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를 사랑해서 미안하다
정호승 시, 박항률 그림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5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분홍빛의 밝은 책표지와 순수한 소녀의 눈빛이 나를 이미 젊은 날의 시절 속으로 훌쩍 들어다 놓았다. 대학시절 '맹인 부부 가수'라는 시를 보며 한없이 가슴아린 기억을 가졌던 나는 '슬픔이 기쁨에게'를 들고 내 대학시절의 푸르렀던 하늘을 시의 언어로 수놓았던 기억이 있다. 마음에서 주체할 수 없이 올라오는 생의 욕구와 삶의 기쁨과 들뜸의 느낌들을 간직한 채 그의 언어를 잡고 있으면 그런 감정들이 떨림을 간직한채 평화로워지는 경험을 하곤 했다.

  내 그대 그리운 눈부처 되리 / 그대 눈동자 푸른 하늘가 / 잎새들 지고 산새들 잠든 / 그대 눈동자 들길 밖으로 / 내 그대 일평생 눈부처 되리 / 그대는 이 세상 / 그 누구의 곁에도 있지 못하고 / 오늘도 마음의 길을 걸으며 슬퍼하노니 / 그대 눈동자 어두운 골목 / 바람이 불고 저녁별 뜰 때 / 내 그대 일평생 눈부처 되리 내게 가장 떨림이 오는 한 편의 시를 고르라면 나는 주저없이 이 시를 고르겠다. 순백의 하얀 마음으로 세상의 모든 것을 대하는 첫마음의 그것으로도 세상은 기쁨을 넘어선 슬픔과 외로움과 사랑의 좌절과 절망이 있다. 하지만 그 모든 삶의 상대적인 빛과 그늘의 문제를 수용하고 승화시켜내는 이 한 편의 시가 좋다. 봄의 새싹과도 같은 푸른 잎이 돋아나고 그 잎이 원숙해졌을 때 피우는 봄꽃의 깨끗함과 화사함의 이면에서 몰래 자라는 낙엽의 아름다움과 성숙, 그것이 나는 좋다. 그렇기 때문에 이 시는 미추가 함께 함을 알게 한다. 

  우리 다시 만날 때까지 / 아무도 슬프지 않도록 / 그대 잠들지 말아라 / 마음이 착하다는 것은 / 모든 것을 지닌 것보다 행복하고 / 행복은 언제나 / 우리가 가장 두려워하는 곳에 있나니 / 차마 이 빈 손으로 / 그리운 이여 / 풀의 꽃으로 태어나 / 피의 꽃잎으로 잠드는 이여 / 우리 다시 만날 때까지 / 그대 잠들지 말아라 / 아무도 슬프지 않도록 우리 다시 만날 때까지 아무도 슬프지 않도록 잠들지 않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만남에 아무런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과연 그런 만남이 있기나 한 것일까? 정호승 시인은 이 시에서 우리에게 삶의 화두같은 것을 던져준다. 마음이 착하다는 것은 마음이 가난하다는 것을 말한다. 마음에 어떤 상도 만들어내지 않고 따라서 집착의 마음도 내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빈 손은 그런 빈 마음을 의미한다. 사물이나 풍경이 비치는 투명한 거울같은 마음, 그러기 위해선 우리 잠들지 말아야 한다. 깨어 있어야 한다.   슬퍼하지만 슬퍼하지 않고 기뻐하지만 기뻐하지 않는 것, 머무르지 않고 머무르며 마음내지 않고 마음내며 사는 것, 정 호승 시인의 시에는 그런 삶의 순박함과 순수함 속에서도 꽃을 피우는 삶이 성숙과 아름다움이 자리잡고 있다. 티묻지 않으면서도 삶의 모든 경험을 관통해버린 깨달음과 명상이 있다. 우리에게 펼쳐지는 삶들을 시인의 눈으로 보게 해준다. 그래서 늘 우리는 희망을 가질 수 있다. 일평생의 눈부처를 가지게 된다.

  박항률 화백의 그림은 이런 정호승 시인의 시와 같은 또 다른 시이다. 한 점 티끌도 묻지 않은 순수한 소녀의 모습 하지만 그녀의 눈빛은 순수함만이 아니다. 세상을 보는 그녀의 마음이 드러나서 깨끗하고도 아름다운 풍경을 만들어내지만 그녀의 눈빛이 향하는 곳은 어디에도 없다. 없는 곳을 향한 눈빛, 그것은 자신의 내면으로 향한 눈이다. 이것은 세상을 마음의 먼지없이 깨어있는 그대로의 상태로 느끼면서도 늘 내면의 눈을 뜨고 있는 상태, 즉 잠들지 않는 상태이다. 그러니, 세상의 모습이 이기심과 욕망으로 인한 절망과 슬픔과 사랑의 아픔과 시련 속에 있더라도 그녀의 눈에는 부처만의 세상이 있을 것이다.

  한 편의 그림 속으로 들어가다보면 순순했던 첫사랑의 마음을 지나 사물을 대하는 첫느낌의 마음에서 세상의 모든 것을 수용하고 자신의 내면으로 들어가는 진리의 눈을 발견할 수 있다. 그렇다. 두 사람은 이미 삶의 구도자이며 수행자의 길을 가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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