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이웃을 사랑하라 - 20세기 유럽, 야만의 기록
피터 마쓰 지음, 최정숙 옮김 / 미래의창 / 2002년 4월
평점 :
절판


500여년이 넘게 다정한 이웃으로 아무런 문제없이 함께 살아온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그들은 민족이 다르다는 이유로 어떤 비극도 만들지 않았으며 오히려 다름을 수용하며 인정하고 상대방의 장점을 받아들이며 조화롭게 살아왔다. 통혼이 이루어졌으며 이젠 서로 친족관계로도 발전해온 그 평화로운 사회에 지옥에서의 악몽이 시작된 것은 자신의 정권에 대한 야욕을 품은 한 인물에 의해서였다. 슬로보단 밀로셰비치. 그는 자신의 정권 야욕을 위해 민족갈등을 이용했고 많은 사람들은 이러한 민족갈등이라고 하는 500여년이 넘게 아무런 문제없이 보였던 그 미끈한 바닥아래에 보이지 않는 틈이 갈라지고 깊어지는 것을 스스로 느껴야 했다.

저자는 밀로셰비치가 아니었다면 20만명의 대량살상이 불가피했던 것은 아니었다고 말한다.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역사적 사실을 뒤집어보는 가정을 하기에 앞서 과연 역사에서 한 개인이 그런 힘을 가지고 있는가 하는 것이 나의 관심이었다. 오히려 많은 사람들의 마음 속에 감추어진 그런 야수성이 있었던 것이 아닐까? 저자의 말처럼 그 근본원인은 민족주의도 국가도 이념도 자본도 아닌 인간본성에 잠재된 악의 근성 즉 '야수성'이라고 하는 것에 있다. 다만 불을 당긴 계기가 단지 민족이라고 하는 20세기 인간학살의 많은 도구로 사용된 그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다.

따지고 보면 자본주의 사회 이전에도 인류의 역사와 더불어 타부족이나 공통체에 대한 전쟁과 대량학살은 인간 사회에 언제 어디서나 존재해왔고, 그것은 인간이 가진 마음 속의 잔인함과 야수성을 바탕으로 해 왔다. 그리고 그것이 어떤 사회체제 속에 편입될 때는 사회제도나 구조 자체가 그런 야수성을 가지게 되는 경우도 있다. 보스니아 내전은 인간의 마음 속에서 발현된 그 야수성이 국가와 민족체계 속에서 드러난 사회적 야수성과 만나 이루어진 사건이었다.

그것은 학식도 도덕도 어떤 가치관도 아무런 작용을 하지 못하고 본성 그 자체에 의해 작동되는 메커니즘을 가진다. 낮에는 타인의 아이와 여자를 학살하고 잔인하게 살인하면서 동시에 저녁에 자신의 집에서는 다정한 아버지의 역할을 하는 이율배반적인 삶도 가능해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해할 수 없는 도저히 인정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이는 이 현상은 사실 어쩌면 너무나도 당연한 것일런지도 모른다. 조그만 일에도 그것이 자신의 자아를 해치려할 때 우리 속에서 불길같이 솟아오르는 적개심과 화는 바로 우리의 평화로운 마음을 순식간에 악마의 것으로 바꾸기 때문이다. 사회적인 야수성 역시 이와 같지 않겠는가? 지배되지 못한 마음은 우리의 내면에도 사회에도 동시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러한 야수성은 아직도 제대로 다루어지지 않았다. 언제 어디서 그 약한 틈을 가르고 우리들의 마음 속에 우리 사회 어딘가에서 솟구쳐 오를지 모르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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