  " 초이차는 맛이 너무 여리다. 그러므로 오래전부터 보관했던 학원차와 섞어여 한 항아리에 보관하였다. 곧 새 차와 서로 어우러지기를 기다렸다가 사용하였다. 또 시를 지어 초의에게 보이려 한다."

1838년 추사가 초의에게 보낸 편지글을 봐도 이 사실을 알 수 있다.

  " 차를 보내주시니 가슴이 시원해짐을 느낍니다만 매번 차를 덖는 법이 조금 지나쳐 차의 정기가 조금 침윤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차를 다시 만든다면 화후를 조심하는 것이 어떨지요?"

1840년 이후에야 추사는 "보내준 차는 과연 가품이다. 다삼매를 드러냈는가?" 하고 칭찬한다.

 

  이 책에서 알 수는 없지만 초의스님은 조주스님의 가풍을 이어받아 다삼매를 통해 진리에 이르려 했는지 알 수 없다. 앞으로 더욱 연구가 필요한 부분이다. 이 책은 그 외에도 한, 중, 일의 다도와 차문화 비교와 차관련 학과가 개설된 대학, 그리고 차문화의 정의 및 범위에 대해 비교하고 있다. 아무래도 엄청난 수요와 차문화의 일상화를 통해 중국은 차 제조 및 생산, 그리고 그 잎의 개량과 제작법에 관한 농과계통의 학과와 연구가 많은 반면 한국은 다문화와 다도구와 다례와 의식, 정신적 삶에 대한 것이 일본은 차 생산과 다도예절에 관련된 부분이 중심이다. 개설된 학과나 체계적 공부는 중국이 최고이고 한국은 2000년대 들어와 본격적으로 생기고 분화되는 편이나 그 속도가 빠르지 않고 일본은 전문대학 및 연구소를 중심으로 오래전부터 생겼으나 지금은 주춤하는 실정이다. 이를 통해 한, 중, 일 간의 공동연구 및 보다 체계적인 연구를 통해 차문화가 단순히 예와형식의 영역이 아니라 현대인의 정신생활까지 포괄하는 다양한 연구가 필요하리라는 생각이다. 논문식 글을 그대로 실은 듯하여 쉽게 읽히지는 않으나 관심이 있다면 지나치지도 않으리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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