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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서록 ㅣ 범우 한국 문예 신서 13
이태준 지음 / 범우사 / 1999년 12월
평점 :
품절
무서록, 글의 일정한 순서나 형식없이 써내려간 글이라는 의미다. 수필형식으로 보여지는 이 책은 근대적 작가로서 "운문에는 지용, 산문에는 상허(그의 호)"라고 불릴만큼 그의 문장력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42편의 제목으로 쓰여진 이 글들은 이태준의 삶을 바라보는 눈이 얼마나 깊고 투명했는가를 알 수 있게 해준다. 뿐만이 아니다. 글쓰는 형식에는 문외한이던 내게 글이 단지 마음만 잘 담아내서 되는 것이 아니라 그 마음이 잘 담겨지기 위한 필연의 형식을 발견해내는 것도 역시 글쓰는 이의 몫이라는 것을 절감하게 하였다.
우선 그의 사람과 사물, 자연을 대하는 마음에는 우리 옛 조상들이 그러하였듯이, 깊은 관찰과 자아와 집착을 비우는 것에서부터 출발하여 대상과의 깊은 교감이 우선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더 나아가서는 구도자의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그 깊은 곳에서 건져올린 언어들이 일정한 배열을 갖추어 하나의 선율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아무리 문체가 화려하고 기교가 많은들 무엇하겠는가. 우선은 자신의 마음 깊숙한 곳에서의 울림없이 나온 글들이 어찌 타인의 마음 깊숙한 곳을 울릴 수 있겠는가 말이다. 글에는 우선 작가의 마음이 담긴다고 했을 때 그 마음없이 타인의 마음을 공명시킬 수는 없기 때문이다. 필묵, 십분심사일분어, 자연과 문헌, 묵죽과 신부 등등의 작품에서 드러난 그의 세상을 보는 방식은 이미 삶의 멋과 지식을 쌓는 것을 넘어 인간 존재에 대한 깊은 탐구심이 바탕된 탐구자이자 구도자의 자세인 것이다.
다음으로 그가 글을 쓰는 방식이다. 그의 글을 맑은 정신으로 읽다보면 그의 글에서 필요없는 군더더기가 거의 없을 뿐더러 그가 선택하는 어휘 하나 하나가 아주 압축적이면서 자신의 의도를 표현하는 가장 직설적인 언어라는 것을 느낄 때가 있다. 문체 또한 마찬가지다. 그것이 독자의 마음 속에 일으키는 마음의 파동을 극대화하기 위한 문체의 선정에 대한 직감적인 포착이 엿보인다. 주제에 접근하는 방식 역시 그러하다. 때로는 직설적으로 바로 들어갔다가, 때로는 넌지시 둘러서 이야기를 하다보니 어느새 주제에 접근해버린 것이라든지....이런 다양한 방식에 따라 그것이 주는 느낌도 물론 달라진다.
역시 글의 대가는 직관적인 글쓰기를 한다. 왜냐하면 글쓰기가 하나하나 논리적으로 맞추다보면 어설프기 그지없는 글이 되는 경우가 많을 뿐더러 글 전체의 느낌이 살아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결국 글은 작가의 마음속의 직관에 의해 포착된 글들이 직관적인 에너지를 통해 분출할 때 자연의 선율을 타고 우리들의 가슴속에 잦아들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런 직관을 계발하기 위한 작가의 노력이 한 작품 이면에 얼마나 많은 습작과 고통의 세월이 쌓여진 것인지 사람들은 모를 것이다.
그래서 재능과 노력이 뛰어난 작품을 만들어내듯, 세상을 격물하는 마음이 어떤 상을 그려내고 그 상을 따라 언어화시키는 작업의 독창성과 숙련도에 의해 작품은 그 빛깔을 달리하게 된다. 이런 면에서 이태준의 작품들은 물을 관찰하는 그의 마음과 그것을 일정한 형식의 글로 엮어내는 재주까지 모두 배워야 할 고전과도 같은 것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21세기를 살아가는 나에게는 그의 이 책이 고완이 되는 것이다. 새롭게 되살려야할 글쓰기의 텍스트가 되는 고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