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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리지 못한 가난
마지드 라흐네마 지음, 이혜정 옮김 / 책씨 / 2005년 8월
평점 :
절판
교직에 들어서서 아이들의 인성을 위한 상담연수를 받을 기회가 많았다. 때로는 교사들이 하는 연수도 있었지만 때로는 상담전문가들이 하는 연수도 받을 수 있었다. 군대에서도 정신교육을 담당하는 교관생활을 2년 남짓 하였는데 그 때 공군장교 선배로서 김동수 성공전략연구소장과 윤은기 시테크의 저자들의 강의도 들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런 강의를 들으면서 삶을 활력있고 긍정적으로 살면서 우리 생활의 심리적인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기에도 조건을 필요로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것은 돈이었다. 보통 전문적인 상담과정을 거치려면 수십만원에서 수백만원까지의 비용이 드는 것이다. 일반 시민으로서 자신의 인격적인 심리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이런 과정을 수강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을 것임을 느꼈다.
나의 성장과정에서도 가난은 그리 크지 않았지만 느낄 수 있는 문제였다. 빈농의 손자로 자란 내가 시골서 하얀쌀밥과 고기를 구경하는 것은 정말 특별한 일이었으며 항상 보리밥속에는 무우나 쑥 고구마 감자 등의 불순물이 섞여 있곤 했다. 이러한 사정이 나아지게 된 계기가 되었던 것은 아버지의 도시생활의 시작이었다. 부산으로 옮기고 나서 사업을 하다가 실패하고 난 후 늦게 들어간 공무원 생활로 최소한 흰 쌀밥은 먹기 시작했던 것이다. 물론 얼마 후 아버지는 보리밥을 섞어먹는 것이 좋다고 했고 우리는 내키지 않았지만 따를 수 밖에 없었다. 그때부터 조금은 알아버린 가난이 그 시절을 산 누구에게나 경험한 것이었지만 나에게도 피하고 싶은 그 무엇이었다.
결정적이었던 것은 대학생활을 할 때 어렵게 마련한 돈으로 책을 한 권씩 사면서부터였다. 왜 그런지 몰라도 나는 용돈이 생기면 항상 절반 이상을 책사는 데 쓰고 있었다.(이 버릇은 아직도 못고치고 있다.) 나도 그 이유를 몰랐다. 왠지 눈에 띄는 책들을 다 사모으고 싶었던 것이다. 그 때 꼭 읽고 싶은 책이 있는데(자본론 전집) 호주머니를 찌른 손이 한 움큼의 먼지만 뱉어내었을 때, 그 깊은 좌절을 나는 아직도 잊을 수 없다. 그 때 나는 커서 적어도 돈에 찌들리는 생활은 하지 말자고 생각했던 것 같다.
가난은 절대적인 것과 상대적인 것이 있다. 그것이 사회문제화될 때에는 주로 상대적인 문제들이 커지는 측면이 있다. 그렇다고 해서 절대적인 문제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대체로 두 가지의 문제가 같이 작용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현대 사회에서의 빈곤의 문제도 보다 많이 가진 사람들이 없는 사람들의 착취를 통하여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명암이 더욱 짙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 이면에는 인간의 욕구는 끊임없으며 그 욕구를 충족하기에는 재화가 충분하지 못하다는 절대적인 문제가 함께 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것은 빈곤과 가난의 문제가 육체적이고 물리적인 문제만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늘 가난은 사람의 영혼을 쪼들게 하고 상대적인 박탈감으로 인한 심리적 위축감과 사회적 위화감을 조성하기도 한다는 사실이다. 나아가 가난의 상태에 처한 사람들의 정신적인 가난이 자신의 주어진 삶을 있는 그대로 살아가기 어렵게 만든다는 점이다. 심지어는 삶의 좌절감에 빠져 다시는 헤어나지 못하는 절망의 수렁으로 빠져들기도 한다는 점이다. 하지만 동양의 고전 사상을 보면 소요유라든지 빈이락하면서 사는 특별한 정신적인 면들이 보이고 있다. 자신의 삶에 필요한 것들을 간소화시키면서도 삶을 그대로 누릴 수 있는 정신적인 무엇인가가 갖추어질 때 비로소 그것은 가능해진다.
하지만 그것도 최소한의 생존이 바탕이 된 다음의 이야기이다. 현대 사회는 경제의 세계화의 물결이 지구상 어느 곳에도 미치지 않는 곳이 없고 따라서 삶을 유지하기 위한 의존성이 그 어느 때보다도 심해진 것이 사실이다. 자급자족적 삶을 유지하기 위한 터전은 개발과 발전이라는 미명하에 모두 파헤쳐지고 폐허가 되어가는 실정이다. 그렇기 때문에 최소한의 생존의 수단마저도 빼앗겨버리고 사회로부터 내몰린 사람들에 대한 대처가 시급한 상황이다. 그들에게는 무조건적으로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최소한의 재화가 필요한 것이다.
다음으로 그런 상태를 벗어난 가난과 빈곤에 대해서는 이제 동양의 고전 사상을 다시 모셔와야 할 때이다. 왜냐하면 이 시점에서 나의 삶으로 돌아와야 하기 때문이다. 사실 재벌도 아니고 그저 평범한 월급쟁이 생활로 사는 나로서는 주어진 소득으로 만족하고 더 벌기 위해 아둥바둥하지 않고 쓸만큼 쓰면서 남으면 가족들과 나누고 때로는 가까운 사람들과 나누고 때로는 익명이지만 절대적 빈곤에 처한 사람들과도 나누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맞벌이임에도 불구하고 사실 조금의 저축과 한달 살림을 하고 나면 남는 것도 없다. 그렇다고 많이 버는 사람보고 부러워않고 비굴해지지 않고 적게 버는 사람보고 으시대지 않고 그저 주어진대로 만족하고 사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닐까? 사람과 만나면 내 쓸 수 있는 범위내에서 좀 더 쓰면 되고 더 번다고 해서 얻어먹으려는 마음없이 당당하게 살면 되지 않겠는가?
정작 중요한 것은 가난으로 인해 마음마저 주룩들고 타락하지 않는 것이며, 좀 가졌다고 그것으로 인해 오만해지고 정신적으로 황폐해지지 않는 것이다. 누구나 자신에게 주어진 상황에 맞추어 산다. 사람은 대체로 극단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상황에 적응하는 능력을 갖추었으니까. 하지만 상황에 맞추어 사는 몸 살림 이면에 정신적인 살림살이는 어떻게 하고 있는지 돌아보고 반성해야 할 때이다.
P.S 그런데 이 책 번역이 너무 짜증났다. 책을 읽다가 몇 번을 던져 두었다가 다시 읽곤 했다. 하지만 마지막 장을 덮는 마음까지 짜증으로 끝내지 않은 것은 다행한 일이다. 좀 더 읽는 사람을 생각해서 번역을 했더라면 하는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