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날 내가 왜 오지도 않을 그녀를 그곳에서 기다리게 되었는지....
학교 건물 옥상에 앉은 까마귀의 울음 소리가 너무 슬퍼보였기 때문인지
아니면 흐린 잿빛 하늘에서 끊임없이 쏟아져내리는 눈발때문이었는지
썼다가 지우고 썼다가 지운 하얀 종이위에 새겨진 글들을 차마 건네지 못하고
종이 위의 글들에 담긴 마음을 하나 둘씩 어둠 속으로 숨겨버려야 했던 날들
교정 앞에서 매일 그녀를 기다렸던 시간 속에
우연을 가장한 필연적인 만남을 만들기 위해
그녀를 기다렸던 시간들이
산너머로 번져가는 노을을 바라보는 시간으로 변했고
어둑어둑해질 무렵의 어색한 시간들에
나의 내면이 차분해지는 시간이 좋아지게 되었다.
그 날도 그랬다.
발목까지 눈에 잠기어 발의 감각이 점점 무디어져가고 있는데
잿빛 하늘에서 눈은 멈추지 않고 펑펑 쏟아져내리는데
오지도 않을 그녀를 기다렸던 시간들이
어느새 나 자신을 들여다보고 있는 시간으로 변해갔다.
왜 초조하지도 않았는지 슬프지도 않았는지
우연을 가장한 필연들이 우연히 새로운 눈을 뜨게 했을 때
내게선 무엇인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다시 봄이 와서야 비로소 나는 지독한 우울증에 시달렸다.
봄비가 내리면 늘 혼자서 바다를 찾곤 했다.
지금도 첫눈이 오면
그 때가 생각난다.
올 수 없는 사람을 기다린다는 것은
내 마음이 어떻게 변해가는 것인가를 지켜본다는 것
어쩔 수 없는 현실을 받아들인다는 것
이미 와 버린 현실을 받아들인다는 것
그것은 나뭇가지 위에 앉은 새가 해지면 둥지를 찾아 날아가는 이유요
무심코 지나가는 내 머리위로 비둘기가 똥을 싸고 날아간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