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락
존 쿳시 지음, 왕은철 옮김 / 동아일보사 / 2000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남아공의 식민지 상황과 그로부터 독립되던 역사적 상황을 안다면 이 책은 더욱 잘 이해되어질런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의 문체는 뭔가 독특한 것이 있다. 어떤 현실을 객관적이고도 담담하게 그려내는 작가의 마음 속에는 어떤 감정과 욕구에도 휘말리지 않는 그만의 냉정함이 자리잡고 있는 듯하다.

데이비드 루리라는 50대에 접어든 대학교수는 자신의 삶에 대한 열정과 욕구가 나이와 더불어 추락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하지만 실제로 그를 추락하게 만든 것은 멜라니라고 하는 한 제자와의 우연의 만남이었다. 그녀와의 관계가 결국은 그를 대학에서 쫓아내게 되지만, 그는 자신을 쫓아낸 것이 부자연스럽고 불편한 관계를 직시하는데 참을 수 없어하는 세인들의 눈이라고 단정짓는다.

하지만 자신의 어떤 잘못된 행동에 대해서도 사람들은 흔히 자기정당화의 방법은 갖고 있다. 그는 자신의 삶의 추락을 바이런의 삶에 비유한다. 테레사와의 열정적인 사랑과 추락, 그로 인한 바이런의 파멸속에서 그와 겹쳐지는 자신의 삶의 예술적 의미를 찾으려 한다. 오만하면서도 전형적인 지식인의 병든 모습일수도 있고 어쩌면 바로 우리들의 모습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것은 언제까지나 자신의 문제에서만이다. 반대로 자신의 딸, 루시의 문제에 있어서는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평범한 세상사람이 되고 만다. 평범한 아버지의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의 이중성을 작가는 냉담하고도 자신을 객관화하는 담담한 글을 통해 드러내고 있다.

어쩌면 추락이란 제자와의 성관계로 대학에서 쫓겨나게 된 일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대하는 그의 태도와 딸의 삶을 수용하는 방식들간의 건널수 없는 차이에서 비롯된 것일지도 모른다. 그것은 그의 정신이 겪는 자아분열이기도 하고 자기모순일수도 있다.

결국 딸이 강간범의 아이를 갖고도, 자신의 농장을 부당하게 점점 잃어가고 있으면서도 그런 억울함에 호소하기는 커녕 잘 적응해가는 모습을 보면서 그녀와의 멀어진 거리를 메울 그 무엇도 발견할 수 없게 된 그가 택한 정신적 자살이자 체념이 추락이다. 그가 애정을 갖고 돌봐왔던 절뚝거리는 개는 어쩌면 자신의 모습이며 그 개를 수술실로 데리고 들어가는 마지막 장면은 그가 경험하는 추락의 끝을 보여주고 있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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