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름이 묻고 산이 대답한다'라는 이 말은 이현주 목사님이 자신의 생활에서 느끼는 수행기를 자신 속의 또 다른 나와의 대화를 통해서 적은 글이다. 그것은 채널링이라고는 볼 수 없고 누구나가 자신 속에 있는 또 다른 나와의 만남이라고 볼 수 있다. 다석 류영모 선생님 말씀대로라면 '몸나'와 '얼나'와의 대화를 시도한 것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우리는 사물을 접하거나 우리 외부의 현상을 대할 때 사실은 그것의 현상을 파악하는 나와 그 현상이면의 실상을 파악하는 나가 동시에 있음을 알게 된다. 내가 깊은 잠에 빠져 자고 일어나서 '난 정신없이 깊은 잠을 잤어'라고 얘기한다면 그 정신없이 깊은 잠을 자고 있음을 알아차리는 자신이 또 있음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 우리가 전쟁을 접하면 외부의 현실에 비참함을 느끼기도 하지만 내 마음 속의 전쟁을 다시금 보게 된다. 나무를 볼 때도 사람을 볼 때도 그 사람의 어떤 특성들을 볼 때에도 사실은 외부의 현상만이 아니라 내 내면속에 자리한 그 대상을 보는 것이 된다. 따라서 늘 우리가 어떤 사건이나 일들을 접할때 이렇게 몸나가 행하는 것과 그 몸나가 행함을 지켜보고 있는 참나가 있음을 알아차리는 것은 중요하다. 그럴때에 우리는 외부의 현상과 그에 반응하는 자신의 행동에 참된 자신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바라보고 결정짓는 무언가가 내면속에 자리잡고 있음을 알아차리게 되고 모든 외부현상과 자신의 행동에 대한 교훈과 결과를 자신에게 귀결시킬 수 있게 된다. 그것은 몸나가 가진 집착과 욕망으로부터 해방시켜주고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접하는 모든 인생경험이 가진 삶의 교훈을 제대로 인식하게끔 해준다. 그럴 때 우리는 세상의 평화를 이루기 위한 peacemaker의 역할을 해낼 수 있는 것이다. 스스로 밝은 빛이 되면 저절로 방안이 환하게 되듯이 자신이 스스로 평화 그 자체가 되어야만 세상의 평화를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