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시와 더불어 배우며 살아가다
김풍기 지음 / 해토 / 2004년 11월
평점 :
절판


  근래에 나는 시에 푹 빠졌다. 물론 내가 시인은 아니지만 시를 향유하며 즐기게 되었다는 얘기다. 벗과 함께 시작한 휴대폰을 통한 다섯 줄 문자메세지에서부터 시작한 나의 시공부는 삶의 미학을 넘어서 삶의 깨달음으로까지 지향되길 원한다. 하지만 예전에 미처 느끼지 못했던 가슴떨리는 감정을 발견하는 시 한편이 있다면 그것이 인생 속에 거품처럼 생겼다가 사라지는 것이라고 해도 그 순간만큼은 내 가슴 속 깊은 곳으로 나를 데려다 준다.

  내 가슴을 울리는 시는 이렇다. 조금씩 시에 대해 알아가면서 단 한 줄의 글에서 내 가슴을 흔들어 이 우주를 함께 흔들어낼 수 있는 마음의 진동을 느낄 수 있는 시, 그런 시가 나는 무척 좋다. 한시에서도 이것은 예외가 아니다. 단 한 줄의 고양되는 감정의 마술이 없다면 시는 그저 아무렇게나 쓰여진 언어의 잡다한 정보에 그치고 말 것이리라. 때로는 그것이 글 사이의 여백에서 드러나는 경우도 있다. 담박하고도 평범한 글과 글 사이의 여백에서 그런 가슴 싸해지는 경험을 하고 있으면 이것이 인생 사는 또 다른 재미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이렇게 시에 빠져들면서 몇 가지의 생각이 들게 되었다. 우선은 인생이라는 삶의 경험 속에서 가끔씩 나타나는 삶의 깨달음과 눈 앞에 드러나는 또 다른 세상의 경험을 어떻게 언어로서 표현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깨달음은 그저 깨달음으로서 느낄 뿐이지 그것을 언어로 빌게 되면 이미 "도가도 비상도"가 되어버린다. 감정도 또한 그러하다 멋진 풍경 앞에서 압도당해 그 풍경 속에 자신을 잊고 서 있을 때의 감정을 어떻게 언어로써 다하겠는가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은 언어라는 형태를 통해 그 순간의 정황을 남겨두려고 하지만 사실 언어로서 남게 되는 것은 그 사람의 박제된 마음 뿐이지 않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잘 선택되고 마음이 담겨진 한 줄의 글을 보면 글쓴이와는 달리 또 읽는 이의 마음으로 빚어내는 새로운 세상과 감동이 있고, 그 속에 시의 매력이 놓여져 있다는 점이다. 그것이 때로는 '화개장터'에 한 번도 가지 않고 '화개장터'라는 노래로 사람들을 감동시키는 글을 만들고 '흑산도 아가씨'를 만들고 '돌아와요 부산항에' 라는 글들을 만들어 내었지만 말이다. 왜냐하면 예술 작품이란 만들 때에는 만든 이의 세상이 되고 그것을 감상할 때에는 감상하는 이의 전혀 다른 세상이 되기 때문이다. 별 것 아닌 문장 속에서도 자신의 가슴이 열리어 그것을 바탕으로 명문장이 생길 수도 있고 또 자신의 삶을 움직여낼 수 있는 힘을 얻기도 한다. 이것은 모두 격물하는 자의 마음이 만들어내는 세상이 아니던가?

  그래서 늘 글을 보고 있을 때면 우리는 언어의 미로 속에 빠져 그 글이 쓰여진 풍경과 마음 속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환상에만 집착하는 우를 범할 수도 있다. 삶이 한바탕의 꿈이듯, 우리는 그 꿈 속에서 또 많은 작은 꿈들과 환상을 접한다. 그래서 우리는 원초적으로 늘 깨고 싶어하는 욕망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더 넓은 세상을 보고 싶어하고 보다 진실한 세상의 비밀을 알고 싶어한다. 한시에서 삶의 깨달음을 지향하는 시가 빠지지 않는 이유도 그러할 것이다.

  시를 풀이하면   언어(言)의 사원(寺)이 된다. 언어의 가장 순수하고도 깊이있는 추구를 통한 삶의 깨달음을 추구하는 곳이라는 의미가 아닐까? 그리고 시를 통해 우리에게 오는 느낌이나 감정 또한 그 원인이 없는 것이니 이 모든 것이 내가 비워진 상태에서 나를 통해 스치는 것이 아니던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